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28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1. 27. 19:52

2020년 1월 28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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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 33-35)

 

 And looking around at those who sat there he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is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to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은 주님의 궤를 모셔 놓고 제물을 바친 다음,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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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우리는 제대로 살아보겠다면서 많은 결심을 하고 실천할 것을 계획합니다.
물론 계획한 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참 드물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결심하고 실천 계획 세우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도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다면서 절제와 극기, 봉사와 기도 생활을 무리하게 계획합니다.
실패로 돌아선 신앙생활의 결심들 앞에 늘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또 다른 신앙생활을 꿈꾸기도 하지요.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저 예수님 발치에 머물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인지 몰라도 애써 이해하려 겸손되이 경청하는 것입니다.
제 계획에 눈멀고 귀먹어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지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사실을 반성하며, 다시 한번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걷겠노라 다짐하였던 신명기계 역사서의 정신은,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듣는 귀를 가지는 것이 변화와 회개의 시작입니다.
듣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결심하고 계획하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 길을 무작정 나서는 무지한 사람들의 반복된 죄악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이동식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는 밀폐된 공간에 한 곳은 딱 한 명만, 다른 곳은 두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시험이 시작되니 절대로 이동식 칸막이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뒤, 이동식 칸막이 건너편에서 한 여성이 심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동식 칸막이 안의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혼자 들어간 곳의 사람은 단 7%만 도움을 주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둘이 들어간 곳의 사람은 분명히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자그마치 70% 이상이 도움을 주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혼자서 하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 있을 때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용기를 갖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주변 사람으로 인해 힘들다는 말을 합니다. 때로는 그 주변 사람이 짐처럼 큰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내가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실천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힘들거나 커다란 짐을 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한 가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족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을 왔다는 말을 듣고도 주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시지요. 어머니와 형제를 힘든 대상으로 또 짐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형제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 모두가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혈육 관계로 맺어진 가족보다, 하느님의 뜻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땅에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을 위해 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해서 그래서 미워하고 단죄하고 싶은 그 사람도 주님 안에서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거짓말은 “사람들이 그러던데”라는 말이다(더글러스 멀룩).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중세 때 유대인들은 유럽 각 도시에 고리대금업자로서 활약을 했습니다. 고리대금업자라고 하면 지나치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행위로 알고 있지만, 중세시대에는 이자를 아주 적게만 받아도 고래대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지금 모든 은행의 행위는 아주 파렴치한 고리대금인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 자체를 매우 심각한 죄라고 말했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엄청난 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누구도 고리대금업에 종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기독교도가 아니었고, 당시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세례를 받지 않았기에 어차피 지옥에 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들의 은행업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이렇게 무식할 수 있느냐고 말하겠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했습니다. 왜냐하면, 배운 사람이 없었고, 자신의 입맛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종교인의 입김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나타나곤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한계에 자신을 가두어서 얼마나 많은 잘못된 판단과 단죄를 반복하고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이 두렵지 않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기념일입니다. 당시 교회가 유럽에게 큰 권위를 행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돈의 행렬을 보며 교황은, 베드로 사도가 성전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며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자, 보게. 저 긴 돈 수레 행렬을.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지났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교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순종하기 위해 내 안의 진리에게까지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큰 권위는 나에게 진리를 선포하도록 내 안에 진리를 넣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 담기면 그 진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박해가 무섭다고 진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멈추면 그것은 진짜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수산나가 못된 노인 두 명에게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린 다니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이렇게 외치며 온 이스라엘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수산나를 변호하고 수산나를 모함한 두 노인의 죄를 밝힙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다 모인 가운데 스테파노에게 환시가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5)

그러자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는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신 이유를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라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러니 죽는 것을 두려워하면 예언자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3,21)라고 한 것처럼, 분명 예수님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당연히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 친척들에게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비난을 받으며 끌려오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는 핏줄도 막을 수 없는 것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진리를 증언하시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권위도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우리 안에 심겨진 진리를 선포함에 있어서 내가 핏줄이나 권위 등에 짓눌려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살펴봅시다. 저는 가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물론 방법상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두려움 없이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진리를 두려움 없이 선포하고 있어야 내 안에 진리가 머무시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도 배운다는 뜻입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 신부님들이 오셨습니다. 동창 신부님, 후배 신부님, 선배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머물기에 조금은 불편하지만, 신학생 시절로 돌아가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신부님들은 제게는 없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싶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요리를 잘했습니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배웠다고 합니다. 길을 잘 찾아다녔습니다. 군대에서 작전병으로 있었기에 지도를 잘 본다고 합니다. 선배 신부님은 글을 잘 쓰셨습니다. 성탄과 새해를 맞으면서 신문에 글을 기고해 주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소통을 잘하였습니다. 묻지는 않았지만, 책을 많이 읽은 듯합니다. 후배 신부님은 운동을 잘하였습니다. 처음 하는 운동도 금세 따라 했습니다. , 후배 신부님과 친화력이 좋았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2020년에는 가까운 이웃에게서 좋은 점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결점에서 나의 결점을 고치면 좋겠습니다.

 

깊은 울림을 주는 예수님의 비유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에서 나왔습니다. 들에 뿌려지는 씨, 하늘을 나는 새, 겨자씨, 무화과나무, 잃어버린 동전, 밭에 묻힌 보물, 혼인 잔치의 처녀, 우물가의 여인, 착한 목자, 착한 사마리아 사람, 돌아온 아들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보시지 않고,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스쳐 가는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도 권위가 있었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는 작은 것에 숨어있는 진리를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들꽃과 새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2020년에는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들이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은 이제 집안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사제가 되면 말씀도 높여서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을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목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을 통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또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직을 그만두게 될 때 세상에서 잘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평생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보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헌신과 기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사랑과 기대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제직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 유혹이 다가와도 굳건하게 이겨내라는 의미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하기보다는 사제직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나태한 삶을 살아간다면 사제직에 머물러 있어도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준비를 소홀히 하고, 권위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고, 공동체에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29년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참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외로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홀로 되신 어머니, 늘 자식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어머니, 당뇨와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이제 허리마저 아프셔서 수술해야 하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런 당신에게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형제요 어머니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따뜻하고 가족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 가톨릭 교회!

 -양승국신부-

 

저희 수도자들에게 있어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친가족입니다. 부모님들이요 형제자매들입니다. 저희가 또 다른 가족, 새로운 가족을 선택함으로 인해, 자연스레 친가쪽은 본의아니게 소홀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친가쪽 가족의 일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나 의무도 하지 못함에 대한 송구함과 아쉬움에 늘 마음 한켠이 시려옵니다. 더 큰 가족을 선택함으로 인해 따라오는 어쩔 수 없는 포기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다 보상해주시고 갚아주시리라 희망할 뿐입니다.

 

 가족과 친척에 대해서는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성모님과 요셉, 가족들은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예수님은 걱정꺼리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그들이 근심걱정이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은 마르코 복음 3장 21절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와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예수님의 친척들이었습니다. 고향은 물론 어머니, 친척들,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은 어머니와 자신을 돌보지 않은채 전국산천을 정처없이 떠돌고 있는 예수님을 그냥 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붙잡으로 온 것입니다.

 

 지난번 친척들에 이어 이번에는 성모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들과 누이들이란 아마도 사촌 형제이요 누이들로 추정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식에 성모님께서는 얼마나 걱정이 되셨겠습니까? 아마도 걱정으로 인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시다가 날이 새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순간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인해 또 다른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코 복음 3장 33~35절)

 

 이 단락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 백성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가 되어 한 가족을 이루게 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예수님을 중심으로해서 그분 주변에 둘러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영적 가족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으로 맺어진 육적 가족을 경멸하거나 무시하시는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절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보다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기 위한 새로운 영적 가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육적인 가족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영적 가족을 선택하시고, 그 우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가 잘 의미하듯이 모든 면에서 관대하고 너그럽습니다. 주님 안에 세상 모든 형제자매들을 한 형제요 자매, 새로운 가족으로 여깁니다.

 

 비록 교회 밖 사람들, 이종교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끌어 안습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가족적인 공동체가 바로 우리 가톨릭 교회인 것입니다.


내 형제, 누이, 어머니

  -반영억신부-  

 

한번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혹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부자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핏줄로 맺어진 연결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더니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핏줄로 맺어지는 관계를 무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근처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엮어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태어난 모든이와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부모 형제, 자매의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늬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 달이 누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 입니다. 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이나 지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 악령이 들렸다(마르3,22) 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기적을 믿었지만 그런 능력을 어디서 받았는지 의심하였습니다. 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은 가족을 먼저 챙겨야지 성당을 우선하면 되겠느냐? 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당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 가족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더더욱 성당에 나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의 가족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이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한마음 한뜻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핑계로 가족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영근신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 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하시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사실,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할지라도.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뜻피앗의 응답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응답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자칫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착각하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의 참 가족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성모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로 사셨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은
사촌 형제들과 사촌 누이들로 해석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해서
당신의 참 가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누가 나의 가족이냐?)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가족의 정의(定義)’를 물으시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의 가족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즉 신앙생활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도 ‘가족의 정의’를 내리신 말씀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당신의 교회를 어머니에게 맡기셨습니다(요한 19,26).
성모 마리아는 모든 신앙인의 어머니이신 분이고,
‘하느님 뜻 실천’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나의 어머니처럼”이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참 가족이다.”>

여기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일반 군중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마태 12,49).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참 가족의 표본’으로 내세우신 것은
제자들의 신앙생활을 신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2-5).”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의 명성이나,
세속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고,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가족을 제일 잘 알 것 같아도, 실제로는 남들보다 더 모를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은 신앙과 구원에 관한 문제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이지만,
일반적인 가정의 경우에는, 가족을 잘 아는 것은 사랑에 관한 문제이고,
그래서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대화와 소통과 공감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TV와 스마트폰 때문에
대화가 너무 부족하고 소통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있는 시간에는 TV와 스마트폰은 꺼야 하지 않을까...
신앙인의 가정이라면,
그런 것들을 모두 꺼놓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에서
마태오복음에 있는 ‘두 아들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
이 이야기에서 ‘맏아들’은 죄 속에서 살다가 회개한 사람을 가리키고,
‘다른 아들’은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척 하는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맏아들이 처음에 “싫습니다.” 라고 말한 것은 분명히 잘못한 일입니다.
그래도 그는 ‘생각을 바꾸고’, 즉 회개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어떻든 하느님의 심판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상태를 보는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집(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곧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야 참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 일은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나라에서 완성되는 일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모두(이 세상 사람은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을 구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부정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은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고, 믿고,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성사가 아니라,
자녀인 줄도 모르고 살던 사람이 자녀로서 새롭게 살아가기 시작하는 성사입니다.)
신앙생활은 머리로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온 삶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신앙인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온 삶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3,31-35: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32)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가족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를 당신의 가족에 분명히 포함시키셨다. 사람들이 당신께 알려준 사적이고 개인적인 혈연관계로서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마리아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이다. 또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을 앞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라고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혈육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참조)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한상우신부-

하느님의 뜻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실행입니다.

예수님의 실행안에
혈육보다 뜨거운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믿음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우리의 실행으로
말씀의 길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의 실행으로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말씀의 올바른
실행은 먼저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말씀과
실행의 관계입니다.

말씀과 실행으로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삶안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하느님의 뜻에서
두 개의 가장
큰 축(軸)은
말씀과 실행이듯

하느님 말씀을
이웃과 우리자신에
실행하는 복음의
사람되십시오.

실행으로
우리모두는
형제가 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을 반복해 읽노라니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행복합니다. 축제의 환호를(기쁨을) 아는 백성!"(시편 89,16)

제1독서는 다윗 임금이 하느님의 궤를 다윗성에 모시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2사무 6,14).

유다와 이스라엘 모두를 통치하는 임금으로 등극한 그가 하느님을 "제자리"(2사무 6,17)에 모시며 제사를 드립니다. 아마포 에폿은 사제들이 입는 옷(탈출 28,6 참조)입니다. 왕국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왕국의 중심에 맞아들이는 이 장엄하고 흥겨운 경삿날, 다윗이 친히 제사를 주관하면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고 또 백성을 축복합니다.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는 다윗을 관상합니다. 형식과 순서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추는 군무가 아니라,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의 딸인 부인 미칼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로(2사무 6,16) 춤이 경박스러웠을지 모르나, 다윗은 사람의 눈에 비칠 체면 따위는 애초에 생각지 않은 듯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현존은 인간의 기쁨이고 환희이며 영광입니다. 지금 다윗은 오직 온 마음과 온 정성, 온 힘을 다해 찬양받으셔야 할 하느님만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추는 그 춤은 하느님과 다윗 사이에 오가는 거룩한 교류이고 뜨거운 합일의 의식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현존을 누리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밖에" 서 있고, 예수님은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마르 3,32) 있습니다. 인간적 관계성으로 보자면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상징적으로라도 "안에" 있어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 관계성을 초월하십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르 3,34).

주님 곁으로 모여든 이들, 갈망과 바람으로 끌리듯 다가온 이들, 주님 현존을 누리는 이들,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 목소리에 설레고 그 내용에 감응하는 이들... 이들이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하느님의 뜻은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아드님 현존을 알아보고 그 충만함을 누리며 구원의 길에 들어서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 뜻의 실행은 주님의 곁에 모여와 그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예수님 곁에 모여든 이들은 사실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춤! 하느님의 궤를 다윗성에 모시며 더덩실 춤을 춘 다윗처럼, 그분 말씀의 위로와 권능으로 기쁨과 환희의 춤사위가 자기도 모르게 들썩이는 중입니다. 주님과 함께함은 이처럼 축제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의 일상성 안에는 축제의 기쁨이 감춰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무료한, 별 일 없이 지나는 삭막하고 짜증스러운, 그날이 그날 같은 시간이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숨막히도록 짜릿한 주님 현존 찾기의 연속입니다.

주님 현존과 부재의 리듬이 그 안에 있습니다. 환희와 그리움이 시소타듯 오가고, 미소와 눈물의 파도타기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 반복 안에서 우리의 할 일은 오로지 예수님 곁, 그분 현존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 누이가 됩니다. 그분 현존에서 흘러나오는 말씀, 빛, 진리, 사랑, 선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제 길을 찾아 흘러나갑니다. 일렁이듯 춤추는 영혼이 세상을 휘돌아 감싸는 기쁨이 되고 환호가 됩니다. 주님 곁에 모여든 우리야말로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다윗과 함께, 예수님 곁의 군중과 함께 주님 현존 안에서 영혼의 춤을 추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Shall we dance?

사람들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김찬선신부-


"다윗은 기뻐하며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살던 여부스 족을 물리치고
다윗은 이제 다윗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주님의 궤를 모시고 갑니다.
역시 혼자 가지 않고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궤란 이동 성전인 셈인데 그동안
이 하느님의 궤를 소홀히 다뤄 적에게 빼앗기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이 하느님의 궤를 이제 다윗이 예루살렘 시온성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가면서 제물을 바치고 춤도 춥니다.
그런데 이렇게 춤을 추는 것에 대해 다윗의 아내 미칼은 빈정거리지요."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


이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


미칼은 자기 아버지 사울이 임금에서 쫓겨나고 다윗이 임금이 된 것이
영 못마땅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날선 소리를 하는 것인데
인간적으로는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겠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것을 신앙적으로 뛰어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봐야겠지요.

그러니까 미칼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신하와 여인들 앞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는 것이 채신머리없는 짓이었지요.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진정 채신머리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는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춤을 춘 것이고 그러니 거룩한 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차원이 다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부럽습니까?

우리는 성전에서도 인간을 의식하여 하느님 앞에 있지 못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지 못하는데
다윗은 신하들과 여인들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 완전히 몰입하여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또 다른 차원에서 정결이요,
영적인 의미에서의 정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결이라고 하면 인간적인 정결,
그러니까 남녀 간의 정결을 생각하지요.
남녀 간에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 않는다든지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다든지 이런 정결 말입니다.

그런 정결도 해야 하고 중요하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 앞에서 정결한 것이 더 중요하지요.
하느님보다 인간을 더 의식하는 것은
임금이 있는 데서 또 다른 권력자인 신하를 눈치보는 것과 같고
그래서 단지 기도 중에 분심하는 것 이상으로 정결치 않은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다른 생각을 할 때 우리는 기도 중에 분심했다고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의식하는 것은 단순한 분심 이상의 정결치 
못함이라는 얘기인데 저는 이것을 프란치스코의 권고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15번 <마음의 깨끗함>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의 것들을 멸시하고 천상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정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23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코 3, 33-35)


 마르코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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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코 복음 3장 33~35절)

 이 단락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 백성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가 되어 한 가족을 이루게 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예수님을 중심으로해서 그분 주변에 둘러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영적 가족인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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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달이 누님이었습니다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자매요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 입니다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이나 지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악령이 들렸다(마르3,22) 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주변 사람들도 기적을 믿었지만 그런 능력을 어디서 받았는지 의심하였습니다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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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하시고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아버지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하십니다다시 말하면그들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함께 있되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실행하는 이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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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자매가 되는 것이다또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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