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2020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마르코 3,7-12)
Even the people who had evil spirits,
whenever they saw him, would fall down
before him and cry out,
"You are the Son of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피신시키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제1독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그분께서는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여도 “조용히 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는 왠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살갑게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코 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예수님의 이 ‘거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어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영광과 기쁨 가득한 자리를 꿈꾸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몸과 현실적 축복을 갈망하였던 군중은 십자가와 하느님의 아드님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예수님과 군중과의 ‘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던지는 우리 욕망의 투사만큼 깊고 먼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1코린 1―2장;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더 열심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있었던 일도 생각납니다. 본당신부로 있을 때 아주 복잡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묵주기도 20단을 바치면서 기도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고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 문제에서 벗어나 더 좋은 방안을 따를 힘이 생겼습니다.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더욱더 가까워지면서,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해주시는 주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됩니다. 하시는 말씀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이었습니다. 특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서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했던 것은 예수님께 손을 대서 병을 낳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그리스도를 만진다고 해서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병의 치유만을 생각하면서 만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손을 대었던 또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을 때, 결박할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뺨을 때리며 모욕을 줬을 때,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만졌습니다. 이때 역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마음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고 있나요?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아니면 주님께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굳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강의나 강론 때 사람들에게 초콜릿이나 사탕을 나눠줍니다. 그래서일까요? 내게도 자신의 초콜릿이나 사탕을 나눠주십니다. 고맙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초콜릿과 사탕 가격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받은 것을 다시 나눠줍니다. 이 모습을 본 어떤 분이 “신부님만 드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서 줬는데 손도 안 대고 다른 사람 주는 것이 서운하셨나 봅니다.
사실 저는 초콜릿, 사탕, 과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단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단것을 먹으면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단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 먹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설탕을 뿌린 토마토를 다 먹고 나서 그릇 아래로 모인 설탕 섞인 과즙을 들이마시면 정말로 행복합니다.
단 것을 싫어해도 토마토에 설탕 뿌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가끔 어머니께서는 토마토를 썰어 그사이에 설탕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기억에 지금 그렇게 싫어하는 단 것이지만 이 토마토는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억이 있느냐가 지금의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지금, 이 순간 좋은 기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좋은 기억을 만드세요.

모기에게 피 빨리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전삼용신부-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어딘가 좀 이상합니다. 양쪽 눈의 색깔이 다릅니다. 한쪽 눈은 푸른색입니다. 자라면서 매우 폭력적이 됩니다. 마음에 안 들면 친구들을 심하게 때립니다. 잘 때 잠꼬대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합니다. 엄마는 그 잠꼬대를 녹음하여 전문가에게 의뢰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난 날과 그 시간에 다른 나라에서 연쇄 살인마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살인마의 눈 색이 푸른색임도 알게 됩니다. 그 살인마의 영혼이 그 아기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까지 거의 죽을 지경이 되게 만들어놓고 그때 죽이지 못한 한 여자를 찾아갑니다. 어머니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이 먼저 그 여자를 죽이면 자기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아이는 완전히 그 살인마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자신에게 이용당한 어머니까지 살해하고는 다른 집으로 입양됩니다. 영화 ‘프로디지’(2019)의 내용입니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답답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의 영혼이 살인마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이라는 연민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살인을 대신 해주려고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는 이런 경우가 없을까요? 자녀가 못된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자녀의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 휘둘린 적은 없나요?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씩 애정에 휘둘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끊어야 할 때는 끊어야합니다. 그것이 자신과 자녀를 위해 좋은 일입니다.
유튜브 채널 ‘강형욱의 보듬 TV; 내 강아지의 공격성’에서 주인까지 무는 진돗개가 나옵니다. 마음씨 착한 노부부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진돗개를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그런데 쓰다듬어 주다가 물리고 마사지 해 주다가 물립니다. 상처투성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의 개에 대해 무척 큰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고 말하는 개 전문가인 강형욱씨는 노부부에게 개 다루는 법을 시범으로 보여줍니다. 개가 자신에게 허락도 없이 발을 감싸자 짧은 목줄을 강하게 당겨 하는 행위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 주위를 돌며 자신의 영역에 강형욱씨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하자 역시 목줄을 당겨 돌지 못하게 만듭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개인지 명확히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무섭던 개가 발에 땀까지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러며 노부부에게 개를 사랑하는 것은 알지만 개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간식을 주고 개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대었을 때 물린 이유는 개에게 애정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뽀뽀를 하려고 하다가 물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씨는 먼저 쓰다듬게 해 주면 간식을 주라고 합니다. 개가 지켜야 할 선을 인간이 무너뜨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여 그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십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밀치거나 잡아당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군중 가운데는 마귀 들린 사람들도 있어서 예수님께 어떠한 해를 끼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휘둘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께서 완전히 사랑하는 사이시라도 그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거리를 이어줄 성령께서 필요하신 것입니다. 무조건 거리를 좁혀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직 모기의 수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기와 기생충이 생명체이기는 하나 그것들에게 무작정 피를 빨려주는 것이 곧 자비는 아닐 것입니다. 그 피의 의미를 깨닫고 변화될 수 있는 이들에게만 피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나쁜 사람처럼 보는 것도 문제지만 모두 천사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나를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 작은 지혜가 쓸데없이 소비될 수 있는 에너지를 아끼게 만들어 더 많은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하도록 이끕니다.

-조재형신부-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평화신문 지사장으로 있고, 제게 필요한 일은 신문 구독을 홍보하는 겁니다. 저의 강론을 보시는 분들이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캘리포니아에 계시는 분도 이웃에게 신문 구독을 권유하셨고, 몇 분이 구독 신청을 하셨습니다. 토론토에 계시는 분도 이웃에게 신문 구독을 권유하셨고, 몇 분이 구독 신청을 하셨습니다. 마리아 성지가 있는 작은 공동체에 다녀왔습니다. 미사를 함께 하였고, 신문을 나눠드렸습니다. 미사 후 식사하는데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신문 홍보 안 하시나요?’ 저는 오늘은 그냥 방문 왔다고 했습니다. 고맙게도 몇 분이 신문 구독 신청을 해 주셨습니다. 신문사에 후원금을 보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게는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만 있습니다. 고마워하면 모든 일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2020년에는 감사하고, 고마운 일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이해하고 사랑할 일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평화는 이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건 예전에 보던 것과 다릅니다. 고통의 순간에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걸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걸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고난의 순간에도 충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은 성변화입니다. 성변화의 핵심은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원망은 오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생깁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은연중에 강한 시기·질투심이 바닥 깊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거룩해서 시기·질투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어딘가 피정에 다녀온 교우들께서 거기서 겪은 체험담들을 신명나게 털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모모 신부님 강의를 들었는데 완전 감동이었어요! 그분으로 인해 제 삶이 완전 바뀌었어요. 새 인생이 시작되었답니다. 예수님이 따로 없답니다. 인물도 얼마나 좋던지? 거기다 겸손의 덕까지! 머리털나고 그런 신부님 처음봤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같이 박수를 치고 호응을 하면서, 함께 기뻐해야 마땅한데, 즉시 해드리고 싶은 조언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랍니다. 그 분하고 사흘만 같이 지내보세요 그런 생각 싹 사라지고 말걸요. 정신을 차리세요. 정신을!’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도 그랬습니다. 사실 사울은 기름부어 세운 왕이었습니다. 왕을 뽑는데 아무나 왕으로 선택하지 않았겠지요. 사울은 탁월한 인품,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툭튀’ 다윗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직 볼이 빨간 청소년이었습니다. 체구도 왜소했고 가방끈은 아예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루 온종일 산과 들로 다니면서 양을 몰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어느날 보기만 봐도 겁에 질리는 어마무시한 골리앗 장군과의 일대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게임이 길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방의 돌팔매로 속전속결로 게임을 끝내버렸습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풍전등화 신세였던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개선길에 올랐습니다.
다윗과 함께 군대가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흥겹게 부르는 노랫가사 한 구절이 사울왕의 폐부 깊은 곳을 찔러버렸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그 노랫가사 한 구절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했습니다. 순식간에 기분이 잡쳤으며 시기·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제대로 한번 빡친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고 인자하던 사울의 마음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수시로 솟아 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 그때, 틈나는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 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 속에 가득 찬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 욱하는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 같은 경우 수도 공동체 내 동료 자매들로부터 엄청난 시기·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시기·질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상냥히 대했습니다. 더 기쁘게 냉대를 열심히 참아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동료 자매를 더 깊이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락 시간이면 일부러 가장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자매 곁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매력이 넘쳤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향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 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가 최고인줄 압니다. 곧 허상 안에서 쓴맛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기에 향기가 있고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은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말합니다.
대체 왜 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집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야,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7-1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병자들의 믿음이 어떤 수준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가엾은 처지만 보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당부만 하셨습니다.
2)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이 대부분
병을 고치는 것만을 원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에는 ‘말씀’을 듣기를 원한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 구원’보다는 ‘몸의 치유’를 더 원했고,
‘말씀의 은총’보다는 ‘치유의 은총’을 더 간청했습니다.
3) 이 이야기는 마귀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귀들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방해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방해하기도 합니다.
1) 예수님께서 배에 타신 것은 군중에게서 조금 물러나기 위해서이고,
배를 설교대로 삼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병 고치는 일을 마치신 다음에 설교를 하셨는지,
아니면 설교를 먼저 하신 다음에 병을 고쳐 주셨는지,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은총’과 ‘치유의 은총’을 모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은총을 받았습니다.
소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조건도 없고, 제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 신앙인들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어떤 조건이나 제한도 없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신앙인들의 사랑 실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병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병자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건강을 함께 나누고......
2)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고, 병을 고쳐 주시기를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병 때문에 열두 해 동안이나 고통을 겪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여자처럼,
어쩌면 대부분의 병자들이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을 것입니다(마르 5,25-28).
병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 절박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이기심은 버려야 합니다.
복음 말씀에서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말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만지는 것만을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만지려고 서로 밀쳐 대면서,
몹시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밀려들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사람들의 무질서, 불친절, 이기심, 조급함 등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는 태도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도 부족하고,
질서 있게 자기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도 부족합니다.
그런 모습들이 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믿음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지려고 애쓴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그저 ‘예수님을 만지는 일’ 자체에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굳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백인대장은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기만 했는데(마태 8,8),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마태 8,10).
믿음이 부족하면 그 믿음은 미신으로 변질되기가 쉽습니다.
(미신에 빠지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이야기 속의 군중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디선가 특별한 계시가 내렸다는 소문이 퍼지거나, 무슨 신기한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퍼지면, 교회에서 공적으로 확인해 주기도 전에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왜 그런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는 곳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장소나 어떤 신기한 사건 속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고,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는데, 왜 자꾸 다른 곳을 보는 것인가?
3)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와 신앙인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희망 대신에 포기를 말하고, 믿음 대신에 의심을 심어 놓고,
믿음의 힘은 깎아내리면서 인간의 과학과 의술을 신앙보다 위에 놓으려고 하고...
병에 걸렸을 때 병원과 약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의 목숨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마르 9,29).
일부 사이비 종파처럼 기도만 하면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데,
병원의 치료만 믿으면서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3,7-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제는 갈릴래아에서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마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악마들도 “믿고 무서워 떱니다.”(야고 2,19)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시다.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 8)
-한상우신부-
희망을 걸
누군가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삶으로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아픈 이들의
치유와 억압의
마귀추방을 통해
우리들에게
희망을 다시
나누십니다.
이 희망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몰려옵니다.
무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희망을 필요로
하는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쁘고
자유롭게 우리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워야합니다.
기적과 치유의
굴레 속에 갇힌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희망을
예수님에게서
만납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거리"가 보입니다.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예수님 주변으로 각지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각자 나름의 청원과 바람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단순히 호기심이 생겨서 온 사람부터 절박한 필요를 안고 온 이들까지, 지금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예수님입니다. 군중과 예수님은 지금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마르 3,9)
군중은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오려고 서로 밀쳐 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밀칠 지경이 되자 예수님께서 배를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배는 물에 띄워질 것이고, 군중은 호숫가에 남아 그분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많은 경우 다정한 접촉이 동반되기도 했지만, 실은 말씀이 중심이지요. 물리적 거리가 군중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걸맞는 해법임을 알겠습니다.
"그들(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밀려드는 군중으로 가뜩이나 복잡한데 더러운 영들까지 소리소리 지르며 한 몫을 보탭니다. 주님을 아는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외침이 진정한 증언은 되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앎이 아니기에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이럴 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치유와 기적 효과를 넘어,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메시아의 신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이들의 경솔하고 섣부른 폭로는 거룩한 이름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손상시킬 수 있기에 침묵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1사무 18,7).
승리에 도취된 여인들의 경박한 노래가 사달의 원인이 됩니다. 둘을 대놓고 비교하니 화 나고 속이 상한 사울이 다윗에게 시기심을 품게 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의 정화되지 않은 시각, 진실의 채로 거르지 않은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하느님까지도 죽음까지 몰아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1사무 19,5).
요나탄이 승리의 주인공는 사울도, 다윗도 아니고 주님이심을 일깨우며 지혜로이 부친 사울을 설득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각자 하느님과 두고 있는 "거리"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이에서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도구로 쓰시느냐가 관건이지, 누가 잘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고 먹이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느님의 일로 보지 않았기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것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도 "우리" 일이니 함께 기뻐하며 응원했어야 옳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들 안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욕망과 바람으로 무질서하고 난폭하게 예수님을 밀쳐 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있게 거르지 않은 섣부른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며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는지, 예수님을 태운 거룻배가 되어 그분과 밀착하는지...
어느 모습 안에 있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침묵'입니다. 앎이 무르익고 봉인이 해제될 때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때까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될 때까지 겸손히 침묵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도록 말입니다.

무신론적인 시기
-김찬선신부-
어찌하면 좋습니까?
사울이 이제 다윗을 시기하여 그러잖아도 하느님께 밉보인 사울이
하느님께 더욱 밉보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울과 다윗을 보면 다윗을 편들기보다는
사울이 안쓰럽고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듭니다.
강자와 약자가 있으면 우리는 보통 약자에게 동정심이 가지요.
아무튼 사울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비록 여인들의 칭송과 사랑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감정,
곧 시기심을 갖게 되었지만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의 가치와 판단의 기준은 여전히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이것을 놓고 볼 때 그는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으로 자기의 중심을 잡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고,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었다가도 다시 인간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에 휩싸이는 사람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동병상련의 정으로 동정심을 가지게 되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병상련을 한다 해도 이런 시기를 괜찮다 해서는 안 되지요.
어떤 이유로든 시기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가 시기란 너도나도
다 파괴하는 그러니까 사랑과 가장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시기란 단순히 인간적인 여러 감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신앙이 없고 하느님이 안 계신 표시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느님이야 계시지만 내게 죽어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랬던 그가 다윗을 나중에 다시 죽이려고 한 것은 결국
그때는 하느님께서 그의 안에서 살아계시지 않았기 때문인 거지요.
사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특히 하느님 사랑이 넘치면
우리 시선이 다른 인간에게 가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가
나보다 사랑을 더 받든 말든, 그가 나보다 더 성공하든 말든
상관치 않을 것이고, 시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다룬 영화라고 얘기 들었고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과 성공을 신기 질투한 것을 다룬 영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서 저는 역시 사울에게처럼 살리에르에게 연민을 느꼈는데
그것은 얼토당토않게도 제가 한때는 모차르트를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어찌 제가 모차르트와 저를 비교하며
음악적 열등감을 느끼고 그래서 제가 작곡했던 곡들을 다 없애버렸는지!
그리고 한 5년을 작곡에 손대지 않고 있다가 달란트 비유의 복음을 깨닫고
나서야 다시 작곡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음악적 재능, 음악적 달란트는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각기 나눠주시는 것이기에 음악적 재능이 내게
없는 것이 내 탓이거나 창피할 일이 아니고 그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이
내게 잘나서가 아니고 그래서 자랑할 것도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선이 하느님의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모든 선이 나온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가난했던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시기에 대한
그의 독특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시기는 그저 인간적인 악감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무신론적인 시기이거나 하느님을 시기하는 것임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코 3,7-12)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1코린 1―2장;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
-박병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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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의 핵심은 성변화입니다. 성변화의 핵심은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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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말합니다.
대체 왜 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집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야,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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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이 하느님의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모든 선이 나온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가난했던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시기에 대한
그의 독특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시기는 그저 인간적인 악감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무신론적인 시기이거나 하느님을 시기하는 것임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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