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1. 20. 20:09

2020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청혼을 거절한 데 대한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에 따라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Look! they are doing

what is forbidden on the Sabbath!" 

Then Jesus said 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not man for the Sabb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옛일을 언급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 사회가 아무리 발전한다 하여도, 인간의 본성과 기본 욕구를 가로막고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규들은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가장 인간답게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게으른 사람이라 밥을 먹을 권리가 없다는 둥, 모자란 사람이라 좋은 것을 누릴 이유가 없다는 둥, 제 기준으로 세상을 마구 단죄하고 규정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천박해지고 비인간적인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챙겨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인간이 지음받았을 때의 본성이자 욕구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장 참조).
무엇보다 서로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경제적 처지가 다름을 기억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규정하고 줄 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창세 11장 참조).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은,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은 채, 제 기준을 절대화하는 완고함에서 비롯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지만 서로 하나가 되어 살아갑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나 둘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970년대, 1980년대가 더 좋았다며 현재의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점이 지금보다 더 좋았냐고 물으면 “정이 넘쳤다.”라는 대답입니다. 그 누구도 당시의 가난, 엄청난 노동 강도를 두고서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문명의 발달이 지금보다 떨어진 것을 두고도 좋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딱 하나, 사람 간의 ‘정’이 넘치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좋았음을 말합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로 좋을까요? 자동차를 운전하시는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차를 바꿀 때 더 높은 사양으로는 바꿀 수 있어도, 낮은 사양으로는 차를 바꾸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돌아가서는 안 될 만큼 물질문명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때가 좋았어.”라는 푸념을 하지 않을까요? 지금 ‘정’이 넘치는 사회가 되면 될 것입니다. 그 누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을 나 자신부터 나눠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받고 싶은 ‘정’을 나부터 시작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을 나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때가 좋았어.”라는 말보다는 “지금이 좋아.”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이 ‘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이 아닌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사라져서 계속 과거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고 있었지요. 이 모습에 바리사이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즉,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고 있는 것이 왜 잘못일까요? 잘못이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은 밀 이삭 뜯는 것을 추수하는 ‘일’로 여긴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확대해석해서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사라지고 맙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린 마음과 넓은 마음으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펼쳐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이 좋아”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세상이 됩니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다. 이처럼 잘 사는 것에 전념하면 미래는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된다(소크라테스).



사랑의 실천은 공감에서...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요리를 사랑하던 할머니가 관절염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여닫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제 요리를 못하겠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고 있었던 디자인 회사에 건의를 했지요. 즉, 연세 드신 분은 냉장고 문을 여닫는 것이 힘드니 새로운 문손잡이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26세였던 무어는 자기 스스로 디자인을 하기 위해, 관절염을 앓는 80살의 노인으로 분장합니다. 머리에는 흰 가발을, 얼굴에는 라텍스로 만든 주름을, 눈에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뿌연 안경을, 귀에는 잘 안들리게 솜을, 팔목과 발목에는 관절을 움직이기 힘들게 부목을, 허리에는 구부정해지게 붕대를, 다리에는 걷기 어렵게 철제 보조기를 하고서 자그마치 3년간을 노인으로 살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공감하기 위해서 스스로 할머니가 되는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연세 많으신 분을 더욱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에 맞는 멋진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은 바로 이런 공감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공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셨음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율법의 존재목적은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따뜻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인천 어느 마트에서 삼십대 아빠와 열두 살 초등학생 아들이 어설프게 우유 2팩과 사과 6개를 훔치다 마트 직원에게 적발되어 경찰에 인도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아빠의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택시 운전사였습니다. 그러나 당뇨와 갑상선 질환 등 병에 걸려 반년가량 일을 하지 못해 수입이 전혀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됐지만, 아빠와 아들, 할머니, 7살 막내아들까지, 임대 주택에 사는 네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실제 아빠와 아들은 이날 하루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상태였고 아빠는 아이들이 굶주림을 호소하자 결국 범행에 나서려 했던 것입니다.

      마트는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신고를 취소했고 경찰은 이 부자를 훈방조치하고 가까운 식당에 데려가 국밥을 대접했습니다. 국밥을 대접한 인천 중부경찰서 소속 이재익 경찰관은 “아침 점심도 다 굶었다고 그러니까, 요즘 밥 굶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라며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진짜 따뜻한 손길들은 이후에 이어졌습니다. 국밥을 먹고 있던 아빠와 아들의 식탁에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왔고, 느닷없이 식탁에 흰 봉투를 두고는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 봉투 안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이날 마트에서 경찰에 붙잡혔던 아빠와 아들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손님이었습니다.

      빵 몇 개 훔쳐서 오랜 세월을 징역을 살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편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좁은 의미로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고, 넓은 의미로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이 뉴스에 나온 사람들은 법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모두가 행복하게 끝났습니다. 무엇이든 왜 만들어졌는지 모르면 자기 목적대로 사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배가 고파서 남의 밭에 들어가 밀을 훔쳐 먹은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율법과 남의 재물을 도둑질해서는 안 되는 율법을 동시에 어기고 있었습니다.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시며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있는 당신 제자들을 감싸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정신은 모르고 율법만 지키려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법이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하면 그 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법이 생긴 목적과 반대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칼이 인간을 해치는 용도로 쓰이게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사용할 때 그것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합니다. 왜 율법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부터 율법은 존재했습니다.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왜 생긴 것일까요? 그 율법을 어기면 결과적으로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그 죄책감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느님과 이웃을 심판합니다. 아담은 하느님께서 괜히 여자를 만들어주셔서 그 여자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율법을 잘 지켰다면 이웃을 심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존재하게 된 목적은 이웃을 심판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으로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였습니다.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만드신 율법을 역이용하여 이웃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지켜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그 율법을 지켜서 주님께서 칭찬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켜야만 죄책감이 생기지 않아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목적을 잃은 칼이 얼마나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기억해야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조재형신부-


종교(宗敎)라는 한문의 뜻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종교(Religion)라는 영어의 뜻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거라고 합니다. 교리와 신학, 교계제도와 교회는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그 이정표를 따라가기 위해서 이성(理性)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계율과 율법, 전례와 성사는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이정표입니다. 그 이정표를 따라가기 위해서도 이성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운전 교본을 공부한다고 해서 운전을 잘하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운전해야 합니다. 요리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요리해야 합니다.

 

교리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으뜸가는 가르침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와 신학에서 제시하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전례와 성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엉킨 실타래를 다 풀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전례와 성사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종교는 깨달음, 해탈, 영성, 침묵, 성찰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각자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악보는 연주되지 않으면 그저 종이에 불과합니다. 악보는 목소리로, 악기로 연주가 되어야 비로소 가치가 드러납니다. 연주가 되어야 기쁨, 슬픔, 고통, 사랑, 절망, 희망의 노래와 음악이 됩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성의 도움으로 많이 알지만,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빈 수레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알지만,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종교인 역시 영적으로 빈 수레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사무엘은 이성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외모와 나이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조각품을 볼 때는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혹시 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대할 때는 겉모습만 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으로 보셨습니다. 마음을 보셨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마음을 보고, 가능성을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혜안이 필요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제 새 포도주는 정결, 청빈, 순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 새 부대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 삼덕이고 향주 삼덕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선포를 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이는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을 어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례와 성사를 소중히 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한 전통과 가르침이니, 사람을 위한 전례와 성사이니 더 잘 지키고,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안식일과 새로운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새로운 안식일과 새로운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이 부활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행복선언은 우리가 따라야 할 새로운 안식일입니다.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삶, 자비를 베푸는 삶,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삶, 마음으로 가난한 삶,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삶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안식일을 사는 삶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과 바리사이 사이에는 그야말로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하나 놓여있었습니다. 말이나 행동, 가치관이나 이념, 지향하는 바 등 서로가 너무 달랐기에 사사건건 부딪쳤습니다.

 

 오늘도 논쟁은 계속됩니다. 어제는 단식 논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었지요. 결론은? 일방적 판정승도 아니고, 1라운드 1초 만에 예수님께서 통쾌한 KO승을 거두셨습니다.

 

 오늘은 주제를 안식일 문제로 바꾸어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선을 지속적으로 추적하면서, 언행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파이들을 번갈아 가면서 붙여놓고, 여차하면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필 안식일이었습니다. 지상에서 머무실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복음선포와 영혼 구원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침식마저 잊어가며 이 고을 저 고을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적당히 알이 맺히기 시작한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무에 무척이나 굶주렸던 제자들은, 그것으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좀 뜯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코 복음 2장 24절)

 

 이미 꼬일대로 꼬인 바리사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못지 않은 강펀치 하나를 시원하게 날리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복음 2장 27~28절)

 

 안식일과 관련된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규정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린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참으로 뜨끔합니다.

 

 안식일은 원래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창조물, 심지어 무생물에게까지 휴식과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의도로 생겨났습니다. 주인도 쉬지만 종도 쉬게 합니다. 사람도 쉬지만 가축도 쉬게 합니다. 농부도 쉬지만 경작지도 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인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생명과 자유를 경축하는 날인 안식일을 속박의 날, 억압의 날로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절대 원치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서 안식일과 관련된 수많은 규칙과 관습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노동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곡식을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진 것은 제자들이 밀 이삭 몇개를 건드린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및 과잉일반화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소홀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동료 인간 존재의 가치를 무시했습니다.

 

 신앙 행위 안에서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 인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의 적극적인 준수보다도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신 날

  -반영억신부-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 고해성사의 중압감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1).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묵주기도나 성경봉독, 선행, 주님의 기도33번 등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정말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글도 제대로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안식일의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중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본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해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고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굴레와 족쇄가 되게 하였습니다’(손희송).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생명에 도움이 되는 날로 되돌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 날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세세한 규정으로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원의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소중함을 보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주일 날에는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주일에 함께 모인다는 것은 공동체의 일치성을 드러내고 형제애를 나누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더불어 주님을 찬미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일은 주님이 주인인 날입니다. 주인님과 함께 이웃사랑을 하는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마르 2,23)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에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2,22).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임을 암시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는 것은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은 문제를 삼은 것은 그들이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그리고 그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그리고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또한, <탈출기>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쉼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요,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그렇게 해서,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으며,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3-28)”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마태 12,1).
우리는 제자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을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배가 고팠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제자들의 행동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의 말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보지 말고
속사정을 먼저 헤아려 보라고 답변하십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은 맞지만,
그들은 안식일을 안 지킨 사람들이 아니라 못 지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안 지킨 것과 못 지킨 것은 분명하게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다윗이 먹은 것은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율법을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못 지킨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무도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제자들을 비난하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배고픈 사람들은 안식일을(주일을) 안 지켜도 되는가?”
“그 배고픔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배가 고프기만 하면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된다.”가 아니라,
“안식일을 안 지킨다고 지적하고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사정을 알아보아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변호해 주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을 칭찬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심한 배고픔의 기준은,
각자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사정을 겉으로만 보아서는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진짜 속사정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장 죽을 것도 아닌데, 그까짓 배고픔도 못 참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배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심각하게 배고픈 사람의 입장에서는 배고픈 것도 서러운데,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
미사 참례를 대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라도 해서 주일을 지키라는 것이지,
주일 지키는 것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것은
평소에 주일 미사 참례를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정말로 예외적이고 특별한 상황에서 적용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자기 마음대로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평소에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어쩌다가 그날 한 번,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시비를 걸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도 자주 그런 행동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혼내셨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종교 자체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종교보다 위에 있습니다.
종교는(교회는) 안식처가 되어야 하고,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종교에서 기쁨과 평화와 안식과 행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종교가(교회가) 사람을 억압하는 멍에가 되고 족쇄가 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성직자들은) 교회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계명들, 가르침들, 교회법 등은 새로운 멍에가 아니라,
온갖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고, 참된 자유를 주는 열쇠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종교보다 위에 있다는 말을 악용해도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계명이나 교회법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정말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하느님과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계명을 잘 지킬 것입니다.
만일에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 없이’ 율법 준수만 고집부리는 율법주의도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사랑을 내세우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도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노력을 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본래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적으로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즉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생명이나 생명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생긴 것이며, 그 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법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인간이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간은 칠일로 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는 노동을 위해 주셨고, 하루는 기도와 휴식과 죄 씻음을 위해 허락하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엿새 동안 이런 저런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날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주님의 집에 가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주님께 대한 감사로 기도를 마무리 하여야 한다. 그렇게 깨끗하게 된다면 제단으로 나아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를 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한 대답을 하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천지창조 사화(창세 1,26-2,4)의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즉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즉 법률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즉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가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판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일을 잘 사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 27)

-한상우신부-

안식일을
만드신 분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시듯

사람을
향해야한는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은
바리사이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연민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폭력과
비판이 아닌
사랑과 진심어린
기도이길 바랍니다.

성녀 아녜스처럼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임을
기억합시다.

사람을 위한
사람의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 주십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의 도끼눈이 보이십니까? 예수라는 젊은 예언자와 그 추종자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길에 큰 부담을 느낀 바리사이들은 그들에게서 무엇이라도 흠을 찾으려 혈안이 된 듯합니다. 고작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이삭을 뜯어 먹는 장정들의 행위를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보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에브야타르 사제(실은 아히멜렉 사제; 1사무 21,7 참조) 때 다윗이 한 일을 들어 그들의 편협한 사고에 균열을 일으키십니다. 그들의 경직된 논리로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왕으로 받드는 하느님의 사람 다윗도 안식일 법이나 어기는 천하의 죄인일 따름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뒤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을 대대로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또한 주인뿐 아니라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종, 노예, 이방인, 짐승, 토지까지도 쉬도록 정하신 날이지요. 그러니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생명 존중과 공정, 자비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 올가미가 된 안식일 법은 사실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하고 있다면 헤이한 이들 때문에 법이 무너질까 우려하기보다, 경직된 법 때문에 사람이 다칠까 염려하기 마련이지요.

안식일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더욱 충만히 누리도록 마련된 날이지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휴식은 게으름이나 무기력이 아니라 생명력을 회복하여 창조를 완성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성을 돈독히 하는 선물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머무릅니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당당히 밝히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쉼의 주인이십니다. 쉼의 주인은 창조의 주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창조의 주인은 만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창조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하셨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제1독서는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는 대목입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사무엘이 이사이의 아들들 중 겉모습이 훤칠한 엘리압에게 눈길을 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 선견자가 아무리 하느님과 가깝다 해도 그의 시각 역시 사람의 눈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사무엘은 ...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1사무 16,13).

막내 다윗은 애초에 이 자리에 끼지도 못한 처지였습니다. 사무엘의 초대에 아버지 이사이조차 다윗을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요. 그런 그가 형들 한가운데에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그때 형들 마음이 어땠을지 성경이 굳이 설명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 아이다." 하는 주님의 목소리가 사무엘에게만 들렸을 테니 형들은 그저 이 놀라운 일을 바라볼 수밖에요. 선견자를 통한 하느님의 선택을 경외하면서도 막내동생이 받은 임금의 표지, 기름부음에 대해 의혹과 의심, 시기와 질투도 없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 눈에 막내는 작고 약하고 미숙한 존재로밖에 비치지 않을 테니까요.

인간의 시선이 한계투성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눈은 겉모습에, 허울에, 장식에 곧잘 팔려 본질을 놓쳐 버리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이행 여부에 눈을 치켜뜨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사십니다.

그래서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 1,17-18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 눈은 주님께서 뜨게 해 주시고 밝혀 주셔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떠야 할 눈은 마음의 눈입니다. 인간의 시력 검사는 얼마나 멀리, 얼마나 또렷하게 보느냐를 측정하지만, 마음의 눈의 시력은 얼마나 깊이 보는지, 얼마나 참되게 보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녜스 성녀처럼, 주님께서 밝혀 주신 마음의 눈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사랑을, 주님을 발견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싫어하는 것이지 나쁜 것이 아니다.  
-김찬선신부-


사울을 물리치신 하느님께서 이제 사무엘에
새로운 왕을 세우라고 하시고 그래서 사무엘은 이새의 집으로 가는데
성읍의 원로들이 나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이 질문이 제게는 하느님께서 오신다는데
좋은 일로 오시는 건지 묻는 것과 같은 말로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느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다면 무진장 무례한 것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 좋은 일이지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가 클라라 영성을 강의할 때 클라라는 하느님을 자비의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3단 논법적으로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선이시고 모든 선의 주인이시다.
-하느님은 선이실 뿐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이시기에 선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선이고 그래서
비록 그것이 고통이고 병이고 죽음일지라도 선이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고,
벌을 주시더라도 그것은 상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을 주시는 거지요.
다만 그것을 우리가 싫어하는 것뿐이지 나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미성숙하냐 하면
좋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나쁜 것을 좋아합니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니 약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먹으라고 하지만
나이를 70이나 먹어도 여전히 입에 쓴 것, 귀에 거슬리는 것은 싫어합니다.

피부가 여전히 고우시다고 하면 좋아하고,
이제 나이 드셨으니 피부 화장은 그만하고
마음 화장이나 잘 하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저도 제 입으로는 제가 교만하다고 하지만
누가 저보고 겸손해야 한다고 하면 싫어하고
사랑이 많다고 귀를 간질이는 얘기를 하면 좋아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표피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각의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당장 좋거나 당의정처럼 겉만 좋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좋은 것이고 속속들이 전부 좋은 것을 좋아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하느님의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에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다고 하시지요.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저는 껍질을 벗기고 먹는 것이 싫어서 새우 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먹어야 한다면 껍질까지 다 먹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껍질을 벗기기 싫어서가 아니라 다 먹어야 완전한 영양을 섭취하게 되고,
입에 싫다고 껍질을 벗기고 먹으면 콜리에스테르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것이 다 선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선이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입맛이 깊어져야 하고 눈은 영안靈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맛없던 것도 맛있어지고,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너머를 보고 깊은 곳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16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이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챙겨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인간이 지음받았을 때의 본성이자 욕구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장 참조).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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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정신은 모르고 율법만 지키려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법이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하면 그 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법이 생긴 목적과 반대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칼이 인간을 해치는 용도로 쓰이게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사용할 때 그것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합니다. 왜 율법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부터 율법은 존재했습니다.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왜 생긴 것일까요? 그 율법을 어기면 결과적으로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그 죄책감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느님과 이웃을 심판합니다. 아담은 하느님께서 괜히 여자를 만들어주셔서 그 여자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율법을 잘 지켰다면 이웃을 심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존재하게 된 목적은 이웃을 심판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으로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였습니다.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만드신 율법을 역이용하여 이웃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지켜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그 율법을 지켜서 주님께서 칭찬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켜야만 죄책감이 생기지 않아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목적을 잃은 칼이 얼마나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기억해야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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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그것은 현대판 율법주의일 것이다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그것이 주일을 잘 사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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