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1. 19. 19:51

2020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마르2,18-22) 


As long as they have the bridegroom

with them they cannot fast.
No one sews a piece of unshrunken cloth

on an old cloak.
If he does, its fullness pulls away,
the new from the old, and the tear gets wor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을 배척한 사울의 행동 때문에 주님께서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시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에게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시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유다 사회는 단식을, 기도, 자선과 더불어 하느님을 만나는 일상의 당연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당위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으로 비쳤을 테고, 예수님의 공동체는 기존 사회에 이질적인 무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신랑과는 기쁨을 나누어야 하고, 기쁨 속에 단식할 수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논리는 우리의 일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야 하지만, 기쁘게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기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기쁨은 신랑과 함께하는 기쁨이지 저 혼자만의 만족감에 따른 결과물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안정적으로 보관되어 기쁨을 주는 것이지, 포도주나 가죽 부대 자체가 기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갈수록 개인주의화되는 우리 시대에 개인적 수련을 통한 행복이나 기쁨의 수여 여부로 신앙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속이 불편하고 어지러울 때가 많은 것이 신앙입니다.
낯선 것이 내 마음속에 포탄처럼 터져 속앓이를 할 경우가 많은 것이 신앙입니다.
일상 속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들에 저당 잡혀 새롭게 시작한 세상의 흐름을 읽어 내지 못하고, 익숙한 것이 좋다며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신앙에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신랑을 얻어 새로운 집에 머물 기쁨을 잊은 채, 혼인 전 제집을 고집하는 신부는 없을 테지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은 개인적 수련이 아닌 사회적 수련을 통하여 공동체의 내일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서로 함께 머무는 자리는 꽤나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하고, 새 포도주를 마시려면 우리의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중학생 때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우연히 보면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를 충격에 빠뜨린 책은 ‘Life’라는 시사 화보 잡지였습니다. 이 잡지 안에는 많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중에 벌거벗은 채 울면서 도망치는 한 소녀의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이 사진은 AP통신의 사진 기사 닉 우드가 찍은 것으로 ‘네이팜탄 소녀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베트남전의 참상을 전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사진을 보기 전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서로 다른 나름의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고 난 뒤에는 전쟁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또 아무런 죄 없는 아이에게 전쟁이 얼마나 큰 상처로 다가오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전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실제로 전쟁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알아야 자신의 말과 행동이 변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더 알기 위해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주님께서 우리가 변하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알고 있을까요? 또 주님을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당시의 단식은 하느님을 열심히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덕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도 또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끊임없이 단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먹보요 술주정뱅이처럼 먹고 마셨습니다.

단식이란 무엇일까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참된 단식은 악습을 멀리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서 인상을 쓰면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단식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자신의 악습을 모두 끊어버리는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단식입니다.

진짜 죽음은 빵에 굶주리거나 물을 마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단식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때를 맞이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해야 했던 것입니다.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모습에 맞게 살고 있습니까?
당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결심하는 그 순간이다(앤서니 라빈스).



의사와 예수님의 차이점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가기 싫은 병원을 뽑으라고 한다면 아마 ‘치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치료할 때 들리는 기계음은 아프고 안 아프고를 떠나 병원에 가길 꺼리는 이유로 충분합니다.

작년 말, 예전에 치료했던 치아에 문제가 생겨서 가기 싫은 치과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미처 몰랐던 이상이 생긴 치아도 함께 잘 치료할 수가 있었습니다. 몇 주 동안 치료를 하면서, 어느 날 문득 병자를 치유해주신 예수님에 대한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사처럼 그저 질병을 제거하심으로써 환자를 낫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보게 하셨으며, 그들이 오늘 당신과 만남을 통해 어떻게 나을 수 있는지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로 가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병만을 치유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내게 어떤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참 기쁨의 순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전삼용신부-


 혜경양은 학창시절 “혜경아 공부해라.” “TV 좀 그만 보면 안 되니?” “학교 갈 시간이야.” 등등의 어머니의 잔소리가 매우 싫었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어머니께서 무엇인가 물어보시면 나중에 얘기하자며 방문을 닫고 잠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건강하시던 어머니께서 갑상선 암으로 성대 제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듣기 싫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께 했던 행동들이 머릿속으로 하나둘 스쳐 지나갈 때마다 후회가 됐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의 행동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입 모양을 보면서 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재활의학 박사로부터 희망이 담긴 말을 들었습니다. 기계를 이용하면 성대를 대신해서 그 부분을 울려주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혜경아, 일 끝나고 온 거니?”

비록 기계의 울림소리였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감동과 기쁨의 눈물로 목이 메었습니다. 혜경양은 어머니 목소리의 가치를 알고부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로 증명됩니다. 천국의 비유에서는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청하라고 하시며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보물인 성령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바로 성령의 은총이고 새 부대는 그 은총의 가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것으로 감동하여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 부대는 성령 받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의 가치는 얼마로 평가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하느님의 목숨 값’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은 ‘성사’, 특별히 ‘세례’를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때는 그냥 단순하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1코린 12,13 참조).

      구약에서 세례의 가장 큰 상징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紅海)’를 건너는 사건입니다(1코린 10,2 참조).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고해성사를 할 때, 성체를 영할 때도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러나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대가임을 알 때에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 죄에서 멀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셔도 됩니다. 제 책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중의 하나가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느냐?’, 혹은 ‘어떻게 어떤 때는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만, 어떤 때는 아드님만 하느님이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부-성자-성령, 세 분이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삼신론이라는 삼위일체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생각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이 의문에 대한 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의견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이 ‘하느님의 피’라면 당연히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는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선물은 성령이시고, 성령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주시는 하느님은 죽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삼위일체신비는 그 사람에게 뜬구름잡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가치를 모르게 되어 성령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음식에서 부모의 피를 발견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감사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용돈이 부모의 살과 피임을 믿을 때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씁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은총, 혹은 성사의 은총이 하느님의 목숨 값임을 알아야 성사생활을 통해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피이자 목숨임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성령’은 ‘죄의 용서’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피’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은 숫자 ‘50’으로 상징이 일치합니다. 교회에 성령께서 오신 날이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이란 숫자상 오(五: 5)와 순(旬: 10)이 곱하여진 날로 ‘50’을 상징하는 날입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느님께서 죄로 가득한 소돔 땅을 유황불로 멸하시려 하실 때 아브라함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의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소돔 땅에서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6)라고 하십니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집니다(에페 1,7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는 ‘50’과 연관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사람들을 ‘50’명씩 앉히신 것도 당신의 살과 피가 ‘50’과 관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루카 9,14 참조). 그리스도의 피가 곧 그리스도의 성령이기 때문에 오십 일을 나타내는 오순절에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오시는 성령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또한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시며, 이 생수는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4항)

      두 번째로 성령이 하느님의 피, 즉 하느님의 생명인 이유는 그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성령을 받는 이에게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는 하느님의 생명과 존재가 들어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실 때, 성자께서 그 성령을 통하여 당신 온 존재를 성모님께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성령 안에 하느님의 온 존재가 담기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넣어서 내어주시는 성체와 성혈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 안에는 하느님의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도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게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죄에서 치유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 생명이다. 이 은총은 세례로써 받는 성화 은총(聖化恩寵, gratia santificans) 또는 신화 은총(神化恩寵, gratia deificans)이다. 이 은총은 우리 안에서 성화 활동의 샘이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999항)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이 될 수 있다면 그 성령 안에 당신 온 신적 본성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내어주시면 살아계실 수 없고, 신성을 내어주시면 계속 하느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피자조각처럼 성령을 나누어주신다고 생각하니 성령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온 존재를 성령을 통해 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성체성혈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 값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하느님의 피이신 이유는 ‘계약’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계약은 쌍방 간의 필요에 의해 맺어집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모르는 두 사람이 땅을 사고팔기 위해 계약을 맺으면 새로운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돈을 주고 땅을 주어야 하는 쌍방의 의무를 다할 때에만 유효합니다. 만약 이 두 관계가 영원하려면 영원히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아는 관계가 되면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영원하려면 끊임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성혈이 든 성작을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예수님의 성만찬 때 하신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미사는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맺은 혼인 계약을 잊지 않기 위해 계약서의 조항을 되새기는 시간과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신이 낀 결혼반지를 보며 부부의 의무를 되새기는 시간과 같습니다. 남편이 밖에 나가서 피 같은 돈을 벌어와 아내에게 주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당신 피를 흘려 신랑으로서의 계약조항을 준수하십니다. 신부가 필요한 것은 신랑의 피입니다. 그러면 신부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과의 계약을 유지합니다. 계약이 유지되어야 관계가 유지됩니다. 이웃을 미워하면 성령으로 맺어진 그리스도와의 계약이 끊어지기에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계약, 곧 성령으로 맺는 계약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유다인과 이방인 가운데에서 부르신 백성을 혈육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다.”(「가톨릭교회교리서」, 781항)

      모든 관계는 계약이고 계약 안에는 내어줌이 있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관계 안에는 이렇듯 오고가는 선물이 존재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오고가는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라 생명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며 숨을 거두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든 내어줌은 이렇듯 죽음을 전제합니다. 하느님은 살려고 해서 영원히 사시는 분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기 위해 죽으려고 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을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으시는 분이시고 죽으시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없다고 말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사람이 죽으신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죽으신 것일까요? 사람만 죽고 하느님은 사셨다고 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인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어머니인가요? 인성과 신성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인간 예수의 어머니가 되신다면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도 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시라면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느님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인간 예수가 죽으신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 예수가 죽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 예수는 죽었지만 하느님 예수는 죽지 않으시었다고 말하면 네스토리우스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한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을 구분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물을 통해 당신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도록 분명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 오는 성사는 분명 그분의 목숨 값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면 하느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위해 죽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안에 하느님의 온 존재와 신성이 들어가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 되십니다. 물론 이 죽음은 인간처럼 죽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 죽음은 분명 죽음이지만 부활이 연계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곧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시면서 부활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아버지도 성령을 주시며 아드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께 다시 돌려보내실 것을 아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렇게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선물로 내어주시며 다시 받는 계약의 관계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래야 삼위일체론적 이단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삼위일체 이단은 양태론(樣態論)이나 삼신론(三神論)입니다.

      양태론은 성부-성자-성령께서 본래 한 분이신데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가면만 바꿔가며 나타나신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하면 이렇게 양태론에 빠집니다.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 완전하게 구분이 되는 세 인격체이십니다. 한 분 안에서는 관계의 역동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 분 하느님은 각자 자유와 인격을 지닌 분들이시고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본성이 사랑이 되십니다. 내어주고 받음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태론을 극복하기 위해 관계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느님은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제각각이시고 각자 신성을 지니신 다른 신이라는 삼신론에 빠집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시지만 동시에 한 분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성인 ‘신성(神聖)’은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성은 나눠질 수 없어서 마치 피자처럼 세 분 하느님께서 쪼개어 동시에 가지실 수 없습니다. 또 신성을 각자가 동시에 가지게 되면 동시에 세 분의 신이 생기게 되어 삼신론이 됩니다. 세 분 하느님이 동시에 신성을 가지셔야 한다고 여기면 신성에 셋이 되어서 삼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인 신성을 옮겨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무시하면 삼위일체는 이단에 빠집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이 지니신 신성을 서로 주고받으시며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세 분이 하나가 되심을 세상에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이것을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셔서는 안 됩니다. 그 전까지는 신성을 아버지께서 지니시고 계셨음을 보여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을 아버지께 돌려드리신 다음에는 무덤에 묻혀 죽어계셔야지 하느님으로서 다시 나와서 활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미 성령을 아버지 손에 맡겨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침묵하고 계셔야 세상에 하느님이 한 분뿐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염두에 두어두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정확히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주고받으시는 역동성을 고려해야 양태론이나 삼신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아버지가 하느님으로 계실 때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는 성령 하느님만이 신성을 지니신 것처럼 보이고 또 그 신성을 품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서 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재적 삼위일체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역동성 안에서 세 분 하느님이 한 분 하느님으로 언제나 영원하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바람개비에 두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에는 붉은 점을 찍고 다른 하나는 텅 빈 채로 그대로 둡니다. 그런데 바람이 붑니다. 성령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게 합니다. 그렇게 붉은 점이 찍힌 날개는 바람의 힘에 의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날개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면 붉은 점이 있던 날개 위치는 이제 텅 빈 날개가 위치하게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지니신 신성이 아드님께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불면 결국 그 주고받음을 통해 붉은 점은 하나의 큰 원을 만들게 됩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힘을 통해 아드님께로 향하고 아드님은 성령을 통해 당신을 아버지께 보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드님 안에 들어오시고 아드님도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에서 바라보면 끊임없이 신성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과정이 존재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면 이렇듯 하느님 안에서는 세 분이 항상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서로를 위한 내어줌의 역동성을 무시하면 하느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없애시기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죽고 부활하심을 반복하실 수밖에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실 필요가 없으셔도 삼위일체 사랑을 유지하시기 위해 영원히 죽으셔야 하고 영원히 부활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선물 자체’이신 분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성령의 존엄성을 깎아내립니다. 그 방법은 성령께서 마치 하느님께서 가지신 소유물 중의 하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모독을 당하십니다.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성령님이 하느님의 생명이며 하느님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가 되시는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를 위해 죽지 않으신다면 사랑의 내어주는 본성을 깎아 내리게 됩니다.

      또한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자비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 서로 자기합리화를 하다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교회에 성령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러셨다면 삼위일체 하느님 사이에서도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셔야 하는 것은 더 당연한 일입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성령도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 자체십니다. 하느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면서까지 생명의 은총을 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성령의 가치를 떨어뜨려 그 선물을 모독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께서 그 사람을 절대 변화시킬 수 없으십니다. 선물의 가치를 알아야 받는 이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분이 목숨을 내어주시며 주신 은총이 성령이고 정말 하느님의 피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믿어야 성령을 모독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성령을 주시기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 고해, 성체 성사 모두가 바로 그분 죽음의 값입니다. 인간을 위해 죽으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면 삼위일체 하느님 내에서도 이 신비가 일어남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니 저는 하느님께서 상대를 위해 당신 생명과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죽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해하자면 세 분이 동시에 신성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서로 내어주고 받음을 통해 순차적으로 하느님의 지위를 유지하신다고 감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이 사랑의 역동성의 진리를 무시하면 진짜 이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손님이 오셔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엘 다녀왔습니다. 입장료가 있지만, 뉴욕에 거주하는 주민이나, 뉴욕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다만 후원금은 받는다고 합니다. 기분 좋게 후원금을 내고 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었습니다. 아담하지만 잘 꾸며진 한국 문화유산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기업이 후원해서 전시공간이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박물관의 한쪽 벽에는 후원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뉴욕의 많은 공원, 공연장, 미술관은 뜻있는 이들의 후원으로 운영된다고 합니다. 자신이 받은 걸, 자신이 얻은 걸 기꺼이 나누는 모습도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을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 있지만, 다른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제삿밥만 챙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달을 바라보라고 내미는 손가락인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국회라는 같은 침대에 있다면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드는 정치인이 올바른 정치인입니다. 조금 늦더라도 절차와 규칙을 지키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다. 교계제도라는 틀에 안주하기보다는, 상처 입고 더러워질지라도 세상을 향해 나가는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도 무엇이 중헌디.’입니다. 1 독서에서 사울은 하느님께 제사 지내겠다며 전리품으로 양과 소를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지내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엘리야는 천둥 속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진 속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불 속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 중요한 건 침묵입니다. 내적으로 침묵하지 않는다면,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이 오래된 포도주였다면 십자가와 희생이 새 포도주입니다. 성전과 교계제도가 오래된 부대였다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죽음을 넘어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한 사도들의 삶이 새 포도주의 삶이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가 새 부대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삶이 새 포도주의 삶이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가 새 부대였습니다. 정결, 청빈, 순명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최상의 포도주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가장 안전한 새로운 부대입니다. 이것이 복음 삼덕이고, 이것이 향주 삼덕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보내기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날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단식과 관련해서 바리사이들은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의 규정에 따르면 일년에 단 한번 속죄의 날에만 단식이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름 엄청 열심한 사람들이었던 바리사이들은 일년에 한번 속죄의 날 단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매주 두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란 사람들은 더 자주 틈만 나면 단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은 단식에 있어서는 전문가였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식을 자주 하다 보니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갔고 횟수를 늘려갔습니다. 건강하게 단식하는 방법도 연구하고 계발했습니다.

 

 사실 일주일에 두번 단식, 이거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대단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에서 단식에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단식을 많이 할수록 거룩한 사람,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니 바리사이들 입장에서는 한심할 지경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한 얼굴로 애써 단식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니 단식과는 완전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잔치집에 가면 어김없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잔칫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굶주린 배를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잔치집에서 말씀도 선포하셨고 치유와 기적을 계속해나가셨습니다.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바리사이들은 마침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코 복음 2장 18절)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동시에 알쏭달쏭,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코 복음 2장 19~20절)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 잔치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지금 이 시기는 당신의 사명이 이루어지는 기쁨과 축제의 순간이기 때문에 단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축제에 초대받았다면 통상 어떻게 처신해야 바람직할까요? 잔치에 온 사람이 아무 말도 않고 울적하거나 뚱한 얼굴 하고 있다면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인상을 빡빡 쓰고 있다면 축제 주최측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축제에 왔다면 기쁜 행사이니 만큼 축제를 마음껏 즐겨야겠지요. 애써 마련한 음식을 행복한 얼굴로 맛봐야겠습니다. 축제에 온 사람들과 포도주 잔도 기울이며 담소도 나눠야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잔치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단식 시기의 적절성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조만간 신랑을 빼앗길 날,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는 단식해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게 되면, 너무나도 당연히 혼인잔치나 축제는 재개(再開)될 것입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보내기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날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남아있는 삶을 최대한 만끽해야겠습니다. 기쁨과 감사, 찬미와 사랑의 날로 하루하루를 장식해야겠습니다.

 

 참된 단식과 관련해서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1. 이웃을 사냥하는 말을 단식하고 상냥한 말을 사용하십시오.

2. 슬픔을 단식하고 감사로 채우십시오.

3. 화를 단식하고 인내로 채우십시오.

4. 비관주의를 단식하고 희망으로 채우십시오.

5. 걱정을 단식하고 하느님을 신뢰하십시오.

6. 불평을 단식하고 단순함을 묵상하십시오.

7. 스트레스를 단식하고 기도하십시오.

8. 쓰라림을 단식하고 기쁜 마음을 지니십시오.

9. 이기심을 단식하고 연민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10. 원한을 단식하고 화해하십시오.

11. 의미없는 말을 단식하고 침묵하십시오.


우리 삶이 새 부대가 되려면

-반영억신부-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소신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디딤돌로 삼아 미래를 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을 쇄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소식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를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 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단식은 생색내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의 절제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사랑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우리 삶이 새 부대가 되려면 새 포도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삶의 무언가 하나는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새 부대가 되길 희망합니다. 내 삶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이는 단식이 무엇을 위한 단식이고, 누구를 위한 단식인가를 밝혀줍니다. 곧 새로운 시대의 단식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구약과 신약의 단식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는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그 말은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 안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단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낡은 옷에다가 새 천 조각으로 깁을 수 없듯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새 포도주인 당신을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제 마음이 당신의 새 부대이오니, 제 마음에 당신 사랑의 술을 부으십시오!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 하리이다.

제 마음 온통 당신 사랑에 젖어 당신 향기 품으오리이다.

이제는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는 포도주 잔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이제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이 되어 제 형제들에게 퍼내 주리이다.

제 삶이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담아 건네 주리이다.

하여, 이 세상이 새 포도주가 담긴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이 나라에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 피어오르고,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기뻐하여라. 

-송영진신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8-20)”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바리사이들의 단식을 ‘위선’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려는 ‘위선’, 즉 마음에 없는,
겉으로만 굶는 ‘거짓 단식’이었는데, 어떻든 그들의 단식은
참회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슬픔’을 표현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에
그런 단식은 필요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이미 오셨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한다는 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셨으니 기뻐해야 합니다.
단식이 아니라 기쁨의 잔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의미로 단식을 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스승인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단식을 했던 것 같은데,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왔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오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의
단식은 바리사이들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단식도 옳지 않은 일이 됩니다.
<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고
증언했는데도(요한 1,29-36) 그것을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원래 요한의 제자였다가
요한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요한 1,40).>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메시아인 내가 이미 세상에 와서 너희와 함께 있으니 기뻐하여라.
그리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슬픔의 단식’은 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은 ‘기쁨에 가득 찬’ 생활입니다.
(구약시대를 ‘슬픔의 시대’로, 신약시대를 ‘기쁨의 시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 즉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소식만 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기쁨’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의 생활의 기본자세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 여기서 신앙인들이 ‘손님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부르심을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이 말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신앙인들은) 신랑과 함께 잔칫상을 받는 신부입니다(2코린 11,2).
그러니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입니다.>

< 강론을 할 때마다 ‘구원의 기쁨’은 말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는 말만 하고, 지옥의 무서움만 너무 강조해서
신앙생활을 ‘무서워서 떠는 생활’로 변질시키고,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만 부각시키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회개시키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만,
그 회개는 무서워서 하는 ‘진정성 없는 억지 회개’가 되고,
‘기쁨 없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차츰 ‘생명력 없는 생활’로 전락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기쁨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그 말이 곧 그 말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전혀 다릅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하는 신앙생활은
그저 벌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생활이고, 사랑 없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그것은 ‘죽은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그리고 사랑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사랑 실천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생명력과 생기와 활기가 생깁니다.
그러면 글자 그대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단식인데,
이 단식은 바리사이들의 단식처럼 ‘슬픔의 단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기쁨의 단식’입니다.
각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빼앗기는 날은 더 이상 없고,
죄를 지으면서 예수님을 떠나는 날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 되돌아가기 위한 ‘회개의 단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바리사이들의 단식과는 다르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잃은 양’인 나를 찾아주시는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단식’입니다.

< 단식에 관한 말씀 뒤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단순히 “헌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지켜라.” 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지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새 것’이냐, ‘오래된 것’이냐? 가 기준이 아니라,
‘옳은 것’이냐? ‘옳지 않은 것’이냐? 가 기준입니다.
‘새 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간에,
옳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하고, 옳은 것은 지켜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그렇고, 교회를 운영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라고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고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은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 19)

-한상우신부-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신랑을 향한
축제도 신랑을
향한 단식도
서로를 향한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안에서
만나게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여정입니다.

단식은 관계의
성찰이며 사랑의
또다른 봉헌입니다.

잔치의 주체도
단식의 주체도
모두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는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의 삶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마음의 단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단식은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자발적인
실천입니다.

강요나
완력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안에서
이루어지는
봉헌입니다.

우리의
모든 여정이
진실한 사랑에서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간극과 간격을
줄여나가는
단식말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합리화의 생채기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이스라엘에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경건한 유다인을 가늠하는 척도였지요. 특히 단식은 속죄의 기능이 있어서 자신, 가족, 민족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와 형벌을 진정시킨다고 믿었지요. 이처럼 단식이 기본적인 수행 행위인데도 드러내어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꽤나 의아했을 겁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르 2,19)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혼인 잔치에서는 누구도 단식하지 않지요. 사랑이 열매를 맺는 축제 기간 동안에는 누구에게나 한껏 기쁘고 흥겨울 권리가 보장됩니다. 아니, 마땅히 즐겁고 행복해야 하지요.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알아들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핏기 없이 제도화된 단식의 본 의미를 흔들어 깨우시는 겁니다. 단식은 음식 섭취를 중단함으로써 몸의 욕망을 제어하고, 탐욕했던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징벌적 성격도 가미된 금욕 수행 방법이긴 하지만, 그 깊이 안에는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아름다운 열쇠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이 단식이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이유는 잘못을 범한 자기를 괴롭히고 벌해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비워 정화함으로써 창조 때의 본 모습을 새로 회복한다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단식은 욕망과 탐욕으로 치달았던 자신을 잠시 멈추고 "주님, 당신이 저를 처음 만드셨을 때 어땠지요? 그때처럼 다시 맑고 순수하게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라는 속삭임이 전제된 수행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 안에서 한창 신랑이신 하느님과 사랑 중에 있는 영혼에게 인위적 비움이나 고행 같은 수단은 불필요합니다. 이미 목적지에 가 닿았으니, 도달하는 데 필요한 이동 수단을 다시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혼인 잔치에서 그분과 나누는 희열이 곧 정화이고, 누리는 사랑이 곧 곧 비움입니다.

사람들 이목과 제도에 편승해 습관이 되어버린 단식은, 하느님께 날마다 새롭게 드려야 할 뜨거운 헌신과 열렬한 사랑을 배제한 요식행위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굶는 행위를 사랑처럼 합리화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의례와 규칙이 이 합리화를 돕기도 하지요. 사랑 없는 단식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의 잘못이 드러납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 다만"(1사무 15,20-21)

이 "다만"이 문제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변명에서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합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두 전멸시키라는 하느님 명을 어겼지요. 그는 보기에 탐스럽고 훌륭한 것들을 아깝게 여겨 남기고,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없애버리며 하느님의 눈을 속이려 했습니다(1사무 15,9 참조).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탐스런 제물로 불순종을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주님의 것인 세상 만물을 그분 뜻을 어겨가며 주님께 바친다고 공로가 될 수 없으니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율법주의로 박제되어가는 이스라엘에 하느님께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일깨우고 완성하실 아드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율법은 한 점 한 획도 사라지지 않고, 예수님의 피인 새 포도주로 맺는 계약을 통해 "사랑"으로 모아질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받은 이들은 혼인 잔치 바깥에서 "사랑"이라 쓰여진 간판이나 닦고 있기를 그만 끝내고, 또 "사랑"이라고 쓰여진 허울을 뒤집어쓴 채 속으로 다른 잇속 챙기기를 멈추고, 새 포도주에 취해 "사랑" 안으로 쑤욱 들어가야 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그 안에서는 합리화를 눈씻고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습관적 요식행위가 아닌 진짜 사랑만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앞에서 우리, 변명하지 맙시다. 합리화하지도 맙시다. 그냥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이지만,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합시다. 스스로를 검열하고 단죄하던 율법주의는 떠나보내고, 눈치 보지 말고 새 포도주의 시대, 사랑의 시간으로 들어갑시다. 아직 신랑을 빼앗기지 않았으니 그 신랑과 함께 사랑에 취해 맘껏 기쁘고 행복해도 좋습니다.

그 안에서는 "굶었느냐 안 굶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안 먹어도 먹은 듯, 굶어도 안 굶은 듯 충만합니다. 이런 우리로 인해 주님마저 흡족하고 뿌듯하실 겁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는 절정을 향해 갑니다.


 말씀을 순히 듣는 착한 아이  
-김찬선신부-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 사무엘기는 기름 부음 받아 왕이 된 사울이
하느님 눈 밖에 나게 되는 사건에 대한 얘기입니다.
아말렉을 치되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을 챙긴 것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사실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이민족들에게는 당연한 것이고,
또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서 전쟁도 하는 것인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 그러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전쟁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악을 부스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하고 말씀하셨던 거지요.

사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죄악과의 싸움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싸우지 말아야 할까요?
이것이 신앙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며 왼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오른뺨을 대주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고 하시는 주님께 이런 사람들, 곧 뺨을 때리고
달라는 사람은 원수가 아니고 그래서 싸워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는 자와는 맞서거나 싸우지 말고
오히려 손해와 고통까지 품는 압도적인 사랑으로 복수하고 승리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이웃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악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내야 하고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기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전쟁입니다.

사랑보다 이익이 앞서는 사람에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말씀인데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내가 손해 보고 말 정도로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나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지요.

아무튼 전리품을 챙긴 것 때문에 질책을 받게 되자 사울은 변명을 합니다.
숫제 다윗처럼 즉시 잘못했다고 인정을 하고 용서를 청했으면
왕위는 뺏기지 않았을 텐데 변명을 하는 것 때문에 왕위를 뺏기는
벌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용서와 벌이 바로 여기서 갈리는 겁니다.

인정을 하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기에 용서를 받지만
변명이나 합리화를 하면 다음에도 또 죄를 짓고 변명이나
합리화를 할 것이기에 용서받지 못하고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변명이라는 것도 참으로 옹색하고 꼴불견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라는 데로 갔고 하라는 대로 다 순종했다고 하고,
전리품을 챙긴 것도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위한 거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선물하기 위해 도둑질하고 강도질했다는 얘기와 같은데
자식의 도둑질을 좋아하고 그 선물을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설사 자기는 나쁜 짓을 하는 강도일지라도
자식만은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착한 사람이기를 바라겠지요.

그래서 사무엘은 이렇게 반박하지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인간 사랑의 경우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사랑이라 할 수 있지만
하느님 사랑은 뭘 드리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이 더 사랑이라는 거지요.
무슨 거창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말씀을 순히 듣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는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마르2,18-22)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로 증명됩니다. 천국의 비유에서는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청하라고 하시며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보물인 성령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바로 성령의 은총이고 새 부대는 그 은총의 가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것으로 감동하여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 부대는 성령 받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구약에서 세례의 가장 큰 상징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紅海)’를 건너는 사건입니다(1코린 10,2 참조).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자녀는 부모가 주는 음식에서 부모의 피를 발견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감사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용돈이 부모의 살과 피임을 믿을 때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씁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은총, 혹은 성사의 은총이 하느님의 목숨 값임을 알아야 성사생활을 통해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성체성혈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 값인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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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과 계명이 오래된 포도주였다면 십자가와 희생이 새 포도주입니다성전과 교계제도가 오래된 부대였다면 시대의 어둠을 넘어죽음을 넘어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한 사도들의 삶이 새 포도주의 삶이었고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가 새 부대였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삶이 새 포도주의 삶이었고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가 새 부대였습니다정결청빈순명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최상의 포도주입니다믿음희망사랑은 가장 안전한 새로운 부대입니다이것이 복음 삼덕이고이것이 향주 삼덕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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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기쁨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그리고 사랑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사랑 실천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생명력과 생기와 활기가 생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그리고 사랑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사랑 실천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생명력과 생기와 활기가 생깁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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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잔치 안에서 한창 신랑이신 하느님과 사랑 중에 있는 영혼에게 인위적 비움이나 고행 같은 수단은 불필요합니다. 이미 목적지에 가 닿았으니, 도달하는 데 필요한 이동 수단을 다시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혼인 잔치에서 그분과 나누는 희열이 곧 정화이고, 누리는 사랑이 곧 곧 비움입니다.
사람들 이목과 제도에 편승해 습관이 되어버린 단식은, 하느님께 날마다 새롭게 드려야 할 뜨거운 헌신과 열렬한 사랑을 배제한 요식행위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굶는 행위를 사랑처럼 합리화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의례와 규칙이 이 합리화를 돕기도 하지요. 사랑 없는 단식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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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무엘기는 기름 부음 받아 왕이 된 사울이
하느님 눈 밖에 나게 되는 사건에 대한 얘기입니다.
아말렉을 치되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을 챙긴 것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왜 그러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전쟁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악을 부스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하고 말씀하셨던 거지요.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죄악과의 싸움뿐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이웃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악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내야 하고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기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전쟁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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