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2020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he drove out many demons,
Rising very early before dawn,
he left and went off to a deserted place,
where he pray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기다리라고 이른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신 뒤 많은 사람을 치유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시몬의 장모가 누워 있던 집에서부터 온 갈릴래아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들은 모두 아픈 이들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십자가가 도시의 야경 속에 뒤엉켜 있는 오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들은 누굴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몸가짐이 단정하고, 생각이 올곧으며, 일상을 성실함으로 꾸며 가는 이들을 볼 때, 참신앙인이라고 칭송합니다.
반면에 괜한 울분으로 세상을 비꼬듯 비판하며, 제 인생조차 남 탓하듯 허투루 대하는 이들의 ‘삐딱함’을 보면서 신앙인의 모범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지요.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들은 모두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는, 아픈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아픈 것도 아쉬운 것도 슬픈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없는 이들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위험한 순간이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되뇌일 때가 아닐까 합니다.
영육으로 ‘결핍’을 느낄 때, 우리는 이웃에게, 하느님에게 손을 내밀 때가 있습니다.
사실 손을 내미는 것도 꽤 힘든 일이지요.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이런 존재밖에 안 되나 싶어, 속상한 마음이 먼저라 손을 내밀기가 힘들기도 합니다.그럼에도 다시 되뇌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들은 모두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잠시만 손을 내밀어 이웃을, 세상을 향하여 도와 달라 외쳐 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맞잡을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으려고 성당에 모이는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처음에는 이 두 마리를 엄마 고양이가 애지중지 키우더군요. 그런데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이제 엄마 고양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 고양이 없이 돌아다니는 새끼 고양이를 보면서 ‘엄마가 왜 이래?’라는 마음이 듭니다.
인간에게는 ‘엄마 이상향’이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 안에서 자식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 이상향에 벗어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면서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꼭 똑같은 엄마의 모습만 있을까요? ‘다른 엄마’의 모습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엄마 이상향은 하느님 이상향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 주셔야 한다.’라는 이상향을 만들어서 온갖 불평불만을 하느님께 보내고 있지요. 그러나 정말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을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그분과 가까워지게 되고, 이로써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셨다는 장면을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 없이도 거뜬히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새벽 아직 캄캄한 시간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도 기도하신다면 하물며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멈추지 않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당신께서 하실 일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떠나십니다.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서 질병을 앓는 사람,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이분이 참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는 ‘기도’를 참 주님이신 분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주님과의 대화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명령하듯이, “이거 해줘!”라고 말씀하시는 분 없습니다. 곧바로 부탁하기 전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이것 좀 해 주실래요?”라고 부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내게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요한 기도를 정성을 다해서 하고 계십니까?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싫어하는 것, 미움, 원망? 누군가는 ‘무관심’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반대말도 어쩌면 ‘사랑’이 아닐까요?
어머니의 불타는 교육열로 인해 힘들어하는 한 아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부만 시키는 엄마가 너무 밉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엄마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이러지 않을 것이라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이 어머니가 비싼 돈을 들여가며 불타는 교육열을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아이가 싫어해도 억지로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상대의 사랑을 사랑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동반하는 사랑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여러 모습이 있지만, 진정한 사랑은 아픔이 아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내 뜻에 맞추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맞추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 더는 사랑의 반대말이 ‘사랑’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인생은 여행과 같고, 꿈은 여행 지도와 같다
-전삼용신부-
파울료 코엘료의 「연금술사」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양치기입니다. 그는 허물어진 성당 안에서 별을 올려다보며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산티아고가 꿈을 꾸는데 피라미드가 있는 곳에 가면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같은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꾸자 산티아고도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살렘의 왕’이라 자처하는 한 노파는 그 꿈은 신의 계시라며 만약 보물을 발견하면 그 보물의 1/10을 달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파울료 코엘료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각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멜키체덱이란 노인은 산티아고가 치고 있는 양 중의 일정량을 주면 보물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귀가 얇은 탓인지, 산티아고는 자신의 양을 넘겨주고 보물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은 순탄치 않았으며 산티아고는 전 재산을 사기 당하고 맙니다. 거지가 된 산티아고는 피라미드로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 크리스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꿈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적어도 집으로 돌아갈 액수만큼의 돈이라도 벌기를 원합니다.
산티아고는 좋은 아이디어로 1년 만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법니다. 산티아고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알게 되어 다시 모든 것을 팔아 피라미드가 있는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납니다.
「연금술사」는 꿈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위해 평생을 산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꾸시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찾으려하고 그 꿈을 실현시키려 하는 삶이야말로 지루할 틈이 없는 인생입니다. ‘연금’이라 함은 물질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신비한 힘과 기술입니다. 석탄과 같은 것이 보석이 되려면 엄청난 압력과 열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변화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향해 꾸시는 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상당히 많은 일을 하십니다.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시고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새벽에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찾고 있다고 제자들이 보고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꿈을 꾸고 계십니다. 물론 각자가 다른 길로 가도록 이끄시기는 하지만 목적지는 언제나 세상의 복음화입니다. 이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삶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삶이 무기력하고 우울해진다면 이 꿈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들러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일주일 동안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 그 우울증이 싹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꿈을 향해 목숨을 걸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죽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말합니다.
“용감한 사람도 소중한 꿈을 잃어버리면 나락으로 떨어져 공허함에 휩싸일 것이다. 인생은 여행과 같고, 꿈은 여행 지도와 같다. 지도를 잃어버리면 가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생에 목표가 없으면 열정도 메말라버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일 아침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찾은 것처럼, 우리 또한 하루하루 주님께서 원하시는 꿈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때 매일 새로운 에너지와 생명력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삶의 여행을 지도 없이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특별한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30년 넘게 반 모임을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먼 타향에 와서 지치고 힘들 때도 있었을 겁니다. 반 모임은 위로를 주었고, 용기를 주었고,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신학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몸에 배고, 몸에 배면 변하고, 변하면 새로운 삶이 됩니다.” 30년간 변함없이 반 모임을 하시는 분들이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말씀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반 모임에 함께하시기를 청합니다.
제게도 자랑할 건 아니지만 고마운 습관이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겁니다. 1995년부터 시작했습니다. 30년은 안 되었지만 25년이 되었습니다. 복음 묵상하고, 묵상한 걸 나누고 있습니다. 새벽의 고요함은 저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새벽의 묵상과 기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을 갔을 때도, 성지순례를 하였을 때도 새벽은 늘 함께하였습니다. 새벽은 지치지 않았고, 새벽은 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중한 습관이 있으신지요?
사무엘은 새벽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 잡던 어부였던 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다는 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때로 세상과 떨어져 살 필요가 있습니다. 강물에 떠밀려 가는 것은 낙엽이나 나뭇조각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에 강물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강물 속에 머물기도 하며, 강물을 이용할 줄 압니다. 물고기는 강물 속에서 살지만, 강물을 거슬러 갈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거친 세상이라는 강물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살아가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 살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우 중에서 자동차를 아름답게 이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성당까지 모셔오고, 미사 후에는 집에까지 모셔다드리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휠체어를 타고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집에까지 찾아가서 모셔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은 자동차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100세의 노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잘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들을 보상하고 갚아야 하므로 오래 살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많은 사람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하느님께서 내게 다가오셔서 내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거룩한 호의입니까?
-양승국신부-
갈릴래아 지방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초기 복음 선포 활동은 카파르나움이란 고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종의 베이스 캠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상류 요르단 강물이 갈릴래아 호수로 유입되는 입구에 위치해있는데, 호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카파르나움은 로마 군인들의 캠프와 세관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집에서 주로 기거하시면서, 근방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환자들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폐허가 되어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지만, 한때 잘 나갈 때에는 멋진 호숫가에 위치한 상업도시이자 교통의 요충지로서, 고을의 길이가 1킬로 미터에 달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큰 규모였습니다.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전무후무한 새로운 가르침, 힘과 권위로 가득찬 가르침을 선포하신 후, 악령 들린 사람을 그 자리에서 치유하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특급 연예인 못지 않은 강도 높은 하루 스케줄을 소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을 것입니다. 시장기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휴식도 취할 겸, 식사도 할 겸, 베이스 캠프로 되돌아오신 것입니다.
집안으로 들어서시는데, 그날따라 분위기가 심상찮았습니다. 씨암탉을 삶고 있을 줄 알았던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 누워있었습니다. 왜 그녀가 열병에 걸렸는지에 대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식선에서 대충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일등 사윗감인 시몬이 돌변했습니다. 고기잡이의 명수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위, 돈도 곧잘 벌어서 용돈도 잘 찔러주던 사위가 갑작스레 배도 버리고, 그물도 집어던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도 뒤로하고, 누군가를 따라가버린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우르르 나타나 밥을 해대느라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시몬의 장모라도 해도 예수님을 향한 미움과 원망으로 인한 화병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미안했던 나머지 예수님께서는 즉시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즉시 열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장모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습니다. 여느때 처럼 맛있는 저녁 준비에 몰두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친히 아파 드러 누워있는 시몬 장모의 침상으로 다가오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가능한 일일터인데, 황공하게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누워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거룩한 호의입니까?
그 찰라같은 순간에 시몬 장모는 열이 가시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딸이 뒷전이 된 것에 대한 원망도, 사위를 강탈당한 것에 대한 미운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터져나왔습니다.
오늘도 친히 우리에게 다가와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자상하고 친절하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 앞에 우리가 앓고 있는 모든 영적·육적 질병은 씻은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
-반영억신부-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 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루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외딴 곳에서 빈말을 되풀이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 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은 곳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이영근신부-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라는 구절입니다. 곧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악습이나 결함이 고쳐지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 응답하게 되면 우리가 고쳐지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는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마귀의 고백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비교하여, 베드로는 사랑의 고백을 했고 마귀는 공포로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며, 그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고 그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의 지상 삶의 두 가지 차원, 곧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 없는 활동이나 활동 없는 기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이는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것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송영진신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사람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예수님께서 모두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르 1,32-34).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아마도 이른 아침부터 또다시 병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속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카파르나움에 치료소를 차리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면, 전국에서 병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셨다면, 아주 쉽게 신자들을 얻었을 것입니다.
(약간이라도 치료비를 받았다면, 돈도 많이 벌었을 것이고......)
어쩌면 제자들은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라는 말씀은,
“이곳을 떠나자.” 라는 뜻이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쉽고 편한 길을 버리고,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일부러 사서 고생하시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이곳에서 내가 한 일은
복음 선포였다. 이제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였습니다.
(복음 선포를 하기 전에 먼저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말씀’으로도 이루어졌고,
‘병자 치유’나 ‘마귀를 쫓아내는 일’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의 은총’이나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외면하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의 ‘몸의 병’을 고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이나 병을 고치는 일은 출발지이고, ‘구원’은 최종 도착지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는데,
예수님께서는 계속 다른 곳으로 떠나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물리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곧바로 다른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자꾸만 다른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가 되신 것은
사람들이 배척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떠나심으로 해서
자초하신 일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그냥 계셨다면, ‘숙식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을 것이고,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다른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1)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가서’ 선포해야 한다.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먼저 가서 전해 주어라.”
2) “있던 곳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안주하지 마라.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라.”
(이런 가르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서는 선교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또 선교활동은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이고,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모습은
‘기쁨 없는’ 모습이고,
그렇게 해서는 ‘기쁜 소식’과 ‘기쁨’을 제대로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기쁨’을 ‘사랑’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이고,
‘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먼저 찾아가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모습은
‘사랑 없는’ 모습이고,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제대로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또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편안한 시기가 찾아오기도 하고, 잠시 쉬고 싶은 때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물’과 같아서,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여 있게 되면,
차츰 건강한 상태를 잃게 되고, 결국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사는 것이 너무 편안해서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면,
거의 대부분 냉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마음과 정성이 식어버린, 내적인 냉담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편안해서 쉬든지, 너무 힘들어서 쉬든지 간에 쉬는 것은 모두 위험합니다.
신앙생활은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생활입니다.
또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만심에 빠져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경우나 교회 공동체의 경우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자만하고, 방심하면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즉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교회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우리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가지고 거리를 지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저녁에 해지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율법은 하늘에 별이 3개가 나타나면 그 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안식일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해가 지고,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주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 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고 하셨다. 우리도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의 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며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들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 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으셔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한상우신부-
다시금 기도에
눈뜨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잡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조화와 균형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도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기도와 치유
기도와 복음선포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중심을 찾는
우리들에게 기도들
가르쳐주십니다.
복음선포에는
외딴곳의 쉬어가는
기도의 시간도
아주 중요한 복음의
한 축(軸)이 됩니다.
기도는 기도를
찾아갑니다.
기도가 멀어질수록
복음선포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지탱하게 하는 힘은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힘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의 힘임을
다시금
가르쳐줍니다.
모든 사도직의
중심에는
새벽이고 캄캄한
외딴곳의 뜨거운
기도가 있습니다.
외딴곳의 기도를
따라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에 말씀들 안에서는 "갈망"을 만납니다. 병들고 고통 받는 이들의 갈망, 사무엘의 갈망, 예수님의 갈망, 하느님의 갈망...
"곧바로, 모두, 온, 갖가지, 많은"
복음 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단어들은 상황에 속도감을 더하고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출현이 병고와 마귀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예수님께로 "온" 고을, "모든" 사람이 밀려들어 손을 내밀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끄집어내주십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복음사가는 물밀듯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말씀 선포와 기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케하시는 예수님의 활발한 활동 중심에 이 문장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내용은 "예수님의 활동-->기도-->활동"의 구조를 갖추게 되지요.
기도는 예수님 행적의 원동력이고 중심이며 근원입니다. 아버지께 머물러 그분과 나누는 사랑의 일치가 곧 예수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이 머무름과 일치의 순간이 있어, 예수님은 당신 안에 차오른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의 아프고 슬픈 이들에게 퍼내어 주시는데 지치지 않으실 수 있으셨지요.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면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은 갈망의 존재이십니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무한히 사랑하기에 갈망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갈망을 더 잘 읽어 주십니다.
"병든 이들, 마귀 들린 이들,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마르 1,32-33)
갈망으로 점철된 이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그들은 제 발로 오기도 하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오기도 합니다. 환자뿐만 아니라 그 아픔을 지켜보는 가족과 이웃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는 내가 아파보았거나 아픈 사람 바로 곁에서 지내보았기에 잘 압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만남에서, 그분의 눈빛과 말씀과 환대와 어루만짐을 통해 치유됩니다. 그동안 켜켜로 쌓여온 오래된 염원, 간절한 갈망이 해소됩니다. 비록 그들의 갈망이 아직은 예수님의 인격을 향하기보다, 질병의 현상적 해소와 고통의 경감, 정신과 육신의 회복 정도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 지난 갈망은 새로운 갈망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소년 사무엘과 하느님의 가슴 설레는 첫 만남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1사무 3,10)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그것도 세 차례나!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1사무 3,3)에서 자고 있었지요. 주님의 성전에서 잔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주님께 바쳐진 그가 누린 특권입니다. 밤낮으로 주님 앞에 머물러 사는 삶, 생각만 해도 부럽고 설레입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1사무 3,5.6.8).
그런데 사무엘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한창 자라는 소년에게 자다가 세 번씩이나 일어나 소리가 났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달려가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텐데 충실하고 순수한 그는 조금도 미적대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1사무 3,7).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번번한 헛걸음은 그의 탓이라기보다 아직 주님과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주님과 인격적으로 직접 관계를 맺기 전에는 영혼이 아직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앎이 없으니 들어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사랑의 일치가 없으니 갈망도 아직 온도를 얻지 못한 상태이지요.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
드디어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경험 많은 엘리 덕분입니다. 한밤중에 세 번의 부르심과 세 번의 헛걸음이라니, 하느님도 사무엘도 참 인내롭습니다. 그래도 이 세 번의 부르심이 엘리에게는 식별과 깨달음의 단초가 되지요. 이렇듯 앞서간 이들, 먼저 체험한 이들의 앎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1사무 3,19).
성경저자는 하느님과 사무엘의 첫 만남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아름답고 행복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오히려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1사무 3,11-18)을 매섭게 드러냅니다. 엘리에게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는 내용이라 어린 사무엘이 잠시 두려움을 갖게는 되지만, 그 내용을 넘어서 하느님과 그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로써 하느님과 사무엘은 서로가 마음을 열고 속을 터놓는 사이가 된 것이지요.
훗날 사무엘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순간까지 하느님은 사무엘과 함께 계십니다. 함께 계시니 갈망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함께할수록 더 갈망하게 되는 존재이십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함께 있어도 네가 그립다"는 싯구가 떠오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갈망을 잘 표현하는 내용이지요.
"목마르다"(요한 19,28).
이 갈증은 예수님 죽음의 순간 뿐 아니라 그분의 온 생애를 관통하는 말씀입니다. 이 갈망은 곧 하느님의 갈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하신 분께서 뭐가 부족하다고 목마르실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목마르십니다. 우리의 눈빛, 관심, 시간, 사랑을 갈망하십니다. 공사다망하게 바삐 움직이며 세상 욕심으로 들어찬 우리 몸과 마음을 갈망하십니다. 그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아니 알아들을 때까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우리에 대한 그분 갈망의 신음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바오로야 바오로야!"
"○○야 ○○야!"
사랑하는 벗님! 오늘 내 이름을 반복해 부르시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갈망하면 들을 수 있고, 사랑하면 알아듣게 됩니다. 외딴곳에서 주님과 깊이 머물러 그분의 눈빛과 심장소리와 손길을 온전히 받으며 그분과 관계맺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의 나이
-김찬선신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어제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봤습니다.
오늘은 아들 사무엘의 기도를 보렵니다.
그것은 소년 사무엘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과정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상당수가 기도는 많이 해도
하느님 음성을 듣는 데는 실패를 합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응답이 없다고 서운해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볼 때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하느님 음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듣는 편은 아니잖아요?
뒤집어 얘기하면 하느님 말씀이건 다른 사람의 말이건
다 잘 듣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할 말이 더 많기 때문이지요.
요즘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이 많은데 이 심리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상담가는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상담가가 내담자의 말을 듣고 문제를 바로 고쳐주려고 덤벼들면
아무리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어도 말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내담자의 대부분이 살아오는 동안
자기 얘기가 한 번도 경청되어진 적은 없고 그저 강압적으로
듣기만 해야만 했던 삶이 병이 된 사람들이고 그래서 이제는
자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듣기를 강요한 사람 때문에 그 밑에서 산 사람은
들어도 듣지 않고 건성으로 듣게 되고 위치가 바뀌면
이제는 자기가 듣기를 강요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이건 이웃이건 다른 존재의 말을 듣지 않지요.
이런 심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실 잘 듣는 것은 쉽지 않고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임을 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들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기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되고 사랑이 충만하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로 가득 차기에
다른 존재의 얘기를 들을 여백이 없게 되는데 겸손과 사랑이
널뛰기하는 저는 잘 들어주다가도 어떤 때는 주장만 가득 차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인데 꽤 오래전부터 무슨 기도를 하기보다는
우선 "Ad Sum" "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하느님 앞에 저를 위치시키고,
다음으로는 오늘 사무엘처럼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라고
말씀드려야겠다고 하지만 자주 실패합니다.
사무엘은 어리기에 하느님이 부르시는데도 사람에게 가지만
저는 나이가 어리지도 않고 수도 생활을 한 지 꽤 됐는데도
아직도 기도의 나이랄까 신앙의 나이는 소년 사무엘처럼 어려서
하느님께서 부르시는데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갑니다.
그러니 숫제 나이 더 먹어 시력이 더 떨어지고 청력이 완전히 떨어져
세상사 못 보게 되고 사람들의 말 듣지 못하게 되어야
기도의 나이와 신앙의 나이가 성숙하게 되어
하느님 앞에 있게 되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될까요?
사실 나이 먹으면서 그렇게 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사람들 시선 앞에 있기보다 하느님 앞에 있으려는 의식도 더 하지만
자연스럽게 사람들 시선을 더 중히 보지 않고 그러면서 하느님 앞에
더 있게 되는 요즘이니 어저면 나이 현상인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오늘 사무엘을 보면서
기도의 나이를 더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오늘의 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마귀의 고백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비교하여, 베드로는 사랑의 고백을 했고 마귀는 공포로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며, 그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고 그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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