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2020년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Jesus rebuked him and said,
“Quiet! Come out of him!”
The unclean spirit convulsed him
and with a loud cry came out of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엘리 사제는 한나의 진실한 마음을 보고 안심하고 돌아가라며 위로한다(제1독서).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다(복음).
☆☆☆
오늘의 묵상
회당과 더러운 영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공간, 그리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깨닫는 공간인 회당에 더러운 영에 짓눌린 이가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현실의 당위를 깨뜨리고 있습니다.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해서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다 보면, 낯선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은 이유 없이 커져 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그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더럽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 없는 적대감에 희생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분리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서로를 멸망시킬 듯 날카롭다면 우리는 더러운 영에 취하여 사람다움을 잃어 가게 됩니다.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사람다움의 회복이었고, 사람다움은 이 세상에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무한한 자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그래도 성당에 가고 나서는 너무 좋았습니다. 미사 하는 것이 좋았고, 미사 후에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도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만화영화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으로 가야 할 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싫었습니다. 이렇게 싫었음에도 열심히 성당에 다니다 보니 믿음이 생겼고, 신학교에 들어가 지금 신부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십니다. 성당에 가면 정말로 좋다고 하십니다. 문제는 성당에 가기까지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성당 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왜 이렇게 바쁜 일들이 생기는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사랑하는 다른 것들을 뒤로할 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더 먼저가 되면서 주님이 항상 뒤에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틀린 말입니까? 아니지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고백했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었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사랑이 없으므로 주님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아닌 세상의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서 말하고 있다면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주님의 꾸짖음에서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수영을 신부가 된 후에야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30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수영을 배운 것입니다. 사실, 이 나이에 수영을 새롭게 배운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수영을 배우고자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배우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근처 수영장에 등록했습니다.
첫날, 너무 어색했습니다. 특히 제 또래의 남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킥보드에 몸을 맡겨서 ‘음파’를 반복하며 발장구치는 것도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첫날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하루를 마치고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3개월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영장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향상하지 않아서 걱정되었지만, 어느 시간이 지나자 실력은 향상되었고, 자유형, 평형, 배영, 접영까지 배우면서 그 재미가 점점 커졌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딱 3개월만 참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재미가 있고, 만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도 그렇다고 봅니다. 처음 성당에 나오신 분들은 상당히 낯설어하십니다. 왜 이렇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는지, 미사는 왜 이렇게 지루한지, 교리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러나 딱 3개월만 참아보십시오. 분명히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은 손으로 만져서 판단하게 됩니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길쭉한 줄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하였습니다. 엉덩이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둥근 바구니 같다고 하였습니다. 옆구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벽처럼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지만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선입견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념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행위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겠습니다. 안개가 걷히면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습니다. 편견, 선입견, 이념, 외모, 과거라는 안개를 걷어내면 좋겠습니다.
스웨덴의 정치를 취재한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스웨덴의 정치는 투명하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수당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면 급여를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도 이등석 이상은 타지 못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표를 구한다고 합니다. 식사나 금품을 받으면 반드시 신고하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재정상태를 볼 수 있기에 부정과 불의는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늘 같은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정치는 봉사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도 이런 대답을 하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분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저분의 말과 행동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뭐든지 시켜 먹어! 나는 짜장면 보통!
-양승국신부-
어린 수사님들을 동반하고 교육하는 선생 수도자로 생활할 때였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새싹같은 수사님들의 선생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수도생활에 대한 수업 시간 때 교실 안에서의 제 가르침과 구체적인 제 삶의 모습이 괴리감이 느껴질 때, 다시 말해서 ‘말 따로 행동 따로’ 일때, 어린 수사님의 매서운 눈초리가 채찍처럼 다가왔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청빈의 삶에 대해 가르칠 때는 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혹시라도 부티나는 옷이나 고가의 브랜드 옷은 절대로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피치못할 상황으로 수사님들과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선택은 늘 값싼 메뉴였습니다.
중국집에 들어가면 제가 농담삼아 늘 그랬습니다. “자네들 먹고 싶은 요리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뭐든지 시켜먹어!” 그러면서 꼭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나는 짜장면 보통!” ㅎㅎㅎ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내려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신선하고 명쾌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수 없었던, 장황하고 고리타분해던 종래 종교 지도자들과는 가르침의 내용이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길고 장황하지 않았습니다. 짧고 단순명료했습니다. 애써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뒤가 구리지 않았기에, 촌철살인의 말씀을 가감없이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루하고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가방끈 짧은 백성들의 귀에도 쏙쏙 들어올 쉬우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이 지닌 또 한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었다 함은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삶 속에서 즉시 구체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허언이나 헛된 공약을 남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에 힘과 위로를 얻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권위 있는 가르침
-반영억신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 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백성의 구원을 위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더러운 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러운 영은 하느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디,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일은 사고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그 일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한 다음, 이어서 ‘악마의 추방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곧 인간이 악마의 뀀으로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악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기에, 이제 구세주께서는 악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킴으로써 하늘나라의 실현을 보여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결국 이 첫 구마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마를 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모습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 말씀의 ‘힘’
-송영진신부-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여기서 ‘권위’로 번역되어 있는 말의 원문 단어는 ‘엑수시아’(exousia)인데,
이 말은 ‘권위’ 라는 뜻 외에도 ‘선택의 자유, 권리, 능력, 힘, 권세, 보증, 통치권’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권위’보다는 ‘권능, 능력, 힘’이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것은,
그 가르침에서 어떤 ‘강한 힘’, 또는 어떤 ‘강한 권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어떤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그 ‘힘’이 ‘하느님의 힘’, 또는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제대로 깨달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든 그들은 그 ‘힘’에 압도되었고, 그래서 몹시 놀라고 있습니다.
(‘권위’ 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강론을 하는 이들이, 또는 묵상 글을 쓰는 이들이
자꾸만 ‘권위’를 주제로 삼아서 강론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힘을 권위라고 표현하면
뜻이 많이 애매모호해집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율법 학자들보다 더 권위가 있는 분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율법학자들’을 언급한 것은,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을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힘’은
당시 사람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거나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또 자기가 묵상한 것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식을 과시하는 것일 뿐이라면,
그 가르침에 아무런 힘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힘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것이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뿐입니다.
(요즘에도 흔히 보는 일인데, 자기 묵상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이 쓴 책에서 읽은 말을 인용하거나,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예화집’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인용해서
강론이나 묵상 글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나쁜 경우는, 사서삼경이나 불경 같은 책들에 나오는 일부 구절들을 근거로
성경을 해설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는 그런 책들이 성경보다 더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나쁜 방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1,23-27).”
이 이야기는 ‘예수님 말씀의 힘’을 사람들이 직접 목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에는 그 ‘힘’을 느꼈을 뿐인데,
이제 그 ‘힘’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 힘인지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악령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나간 것은 실제로는 쫓겨난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의 힘’으로 그 악령을 쫓아내신 일입니다.
악령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명령이 하느님의 명령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만일에 악령이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그 악령은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면서도,
뭔가 힘든 일이 생기면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 일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신앙을 스스로 부정하는 죄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이고,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대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힘도 믿어야 합니다.
그 어떤 힘도 예수님의 힘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나 전례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그 말씀의 힘을 받고 있고,
그 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은,
마귀와 ‘마귀 들린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
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과 마귀 들리는 것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귀 들린 사람’이 한 말은,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마귀가 한 말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마귀는 가해자이고, 그 사람은 피해자입니다.
어쩌다가 마귀 들린 상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귀 들리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따라서 ‘마귀 들린 사람’을 함부로 죄인 취급하면 안 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21b-28: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던 것이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 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참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고백하며 따르고 있는가? 생각하며 살도록 노력한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한상우신부-
다시금 기도에
눈뜨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잡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조화와 균형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도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기도와 치유
기도와 복음선포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중심을 찾는
우리들에게 기도들
가르쳐주십니다.
복음선포에는
외딴곳의 쉬어가는
기도의 시간도
아주 중요한 복음의
한 축(軸)이 됩니다.
기도는 기도를
찾아갑니다.
기도가 멀어질수록
복음선포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지탱하게 하는 힘은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힘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의 힘임을
다시금
가르쳐줍니다.
모든 사도직의
중심에는
새벽이고 캄캄한
외딴곳의 뜨거운
기도가 있습니다.
외딴곳의 기도를
따라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대비되는 두 개의 간청을 만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안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이렇게 외칩니다. 세상은 하느님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성 안에 존재합니다. 한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우리 모두는 가시적으로든 비가시적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이러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고립시키는 힘은 악에서 나옵니다. 악은 끊임없이 너와 내가 아무 관계가 없으니 상관 말라고 부추기며 소외와 절망을 퍼트립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제법 옳은 소리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원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런데 존중과 경외심이 들어 있지 않은 앎은 공허하고 자칫 폭력도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께 대한 더러운 영의 외침은 그가 어떤 말을 했든 두려움과 공포가 수선스럽게 표출된 호들갑에 불과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와 확연히 대비되는 간청이 흐릅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1사무 1,11)...
한나의 기도입니다. 그녀는 하느님께 자기와의 관계를 기억해 주시라고, 자기 삶에 들어와 주시라고, 더 강력하게 개입해 달라고 청합니다. 더러운 영이 주님을 관계에서 밀쳐내려 했다면, 한나는 그 관계성에 기대어 호소합니다. 더 깊은 관계를 맺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겁니다.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1사무 1,17).
사제 엘리는 잠시 그녀를 오해하긴 했지만 이내 그녀를 축복합니다. 그녀의 길고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술주정이 아니었다면 하느님과 진정한 관계 안의 간청일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1사무 1,18).
눈물의 기도는 종종 슬픔과 절망을 희석해 줍니다. 거기에 엘리의 격려까지 받았으니 한나는 위로와 확신으로 어둠에서 걸어나옵니다.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1사무 1,20).
주님께서는 한나가 바란 대로 그녀를 "기억해"(1사무 1,19) 아들을 주십니다. 엘리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보답으로 한나는 아이의 이름에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성을 새겨 넣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엘리의 입을 빌어 기도에 응답을 주셨지만, 지금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굳이 다른 목소리를 빌릴 필요가 없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 친히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외침은 그 내용이 아무리 명예롭고 영광스러워도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침묵" 뿐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예수님의 구마 행위에 모두 놀랍니다. 놀람과 경탄은 하느님의 일에 열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더 이상 경이로울 것이 없다면 그의 영혼은 이미 박제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군중의 입에서 나온 "새로움"과 "권위"는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과 맺으실 새 계약을 가리킵니다.
더러운 영은 멀리 있지도 않고 한눈에 알아볼 만큼 흉측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에 대한 해박하고 화려한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주님께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적당히 선을 긋고 내 삶에 너무 깊이 끼어들지 말기를 청하지요.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삶의 가치관과 지향은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지대를 확보한 채 적당히 신자이고 적당히 의인인 듯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궁금하다면, 한나의 기도에서 답을 찾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내게 꼭 필요하다"는 절절한 하소연은 그분과 내가 서로의 가슴을 가르고 들어갈 만큼 친밀하고 간절한 기도이고, 그 자체가 곧 사랑이고 관계입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과 또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고 이 관계의 불편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털어버리는 기도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630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박병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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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은 손으로 만져서 판단하게 됩니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길쭉한 줄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하였습니다. 엉덩이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둥근 바구니 같다고 하였습니다. 옆구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벽처럼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지만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선입견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념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행위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겠습니다. 안개가 걷히면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습니다. 편견, 선입견, 이념, 외모, 과거라는 안개를 걷어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분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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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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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일은 사고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그 일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한 다음, 이어서 ‘악마의 추방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곧 인간이 악마의 뀀으로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악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기에, 이제 구세주께서는 악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킴으로써 하늘나라의 실현을 보여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모습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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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것은,
그 가르침에서 어떤 ‘강한 힘’, 또는 어떤 ‘강한 권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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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던 것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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