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9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2020년 1월 9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카 4,14-22ㄱ)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proclaim a year acceptable to the L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리키는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이 자리, 이 시간에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그럼에도 메시아가 어디 있는지, 은혜가 어디 있는지,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복음을 읽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주어지는 이들을 되짚어 봅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가난한가? 나는 잡혀갔는가? 나는 눈이 멀었는가? 나는 억압받는가?’우리가 외면한 이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은총을 진하고 강하게 체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덩그러니 홀로 있게 되었을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토닥여 준다면, 참 고맙겠지요.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은총은, 삶이 무너진 이들이 받아 누리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잘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허전하고 외로워지지 않습니까? 외롭지 않다며 으스대는 가식의 옷을 벗어 던지고 서로의 손을 잡아 줄 줄 아는 따뜻함이 구원입니다.루카 복음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갑니다.
그 길에는 가난한 이, 다리저는 이, 눈먼 이들이 늘 함께합니다.
우리는 위로받고자 합니까, 위로받기를 부끄러워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참된 은총을 받고자 합니까, 누군가에게서 저만을 위한 거짓 은총을 얻고자 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습니까?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네 입맛을 알겠다. MSG 입맛이구나.”
이 가게의 음식에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서 맛있는 것이지, 특별히 맛집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MSG라는 조미료가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식품 의약품 안전처에서는 이렇게 공식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MSG를 평생 먹어도 안전하다. 식품의 첨가량에 상한선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느 연구자의 논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쥐에게 MSG를 먹이니 이 물질이 뇌로 가서 흥분성 신경전달물질로 작용해서 뇌 신경 세포막을 파괴하고 뇌하수체에 이상을 일으키며 물질대사 및 성장에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학계에서 아주 몰상식한 실험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치면 60kg의 사람에게 무려 500g에 가까운 양의 MSG를 매일 지속해서 먹이는 실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MSG는 소금보다 치사율이 낮고 비타민 B12, 비타민 C보다도 독성이 덜하며,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의한 위 손상으로부터 점막을 보호해주기도 한다는 실험내용이 있습니다.
잘못된 상식이 진실로 호도되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상식이 무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자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른 판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잘못된 판단이 아닌 올바른 판단, 자기의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신원을 먼저 밝혀주십니다.
그분은 부유한 사람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셨습니다. 이로써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을 이 주님의 뜻을 보지 못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고, 억압받는 이들의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장차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됨.’
성적표에 담임선생님께서 이런 짤막한 의견을 써서 학부모에게 보냈습니다. 이 학생의 어머니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남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단다. 남과 같아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니?”
많은 아이를 지켜본 선생님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에 반해 어머니는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았을까요?
성적이 엉망이고 뭐 하나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아 선생님의 끔찍한 평가까지 받았던 이 아이는 훗날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 역사 안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는 물리학자가 됩니다.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것에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인간의 평가는 절대로 정확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훗날을 믿어주며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의 성령의 작용을 보지 못하는 것이 교만이다.
-전삼용신부-
하는 일마다 잘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으면 우리 마음은 마치 돼지비계처럼 교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젊은 나이게 자수성가한 어느 청년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마음에 도취되었습니다. 가난한 어머니에게 집도 사 주고 차도 사주고 이젠 비싼 옷을 사드리기 위해 백화점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아들이 기세등등하게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우리나라에서 지금 제 나이에 저만큼 성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가난하게만 살아왔던 어머니는 잠시 생각한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어미가 못 배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숫자보다는 한 명이 적을 거다.”
‘라이언 홀리데이’의 「에고라는 적」은 과거의 성취에 우쭐해 있다가 그 교만으로 망하고 나서야 교만이라는 적을 조심해야 한다는 글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미국의 기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이른 성공은 그의 에고와 자만심을 자극했지만 그는 에고를 극복하기 위한 독특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밤을 새워가면서 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지금 막 일을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니 네가 지금 굉장한 인물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흥분해서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냥 지금처럼 꾸준하게 나아가라.”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교만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에고에 잡아먹혀 더 이상 숨 쉴 수도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노력으로만 두 발로 걷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두 발로 걸을 수 없습니다. 늑대에게 키워졌으면 두 발로 걸을 수 없을뿐더러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한다면 부모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준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불효이고 교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 또한 하느님 자녀로서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자신의 힘으로 신앙을 지니게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 사제가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 멋진 성전을 건축하였다고 믿는다면 그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사랑인 성령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조차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은총이 넘쳤는데 그 이유는 그분 안에 성령의 은총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하시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공로를 성령을 내려주신 아버지께로 돌리고 계신 것입니다. 내 안의 성령의 작용을 보기만 한다면 그것 자체로 성령을 주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느끼는 겸손한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동차에서 연료의 작용을 아는 사람과 같습니다. 연료게이지에 민감하여 항상 때가 되면 주유소로 향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작용에 민감한 겸손한 사람은 기도에 목숨을 겁니다.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로 자신의 모든 능력은 성령을 통하여 나오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그러면 겸손한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꽃동네 후원의 밤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아이티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과 수녀님이 오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사랑하면’이라는 말로 영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부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후원의 물품이 상자로 왔다고 합니다. 상자를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변한다고 합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정상으로 자라는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외국말도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수녀님이 한국말을 하는데도 아이티의 아이들은 다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이티의 꽃동네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아프고 병든 아이들이 약을 먹고 치유된다고 합니다. 사랑이 있으니 희망의 꽃이 피어난다고 합니다. 꽃동네는 꽃이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꽃동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동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요한 사도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아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어릴 때, 연탄을 갈면서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시인은 연탄 하나를 가지고도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 냅니다. 연탄구멍을 잘 맞추어야 하고, 적당한 때에 새 연탄을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온몸을 뜨겁게 달구어 새 연탄에 불을 붙여 주고, 자신은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려지는 것이 연탄입니다. 하지만 연탄은 방안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예전에는 연탄불에 음식도 해서 먹었습니다.
미아리에 있는 ‘성가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료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병원이 곧 문을 닫을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그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진료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으며, 독지가들이 약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등포에 있는 요셉의원도 3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을 위해서 무료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나눔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서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국회에서 좋은 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법부가 공정한 판결을 내려서 세상을 정의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존의 그늘을 밝게 비추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나눔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반영억신부-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갈릴래아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경신례를 바치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작은 마을까지 퍼져있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계시다”(1베드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여전히 주님 공현 후 주간 안에서, 주님의 현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은 그 “하늘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마치, 창조 때 하느님께서 “~(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9.11.15.24.30)라고 하시며 말씀을 이루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말씀을 이루시는 구원자로 당신을 선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이루는 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서는 진리에 나아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곧 진리를 이루지 않고는 진리에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길은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랑을 실행하지 않고는 사랑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미 그 사랑을 입은 까닭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9-21)
그래서 우리는 잠시 후에, <예물기도>를 이렇게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침으로써, 저희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 받은 것, 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안에서 현현하실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말씀의 영으로 저를 도유하소서!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제 입에 당신 말씀을 담게 하소서!
제 발 인도하시고, 제 삶이 당신 말씀을 떠받들게 하소서!
들은 바를 살게 하시어, 듣는 가운데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참 기쁨’이신 예수님
-송영진신부-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기쁜 소식’은 듣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은, ‘참 기쁨’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이고,
동시에 ‘참 기쁨’을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참 기쁨’을 얻는 방법을 믿고 그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고,
그 기쁨을 얻어 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참 기쁨’을 얻을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을 갖는 일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참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듣는 일 자체가 ‘기쁜 일’이 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기쁜 소식’은 먼 훗날에 이루어질 기쁨을 알려 주는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쁨을 알려 주는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기만 하는 ‘소식 전달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참 기쁨’이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참 기쁨’이십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듣는 사람 쪽에서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을 뜻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듣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또 믿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잘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면 그것을 구경만 하지 말고 먹어야 합니다.
밥상에 잘 차려진 음식을 먹는 일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지침들입니다.
그 지침들을 제대로 실천해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는다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로마 2,6-7).”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을 안 지킨다면,
그 고백은 거짓 고백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일은,
죄와 죽음의 억압과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길을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그 길을 알려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해방과 자유를 얻는 열쇠입니다.
그 열쇠는 죄와 죽음이라는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 열쇠를 주신 일은 참된 해방과 자유를 주신 일이고,
‘큰 기쁨’을 주신 일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은,
그 열쇠를 받아서 감옥 문을 열고 감옥에서 나가는 일입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해방과 자유를 얻어 누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욕심’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남들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독점하려고 하고......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2).”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참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세속의 어떤 것을 갖기를 원하다가 그것을 마음껏 차지할 때 얻는 기쁨은,
기쁨이 아니라 허무한 즐거움이고, 속된 쾌감일 뿐입니다.
‘참 기쁨’은 속되고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먼 이들’은 진리를 찾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거나,
누구에게서 얻을 수 있는지를 모르거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 또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과 생명의 진리이신 분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고, 이 깨달음은 큰 기쁨이 됩니다.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말하는 깨달음은 불교의 깨달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충실한 신앙생활을 할 때 얻게 되는 참된 기쁨, 평화, 행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은 안 읽고 다른 책들만 읽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하지 않고 다른 종교의 수행 방법만 따라 하고,
그러면서 점점 더 진리에서 멀어지고, 결국 기쁨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4,14-22: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사탄을 힘차게 물리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능력과 권위를 떨치며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백성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분은 성령의 힘을 당신 힘과 권능처럼 사용하심으로써 찬미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펼쳐 당신에 관한 예언 이사 61,1-2을 읽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18절).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잡혀간 포로들이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18절) 하려고 오셨다.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눈먼 이들이 앞을 본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잡혀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18절)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절) 그 때는 우리가 눈을 더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이다. 즉 주님의 때, 주님의 은혜의 때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으시자,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읽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분을 보고 있다. 그 때,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시며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이가 바로 당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심으로써 그 말씀을 현실화 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난하고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들도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잡혀있는 자들을 풀어 주시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셨다. 그분은 죄 때문에 가슴이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장차 생명을 주실 것이며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루심으로써 이사야서를 완성하셨다면, 그리고 이사야와 만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냄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참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을 체험케 하는 그리고 그분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한상우신부-
은총의 말씀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늘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의 길은
말씀의 길입니다.
이끌고 밀어주는
주님의 말씀에서
오늘의 길을
찾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걸어가야
할 우리의 길을
만들어줍니다.
오늘을 위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기쁨은
오늘의 말씀안에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과
우리를
연결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이루십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르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넷째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사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한처음 시간이 생기기 전, 말씀은 하느님이셨네. 그 말씀이 세상의 구원자로 태어나셨네"(입당송).
이처럼 입당송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시던 말씀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심을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구원자(고엘)'는 가난한 형제의 빚을 대신 갚아 주거나, 형제의 넘어간 토지를 되사서 돌려 주는 이, 후손을 이어주고, 피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이를 가리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루카 4,14).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사십 일 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루카 4,1)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같은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이사 61,1-2)을 인용해 당신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이 사명의 완성이 곧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의 도래입니다. 희년에는 제 소유지를 되찾고 거룩히 지냅니다(레위 25,8-13 참조). 모든 것은 잃고 무너지고 손상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처음 주셨던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사실 이 말씀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도래와 희년을 동일시하신 것이니까요. 주님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메시아로서 해방과 치유, 되살림과 되찾음, 기쁜 소식의 주체가 곧 당신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이스라엘이 지켜오던 구원자(고엘)의 의무들을 넘어섭니다. 이는 영성체송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영성체송).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화폐가 아니라 당신 생명을 지불해서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구원입니다.
제1독서는 사랑의 사도 요한의 편지답게 계속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형제와 이웃을,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골자로 짚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렇듯 한 뿌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명은 전부,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해 있으며, 그들의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위로해 드리는 일이라고 역설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빼앗기고 억압 당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모상성을 회복하도록 새 출발선을 마련해 주는 일, 새 도화지를 펼쳐 주는 일이 곧 예수님의 사명이자 희년이신 분의 아버지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당신의 사명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그분 존재가 곧 희년이시기 때문이고, 또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듣는 이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치유와 해방, 기쁨과 자유의 실타래는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이미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지방에"(루카 4,14)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루카 4,15)
"모든 사람의 눈이"(루카 4,20)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루카 4,22)
오늘 복음 대목에서는 "모두, 모든"이라는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 네 차례나 등장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의 과장이 포함된 표현이기도 하지만 전체성을 염두에 둔 의도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이 "모두, 모든" 안에는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또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와 미래의 인류까지, 잠재적 하느님의 자녀들 전부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두의 눈앞에서 구원자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희년을 7년이 일곱 번 반복된 후 맞는 50년째 해를 가리킵니다만, 우리는 숫자보다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계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은 저마다 희년을 맞아,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열리면 주님께서 나의 어떤 부분에 치유와 해방, 기쁨과 자유를 선사해 주시길 바라십니까? 아마 저마다 다르겠지요.
잠시 숙고해 보시고 주님 앞에 그 부분을 펼쳐 놓은 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 부분에 깊이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귀를 뚫고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고 영혼에 번져갈 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시는 단호한 선언이 여러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 해방을 얻고 자유로워져 마음껏 행복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래도 미친 사랑을 꿈꾼다.
-김찬선신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한다는
것을 당연한 듯이 얘기하는데 실제 우리 삶을 보면 부모는 사랑하면서
형제와는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서간의 말씀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경우 형제만 사랑치 않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사랑치 않는 겁니다.
아무도 사랑치 않고 자기만 사랑하는 것이거나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시면서 세리나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경우를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이 경우 부모는 자기를 사랑하기에 사랑한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경쟁하는 형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진정 부모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이 아니라
부모중심으로 사랑한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부모가 사랑하는 다른 자녀들,
곧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극단적인 비교를 한다면
반려견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는 사랑한다면서
내 반려견을 몹시 싫어하고 심지어 학대까지 한다면
그가 사랑한다거나 존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 진정 사랑이라면,
사랑이 진정하면 할수록 좋아하는 것과 달라야 합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사랑하면 할수록 싫은 것을 초월합니다.
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싫은 것을 수용함으로써
또는 좋은 것을 희생함으로써 그를 위한 사랑이 더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사랑하기에 싫은 것이 좋아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미친 현상이요 사랑에 미친 짓이지요.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바라던 식사였습니다.
그와 식사하는 것만으로 너무 황홀하고 영광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만남이기에 나는 그의 식성을 알지만
그는 나의 식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더 사랑하는 내가
그에게 선택권을 줬는데 내가 평소 싫어하는 것을 그가 선택합니다.
그래도 나는 그 선택에 기꺼이 '예스' 합니다.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먹는 것은 뭘 먹어도 좋은 것입니다.
이 정도가 돼야 나의 '좋고 싫음'을 초월하고,
내 중심성을 초월한 진정한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랑의 경지는 도달하기 쉽지 않기에 욕심부릴 수는 없고,
조급하게 성취할 수도 없지만 나의 목표로 삼을 수는 있겠지요.
하느님 사랑을 포함하여 나의 모든 사랑이 이런 경지에 오르게 되기를
바라며 빌어마지않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4-22ㄱ)
아이가 자신의 노력으로만 두 발로 걷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두 발로 걸을 수 없습니다. 늑대에게 키워졌으면 두 발로 걸을 수 없을뿐더러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한다면 부모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준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불효이고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조차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은총이 넘쳤는데 그 이유는 그분 안에 성령의 은총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하시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하십니다.
-전삼용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