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6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2020년 1월 6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코 6,45-52)
When they saw him walking on the sea,
they thought it was a ghost and cried out.
They had all seen him and were terrified.
But at once he spoke with them,
“Take 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제1독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놀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시고 풍랑을 멈추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다!”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신앙이 본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나다!”라는 예수님 한 말씀이면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체로 오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의 이웃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만나시는데 우리는 왜 이리 부족함을 느낄까요.호수의 맞바람을 이겨 내며 노를 젓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봅니다.
애를 씁니다.
땀이 납니다.
그만둘까 고민도 해 봅니다.
바람이 멎거나, 아니면 바람을 이겨 낼 초인적 힘이 주어지거나.
이러한 잡다한 생각들로 노 젓는 일이 더욱 힘겨워집니다.자기 삶에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껴진다면, 넋을 잃고 헤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줄곧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고수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을 예수님께 투사시켰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예수님을 보기보다 영광 속의 멋진 예수님을 그려 나갔던 제자들은 늘 넋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부족한 마음은 채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행복하려고, 성공하려고, 이런저런 자기 계발서들을 읽는 우리의 노력이 커질수록, 우리의 결핍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부족한 마음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이웃을 있는 그대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망상 때문입니다.
혼자 애쓰고 노력하고 다듬는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함께 나누고 보듬고 채우면 세상은 놀랍게도 풍요롭고 행복해진다는 사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묵상해 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되면 절대로 상대하지 못할 적으로 돌리고 있으며, 자신의 이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마치 원수 보듯이 여깁니다.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어렸을 때 한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떠올려 보면 별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그 친구가 틀린 것이고 그래서 당연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친구와 저를 선생님께서 발견했고, 저희는 선생님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화해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친구끼리 싸우면 어떻게? 서로 손 잡고 화해해.”
억울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악수하고 화해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얘가 잘못했는데 왜 화해해야 해요?”
저는 친구가, 그리고 친구는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어린이의 미성숙한 마음으로 지금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똑같은 사람이니까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으며, 그냥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안 될까요?
제자들은 밤새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풍랑과 맞바람으로 정상적으로 노를 저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목적지인 건너편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사실 제자들의 예전 직업 중에서 어부가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물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당황스러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자신의 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힘든 상황, 그래서 당황스러운 상황에 자주 빠지는 우리입니다. 그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느 형제님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아내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자신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고, 이 사랑에 의해 자신은 이용당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남자가 그것도 이해 못 해줘?”라면서 화를 내면 할 말이 없어진답니다. 반박하면 “남자가~~”라고 시작하는 폭탄을 받게 됩니다. 왜 나만 사랑하고, 왜 나만 이해해야 하느냐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이런 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역시 많이 겪게 되는 일입니다.
나만 사랑하고 있고, 나만 이해해야 하는 현실이 싫다는 말인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배우자 역시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사랑은 동등하게 작용합니다. 처음에는 나만의 손해인 것 같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긴 시간을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동등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나만 이해해야 한다는 현실이 사랑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러나 손해 보는 것은 나만이 아니고, 상대방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면 무엇인가가 보이게 됩니다.
사랑이 보입니다.

두려움을 놓아두면 용기가 잡아먹힌다
-전삼용신부-
한나라의 궁궐엔 수천 명의 미인들이 왕을 위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왕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며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인들은 왕이 자신을 찾도록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왕이 혼자서 그렇게 많은 미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 줄 수는 없는지라 왕은 황실 화가로 하여금 후궁들의 모습을 그려 바치게 했습니다. 후궁들의 운명은 자연 화가의 붓 끝에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궁들은 앞을 다투어 화가에게 뇌물을 바쳐야했습니다. 돈 맛을 본 화가는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후궁들의 아름다움을 조작하였습니다.
어느 해의 일입니다. 한나라의 왕 원제는 외교상의 필요에 의하여 그 당시 걸핏하면 자기 나라 변경을 어지럽히는 흉노족의 왕 호한야 선우에게 후궁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물로 주기로 하였습니다. 왕은 화가가 그려준 그림을 토대로 가장 밉게 생긴 그림의 후궁을 골라서 흉노족의 왕에게 선물로 주기로 했습니다. 흉노족의 사신에게 그 후궁에 대해서 입이 마르도록 거짓 칭찬을 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러 인사차 들러 후궁을 보고는 왕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서고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바로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소문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수군이었습니다.
왕은 아깝고 절통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황제라는 체면과 이미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에 고스란히 주고 말았습니다. 뇌물을 받아먹고 사심의 마음으로 붓을 휘둘러 최고의 미인을 고의로 추녀로 그려낸 황실 화가가 무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화가 모연수는 그날 부로 목과 몸뚱이가 분리되는 참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책에 기록된 역사라고 합니다.
[출처: ‘화가 모연수의 거짓 그림’, Lectio Divina, https://lectio.tistory.com/603]
모연수는 돈에 집착하여 거짓 그림을 그렸습니다. 집착하면 그 집착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의 감정이 발동합니다. 사람은 두려움에 조종당합니다. 두려움에 조종당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면 하느님을 모실 공간이 사라집니다. 모연수는 집착에서 오는 두려움의 감정을 간파하고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어야합니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바람에 맞서 노를 젓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고 말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의 놀라고 두려운 반응을 부각시키며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란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나다!”라고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과자였던 장발장은 과거를 숨기기 위해 새로운 이름으로 어느 지방 도시의 시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한 노인이 수배 인물 장발장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가?’
그는 벽장 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심한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재판정에서 판사의 언도가 내려지려는 순간 장발장은 일어서며 당당히 소리칩니다.
‘내가 장발장이요!’
장발장은 자신을 대신하여 처벌을 받을 뻔한 노인을 위해 명예와 권세를 모두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집착이 없어야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사람이 두려움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주방 싱크대의 수도꼭지와 샤워실의 샤워 꼭지를 교체했습니다. 수도꼭지는 잡아당기면 줄이 나오는 거로 바꾸었습니다. 설거지하고 난 후에 싱크대 정리가 편해졌습니다. 수압이 약해서 샤워하기 불편했는데 새 꼭지를 다니 수압이 좋아져서 샤워도 편해졌습니다. 작은 변화지만 관심을 가지면 보이고, 보이는 건 바꿀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보았지만 측은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축복하셨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나누었더니 배고픈 사람이 다 먹고도 넉넉하게 남았습니다. 기적과 표징은 관심과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순례하면서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건강입니다. 자신의 몸 상태는 본인이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평소에 먹는 약이 있다면 잘 챙겨 먹도록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시간입니다. 적어도 10분 전에는 약속된 장소에 나오도록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잘 지켜지는 순례는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소지품입니다. 매일 이동하기에 소지품 관리가 중요합니다. 여권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는 넉넉한 마음과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버스로 이동할 때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넉넉한 마음입니다. 숙소에 도착할 때 버스 안에 있는 짐을 내려 주는 건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이웃에 대한 배려는 순례를 풍요롭게 합니다.
순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내면서 순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이 보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가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보입니다. 엘리사벳과 만나는 마리아의 모습도 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을 받으시는 나자렛 예수님의 성가정도 보입니다.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던 언덕이 보입니다.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던 마을도 보입니다. 그물을 더 깊이 던지라고 하셨던 갈릴래아 호수도 보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의 수건도 보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라고 말씀하셨던 바위도 보입니다.
지난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하지만, 잘못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그런데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아직도 나를 기다려 주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자캐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와 그 가정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을 받아주시고,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성전 문에 있는 글은 순례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반영억신부-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뒤에 오실 분을 소개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요한3,29).하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자기의 소명, 분수를 명확히 알았고 그에 맞는 처신을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 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마라
-이영근신부-
주님 공현 후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건네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바람과 풍랑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요한 6,20)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주님이신 예수님
-송영진신부-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7-52).”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이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라는 증언입니다.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은 곧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욥기 9장 8절에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본 뒤에는 욥기의 이 구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을 멎게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저절로 바람이 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멎게 하셨습니다.)
이 일도 예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여기서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라는 말은,
오해하기가 쉬운 말인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도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나가다.’ 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탈출 33,19; 1열왕 19,11).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제자들의 상황과 그들의 모습입니다.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의 모습은,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고,
예수님 없이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 제자들의 그런 모습에서, 물고기를 잡으러 가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모습이 연상됩니다(요한 21,3).
신앙인은 예수님과의 연결이 끊어져 있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특히 자기 스스로 떨어져 나가면 모든 위협에 대해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잘 유지하는 것, 그리고 항상 예수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과 떨어져 있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45절) 당신은 혼자 뭍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자들이 떨어져 간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시에 의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이 떨어져 있다고 해서 마음까지 멀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함께 있으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몸이 함께 있어도 마음이 멀어져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말은,
육안으로 보셨다는 뜻은 아닐 것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항상 제자들(신앙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고,
제자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고, 제자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리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어떤 물체를 보았고,
그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유령이 다가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렸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인 줄을 모르고 유령 때문에 겁에 질렸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유령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을 크게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유령 따위를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긴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귀신이나 유령 같은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섭더라도 믿음으로 그 무서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그런 것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귀신이나 유령은 믿음이 강한 사람을 해치지 못합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 외에도 우리가 무서워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실감...... 그런 일들을 모두 포함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 등이
우리를 짓누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필요한 것이 ‘주님이신 분’에 대한 믿음이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그런 모든 것들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것들이라도
예수님께서는 ‘주님으로서’ 그것들을 지배하시고, 복종시키시는 분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모범이 되는 사람은 어떤 백인대장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마태 8,8-9).”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또 모든 일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6,45-52: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 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셨다. 낯선 사람처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시니까,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고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바로 주님께서는 도와주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치려 하신 것이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바로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또한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의 모습에서 그들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하겠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45)
-한상우신부-
예고 없이
찾아 오는
풍랑의 시간입니다.
견디어 낼 수
있는 만큼의
풍랑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파도처럼
부딪히며
깨닫게되는
우리들 삶입니다.
지나가야 할
풍랑의 시간입니다.
풍랑을 통해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잊고 산 우리들을
보게됩니다.
용기를 주시는
믿음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풍랑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어찌할 수 없는
풍랑의 시간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믿음으로
데려가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풍랑속에서도
용기 있게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오상선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셋째 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 드러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마르 6,46).
오천 명 이상의 군중과 함께했던 시간을 보내신 후,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하시기 위해 산으로 가십니다. 세상과 인간 실존을 향한 연민으로 한껏 헤집어졌던 마음을 아버지 안에서 다시 그러모으고 오롯이 그분과 하나되기 위함입니다. 이때는 하나이신 아버지 안에 잠겨드는 본향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겁니다.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마르6,47).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홀로"라고 기술합니다 아마도 사람으로 북적이던 시간에 비해 "혼자"이시고, 제자들이 곁에 없기에 "혼자"라고 표현했을 겁니다. 이렇게 지금 예수님은 인간의 눈으로는 "홀로"지만 성삼위 하느님 안에 충만하십니다. 그분은 "혼자"이되 "혼자"가 아니십니다.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마르 6,48).
뱃일에 익숙한 장정들이 호수 위에서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호수인데도 예수님께서 비로소 그들을 향해 움직이신 "새벽녘"까지 호되게 고생을 하게 되지요.
인간이 아무리 과학과 기술, 경험과 지혜로 무장하고 자연을 통제하려 해도 천재지변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은 인간에게 호의적이고 관대히 자원과 식량과 아름다움을 베푸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때로는 낯빛을 바꾸어 인간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닥친 풍랑이 그 작은 예가 되겠지요. 게다가 지금은 스승이 함께 계시지 않는 순간이니 그들은 주님의 부재를 처절히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르 6,48).
제자들이 빠진 곤경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십니다. 이 방향성의 원천은 방금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사화의 원천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 곧 연민의 사랑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우선 그들의 두려움을 진정시켜 주시려는 겁니다. 아직 풍랑은 여전하지만 예수님께는 사람이 먼저입니다. 아마 바람부터 먼저 멎게 하셨으면 굳이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아도 제자들이 스스로 안정을 되찾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자들이 말씀의 위력을 깨닫는 데는 느렸을 겁니다.
살다 보면 가슴을 옥죄는 두려움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한 자각과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 되기도 하고, 외부적 폭력이나 위해 등으로 겪게 되기도 하지요. 두려움이 질서를 찾으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지지만 때로는 인간 정신을 분열시키고 해체시키기도 하는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르 6,51).
그분은 당신 말씀으로 마음을, 당신 현존으로 만물을 가라앉히십니다. 배는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가정을 비롯해 다양한 신앙 공동체 안에 어려움과 분열, 그로 인한 두려움이 없을 수 없지만 주님의 말씀과 현존은 이 모두에게 질서를 되찾아 주는 힘입니다.
제1독서에서 서간 저자의 사랑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인간이 쉽게 쓰는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는 사랑 아닌 것도 불순물처럼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집착도 사랑이라 하고 욕정도 사랑으로 포장하기도 하지요. 저마다 제 입장에서 사랑을 해석하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서 서간의 저자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불안과 두려움, 수치심과 이기심이 범벅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16 참조).
우리를 둘러싼 현실 안에 사랑인 것과 사랑이 아닌 것이 함께 출렁이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아닌 것들이 공존한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를 평화와 기쁨으로 이끄는 선한 힘과, 두려움이나 절망으로 끌어가는 악의 힘도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인간의 실존입니다.
정신의학적 치료가 시급히 요구되는 차원이 아닌, 보통의 정상 범주에 속하는 차원에서 볼 때, 두려움을 다루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해법은 "말씀"임을 오늘의 복음은 보여줍니다. 말씀에는 출렁이다 못해 우리를 전복시킬 만한 위력으로 영혼을 들쑤셔대는 악을 쫒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내면에 들어오셔서 힘을 발휘하시도록 문을 여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출렁거리며 두려움을 야기하는 무질서와 악에는 주님의 현존이 해법입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 당하는 고통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말씀과 성체로 다가오시는 주님 현존 안에서 안팎으로 평온을 되찾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주인이 그걸 원하시니 무엇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랑의 성숙과 그 완성
-김찬선신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어제 요한의 서간에서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봤고,
그러므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랑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 사랑의 씨를
지니고 있는데 그러나 그 씨는 우리 안에서 성장해 완성돼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미성숙에서부터 성숙을 향해 가는 것이며 그러므로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사랑의 완성이란 완전한 성숙의 줄임말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 미성숙에서부터 차츰 완전한 성숙에로 나아가 그런 것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서간은 완성된 사랑을 두 가지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먼저 두려움이 없는 사랑을 보겠습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그 자체로 사랑이 없다는 표시인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좋고 싫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좋아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기에
싫어하는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사랑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기애에 갇힙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 문 걸어 잠그듯 싫어하는 사람이 내 사랑 안에 들어올까
두려워 사랑의 문을 잠그기 때문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을 하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자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로 하여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다음으로 이런 두려움의 사랑은 아니지만 욕망의 사랑을 하는 것도
두려움의 사랑 못지않게 미성숙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욕망이란 것이 본래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기에 애정결핍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에는 늘 욕망의 그늘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사랑하는 것이기에 사랑의 동기가 불순할 뿐 아니라
그래서 결과도 원하는 만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결핍이 늘 있거나
집착적 사랑으로 인해 결국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다음으로 서로 사랑을 하지만 서로만 사랑하는 사랑도 미성숙합니다.
서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배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의 공동체는 공부도 하고 수도원회의도 했는데
공부 중에 공동체 안에서 조심해야 할 특별한 사랑에 대해 나눔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끼리끼리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더 잘 통하는 형제들끼리 영적인 나눔을 하는 것이 더 큰 사랑에로
발전하고 확장되는 것에 이바지한다면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좋은 거지만
다른 사랑을 배제하고 더 나아가 자기들끼리 힘을 형성하는 사랑은
미성숙한 사랑 정도를 넘어 해로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런 사랑에는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남녀가 처음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빠지면 부모도 보이지 않듯이
서로만 사랑하기에 하느님도 배제하고 하느님 사랑도 배제하지요.
그러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서로의 사랑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면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는 사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Deus Meus, Omnia!', 곧 나의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45-52)
“나다!”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신앙이 본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나다!”라는 예수님 한 말씀이면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체로 오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의 이웃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만나시는데 우리는 왜 이리 부족함을 느낄까요.호수의 맞바람을 이겨 내며 노를 젓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봅니다.
애를 씁니다.
땀이 납니다.
그만둘까 고민도 해 봅니다.
바람이 멎거나, 아니면 바람을 이겨 낼 초인적 힘이 주어지거나.
이러한 잡다한 생각들로 노 젓는 일이 더욱 힘겨워집니다.자기 삶에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껴진다면, 넋을 잃고 헤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줄곧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고수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을 예수님께 투사시켰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예수님을 보기보다 영광 속의 멋진 예수님을 그려 나갔던 제자들은 늘 넋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부족한 마음은 채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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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사가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의 놀라고 두려운 반응을 부각시키며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란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나다!”라고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과자였던 장발장은 과거를 숨기기 위해 새로운 이름으로 어느 지방 도시의 시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한 노인이 수배 인물 장발장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가?’
그는 벽장 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심한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재판정에서 판사의 언도가 내려지려는 순간 장발장은 일어서며 당당히 소리칩니다.
‘내가 장발장이요!’
장발장은 자신을 대신하여 처벌을 받을 뻔한 노인을 위해 명예와 권세를 모두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집착이 없어야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사람이 두려움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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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보았지만 측은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축복하셨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나누었더니 배고픈 사람이 다 먹고도 넉넉하게 남았습니다. 기적과 표징은 관심과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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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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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8절에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본 뒤에는 욥기의 이 구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을 멎게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저절로 바람이 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멎게 하셨습니다.)
이 일도 예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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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있다면 그 자체로 사랑이 없다는 표시인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좋고 싫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좋아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기애에 갇힙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 문 걸어 잠그듯 싫어하는 사람이 내 사랑 안에 들어올까
두려워 사랑의 문을 잠그기 때문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을 하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자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