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Margaret K 2020. 1. 4. 20:12

2020 1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1-12)


Behold, magi from the east arrived in Jerusalem, saying,
“Where is the newborn king of the Jews?
We saw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do him homag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 영광의 빛을 향하여 올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다른 민족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제2독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고 예물을 바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나심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신앙인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반가운 일일 테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아닐 테지요.
동방 박사의 등장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 안에서, 또 믿지 않는 이들 안에서 상당한 혼란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유다 문화를 모르는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 한 말은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유다인들의 임금”, 이 말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잡고 있던 헤로데에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유다인들의 임금은 헤로데여야 하였지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헤로데에게 그들이 예로부터 기다린 메시아 신앙을 짚어 줍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 그곳에서 참된 통치자가 나와야 한다는 신앙 고백은 헤로데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지요.예수님의 등장은 마냥 좋은 것만도,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사회에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지요.
돈이 많고 힘이 세고 명예를 중시하는 계층일수록 세상을 바꾸는 데 소극적입니다.
지금 이대로가 편하니까요.
반면에 돈이 없고 힘이 없어 내세울 자랑거리 하나 없는 계층은 늘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세상,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속에 서로의 ‘다름’을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것에 눈이 멀어 다른 이의 처지를 읽어 내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다양한 세상’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에만 갇혀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은 참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예수님의 공현은 결국 ‘내’가 ‘우리’ 안에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또 다른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빛을 찾아가는 이들

-손희송주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느껴보려고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지금은 편리한 교통수단 덕분에 큰 힘이 안 들지만, 과거에는 도보로 고생고생하면서 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없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멀고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그 멀고 험한 여정을 거쳐 예수님을 만나는 세 명의 동방 박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멀리 동방(아마도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까지 와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뵙고 경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황금은 왕에게 바치는 예물로서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제사 때 사용되는 향료인 유향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인정하는 표징입니다. 몰약은 시신에 바르는 방부제로서 예수님이 참 인간이시며 우리를 위해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예고하는 상징입니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하느님을 향한 열망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빛이신 그분만이 우리 내면의 어둠과 주변의 암흑을 몰아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빛 안에서만 믿음과 희망, 사랑이 가득한 ‘나’로 성장하고 ‘우리’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수님께 예물로 바치면 좋겠습니다. 황금을 바치면서 돈, 명예,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의 참된 임금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기를 소망합니다. 유향을 바치면서 내 자존심, 내 생각, 내 상처,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참 하느님으로 섬기기를 기원합니다. 몰약을 바치면서 참 인간이신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욕심, 바람, 생각,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받드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과 교회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래로 인간에게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심’(창세 3,5 참조), 곧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이 세상의 중심이 되려는 경향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합니다. 신앙인은 이런 유혹을 거슬러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끊임없이 애써야 합니다.

세상과 이웃, 나 자신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주인이 되시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변질될 위험이 큽니다. 하느님이 빠지면 신앙은 독선으로 흐르고, 정의는 폭력으로 변질되며, 아름다움은 천박해지고, 지식은 혐오스럽게 되기 쉽습니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태양이 비칠 때 영롱한 빛깔을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만 그 의미와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 빛을 찾아가서 그 안에 머무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성 요셉! 당신처럼 말없이

-장재봉신부-


오늘 복음은 매우 특별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분의 탄생을 미리 예견했던 예지, 그분을 뵙기 위해서 단호히 길을 나섰던 결단력,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낸 동방 박사들의 인간 승리 이야기이니까요. 그런데 다른 복음서와 달리 박사들이 경배를 드린 장소가 ‘집’이라고 기록된 사실이 눈에 띕니다. 어쩌면 하느님 아들의 출생 장소가 짐승의 외양간이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파서 ‘집’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도 같지만, 위로가 되는군요.

하지만 그날 마리아의 순산을 위해서 제일 속을 앓으며 애썼을 요셉 성인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는 게 아쉽습니다. 복음이 일러주지 않는 요셉 성인의 삶을 추억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느닷없는 생각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을 잘 일깨우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해줄 것만 같은 겁니다. 드러나지 않게, 평생을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던 요셉 성인의 삶이야말로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을 가졌는지, 선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글이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께도 기쁨이시길 청하며 성 요셉의 삶을 묵상합니다.

마리아의 잉태 소식은 요셉의 일상을 완전히 뒤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때에 혹은 어느 순간에 무어라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요셉은 언제나 어떤 일에서나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만 집중하여 살았다는 증거라 싶은데요. 말 많고 탈 많은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헤아려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일러주는 듯 보입니다.

보이치에흐 게르손의 ‘아기 예수를 안은 성 요셉과 성녀 안나’.


솔직히 약혼녀의 임신 소식을 접했던 요셉의 고민은 깊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전해준 것만으로 요셉의 고뇌가 해결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의 혼돈은 사라졌다가도 반복되기 일쑤이니 말입니다. 번민은 순간마다 때마다 요동치며 마음을 들쑤시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말입니다. 요셉에게 천사의 발현은 성가정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신호에 불과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때부터 요셉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키우는 과제는 매일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여 더 고단한 일상을 살게 했을 것이니까요.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눈총과 수군거림이 평생 따랐을 것도 같은데요. 이렇게 말이죠! “요셉이 순해 터져서 멍청해. 속았어 속았어…”라는 소문도 따랐을 법하고 “마리아한테 빠져서 정신이 나갔어…”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제아무리 성령의 뜻을 확신하고 따르는 길일지라도 향기로운 꽃길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진리를 건네줍니다. 오히려 믿음이 굳건해서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주님의 뜻을 앞세우는 탓에 비방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믿음으로 세상의 조롱이 치워지지 않는다는 것, 손해를 막아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숱한 속앓이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일깨움 받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나 혼자, 제대로 믿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 신비의 것임을 명심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아기 예수님이 구유가 아닌 ‘집’에서 태어나셨다고 기록해 준 마태오 복음사도가 고맙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구유에 누어야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겸손이 아니라 인간의 매정함에서 비롯된 결과였으니까요. 그날 예수님은 얼마든지 깨끗하고 따뜻한 곳에서 태어나실 수가 있었을 테니까요.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순산을 도우려 무진 애를 썼을 것입니다. 여관이나 여염집을 가리지 않고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그 날에 저지른 인간의 과오는 어떤 보상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뵈오며 단단하고 딱딱한 우리의 인색함을 사죄드리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여깁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아기 예수님을 추운 외양간으로 내몰았는지, 면밀히 살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차선에 미루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을 또 다시 구유에 눕게 하는 매몰찬 행위임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요셉 성인께 예수님은 인생일대의 십자가였습니다.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십자가에 성인은 어깨를 짓누르는 통증을 느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성인은 말이 없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 함구했고 예수님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성인은 이렇게 믿음의 길에서는 어떤 조건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아닐지요, 믿음에는 어떤 조건도 달 수 없으며 요구사항을 내세우지 않는 정확하고 강직한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지요.

그러고 보니 성경이 요셉의 언어를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 더욱 심오하게 다가옵니다. 이야말로 절대적 순명에 대한 하느님의 칭찬이라 싶습니다.

요셉 성인의 승리는 삶의 기준을 오직 하느님의 뜻에 두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로지 진리이신 주님의 손길에 삶을 봉헌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를 진정으로 흠숭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성인의 삶에서 희망을 봅니다. 우리도 군더더기 생각을 치워내고 차오르는 말을 삼키는 것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주님을 뵙고 마음모아 크고 우렁찬 찬미를 올리는 오늘,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십자가마저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꼭 그리하시어 모두, 요셉 성인처럼 주님께 소중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께 선물을!

-박종수 신부-


유다인들의 임금이자 온 세상의 임금이신 아기를 찾아 나선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하는 별은 베들 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의 어떤 마구간으로 그들을 안내합니다. 그 마구간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동방의 박사들은 반대의 모습을 그리며 길을 떠났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이라면 온 세상 의 임금이 태어날 곳으로 넓고 화려한 궁전을 생각하고 귀족과 고위직 사람들의 인사와 축하를 받으 며 누워 있는 아기를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가장 초라한 모습의 마구간이었고 아기 예수님 탄생의 축하는 아기의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말과 소와 양 그리고 양치기 들만이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별은 바로 그 초라한 곳에 누워 있는 아기가 바로 그 임금 님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모습과는 다른 장소, 다른 모습의 아기 예수님이었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안 내를 믿고 그곳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귀한 선물을 예 물로 드립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 복음 말씀은 가난한 이들, 헐벗고 굶 주린 이들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마태 25,40 참조) 동방의 박사들처럼 우리 도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다면 복음의 인도에 따라 가난한 이 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믿고 초라한 마구간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 님께 귀한 선물을 드렸듯이 우리도 복음을 믿고 가난한 이들에게 귀한 선물을 드리는 것이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이 온 세상에 드러났음 을 기념하며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다시 한번 기뻐하는 이 시기, 우리도 동방의 박사들처럼 아기 예 수님께 선물을 드립시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찾아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 주어 우리의 사랑 실천이 아기 예수님께 좋 은 선물이 되길 바랍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한명석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구세주로 당신을 드러내 보 여주신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가장 먼저 유다의 목자들이 찾아가 경배를 드렸고, 이어서 이방인인 동 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하늘에 나타난 별을 보고 위대한 임금의 탄생을 알게 되었고, 새로 나신 임금께 경배 드리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별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 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분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로데는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 니다. 

  멀고 험난한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들과 오랫동안 기다려 왔으면서도 정작 구세주의 탄생 소식에 무관심 한 유다인들의 반응이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탄생 순간부터 환영하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사 이에 있었습니다. 전혀 의외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였고, 또 배척하였습니다. 이런 긴장은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이어졌습니다. 

  신앙의 고향 예루살렘은 빛을 잃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뿐 구세 주의 탄생 소식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방에서도 알아보고 찾아온 별이 가까이 사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빛을 가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어 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구세주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향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삶의 중심 을 하늘에 두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년에 이탈리아 성지순례 중에 바티칸의 시스틴 성당을 순례했습니다. 이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지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다시 봐도 이 거대한 천장화의 웅장함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인데?’

그의 대표작인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상,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주 종목은 분명히 조각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이 천장화를 그리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조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천장화를 그리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계속 얼굴을 위로 향한 채 작업을 해야 했기에, 고개도 아픈 것은 당연하고 시력 감퇴까지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거절할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이어도 그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의 작품 완성 시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자그마치 4년간의 작업으로 이 대작을 완성합니다.

하기 싫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가스파르, 발타사르, 멜키오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세 명의 동방 박사가 구세주께서 탄생하심을 알고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한 사건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이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이 동방박사들은 먼 곳에서 별을 쫓아서 베들레헴까지 오게 되지요. 지금처럼 교통 사정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움직임만을 보고서 길을 떠난다는 것이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굳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여행입니다. 드디어 별이 멈춘 곳에 이르렀지만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사람보다 짐승에게 더 어울리는 어둡고 초라한 마구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고, 가기 싫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대신 하느님의 뜻에 집중했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더없이 기뻐하면서 이 땅에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인해서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우리의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건 새로운 일을 전혀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신호다(우디 앨런). 



인공지능

몇 년 전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로 인해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인간은 150이면 지능이 높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IQ가 150이면 ‘너무 지능이 낮다.’라고 말한답니다. 왜냐하면, 현재 인공지능의 IQ는 1만이거든요. 이렇게 지적인 면에서 인공지능을 뛰어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진국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주입식 교육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휴대전화가 보편화하기 전에 사람들은 열심히 전화번호를 외웠고 아니면 수첩에 꼼꼼하게 적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번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노래방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 앞에 자신 있게 외워서 부를 노래가 2~3곡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사를 외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휴대전화와 노래방이 준 변화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한 변화는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주입식 교육 중심이고, 정부에서는 어떤 대책도 없습니다.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는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나’ 역시도 변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태양을 향해 걷는 자는 자기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영국의 작가 버나드 쇼는 항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스스로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고 의사에게 빨리 와달라고 자주 청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의사는 버나드 쇼의 부름을 받고 일부러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묻자 의사는 “급히 오느라고 심장에 이상이 생겨 내가 죽게 생겼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놀란 그는 벌떡 일어나 응급약과 차를 준비하는 등 의사를 간호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무기력증과 우울했던 감정이 싹 사라졌습니다.

      1시간 후 의사가 그에게 “진료비를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선생님을 보살펴주었는데 무슨 진료비입니까?”라는 그의 말에 의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당신 병이 다 나았지 않았습니까? 이게 처방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기력증과 우울증에서 해방되려면 남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면 됩니다. 그런 소명을 주는 만남이 가장 가치 있는 만남입니다.

      사람은 딱 두 종류가 있습니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입니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은 사람만이 참으로 살아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버나드 쇼는 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을 정도로 노력해야 할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때부터 삶이 살아납니다. 죽어야 되는 이유와 살아야 되는 이유는 결국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그만 뒤집히려는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중 노인 한사람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 노인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 딸은 몇 년 전에 잃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 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되고 살아도 됩니다.”

      이 노인이 참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만이 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어야 되는 이유는 나를 살게 하신 분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려고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세상에 드러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 박사들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한 이기적인 욕망에서 자신들을 구해 줄 메시아를 찾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구를 하다 보니 메시아가 나타나면 하늘에 징조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하늘에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연구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별을 다른 별들과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목말라했던 이 세 명만이 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별이 사라집니다. 그래도 그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왕 헤로데에게 가서 새 왕이 어디서 났느냐고 묻습니다. 헤로데가 이것을 좋아할 리 없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범상치 않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베들레헴임을 알려주고는 자신도 경배하러 가겠으니 나중에 돌아올 때 꼭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동방박사들은 갈 길을 잃을 수도 있었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까지 당도합니다.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가 있는 곳을 비춥니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 메시아께 자신들이 준비한 예물을 바칩니다. 그 예물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희생되셔야 하는 분임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동방 박사들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사람들이었고, 헤로데는 살기만을 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누구의 인생이 더 행복했을까요? 헤로데는 자신이 살기 위해 죄 없는 수많은 아기들을 학살하라고 군대를 보냅니다. 그런 삶이 행복일까요? 우리는 죽어야 하는 이유를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야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목숨을 걸고 그 별이 이끄는 길을 잃지 않으려 헤로데에게까지 갔습니다. 그런 용기 있는 자만이 메시아를 만납니다.

      ‘겨울왕국 1편과 2편’은 모두 두 젊은 공주들이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1편은 자신만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언니 엘사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동생 안나 이야기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언니를 찾아 나서서 심장에 심각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보며 부러워하고 그 주인공들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2편 역시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밀을 찾기 위해 엘사가 먼저 떠납니다. 자신에게만 왜 그런 능력이 주어졌는지 알고 싶은 내면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목숨을 거는 모험의 길이었습니다. 동생은 또 그 언니가 알아낸 비밀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두 딸이 하는 그런 행동은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도 두 주인공 중의 하나가 되고 싶어 합니다.

      목숨 걸어야 할 이유를 찾은 이들이 가장 행복합니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이들이 보는 것은 온통 두려움의 그림자뿐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았던 헬렌 켈러는 “태양을 향해 걷는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태양을 향해 걷는 이들은 걱정과 두려움과 절망의 그림자를 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드러내보이심을 발견한 이들이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목숨을 걸 목표가 생겼는데 죽음의 공포 따위가 그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존재의 이유만을 목숨을 걸고 찾는 이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곧 죽어야 하는 이유, 즉 삶의 소명을 전해 받는 시간입니다.

      나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읍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죽어도 되는 이유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만남만큼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목숨을 걸 소명을 찾읍시다.


-조재형신부-


가톨릭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 LA를 방문했습니다. 뉴욕에서는 비행기로 6시간 정도 걸리고, 시차가 3시간 나는 곳입니다. 공항에서는 평화신문과 함께 성지순례를 가는 여행사 대표님이 차량 봉사를 해 주셨습니다. 숙소는 수녀님들의 배려로 수녀원 영성센터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한인 성당 방문은 명예 기자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앞길을 밝혀주셨고, 저는 평화신문을 홍보할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제가 잘나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제이기에, 제 뒤에 하느님이 계시기에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숙소를 마련해 주신 수녀님, 공항에서 숙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행사 대표님, 한인 성당 방문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신 명예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을 만드는 거라고 합니다. 원은 나의 것을 기꺼이 나눌 때 커진다고 합니다. 나의 것만 챙기려고 하면 원은 작아진다고 합니다. 저를 도와주신 분들의 원이 컸기에 저는 그 원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뉴욕에 와서 4달이 지났습니다. 그중에 3달은 손님 신부님들이 계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원을 조금 넓게 만들었기에, 누추하지만 저의 숙소에 신부님들이 머물 수 있었습니다.

 

넓은 원을 만드신 분들이 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큰 원을 만드셨습니다. 가난한 이,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이, 억울한 이, 병든 이들이 원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안에서 위로를 얻었고, 용기를 얻었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도 큰 원을 만들었습니다. 버림받았던 많은 사람이 꽃동네의 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늘 교회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원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빛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말씀이 하느님이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원을 만드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 머무르는 나라가 아닙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지친 이들은 모두 나에게 와서 쉬십시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이 세상에 사는 사람도, 앞으로 이 세상에 올 사람도 모두 갈 수 있는 원입니다. 특정한 민족, 계층, 이념, 종교, 신분,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개방된 원이 아닙니다.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원, 곧 하느님 나라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와 동방박사들을 보았습니다. 헤로데도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헤로데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 명예와 욕망을 채우려는 헤로데의 방법으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로데가 알려주는 길을 가지 않았고 자신들의 길을 찾아갔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에페소인들에게 보내 편지에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능력, 학벌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고,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야 참된 상속자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트리의 전구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우리들의 신앙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께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 올랐다.”


뇌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쳐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 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알아 뵙고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한 임금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내어 놓는 임금이고 다른 임금은 자기자리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모략을 꾸미고 거짓으로 속이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소위 갑질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근심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욕심은 그나마 지금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버림으로써 풍성함과 자유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술에 만취한 베드로가 한참 비틀비틀 걷다가 전봇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전봇대를 잡고 서너 바퀴 빙빙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전봇대에 기대어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렸어!

 

살다 보면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그 길을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목적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 길을 마다 않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먼저 감사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어찌 되었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 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두 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썩지 않는 새 생명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는 선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빛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은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주님을 증언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생에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교는 우리의 소명이고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영세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한명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잠시 앞으로 예비자로 인도할 한 사람을 기억하실까요?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게 위해서는 우리가 이 지역사회에서 더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은 앞서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빛나게 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각자가 지향하고 봉헌하는 예비자를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드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미루지 않는 사랑,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분의 별"

-이영근신부-


찬미 성탄! 오늘은 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5)


그러니 오늘 이 거룩한 빛의 신비를 본 우리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마음이 두근거리며 가슴이 벅차오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기쁜 빛으로 가득한지요? 마음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는지요?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 임을 찾아나서는 을 떠나고자 합니다. 은 성경의 핵심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한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열려있는 자라야 그 별을 바라보고, 그 별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길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먼저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길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길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하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하여,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서 또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나와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나의 허황한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는 길입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자신을 내려놓고 무릎은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낮게 엎드린 우리를 참된 빛이 비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은 우리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인가 봅니다. 구유라는 밥통에 자신을 밥으로 내어놓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가 낮아져야만, 우리 자신이 온전히 예물이 될 수 있는가 봅니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가지 말아야 할 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몰아내고,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을 밝힐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복음 선포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2,1-2).”

여기서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은 메시아(구세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뒤의 4절을 보면, 헤로데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이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라는 말은, 나중에 유다인들의 임금이 되실
아기가 태어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즉 나중에 메시아가 되실 아기가 태어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기로 태어나고 자라서 나중에 메시아가 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즉 인간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부터 ‘메시아’이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메시아께서 인간 세상에 오신 일입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을 인도했던 ‘별’은,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곧장 인도하지 않고, 왜 예루살렘에 들르도록 했을까?
(‘별’은 예루살렘까지만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고 나서 모습을 감추었다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된 다음에
다시 나타나서 베들레헴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메시아께 경배하는 것은 동방 박사들 자신들이 원한 일이었고,
예루살렘에 들러서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임무를 그들이 의식했든지 아니든지 간에...
(동방 박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메시아께서 탄생하셨음을 말한 것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한 일과 같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첫 번째 선교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공공연하게 알리면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복음은 은밀하게 전하는 비밀 소식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이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
사람들에게 물은 것은 사람들이 그곳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민족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메시아 강생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고,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동방 박사들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메시아 강생’이라는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준 일은,
그 소식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알려 준 선포이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나누기 위한 선포이고,
기쁨에 동참하자고 초대하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자기들과 함께 메시아께 경배하러 가자고 권하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복음 선포’가 어떤 일인지 잘 드러내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는 아직 복음을 들은 적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전해 주는 일이고,
이미 들었지만 소극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는 냉담 중인 사람들에게는 다시 ‘복음의 삶’을 살도록 깨우쳐 주는 일이고,
‘복음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이 됩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직 복음을 모르고 있다면, ‘복음 선포’는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듣는 일이 되고,
복음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면,
더욱 능동적으로 ‘복음의 삶’을 살자는 초대를 받는 일이 됩니다.
(복음은 한 번 듣고 끝나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듣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마태 2,3-5ㄴ)”

동방 박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에는 메시아 강생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근거로 해서
메시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메시아 강생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는
잘못한 일도 아니고 문제 삼을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은 동방 박사들을 통해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들은 다음에
기뻐했는가? 아닌가?”, 바로 그 점입니다.
여기서 ‘깜짝 놀랐다.’ 라는 말의 원문 단어에는 ‘기뻐하다.’ 라는 뜻이 없습니다.
(‘기쁨’보다는 불안감 쪽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기뻐한 사람도 일부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데를 비롯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은
메시아 강생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는커녕 불안해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을까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자기 인생에서 복음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때에 이루어집니다.
다른 것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더라도 뒤로 미룬다면, 그것은 받아들인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그렇다 해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을까?
동방 박사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복음서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내용만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에는
베들레헴으로 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실제로는, 몇 명 정도는
동방 박사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메시아로 믿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 메시아로 안 믿고 그냥 되돌아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헤로데의 계획을
요셉에게 알려 준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빛이신 주님의 나타나심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로서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백성들을 불멸의 신적 영광에 참여시켜 새롭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심을 기념하고 있다.

 

1독서: 이사 60,1-6: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의 유배생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이 폐허로 변한 것에 상심할 수도 있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 새 예루살렘의 찬란한 광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예루살렘이 모든 민족들을 불러 모으고, 값진 보물을 가지고 모여들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영적인 수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1독서에서의 핵심적인 말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자체의 빛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이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1).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주님의 빛으로 싸여 모든 민족들을 부르게 된다(3).

 

복음: 마태 2,1-12: 동방박사들의 경배

오늘 복음에서 박사들은 이상한 의 인도를 받아 주님께 경배하러멀리서 왔다가 그들을 감싸고 그들에게 스며들었던 그 의 전달자가 되어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방박사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는 복음은 알려주지 않고 있다. 그들은 팔레스티나 동쪽(1)에 있는 여러 지방에서 왔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이에 대한 정확한 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당신 자신에 대한 자기입증의 능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존자체만으로도 인간들을 당신께로 끌어당기신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여기서의 주인공은 그 이상한 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박사들이 헤로데 왕에게 말하였다(2).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보이지 않는다. 박사들이 다시 베들레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그 별이 다시 나타나 인도하고 있다(9-10).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당신께로 이끌기 위하여 그들을 찾아 나서신다. 바로 그분이 이시고 빛은 자신을 스스로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성 아우구스티노). 태양은 수평선에 떠오르는 것만으로 땅을 비추고 사람들을 광채로 감쌀 수 있다. 구름이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킴으로써 베푸신 구원을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렸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2)에게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이러한 극적인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아 나서고, 그 분이 어린 아기였음에도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즉 포악한 군주와 더불어 술렁이는예루살렘으로 표현되는 유다인들은 그를 무시하고 적대시하고 더 나아가 그를 없앨 음모를 꾀한다. 박사들에게 부탁하는 헤로데의 말이나(8), 뒤이어 나오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마태 2,16-18)은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로써 믿음의 새 백성이 낡은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교회가 회당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며,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다양한 징표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도 하나의 징표였다. 그 징표를 오직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기적은 그들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내면에서 일어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당신 자신에 대한 증거를 주신다. 교회를 통해서이다. 교회의 모든 힘은 믿음의 강한 광채에 있다. 믿음의 광채를 통해 교회도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시는주님을 드러내 보일수 있다.

 

이제 여기서 새 예루살렘인 교회의 사명이 드러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을 받아들여 그 빛을 모든 사람들에게 밝게 비추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그분의 사랑, 그분의 형제애, 자신을 내어주고 남에게 봉사하는 그분의 능력이 요구하는 바를 매순간순간에 실현시켜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에 교회는 그 자체가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기쁜 선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교회는 에 의해 동화된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바로 주님의 공현이 되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갔을’(12) 때 분명히 했던 것처럼, 형제들에게 그 의 찬란한 빛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과 마음속에 그 빛을 먼저 간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공현이란, 구원의 빛이신 주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신비를 말한다. 이제 주님의 공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빛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주시는 분으로 드러나도록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있습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주님 공현 대축일은
삶의 길을 훤히
밝혀줍니다.

떠남과 만남은
하느님을 만나는
공현의 참된
방식입니다.

떠나야
만날 수 있고
떠나야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 오늘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떠나야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초라한 마굿간의
아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마굿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깨닫게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이십니다.

공현은 성탄의
보편적 의미입니다.

하느님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초대합니다.

공현은 구원을 향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한 이들은
목동들과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황금과 유향
몰약의 여정을
걸어가실 것입니다.

탄생으로
공현의 기쁨을
나누신 우리 주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것은
사랑이며 삶이며
눈물입니다.

주님 공현은
가장 값진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인류 전체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주님을 만나고 알아뵙고 경배하고 섬기는 은총이 누구에게 허락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험한 길을 마다않고 와서는, 그 임금이 어디에 계신지 묻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길을 떠난 이들입니다. 발목을 휘감는 일상의 요구들과 안전지대의 나른한 유혹을 박차고 나온 이들이지요.

아마도 별의 자리, 별에 담긴 신화적 상징들, 별의 움직임을 통해 온 우주를 통찰하는 학자나 점성술사, 신비가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들의 앎은 그들을 책상머리에 묶어두지 않고 세상 밖으로 불러냅니다. 박사들은 그 부르심에 충실히 따랐지요.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마태 2,5).

다급해진 헤로데 앞으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소집됩니다. 그들은 백성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성경과 관습에 정통한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그 근거까지 정확히 댈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앎은 그들 자신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너무 지쳤서 희망이 퇴색된 걸까요. 아니면 식상해버렸을까요. 혹시 그들이 더 이상 메시아가 필요 없을 만큼 다 누리고 있어서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린 걸까요...

결국 그들의 앎은 잔인한 폭군의 질투심에 피비린내 나는 방향을 잡아준 꼴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죄없는 아기들의 순교입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9-10).

동방 박사들은 유난히 빛을 발하는 별을 보고 놀라워할 줄 아는 이들입니다. 삶의 일상성과 특수성에 경이감을 느낄 준비가 된, 열린 이들이지요. 또 그 별을 내시고 의미를 심어놓으신 창조주께 경외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2,11).

그들은 그 별의 주인공께 가장 귀한 것을 바치고 싶은 순수한 공경심마저 지닌 이들이지요. 그들이 바친 예물들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결한 봉헌물들입니다. 황금은 임금이심을, 유향은 사제의 거룩함을, 몰약은 희생제사를 준비하나 그 의미 역시 하느님의 신비 안에 들어있을 뿐 어떤 인간적 의도도 없습니다.

"그들은 꿈에 ...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

그들은 꿈쟁이입니다. 꿈이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고 움직이는, 논리지향적 세상이 몽상가라 폄훼하는 부류일지도 모릅니다. 꿈을 가벼이 넘기지 않고 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이들, 하느님 구원 역사는 사실 이렇게 꿈을 좇는 이들을 징검다리 삼아 이어져 왔습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3).

제1독서에서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빛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미래를 예견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하느님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5).

자기들만의 신으로 사유화했던 야훼 하느님을 온 세상이 받들어 섬기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편협한 선민사상이나 저급한 우월주의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경이감으로 설레고 또 경외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들이 진정 순수한 야훼 신앙의 소유자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자신의 직무가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밝힙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철저한 바리사이였던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뒤 유다인이 접촉조차 꺼리는 이방인들 사이로 율법을 초월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며 구원의 길을 보여주지요.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에페 3,3).

사도 바오로는 평생 배워온 율법과 관습을 넘어, 계시를 통해 신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계시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인류가 받은 공적 계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그 계시를 받아들여 신비를 알게 되는 이들, 좀 강하게 표현해서 신비를 깨닫고 거머쥐고 쟁취하고 소유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논리성이나 합리성, 실리에 밝은 계산능력에 있지 않고, 꿈을 꾸고 별을 좇고 희망을 견지하는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한 아기가 드러나십니다. 주님 공현의 신비는 놀랄 줄 알고 삼가할 줄 아는 이에게 열린 신비입니다. 그분 앞에 나아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경배하는 우리 안에 이천 년 전 동방 박사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별을 따라 길을 떠나는 용기, 아기에게서 구원자를 발견하는 순수한 기쁨, 거룩한 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진지한 경외심, 일상의 수고와 미소와 눈물을 버무려 준비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우리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주님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저마다의 구비구비 인생 여정을 거처 오늘 구유 앞에 선 우리 모두가 동방 박사입니다. 주님을 만나뵙겠다는 일념으로 말씀과 성체의 빛을 따라가며 하늘나라를 꿈꾸면서 주님께 마음껏 경배하고 사랑하며 온 존재를 남김없이 바쳐드리는 귀한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희망 마중물 

-김찬선신부-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그리고 오늘 감사송은 오늘 축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 구원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그분을 인류의 빛으로 드러내 주셨나이다."


그러니까 오늘 공현축일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빛을 비추시는
빛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그러므로 공현축일은 인간이 어둠에 처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우리의 어둠에는 크게 두 가지 어둠이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적인 절망의 어둠이 그 하나이고,
빛이신 하느님을 모르는 신앙의 어둠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선 인간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안 좋은 일들이 나고,
그것들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이 허다합니다.

실직에다 중병까지 얻어 재기의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개인적인 절망과,
술 중독에 폭력적인 가장으로 인해 모두가 불행한 가족적인 절망에서부터
독재와 부정부패로 인한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절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서 더이상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각가지 인간적인 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이 우리 신앙인이 볼 때 인간에게는
구세주 하느님을 찾게 하는 절망이 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이 더 큰 절망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찾았다면 고통이 애초에 불행이 되지 않고
하느님을 더 찾게 하는 희망마중물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희망마중물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제가 만들어낸 말이니 처음 들으셨을 텐데
인간에게 고통이 없거나 있더라도 그 고통을
인간이 관리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니
우리 신앙인에게 고통은 구세주 하느님, 곧
희망의 하느님을 찾게 하는 마중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통 말고도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마중물이 있고,
또 그런 희망마중물들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마리아처럼 구세주를 낳아주는 사람과
동방의 박사들처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다 이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예외 없이 고통 중에 하느님이 찾아오시는데
고통 중에서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찾은 사람이 신앙인이요,
찾은 결과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 신앙인이며
이런 체험 때문에 하느님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낳아주고 찾아 만나게 하는 사람이 신앙인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낳아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함으로써 낳아줄 수 있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시고 프란치스코도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공현축일은 프란치스칸들에게는 선교주일입니다.
선교란 꼭 멀리 이국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보고 알도록
내 태중의 아기를 출산하는 것 모두가 선교이며,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이민족에게까지 가서 하느님을 알려주면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프란치스칸에게는
더 적극적이고 완전한 선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 프란치스칸들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2014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1-12)


 목숨 걸어야 할 이유를 찾은 이들이 가장 행복합니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이들이 보는 것은 온통 두려움의 그림자뿐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았던 헬렌 켈러는 “태양을 향해 걷는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태양을 향해 걷는 이들은 걱정과 두려움과 절망의 그림자를 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드러내보이심을 발견한 이들이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목숨을 걸 목표가 생겼는데 죽음의 공포 따위가 그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존재의 이유만을 목숨을 걸고 찾는 이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곧 죽어야 하는 이유, 즉 삶의 소명을 전해 받는 시간입니다.

      나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읍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죽어도 되는 이유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만남만큼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목숨을 걸 소명을 찾읍시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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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반영억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