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Margaret K 2020. 1. 3. 20:09

2020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Rabbi, where are you staying?’

Jesus said, ‘Come and se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기에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제1독서). 예수님의 초대를 받은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 모여드는 사람들의 바람과 갈망은 다양하다 못하여 어지럽습니다. 

진학, 사업, 건강, 성공, 행복 등은 제쳐 놓더라도 제 신념에 대한 확증이나 사람끼리 부딪쳐 상처 입은 영혼의 처절한 외침까지, 예수님을 찾는 이들의 가슴은 그렇게도 답답하고 먹먹한가 봅니다.“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요한의 두 제자가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였을까요? 메시아? 그럴 테지요.
다만 그 메시아가 각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보장해 줄 메시아일 수도 있고, 제 신념이나 가치관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줄 메시아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한마디만 건네십니다.
“와서 보아라.” 중요한 것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저마다 다른 뜻과 바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 놓아둘 수 있는 일, 쉽지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는 길에 필수적인 과업입니다.신자로서 잘 살아야 된다는 사명감 아래,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덕목들을 순수한 신앙의 가치들과 뒤섞어 놓는 일이 많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반드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가치는 인간의 모든 것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무모하지만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만 하는 끝없는 회개로 초대된 사람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몇 년째 신학교에서 ‘설교학’이라는 과목을 맡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설교학’은 말 그대로 강론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지요. 스스로 강론을 잘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강사로 활동을 하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해서 강의를 해왔습니다. 이 설교학을 강의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신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였습니다.

“우리 본당 보좌 신부님은 젊은데도 너무 강론을 잘하세요.”

물론 이 보좌신부는 신학생 때 제게 수업을 들었던 신부입니다. 저에 대한 칭찬이 아닌데도 기분이 좋은 것은, 본인의 노력으로 신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겠지만 가르쳤던 저 역시 한 몫은 하지 않았겠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잘사는 모습에 너무나 기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로 당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 뜻과는 정반대로 살고 있다면 어떠하실까요? 주님의 사랑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욕심과 이기심만 내세우고 있다면 아마 크게 슬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무엇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예수님에게서 학식을 배우려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출세 좀 하려고? 그 모든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엇을 찾는지 제자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동문서답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주님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승이 되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더 중요한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늘 예수님 곁에 있겠다는 염원의 표현으로 묵는 장소를 물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같이 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습니다. 이런 강한 의지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직접 와서 직접 보고 믿으면서 함께 하자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주님 자체를 찾고 있다면 기쁘게 여러분을 초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만 매여 있다면 주님께서는 크게 슬퍼하실 것입니다.
나쁜 습관은 고치는 것보다 예방하기가 더 쉽다(벤자민 프랭클린).



지금 잘 하세요.

가정에서 폭군의 모습을 보이는 중년의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가족들을 향해 폭언을 자주 쏟으셨고, 심지어 물건을 집어 던지면서 자신의 화풀이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가장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내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친구들의 모임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가장의 권위가 산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자 한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나이가 벌써 50을 훨씬 넘었어. 그런데 이런 말 들어본 적 없어? ‘50세 넘은 남자는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더는 존재 가치가 없다.’라고 말이야. 여기에 점점 경제적 영향력도 줄어들기 시작하는 나이야. 자네 가족이 착해서 그렇지, 자네의 그런 행동으로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이네. 앞으로 잘해.”

가족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주변에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강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럴수록 점점 외로움 속에서 힘들어하게 됩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의 물질적 풍족이 영원할 것도 아니고, 자신의 신체적 능력도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언젠가는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잘하십시오.                  

피가 있는 공동체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전삼용신부-


토니 던지의 꿈은 미식축구팀 감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던지는 ‘습관’의 형성을 강조했습니다.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자동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덕분에 어떠한 구단도 그를 감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코치법이 그리 혁신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1996년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으로 평가받던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신임감독으로 초대받게 됩니다.

      던지는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반복된 훈련을 통해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였습니다. 생각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몸을 경직시켜 결국 판단력까지 흐려지게 만든다는 것을 던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던지는 버커니어스는 선수들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것 하나만으로 최악의 팀을 강력한 팀으로 만들어 승승장구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강팀으로 변모한 버커니어스가 플레이오프에 나가 큰 경기를 할 때마다 매번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강팀으로 탈바꿈한 팀으로서 받는 팬들의 기대가 그들이 더 이상 자동적인 움직임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다시 자기 생각으로 경기를 풀어가게 만들었습니다.

      던지는 말합니다.

      “우리는 훈련을 반복했고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큰 경기에 진출하면 훈련 받은 걸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선수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 시스템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맞으면 그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던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2년 연속 슈퍼볼 경기에 진출하지 못하자 해임통보를 받습니다.

      일주일 뒤 던지에게 구조 요청을 한 팀은 역시 한 해 동안 참담한 시즌을 보낸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였습니다. 던지는 똑같은 전략을 시행했습니다. 물론 콜츠도 강력한 팀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시즌에서는 선수들이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긴장하여 버커니어스 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콜츠가 정규 시즌을 14승 2패의 역사상 최고 성적으로 마친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기로 한 것입니다.

      한 선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계약 조건과 연복을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던지 감독이 장례식을 끝내고 복귀했을 때 나는 감독에게 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습니다. 그분의 상처를 어떻게든 덜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팀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콜츠 선수들의 믿음은 이 비극으로부터 출발하였고 던지의 전술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전술이 ‘진리’라면 그 전술로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힘이 ‘은총’입니다. 은총과 진리로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데, 은총은 그 팀을 이끄는 감독의 ‘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해에 콜츠는 슈퍼볼을 향한 콜츠의 열망을 두 번이나 좌절시켰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역사에 남을 명경기로 역전승하며 슈퍼볼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슈퍼볼에서도 승리를 거둡니다. 선수들은 “우리의 리더, 던지 감독을 위해 승리해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던지 감독은 미국 프로 미식축구 역사에서 10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유일한 감독이 되었고, 슈퍼볼에서 승리한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었으며, 프로 선수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참조: 「습관의 힘; PART 1. 개인의 습관」, 찰스 두히그, 갤리온]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때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원수를 미워하게 시스템 되어 태어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생각’이라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만을 참 소명으로 여기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하룻밤을 묵기를 원했던 시각이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라고 합니다. 본래 “제10시였다.”가 맞습니다. 성경에서 ‘10’은 계명을 상징하고 하느님의 계명이란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이 제10시를 강조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머물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힘이 나를 통해 작용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오늘 복음의 두 제자처럼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부모의 ‘피’가 자녀가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 새로 태어나게 하듯,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교회 내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명이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고 말하는 이유는 교회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피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진 한 팀을 만드셨습니다. 그 팀에 머물고 진정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갖고 구원된 기쁨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인 성령으로 세워진 공동체에서 그 진리를 배우고 그 은총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우리가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에 미국과 한국에는 중요한 선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향후 4년간 미국을 이끌어갈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4년 동안 대한민국 국회를 이끌어갈 총선이 있습니다. 선거는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사람이 당선됩니다. 당연히 후보자들은 자신들의 정책, 공약, 장점을 소개합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상대방 후보의 약점, 실패, 도덕적인 결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현명한 유권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후보자의 유세를 보기보다는 후보자의 삶과 정책을 꼼꼼히 살펴본 후 선택합니다.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의 소중한 권리를 행사한다면 무책임한 유권자가 될 겁니다. 이는 민주주의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가 됩니다. 2020년 미국과 한국의 유권자들은 현명한 선택으로 국가를 이끌어갈 책임자를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금욕과 극기의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갔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죄를 용서받았던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절망과 어둠에서 희망과 빛으로 이끌어 줄 새로운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세례를 받고, 금욕과 극기의 삶을 사는 건 분명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롭게 등장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칭찬하였고, 자신보다 더 높으신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고, 새로운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금욕과 극기보다는 세상으로 들어가셔서 가난한 이, 외로운 이, 병든 이, 이방인, 세리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혈통과 능력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으로 주어지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 참된 행복을 얻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으러 다니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그리고 종교는 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꿈입니다. 그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꿈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그 꿈은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께서 기꺼이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됩니다. 이를 풀이하면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 됩니다. 말은 마음의 알갱이에서 나옵니다. 말이란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곱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을 험하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험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말에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말씀으로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그분과의 만남 이후, 비로소 제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세례자 요한의 급격한 쇠락과 동시에 예수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세례자 요한의 태도가 참 놀랍습니다. 오랜 기간 공들여 교육시켰던 제자들을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예수님께로 인계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복음 1장 36절) 스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적을 바꾸어 말을 갈아탄 두 제자는, 전 스승님에게는 송구스럽고, 새로운 스승님께는 어색하고 그랬던지, 쭈볏쭈볏 예수님 뒤를 따라가자, 이를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어색함을 깨고 먼저 다가와주신 예수님께 황공해하며 두 제자는 묻습니다.“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복음 1장 38절)

 

 복잡한 것을 싫어하시는 분, 요약과 단순명료함의 대가이신 예수님께서는 장황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딱 한 말씀만 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복음 1장 39절)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자신의 거처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그분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겠죠. 거처에 들어가서는 그분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밤늦도록 포도주 잔도 기울였을 것입니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두 제자는 점점 예수님께로 빠져들어갔을 것입니다.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언어, 오랜 갈증과 의혹을 말끔히 풀어주는 탁월한 가르침, 깊은 인간적 매력, 따뜻하고 자상한 눈빛, 묘한 신비로움...두 제자는 밤 늦도록 그분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두 제자는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이 분이야말로 그토록 고대하던 바로 그분,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찰라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분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이 곧 구원의 시간이요, 천국 체험의 시간이었음도 온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 둘도 없는 값진 보물을 발견한 두 제자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뒤로 하고, 애지중지하던 고깃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린 채, 즉시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존재 자체로서 풍기셨던 매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분을 만난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분과의 만남 이후 자신들의 새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봄날,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도하셨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흘러넘치던 그 생명력, 그 기쁨, 그 환희,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은 우리들이 선포하는 말씀으로 인해 위로받고 치유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지나친 폐쇄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순례성, 개방성, 유연성, 연대성...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어떤 공동체는 세상과의 경계가 되는 담을 너무 높게 쌓아올렸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마치 대단한 성채, 단단한 철옹성 같아서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다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찾아온 나그네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지상의 나그네를 환대하는 집이 교회가 아닐까요? 목말라하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 한잔과 쉼터를 제공하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요?

 

 세상과의 전투에서 상처 입은 부상병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야전병원이나 응급실이 교회가 아닐까요? 사회적 약자들과 날개가 부러진 사람들과 기가 꺾인 사람들이 원 없이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 충전소가 교회가 아닐까요?


와서 보아라

 -반영억신부-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3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물으십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결국 우리가 찾는 “무엇”은 이제 “누구”로 바뀌어야 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는 것이 요한의 진심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 자기의 자리를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저의 삶이 이러니 여러분도 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2,15).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믿음은 허상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증언입니다. 이는 마치 소개장처럼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두 명의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은 우리에게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것은 행위를 나타내는 일곱 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에 두 가지요, 만나서 함께 있는 중에 세 가지요, 그리고 만난 후 그 결과로 발생하는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에는 증언을 듣다와 예수님을 뒤 따라갔다는 동사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는 말씀을 주고받으며 함께 가다와 그분이 묵으시는 곳을 보다와 그곳에서 함께 머물렀다(묵었다)”는 동사로, 그리고 만남 이후에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다(말하다)”와 그를 예수님께 데려갔다는 동사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증언을 듣다.”는 것은 단지 그 것에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너머서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한다. 그리고 뒤따라간다.”는 것, 역시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뜻한다. 곧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신을 찾아 나서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 “무엇을 원하느냐?”하시며, 진정 찾아야 할 것을 찾게 해주고,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도록 일깨워주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참된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있는지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는 묵는 곳을 와서 보라는 초대는 원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입니다. 또한 함께 가 주시며, 동행하여 당신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하고 이끌어주십니다. 손수 동반자가 되어 주시고, 반려자가 되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묵으시는 곳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며, 함께 묵으십니다.” 사랑을 속삭여 주시며 흠뻑 적셔주십니다. 이렇게 사랑을 먹은 이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하고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일곱 가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제자로서 걷는 길이요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나에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곧 우리가 함께 아버지께 가는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일곱 가지의 행동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 끊임없이 요청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나서고, 그분과 동료들과 함께 걸어가고, 그분을 뵈오며, 함께 머물러 묵고, 그리하여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하며, 다른 이들을 그분께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이시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에게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함께 아버지께 가는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들입니다. 아멘.


-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고,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35-42: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 요한 세례자는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하면서, 그분을 증언해야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 오직 자신의 사명에만 충실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를 따르는(참조: 1,31.47-49)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고 그 하느님께서 메시아에게 주신 공동체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된다(참조: 3,27.29). 두 제자들이 한 따르다는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향한 첫 걸음이며, 여기에 함께 지내는일이 이어지는데, 단지 그 날만이 아니라(39), 그분과의 계속적인 친교 안에 함께 지내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38)라고 물으신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께 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여튼 그 제자들의 대답에는 예수님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의도가 담겨있다. 즉 예수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알기를 원한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39)하셨고 제자들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함께 지내면서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오후 네 시쯤이라고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간은 단지 함께 있었던 시간을, 대화의 결실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고, 제자들에게 때의 중요성을, 즉 그 때에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친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제자들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40) 안드레아는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1)하면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간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41-42). 그래서 시몬도 그 친교에로 들어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만남이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이렇게 진정한 만남은 그것이 짧은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줄 수 있다. 주님을 만남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분 안에 함께 머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한상우신부-

하느님의 뜻은
만남으로
더욱 빛납니다.

성탄도
부활도 모두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의 선물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으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됩니다.

만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모든 만남의
여정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된 만남입니다.

만남으로
사람의 삶이
변화됩니다.

메시아와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집니다.

메시아와의 만남은
우리의 일상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은
이와같이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만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육화된 말씀입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우리는 치유되고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삶이란
마침내 가장
알맞은 때에
메시아를 만나게되는
은총의 삶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만남의 소명에
충실한 만남의
일상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도 "봄"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의 증언과 듣는 이의 반응 사이에는 반드시 "봄"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요한 1,35).

요한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현존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임을 먼저 들었고, 드디어 보았고, 그래서 믿게 되었으며, 결국 증언하지요(요한 1,32 참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5).

요한의 이 간명한 표현에는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실 무죄한 어린양이십니다. 요한은 군중, 제자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을 향해 "그분을 보라"고 외칩니다.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요한 1,38).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제자들을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보시는 겁니다. 이 시선은 신적입니다. 앎으로 연결되는 인간의 "봄"과 달리 하느님의 "봄"은 이미 약하고 죄인인 인간 실존에 대한 앎으로 가득합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보라고 하십니다. 어디에 묵으시느냐는 그들의 물음이 꼭 장소나 소속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예수님은 아십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임을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요한의 제자들이 먼저 "보라"는 스승의 말을 들었듯이, 이번에도 선선히 예수님의 초대에 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삶을 보고, 거기서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여태까지의 "봄"이 믿고 말하고 듣고 따라가는 행위와 연결되었다면, 여기서의 "봄"은 머무름으로 이어집니다. 머무름은 여타의 행위들에 무게와 농도와 깊이를 한층 더한 차원입니다. 머무름 안에서는 보고 듣고 먹고 냄새 맡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차원의 감각과 행위와 사고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제자들의 머무름은 그들을 새로운 스승과 묶어줍니다. 요한의 제자였던 이들은 스승의 권고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봄"을 타인에게 선포하지요. 그 "봄"과 "머무름"이 그토록 강렬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보았소"라고 하지 않고 "만났소"라고 말합니다. "만남" 안에는 시각적 "봄"과 전 존재적 "머무름"이 녹아 있습니다. "봄"이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만남"을 거쳐 마침내 "하나됨"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은 인간적 "봄"이 신적인 "봄"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요한 1,42).

예수님의 "봄"에는 대상에 대한 통찰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시몬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의 "봄"이 고작 "앎"뿐이라면 우리는 신 앞에서 늘 눈치나 보며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보기만 하고, 알기만 하는 신은 판단자요 심판자일 뿐이니까요.

"시몬을 눈여겨보며"

예수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포개어 봅시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자비, 연민과 염려, 대견함과 애틋함, 유머와 미소, 눈물까지 함께 느껴봅시다. 그리고 그 시선을 옮겨 우리 자신을 "눈여겨봅시다." 예수님의 시선이 얼마나 깊고 따사롭고 부드러운지요. 얼마나 관대하고 선하며 유연한지요...

우리의 "봄"이 인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봄", 그 시선에 합해지면, 듣고 묻고 따르고 느끼고 하는 개별적 행위들은 그 안에 자연스레 융합됩니다. 결국 "봄"은 "만남"이 되고 "머무름"이 되어 종래에는 "사랑"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3,9).

하느님의 씨! 하느님 모상성이고 말씀이고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완전체인 신을 다 품을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그 "씨"는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 본성을 닮도록 허용된 가능성이 이미 진즉에 우리 안에 무한히 존재합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사랑하는 벗님! 온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신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며 우리의 "봄",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그것처럼 거룩히 정화하고, 순히 가다듬고, 따뜻이 북돋우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

-김찬선신부-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로 들립니다.
왜냐면 보통 믿기에 속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믿지 않지만 속기도 합니다.
속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얘기하면 속아주는 것입니다.

아기가 뻔한 거짓말을 할 때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가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속아준다는 것은 속아서 주는 것이고,
그러기에 어찌 보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에 속고 손해를 보면서도 주는 겁니다.

제가 북한 일을 할 때 많이 속아줬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온성에는 못자리를 위한 온실 자재를,
나진-선봉 지역에는 농지 개간을 위한 트랙터를 보낸 적이 있는데
우리가 원하면 언제고 돌려줄 것을 계약서에 썼지만 거저 줄
생각도 있었기에 그들이 속일지라도 떼어먹힐 각오로 보내줬지요.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그것들을 무기가 아니라 농사짓는 데 쓸 것이기에,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이유로 줘도 되는 거였기에 속아줘도 되는 거지만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속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뭘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너와 나 모두에게 그저 해가 되는 거고,
해가 되더라도 어쩌다 작은 손해 정도는 괜찮겠지만
내가 쓰러질 정도로 타격이 큰 해는 입지 말아야 할 겁니다.

권투로 치면 펀치를 전혀 맞지 않고 권투를 할 수 없으니
작은 펀치는 맞더라도 내가 쓰러질 정도로 타격이 큰 펀치는 맞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렇다면 타격이 큰 해란 어떤 걸까요?

속아서 투자한 회사가 망해 재산을 다 날리게 되는 그런 걸까요?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돈도 잃고
사람에 대한 불신도 생기는 그런 걸까요?

실제로 우리 인간은 이런 경험들이 적어도 한두 번은 있어서 
사람에 대한 불신이 대체로 있고 저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속아주기는 해도 정말로 속을 정도로 믿지는 않는 편입니다.

또 자주 얘기하는 바처럼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않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만 믿기에 그런 한에서 웬만하면 다 믿고 
그래서 여간해서는 배신당했다는 생각도 하도 않습니다.

우리가 개를 믿지 않지만 개를 믿는다면 개만큼만 믿지
그 이상으로 믿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사람으로만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지 말아야 하고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좀 더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그런 것과 그런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속지 않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오늘 서간과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대로 악마에게 속지 않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회개중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지 않으며...
악습과 죄를 일삼고 나쁜 욕정과 자기 육신의 나쁜 욕망들을 쫓아다니며,
현세 삶에 대한 근심에 빠져 세상을 육신적으로 섬기는 남녀 모든 사람,
이들은 악마에 속아 악마의 자식들이 되고 악마의 짓을 그대로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의 편지는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누구에게나 속을지라도 악마에게는 속지 말라고 하겠습니다.
그 악마란 요즘 목사라고도 할 수 없는 전ㅇㅇ 같은 자이고,
하느님께 향해야 할 사랑과 관심을 자기와 세상에 돌리게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저도 그런 자이기에 그런 저를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2017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신앙은 그리고 종교는 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꿈입니다그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그 꿈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그 꿈은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께서 기꺼이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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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 오직 자신의 사명에만 충실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38)라고 물으신다우리는 여기서 그분께 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내가 주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내가 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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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요한 1,35).
요한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현존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임을 먼저 들었고, 드디어 보았고, 그래서 믿게 되었으며, 결국 증언하지요(요한 1,32 참조).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보았소"라고 하지 않고 "만났소"라고 말합니다. "만남" 안에는 시각적 "봄"과 전 존재적 "머무름"이 녹아 있습니다. "봄"이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만남"을 거쳐 마침내 "하나됨"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은 인간적 "봄"이 신적인 "봄"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봄"이 인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봄", 그 시선에 합해지면, 듣고 묻고 따르고 느끼고 하는 개별적 행위들은 그 안에 자연스레 융합됩니다. 결국 "봄"은 "만남"이 되고 "머무름"이 되어 종래에는 "사랑"이 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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