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2020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요한 1,29-34)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He is the one of whom I said,
‘A man is coming after me who ranks ahead of me
because he existed before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자녀는 그분을 뵙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자신을 순결하게 하려고 애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약 시대부터 더듬어 보아야 할, 꽤나 무겁고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탈출 12장 참조), 어린양의 피로 하느님께 ‘생명’을 보증받았습니다.
피가 생명일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었고, 그 희생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는 여정의 어려움에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은 이사야서 53장에서도 나타납니다.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빗대어 묘사됩니다.
죽어 가면서도 침묵하는 그 침묵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진 주님의 종의 희생을 상징하는 격조 있는 표현입니다.요한은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린양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살리는 어린양의 겸손과 희생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자, 예수님의 삶 자체였습니다.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낮은 자리에 먼저 찾아드는, 그래서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사랑입니다.더불어 살기에는 너무 심한 경쟁에 내몰린 오늘, 우리의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사랑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묵묵히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걸어오시는데, 우리는 그저 하늘만 쳐다보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작가가 자기 책의 서론에 쓴 글입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개방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솔직함이 드러나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작가 자신도 평생 가장 어려울 수밖에 없고, 또 막막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단점이 될 수 있는 부분, 남들이 알지 못했으면 하는 부분을 숨기고 대신 ‘거짓된 나’를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데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니 더 큰 불편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판단을 다른 사람을 향해 쏟아내고 있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완벽하지도 않고 실수도 계속해서 반복하며 사는 부족한 ‘나’입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어쩌면 가장 못났으면서도 자기 잘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 아닌, 스스로 낮추며 살아가면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 더욱더 멋지게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묵상합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고 불릴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고 따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 잘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철저하게 주님의 길을 닦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필요함을 예수님 자신도 보여주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제단에서 봉헌되는 진심들은 다섯 종류입니다. 즉, 황소, 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입니다. 그리고 양에는 숫양, 암양, 어린양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어린양으로 표현하지요. 이 어린양은 특별히 일일 번제물로 최상의 제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최상의 제물로 스스로 봉헌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봉헌은 당신을 낮추시는 위대한 겸손이고 우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분명 사람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이었지만, 겸손과 사랑의 모범을 이렇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과 세례자 요한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 역시 겸손한 마음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된 나’가 아니라, ‘진짜 나’로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회사를 꾸려가던 형제님께서 직원 한 명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다음날 집에 일이 있다면서 늦게 출근하고, 그다음 날에는 집에 좀 가야 하겠다고 일찌감치 퇴근합니다. 지방으로 출장을 가야 하니 자료를 챙겨달라고 했지만, 전혀 챙겨 놓지 않고 퇴근을 해버립니다.
이러한 새 직원의 행보에 형제님은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직원으로 생각해서, 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직원이 노동부에 재소한 것입니다. 결국, 부당해고가 인정되어서 한 달 치 월급을 지급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일주일도 일하지 않았고 회사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성실하지 않은 이 직원의 손을 들어준 노동부의 결정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화병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자기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소상공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나게 글을 쓰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 하나를 체험합니다. 글쎄 화병이 사라진 것입니다.
화가 나는 상황이 우리 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더욱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화를 어떻게 없앨 수가 있을까요?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해결되지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줄이는 방법이 글을 쓰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만 하지 마시고, 쓰고 만나십시오.

내가 변했다면 믿음이 생긴 것이고 믿음이 생겼다면 성령(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전삼용신부-
존은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회사 다니며 한 여자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을 때부터 스트레스를 술로 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음주 운전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인도로 차를 몰아 정지 표지판을 들이받았습니다. 아이의 팔이 부러지고 얼굴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알코올 중독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을 드나들었습니다. 13개월 동안 이틀에 한 번씩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석했고 그렇게 술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이런 술주정뱅이들이랑 어울려야 할 정도로 패배자는 아니잖아?’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에 관련된 모든 모임에서 탈퇴하였습니다.
2년 동안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고 암이 상당히 진전된 상태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아내가 집을 나갈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습니다. 심지어 코카인을 흡입하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아이들을 태우러 가는 도중 또 트럭과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도중 그런 사고가 났다면 아이는 죽었을 것입니다. 조수석 쪽이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다시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뜻대로 절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내 삶을 결정하는 더 높은 힘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떠한 도움도 받으려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나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어보려 했고 그러자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 존재가 하느님인지 아니면 다른 신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 이후로 7년 동안 술을 끊고 지내는 데 도움을 준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건 압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알코올 치료 재단인 AA는 ‘신’의 존재를 믿도록 유도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나눔에는 신과 영성이란 단어가 끊임없이 언급됩니다. 믿어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공동체에 머물러 있을 때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엔 탈출이 불가능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참조: 「습관의 힘; 개인의 습관」, 찰스 두히그, 갤리온]
사람이 부모처럼 두 발로 걷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변할 수 있는데 그 믿음은 사랑을 보아야만 생깁니다. 사랑은 믿어서 변하려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부모의 사랑을 봅니다. 그러면 자신도 부모와 같은 인간임을 믿게 되고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 수천 번 넘어져도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들 하느님의 사랑, 즉 성령을 보아야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머무시는 성령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선물임을 본 것입니다.
저는 매일 라면만 먹으면서도 부모님의 손과 발의 굳은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굳은살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께서 주시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을 품고 있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당신 사랑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가진 베드로 위에 시작된 교회 공동체에서 성령을 받아야만 그 믿음을 유지하고 처음엔 비틀거리겠지만 언젠가는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교회는 물 위를 걸으려고 시도하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며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존은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처음엔 성령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술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그 공동체 안에 살아있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믿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 믿음을 보아야합니다. 교회는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시도한 베드로 위에 세워졌고 성체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요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제공합니다. 교회에서 이 성령이 머무시는 것을 보지 못하면 진정한 삶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신문사의 건물은 화재보험을 들었습니다. 갱신하기 전에 보험사에서 직원이 왔습니다. 직원은 건물을 돌아보고 결과를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보험을 갱신하려면 몇 가지 보완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익숙하기에 어쩌면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문제를 보험사 직원은 찾아냈습니다. ‘숨은그림찾기’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잠시 다른 데를 보고, 그림을 보면 숨은 그림이 보이곤 했습니다. 보험사 직원은 경험이 풍부하고, 그런 검사를 전문으로 하기에 잘 보았을 겁니다.
미국에 와서 몇 번 들었던 말입니다. ‘미국 사회는 허술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문사 입구에 난간을 설치하라고 했습니다. 소화기는 벽에 고정하라고 했습니다. (신발장 뒤에 있어서 찾기 어려웠습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파이프는 철제로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어지러운 전선은 정리하고, 뚜껑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익숙하기에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 비용은 들겠지만 잘 정리해서 보험을 갱신하려고 합니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는 변방의 사람 예수님의 가르침이 빠르게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던 ‘나자렛파’가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장의 4가지 요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와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리서였고, 교재였습니다. 제자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선교하였습니다. 헬레니즘의 사상을 넘어설 수 있었던 건 교육의 힘이었습니다. 새로운 기업, 새로운 종교가 성장했던 첫 번째 요인 역시 ‘교육’이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공동체, 말씀이 중심에 있는 가정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 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힘과 업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헌신과 나눔에 있었습니다. 제자도, 이방인도, 세리도, 고아도, 과부도, 아픈 사람도 모두 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이런 평등의식은 강력한 연대감을 형성했습니다. 섬기는 공동체는 시련의 때가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공정과 정의’입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한 몸을 이루어 성장하듯이,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공동체는 어려운 공동체를 기쁜 마음으로 도왔습니다. 굶주린 형제에게는 먹을 걸 나누어 주었습니다. 옷이 없는 형제에게는 입을 옷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회복지는 초대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공동체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분열과 갈등은 사라질 겁니다.
네 번째는 ‘복음적인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실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헌신과 변화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난향천리(蘭香千里) 덕향만리(德香萬里)’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복음적인 삶은 세상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지키는 공동체는 바위 위에 세워진 집과 같습니다.
지금 교회에 당면한 문제가 있다면, 지금 교회가 익숙함에 젖어있다면, 지금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늙어가고 있다면 초대교회가 성장했던 이유를 다시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지 알고 싶다면 역시 초대교회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과연 나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기쁘게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양승국신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시자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위 문장에서 우리는 특별한 단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세상’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질서’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요한 복음에서 코스모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의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의 그릇된 질서입니다. 위의 세상이 아니라 아래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 세상은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결국 극복되어야 할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때가 이르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세상이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의 죄’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며 자만심입니다. 세상의 죄는 인간 각자의 개인적인 죄를 넘어서는 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분을 적대시하는 세상의 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인류, 상처입은 인간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린양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는데, ‘없애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치워 버리다.’는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보다 깊은 뜻은 ‘짊어지다.’입니다.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 인간 각자의 죄, 세상의 죄,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이라 외치며, 머지않아 우리들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짊어진 후, 묵묵히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암시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 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돌아보니 저도 젊은 시절 보따리를 쌀 때 마다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내가 떠나면 나만 바라보던 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데, 내가 가버리면 이 시설이 과연 제대로 운영이나 될 수 있을까? 저 많은 후원자들 다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몇년 뒤에 슬쩍 그 소임지를 가봤더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 없는데도 다들 환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공연히 부질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와서 보아라
-반영억신부-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3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물으십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결국 우리가 찾는 “무엇”은 이제 “누구”로 바뀌어야 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는 것이 요한의 진심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 자기의 자리를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저의 삶이 이러니 여러분도 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2,15).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믿음은 허상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이 뭔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사실, 말 그 자체로 패러독스입니다. 왜냐하면,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린양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흠이 없는 어린양이 임신했을 리도 만무하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출애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보듯이, 어린 양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을 의미합니다(이사야 53장).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미 오래된 메시아 대망사상을 표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보듯이, ‘어린 양’이란 말에는 이미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예언자 예레미아도 그리스도의 입이 되어 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습니다.”(예레 11,19)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을 예언자들이 예고한 분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를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서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그리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는데, 그것은 세례를 받으신 분의 존귀함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려오신 분의 존귀함으로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 마음 안에서도 하늘은 열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입히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의 특성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곧 ‘봉헌의 삶’의 특성은 지향이 있는 삶인 것입니다. 향하여 바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진정 내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는,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삶 안에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29절), 희생적인 구원자이시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32절)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절)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요한 세례자는 구체적으로 더 깊게 주님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증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독서인 1요한 3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하느님의 영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세례로 사람들에게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면,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1요한 3,5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반복 불가능한 구원의 업적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5a), 죄 없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고(5b), 그분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6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전 인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개념이다. ‘없애다’라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마르 8,34의 십자가 참조). 즉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종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어린양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이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면서 29절 이하의 말씀에 대해 그의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을 확대하고 있다. 즉 거룩하시고 먼저 계셨던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탁월하게 구원의 선물 즉 성령을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 예수께 대한 증언을 수렴하고 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도 역시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한상우신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더 나은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진정한 희망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당신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의 체험은
영광스러운 영원한
체험이 됩니다.
사랑때문에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바치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우리자신을
보게합니다.
사랑으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사랑의 진리를
하느님의 어린 양이
몸소 보여주십니다.
어린 양의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가장 아픈 곳에서
가장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어린 양을
따라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우리를 봄, 관상으로 초대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요한은 사람들을 "봄"으로 초대합니다. 물론 단순히 주위를 환기하거나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의도에서 "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요한의 경우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한 증언이기에 그렇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33).
사실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온전히 확신하지 못했었습니다. 제자들을 그분께 보내 "오실 분이 당신이신지"(마태 11,3 참조) 물은 적도 있었지요. 지금도 그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노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했지만 보았습니다. 이 "봄"이 그를 앎으로, 확신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그는 증언합니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그가 원래 잘 몰랐기에 이 증언에 신빙성과 무게가 더해집니다. 모르던 걸 보고 알게 되어 확신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이 증언이 이토록 강력할 순 없었을 겁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요한이 전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안에 깊이 새겨진 구원의 표지입니다. 무죄한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 민족을 재앙에서 건져낸 파스카의 표상이지요.
또 이사야 예언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 나오는 "입을 열지 않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사 53,7 참조) 역시 하느님 말씀 안에 기록된 메시아 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과 역사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아무나 가리키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요한 1 32).
요한은 자신이 본 내용을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세례 때 광경이라 보여집니다(마태 3,13-17 참조). 그 자리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성 삼위 하느님께서 온전히 현존하셨지요. 그날 그 자리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허락된 이 "봄"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관상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도 이 "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2,2).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이는 예수님의 첫 번째 나타나심인 강생 너머의,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재림이나, 우리 각자의 영혼이 지상 순례를 마치고 천상에서 뵈올 그리스도와의 해후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곧 어떤 장막도 너울도 가리개도 없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참조). 그리고 그렇게 마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봄", 관상은 하느님과 우리 서로를 닮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볼 것이고 그렇게 서로 보면서 닮아가니까요. 완전한 선, 완전한 아름다움, 완전한 진리이신 분이 우리의 부족하고 나약하고 미비한 꼴을 취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지요. 반면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의로움, 거룩함, 순결함을 입어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1요한 3,3)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알수록 모르는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육신의 눈으로 그분의 자취와 기적들을 세상 안에서 보는 가운데 그분을 알아가는 "지상적 봄"도 가능하고, 영혼의 눈으로 뵙긴 한 것 같은데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천상적 봄, 신비적 봄"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건 이 모두가 그분께서 보여 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 그래서 증언하였다"(요한 1,34).
물론 "봄"의 일차적 수혜자는 보는 이 자신입니다. "봄"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충만하게 되지요. 그는 봄으로써 더 믿게 되고 더 알게 되고 더 큰 확신에 차 증언합니다.
이 "봄"이 진중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지향의 채로 걸러져 세상에 조심스레 흘러나올 때, 세상은 어느 결에 주님을 닮아간 이에게서 희망을 보고 구원을 이야기할 겁니다. 결국 보는 이가, 기도하는 이가 세상에 하느님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화답송). 아멘.

성령의 궁전이 되기에 합당한 겸손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345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요한 1,29-34)
희생 재물로 오신 어린양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알코올 치료 재단인 AA는 ‘신’의 존재를 믿도록 유도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나눔에는 신과 영성이란 단어가 끊임없이 언급됩니다. 믿어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공동체에 머물러 있을 때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엔 탈출이 불가능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자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부모의 사랑을 봅니다. 그러면 자신도 부모와 같은 인간임을 믿게 되고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 수천 번 넘어져도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들 하느님의 사랑, 즉 성령을 보아야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머무시는 성령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선물임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당신 사랑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가진 베드로 위에 시작된 교회 공동체에서 성령을 받아야만 그 믿음을 유지하고 처음엔 비틀거리겠지만 언젠가는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교회는 물 위를 걸으려고 시도하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 믿음을 보아야합니다. 교회는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시도한 베드로 위에 세워졌고 성체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요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제공합니다. 교회에서 이 성령이 머무시는 것을 보지 못하면 진정한 삶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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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출애 12,1-13).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보듯이, 어린 양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을 의미합니다(이사야 53장).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미 오래된 메시아 대망사상을 표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보듯이, ‘어린 양’이란 말에는 이미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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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33).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했지만 보았습니다. 이 "봄"이 그를 앎으로, 확신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그는 증언합니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요한이 전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안에 깊이 새겨진 구원의 표지입니다. 무죄한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 민족을 재앙에서 건져낸 파스카의 표상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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