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2020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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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When they saw this,
they made known the message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by what had been told them by the shepherds.
And Mary kept all these things,
reflecting on them in her he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모세에게 이르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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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들의 인도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알현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런 특별한 은총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기쁨에 넘쳐 찬미 찬양하며 돌아갑니다. 그때 세상에서 그들만큼 행복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 베들레헴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목자들이 느끼는 기쁨을 맛볼 수 없었을까요? 베들레헴 사람들은 천사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만큼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빴습니다. 바쁘면 들리지 않습니다. 땅에 정신이 팔려 하늘의 천사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참된 기쁨이 있었다면 하늘에서 기쁨이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제2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더 큰 기쁨이 지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돈, 명예, 성공, 쾌락 등이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지상의 헛된 기쁨으로 천상의 참된 기쁨을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유일한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목자들처럼 세상 것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한 마음’만 있다면, 저 교회에서 들려오는 복음의 외침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함입니다. 가난한 이들만 하늘 나라를 차지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올해에도 참 많은 일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전 세계의 축제인 일본 도쿄 올림픽이 열리며, 국민을 대표하는 봉사자를 뽑는 중요한 선거인 제21대 국회의원선거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할 일이 많다고 올 2월은 윤달로 29일까지 있지요. 하루를 보너스로 더 받게 됩니다.
이런 새해 첫날, 우리는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기념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떠올리면서 새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몇 달 전에 양치하다가 어렸을 때 해 넣었던 치아 하나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니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말해서 이를 뽑았습니다. 이 하나 뽑는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저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더군요. 뽑고 난 뒤의 통증도 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발음이 새는 것 같아서 말하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말할 때 버벅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게 되더군요.
별것 아닐 수 있는 이 하나 뽑는 것도 이렇게 제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큰일, 특히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부터 일어난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가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영광이라며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의연하게 묵묵히 모두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오늘 복음에도 성모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한 해도 기쁘고 좋은 일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일들도 우리와 함께 공존할 것입니다. 그때 성모님의 모습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해보다도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어느 회사의 한 여직원이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재고 파악을 위해 냉동창고에 갔습니다. 그래야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지요. 한참을 재고 조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냉동창고의 문이 닫힌 것입니다. 이 문은 창고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라서 안에 있는 자신은 도저히 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없는지 창고 안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누구 하나 와서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영하 25도, 점점 추위를 참기가 힘들었고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냉동창고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회사의 경비아저씨가 문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극적으로 구출된 이 여직원은 경비 아저씨가 어떻게 자신이 여기에 있는 줄 알았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회사에서 저에게 출퇴근 시간에 유일하게 인사를 해주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분명 오늘 아침에 인사했는데, 저녁에 당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되어서 돌아보다가 냉동창고 안에 갇힌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받을 것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으로는 결정적 순간에 필요한 도움을 받기가 힘듭니다. 평상시에도 베푸는 사랑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십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찬미 예수님!"이었다.
-전삼용신부-
허윤석 신부님은 평화방송 ‘성모 마리아는 누구의 어머니신가’란 제목으로 한 영성특강에서 당신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간추려봅니다.
허윤석 신부가 어렸을 때 동생이 성당에 복사를 서기 위해 가다가 무면허 운전기사가 모는 트럭에 다리를 깔려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허 신부의 어린 시절은 오락실과 가출한 아이들과 노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집이 비어있으니 가출한 아이들의 거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생 때 허 신부도 취객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고 생사의 길목에서 사경을 해매야 했습니다. 의식은 흐려지고 손발이 차가와지고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몰려와 분명 죽음에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주 작고 온화한 빛이 점차 커지더니 성모 마리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허 신부의 머리에 강복해 주시고 손을 잡아주셨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의 혼수상태 끝에 허 신부는 깨어났고 그때 성모님께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라 불렀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어머니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분이라 누구라도 성모 마리아를 만나면 어머니라 부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허 신부는 그때부터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고 어머니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기도하는 학생으로 변했습니다.
한 번은 새 어머니에게 매일 구타당하는 것이 싫어서 가출한 친구와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다음 날 자기 생일인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묘지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허 신부는 신자도 아닌 그에게 묵주를 쥐어주며 함께 묵주기도 하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땅 속에 묻혀 있는데 어디 또 어머니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천국에 계실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허 신부는 루르드 성모님의 메시지를 인용하며 누구도 회개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날 함께 자고 다음 날 학교에 갔습니다. 그 친구와 같은 반이었는데 점심시간에 갑자기 그 친구의 새 어머니가 교실로 들어와 아이의 뺨을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가출해서 새엄마 걱정을 끼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손에 어제 받은 묵주를 꼭 쥐고 “죄송해요. 다시는 가출 안 할게요. 그리고 다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을게요. 미워하면 엄마를 볼 수 없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새 어머니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나도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나도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하며 울었고 그 친구와 허 신부도 울고 담임선생님도 울었습니다. 새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매를 많이 맞으며 자라서 그러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허 신부의 친구는 성모 마리아를 사랑했던 제자의 이름인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고 새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사건 이후로 새 어머니를 어머니로 받아들여 행복한 가정이 되었고 지금은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새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친어머니 옆에 나란히 묻혀있고 그 중간엔 성모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성모 어머니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하느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또한 자비이고 용서이고 평화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평화를 전해준다면 그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낳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손님을 맞이합니다. 가난한 목자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이 낳으신 하느님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또한 목자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당신 아드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하느님의 자녀들로 새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허윤석 신부님도 성모 마리아와 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우선 가정 안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비뚤어질 수 있었는데도 성모 마리아를 통해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잉태된 자비와 용서를 친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자비와 용서가 아기 예수님입니다. 친구도 그 자비와 용서를 보고 믿고 새로 태어났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구는 또 자신의 새어머니를 새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낳은 자비와 용서로 새어머니의 성모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신자분은 자신의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사처럼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하여 1년에 30명 이상을 선교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찬미하는 예수님을 통해 또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하는 삶이 성모 마리아의 삶이고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우리도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잉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평생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사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먼저 찬미하고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모성을 닮는 길은 온 삶이 “찬미 예수님!”으로 집중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새해를 시작하는 모든 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저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모든 분의 소망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새해에는 만나는 모든 분에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성전의 문에 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If you enter here as a tourist, we are hoping that you would exit as a pilgrim. If you enter here as a pilgrim, we are hoping that you would exit as a holier one. (만일 여러분이 여행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3가지 유형의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결심은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싹을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씨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왔지만, 그 이유와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고통과 좌절 앞에 무너지는 사람입니다. 삶의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어렵게 뿌리를 내리지만 가시를 견디지 못하고 시드는 싹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온 이유와 목적은 알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물론 이웃의 십자가도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땅속에서 양분을 얻고, 햇빛을 받아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보다 가난을 택하기도 하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하고, 오래 살기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책에서 보았던 글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Life is no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Life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춤추는 걸 배우는 겁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2020년에도 시련의 폭풍우가 있을 겁니다. 좌절의 바람이 불 겁니다. 고독이 심하게 밀려올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포기하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찾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중하게 여기는 출애굽의 이야기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폭풍우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법을 배웠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는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데서 뛰어 내려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명예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권력의 단맛이 워낙 중독성이 강하기에 거부하기 힘든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새해 첫날에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제 오늘,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달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미사참례에 오신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의 복의 전달자가 되실 것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가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해는 세속적인 복을 찾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주어져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리아는 이모든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겼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또한 새해 첫 날입니다. 모든 날들의 어머니인 날입니다. 그 어떤 것이든지 있는 것들은 모두 어머니 없이는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무엇에든지 어머니가 있다는 것,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는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있을 수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참 소중합니다. 어머니인 대지 또한 소중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의 어머니이신, 스스로 계신 오직 한 분이신 어머니이신 하느님은 그지없이 존귀합니다.
오늘 새해를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특별히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드렸던 축복을 받으시길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십시오.”
그리하여, 매일매일 아기 예수님을 탄생시키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시오.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 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이를 두고 우리는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이 강생의 신비에는 그야말로 지극한 사랑이 그득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강생을 담은 신비로운 그릇이 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좀 듣기에는 거북한 비유이지만, 실로 사람이 개를 사랑한 나머지 개로 태어난 가당치 않는 사건에 해당합니다. 더욱 당혹스런 것은 이제 사람이 하느님을 낳았다고 해서,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일컫습니다. 참으로 당혹스런 일입니다. 이는 듣기에는 몹시 불쾌한 비유이지만, 마치 개가 사람을 낳았다고 해서 개를 보고 사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대체, 이 당혹스런 신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이는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자기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바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인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는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하느님의 아들이 1400년 전 마리아한테서 태어났을 뿐, 지금 내 인격, 내 문화, 내 시대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마감하기 전,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인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대체, 성자께서 하신 일, 그보다 더 큰일이라니, 그 일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바로 이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인간이 하느님을 낳는 일’, 곧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첫 날에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새로운 한해를 진정으로 사는 길은 우리도 이처럼 “하느님을 낳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처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겨야 할 일입니다.
오늘, 이 특별한 날, 한 해를 잉태하는 날을 맞아, 우리는 “하느님을 낳을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신비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에 깊이 뿌리내려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지고한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진정한 축복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해가 갈수록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희망
-송영진신부-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16-21).”
여기서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은,
아기에 관해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한 말을 가리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천사가 한 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오늘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
2) 구유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가 메시아다.
3) 메시아께서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을(구원을) 주실 것이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찾아낸 다음에는 천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또는 자신들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안 믿고 있다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본 다음에야 비로소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었는데(루카 2,15),
그것은 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본 것은 “작고 약한 갓난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ㅍ 그 아기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메시아께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로 오셨다고 말했고,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기가 자라서 나중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게 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 일은 전적으로 ‘그냥 믿는’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말한 대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내고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구유에 누워 있는 그 아기가 자라서
나중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서 ‘희망’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이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망’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될지 안 될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내가 바라는 대로 되면 좋겠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내가 믿고 있는 그 일이,
믿는 그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은 사실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망’은, 복권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그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당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당첨되면 정말 좋겠다.” 라는 불확실한 일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이미 당첨된, 그러나 아직 당첨금과 교환하지는 않은,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복권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우리는, 지금 내가 주님께 청하는 그것이, 또는 그 일이,
청하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런 희망과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빈말’입니다.)
여기서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라는 말씀은, 앞에서 말한,
“희망이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이다.” 라는 말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희망’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주님께서는 구원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믿고 희망하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구원이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라는 말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구원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희망과 믿음에서 인내심이 생깁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라는 말은,
구원이 완성되면 희망의 역할이 끝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을 맞이해서 여러 가지를 희망하고, 계획합니다.
그 희망과 계획에 대해서, 신앙인은 다음 두 가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1) 지금 나의 희망과 계획은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인가?
2) 나의 희망은 믿음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가?
자기의 희망을 말씀드리는 기도를 주님께 바치면서도,
주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청한다면,
즉 허무하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소원만 빌고 있다면,
그것은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는 ‘헛된 일’입니다.
또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희망하고 청하면서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면,
즉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확신도 없이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받을 준비를 안 해서 주시는 것도 못 받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새해 첫 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2,16-21: 여드레 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8일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느님의 1주간이 꽉 찬 것이다. 이것은 주일로부터 주일로 부활주일로 완성된 모습이다. 이 8일이 된 날 할례를 통하여 아기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된 날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예수“Jeshua'-Jah, 야훼는 구원이시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어제이며, 우리의 오늘이고, 또한 영원히 같은 분이시여라”라고 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신 분”으로 항상, 그리고 오늘 여기서 주어지는 분이다. 단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찬을 모시고, 마음의 할례 즉 회개를 할 때, 그분은 우리를 복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자유롭게 받아들여(루카 1,38 참조)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성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 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 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 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 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 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보다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자.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
-한상우신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신
분이십니다.
구원의 역사안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의 일이
펼쳐집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이여정을 기쁘게
걸어가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낳으시고 기르십니다.
사랑의 신비이며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의 이여정은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끝까지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말씀을 믿으셨기에
십자가 곁에서도
꿋꿋하게 계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의 말씀은
마리아를
순종의 여인이
되게하며 드디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가는
가장 행복한 새해이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말씀을 받아들인
마리아에게
탄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한 여인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하신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신 믿음의
어머니십니다.
교회는 그 길을
따라갑니다.
새 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오상선신부-
말씀과 함께 새해를 엽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이 여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대히 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십니다.
제게는 축복이 가득한 새해 첫 날의 말씀들이 일제히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인 "기도"를 향하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마리아의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처음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천사의 "인삿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하셨지요.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속으로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품으셨습니다. 부산하게 말씀을 헤집거나 흩어버리지 않고 그저 침묵 가운데 곰곰이 머무르십니다.
<말씀에 머물러 되새기는 기도>는 말씀이신 분의 현존 안에 온전히 잠기는 기도입니다. 다가오신 말씀을 온 존재로 품다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머리가 아니라 영혼이 감지합니다.
말씀이신 분의 정감이 내게 스며들어 당신을 드러내시면, 이내 문자는 사라지고 문자 안에 감추어졌던 주님의 속성, 주님의 마음이 만져집니다. 그 주님과 하나되어 일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기도입니다. 이때는 무얼 바라거나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지도 않지요. 그저 그분과 사랑 안에 잠겨 사랑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다음은 <축복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백성을 위해 축복을 명하십니다. 타인을 축복하고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직무 사제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아니 하느님의 모상인 모든 사람의 권한이고 의무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하여 대화할 때 우리 시선이 자신의 욕망과 안위에만 고착되어 있지 않고 타인의 선과 유익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도 진심으로 염려하고 응원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참 흡족하시겠지요. 축복의 기도는 축복하는 이와 축복을 받는 이, 아버지를 동시에 행복하게 만듭니다.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성령께 내어맡기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신 성자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현존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성부 하느님을 향해 힘껏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그 영과 하나 된 우리도 함께 아버지를 부릅니다.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호의가 아니면 우리 힘으로 꿈꿀 수 없는 은총이지요.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사도 바오로는 성경 다른 곳에서도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어떻게 도와주시고 이끄시는지 알려 줍니다.
살다 보면 주님 앞에서 무얼 청해야 할지, 무슨 말씀은 드려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순간도 닥치게 됩니다. 이제껏 청한 내 간구가 과연 아버지의 뜻에 맞는 기도였는지 성찰하게 되면서 갑자기 길을 잃은 듯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내 안의 성령께 그냥 맡겨드리면 됩니다. 내 안의 성령께서는 내가 원하는 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정확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자유로이 기도하시도록 방해꾼인 내 자아와 욕망은 잠잠해져야 합니다.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루카 17,17).
매우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목자들의 말과 행동은 순박한 믿음에서 우러납니다. 소박하고 단순한 그들은 이 엄청난 신비의 증인으로 채택된 것에 대해 우쭐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들은 바를 보기 위해 서두릅니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기 위해서"(관상)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가늠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확인 차원이 되어서도 안 되고, 교만의 근거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기도는 그저 믿음이 지시하는 바를 보는 것입니다. 봄! 관상은 우리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게 기꺼이 열어보이시는 은총입니다.
"목자들은 ...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20).
목자들은 들었고, 찾아냈으며, 들은 말을 알려 줍니다. 선택된 증인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지요. 자기들의 몫을 다한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자기들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목자들이 돌아간 제자리는 이전과는 다른 목장, 목초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그곳에 찬미와 찬양이 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의 결과를 외부에서 찾다가 실망하기 일쑤지만, 실상 기도는 기도하는 이의 내면에서부터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바를 본 영혼은 더이상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기도 자체, 봄 자체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루카 2,21).
이 이름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가 각각 알려 준 바 있습니다(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는 "주님께서는 구원하신다"는 뜻의 히브리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천사의 전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성자의 소명이 그 이름 안에 각인된 것입니다. 기도는 비록 침묵이나 머무름처럼 정적이더라도 이루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품는 그 자체에 완성이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사 말씀들 곳곳에 묻혀 있는 기도의 보물들을 두서없이 꺼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또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올해 우리를 축복 가득한 기도의 곳간으로 이끄시는 듯합니다. 말씀이 기도로 이끄시니 그저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말씀사랑 벗님! 올 한해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 한해 아버지의 아들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286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어떤 신자분은 자신의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사처럼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하여 1년에 30명 이상을 선교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찬미하는 예수님을 통해 또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하는 삶이 성모 마리아의 삶이고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우리도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잉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평생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사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먼저 찬미하고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모성을 닮는 길은 온 삶이 “찬미 예수님!”으로 집중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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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no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Life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성서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찾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중하게 여기는 출애굽의 이야기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폭풍우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법을 배웠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