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2019년 12월 31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Father’s only-begotten Son,
full of grace and tru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보여 주는 거짓에 홀리지 않고 진리 안에서 친교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제1독서). 요한 복음사가는, 말씀이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는 은총을 받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시간은 인간 실존과 무관한 차원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날은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날과 해는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우리는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빈 포장지가 아니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고, 선과 악 그리고 사랑의 자유와 죄의 종살이가 끊임없이 싸우는 곳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나타날 거짓 예언자들의 존재를 떠올리면서 이런 싸움을 강조합니다.우리에게 상기되는 “마지막 때”는 결정적인 싸움의 시간입니다. 신약에서 ‘마지막 때가 왔다.’는 표현은 역사가 끝나 가고 있음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우리 각자 해야 할 결정과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결정과 선택을 다음 기회로 미룰 수 없습니다.요한은 거짓 예언자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그자들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곧 예수님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주실 뿐 아니라 그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을 맞아들이고 함께해야 합니다. 이는 복음의 지혜를 얻는 것을 뜻합니다.오늘 복음의 한 말씀, 곧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한 해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간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당신 은총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그분 자신입니다. 올해 주님에게서 받은 모든 은총은 내년에 받을 은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모든 자료를 분석한 연구팀은 일기를 통해 특정한 감정을 경험한 횟수가 많은 사람일수록 심리적인 불안이나 체내 염증 수준이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특정한 감정은 대상을 접했을 때 솟아나는 전율 같은 감정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의 감동적인 모습에서, 뛰어난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등에서 얻게 되는 감정입니다. 이런 감정이 본인의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이었지요.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찾기 힘들까요? 아닙니다. 사실, 주의 깊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생각해본다면 삶의 모든 것에서 특별한 감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더욱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2019년도의 마지막 날인 오늘입니다. 아마 오늘을 보내면서 2019년이 어떠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생각하는 멋진 2019년을 만드셨습니까? 혹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멋대로 생각해서 아픔과 상처가 더 많은 2019년은 아니었는지요?
복음에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전해줍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 역시 요한의 모습을 따라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지요.
이런 삶을 위해 제대로 보고 제대로 생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가운데 사시는 주님과 함께할 수 있으며, 후회 많은 삶이 아닌 멋지고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19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새롭게 주시는 2020년을 잘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올 한 해 수고하셨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 날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기 위해 교실로 돌아왔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인상을 쓰시면서 맨 앞줄에 앉은 아이부터 차례로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단으로 나온 아이들의 엉덩이를 몽둥이로 한 대씩 세게 때리는 것이 아닙니까?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웅성댔고, 졸업식 날 뭐 하시는 거냐며 따지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반 아이들 모두 한 대씩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그 뒤에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고, 더 자라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가게 되면,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매를 맞는 일을 한 번쯤은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고 싶었다. 이게 나의 마지막 졸업선물이다.”
사랑의 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선생님의 방식을 ‘옳다,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무 이유 없이 불이익을 당하는 억울한 일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때 그럴 수 있다면서 포기하고 참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해서 지금 해야 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새로운 나를 만드는 변화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행동을 바꾸려하지 말고 자기에 대한 믿음을 바꾸려 노력하라
-전삼용신부-
오래 전 영화 ‘워털루 브리지’에서 비비안 리는 전쟁에 나간 남편 로버트 테일러의 이름이 전사자 명단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실 남편은 전사한 것이 아니었고, 신문의 보도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비비안 리는 ‘다시’ 길거리에서 웃음을 파는 불행한 직업을 택하게 됩니다.
‘다시’라고 말한 이유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부터 춤추는 직업을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시어머니는 항상 며느리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시어어미는 춤추는 직업을 가졌던 비비안 리와 명문가의 자손인 자신의 아들과의 결합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나려는 희망에 부풀어 집으로 돌아오는 로버트 테일러의 가슴에는 아직도 아내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자신의 몸을 더럽혔던 비비안 리는 그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행동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누군가 불 속에 갇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속으로 뛰어든다면 그 아이의 부모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사랑해야 하는지 알아서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비안 리는 남편의 사랑이 아니라 시어머니의 생각을 더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비비안 리는 결혼해서도 자신은 웃음을 파는 여자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위는 안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하루에 수천 번 되뇌어도 사람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알아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야 행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테일러라는 아내의 정체성을 명확히 가졌다면 남편이 죽었더라도 다시 몸을 파는 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영국군이 전쟁에 참패를 당하여 거의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의 병사들이 모두 숲속으로 도망쳤는데, 그중 ‘부수’ 장군도 함께 끼어 동굴 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참패한 것이 수치스러워 그는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동굴 어귀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거미는 바람으로 인해 6번을 연거푸 실패 했으나 7번째에 가서 성공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부수장군은 무언가 깨달은 듯 벌떡 일어나서는 “난 겨우 한 번 실패했을 뿐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전쟁터에 나가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자신이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망각하면 한 번 실패해도 자살이라는 행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반면 거미는 거미줄 치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거미니까 그렇습니다.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포기할 때는 더 이상 거미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행동을 하려면 내가 하느님이라고 믿으면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처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입니다. 개에게서 태어났으면 개이고 사람에게서 태어났으면 사람이며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은 하느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나는 하느님입니다.”라고 고백하기를 주저합니다. 다른 이들이 교만하다고 여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 “나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말하면 교만한 것일까요? 당신 태중에 하느님을 모시고 계신 분이 오히려 “저는 그냥 하찮은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하찮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체가 하느님이라면 그 성체를 영하는 사람도 하느님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하느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하느님이 되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이 하시는 행동이 됩니다. 자주 “나는 하느님입니다!”를 고백합시다. 조금씩 저급한 행위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캐나다에서 지낼 때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습니다. 소리의 웅장함, 엄청나게 쏟아지는 물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에 압도되었습니다. 기회가 되어서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를 보았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이과수 폭포에 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규모와 크기가 달랐습니다. 자연이 주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류가 만든 건축물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 스페인의 아람브라 궁전도 있습니다. 인류의 예술, 종교, 정신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을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바꾸었으면 세상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구약에 예언된 분이 예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다윗의 영광이 재현될 거라 말합니다. 루가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세리, 과부, 고아, 아픈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감옥에 갇힌 이를 풀어주고,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주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 복음서의 서문을 읽었습니다. 공관 복음서는 구약에 예언되시는 분, 이방인의 구원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은 차원이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듯이, 시간과 공간의 유한함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은 빛이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눈이 먼 사람은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틀에서는 말씀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영적인 눈을 뜨는 사람은 말씀을 볼 수 있고, 그 말씀이 진리이며, 진리가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거라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어른이 되고,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꿈을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나의 삶과 같아야 합니다.
이제 곧 2020년이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동상동몽(同床同夢)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2020년을 기다리며, 지난 1년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모두 또 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돌아보니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한해였습니다. 굽이 굽이 참 많은 험한 봉우리들을 넘어왔습니다. 넘실거리는 높은 파도를 겨우겨우 이겨내며 여기까지 건너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게 두 발로 서있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활기차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직까지 내가 두발로 당당히 서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직도 나를 축복하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가장 큰 표현이 확실합니다.
올 한해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충만한 자비와 은총에 깊이 감사하면서, 2019년 마지막 날을 기쁨에 찬 영가와 감사의 찬가와 더불어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지나온 한해, 비록 실패와 상처투성이, 죄와 십자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복음 1장 16절)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참 다양한 함의(含意)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완전 방전된 밧데리 상태의 제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몸 서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꼽아야겠습니다. 그것이 기도생활이요 영적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이틀에 한번 사흘에 한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 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 그리고 빛
-반영억신부-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마음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복을 많이 지으십시오.

한 처음~"
-이영근신부-
오늘은 2019년도를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 사랑의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다보며, 오늘을 가져다 준 지난날들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지난 한 해를 감사하면서, <이 한마디>라는 글귀를 되새겨봅니다.
‘참 고맙다’는 이 한마디 /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올 때,
나는 내 인생길 어디쯤 걷고 있을까?
‘참 고맙다’는 이 한마디 / 가슴에서 퍼 올려 입술에 담고 걸을 때,
내 발길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참 고맙다’는 이 한마디 / 내 삶의 노래가 될 때,
내 마음에는 어떤 평화가 찾아와 있을까?
오늘 우리는 이 마지막 날에, <복음>을 통해 “한 처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분 안에 모든 생명이 있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으며, 그분을 통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 생명이신 말씀이 우리의 길을 비추어 온 빛이요, 우리의 마음 안에 부어진 구원의 능력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낼 수 없었던 한해를 보냈습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들도 많고, 아쉬운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들도 많고, 감사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모두가 사랑이었습니다. 은총이었습니다.
잠시 한 해를 돌이켜 보며, 감사를 드립시다. 세 가지 차원에서 감사를 드려봅니다.
<첫 번째> 감사는 베풀어준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온갖 돌보심과 보살핌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도움과 유익함을 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선의와 호의로 도움을 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곧 報恩之情의 감사입니다. 人之常情의 감사입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감사입니다.
<두 번째> 감사는 “있다는 사실”, 곧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존재 자체가 의미 있고 가치 있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곧 은총을 입고 ‘이미 구원받은 존재’임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미 용서를 입었고, 사랑을 받은 존재임에 대한 감사입니다. 곧 첫 번째 감사가 행위 차원에 대한 감사라면, 이 두 번째 감사는 존재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곧 구원을 위한 관계 안에 있음을 보는 눈입니다. 그래서 결핍과 부족, 결점마저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에서나 드리는 감사요,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사입니다.
<세 번째> 감사는 당신이 하신 일과 당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존재임과 동시에, 그것이 당신 구원의 섭리 안에서 안배되고 주어진 선물임에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승리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동행하심에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과 함께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동행에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동행하시되, 이미 이루신 당신의 구원으로 우리를 이끄심에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 분을 바라보며 드리는 예배요, 경배의 감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반겨 맞을 수 없는 한 해를 시작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나날들이 있다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라고 나날들이 다가옵니다. 사랑받아 왔기에, 이제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사랑에 힘입어 새로이 사랑을 희망해 봅니다. 새 날을 밝혀, 사랑으로 마중 나가야 할 때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 안에 빛을 불어넣으시고 어둠을 몰아내소서. 빛의 아들로 세상의 등불 되어 당신 빛을 비추게 하소서. 빛을 증언하여 세상이 당신의 말씀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영원
-송영진신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요한 1,1-2).”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한처음’이라는 말은, ‘창조 이전의 시간’,
또는 ‘시간 이전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시간은, 인간은 알 수 없는 ‘영원 속의 시간’입니다.
인간은 그 시간을 믿음 속에서 묵상할 수는 있지만,
그 시간에 대해서 알 수는 없습니다.
‘한처음’의 반대쪽에는 ‘종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시선에서는 반대쪽이라는 뜻일 뿐이고,
‘한처음’과 ‘종말’이 반대 개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말’은 ‘시간의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시작’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허무한 존재인 인간들에게
당신의 ‘영원’을 선물하시는 때가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종말 후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심판 때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이라는 시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과 ‘새해의 첫날’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든 말일 뿐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영원’이라는 시간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도 없고 새해의 첫날도 없습니다.
연도를 구분해서 부르는 일도 없습니다.
‘오늘’이 ‘영원’이고, ‘영원’이 ‘오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을 묵상하게 되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또 새해 첫날이라고 호들갑을 떨 이유도 없고,
지나간 시간들을 아쉬워할 것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을
겸손하게 감사드리면서, 또 세월과 시간의 흐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내일은 오늘보다 더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또 신앙인은 가는 세월이 무정하고 야속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항상 오늘을 인생의 첫날로 맞이하고,
인생의 마지막 날로 사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보면,
인간은 잠깐 살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은 허무한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활이고,
하느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돈, 권력, 세속의 명예 같은 것들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만일에 그런 것들을 얻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얻은 다음에는 움켜쥐고 있기만 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않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심판 때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이 말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입니다.
그 실천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실 ‘사랑’은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은 허무한 인간 존재 속에 숨어 있는
‘영원성의 씨앗’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사랑 실천’은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반대로, 사랑 없는 이기심과 욕심만으로 사는 것은
자기 스스로 ‘영원’을 버리고 ‘허무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묵시 22,13).”
이 말씀은, 예수님의 권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원래 하느님과 예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라고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시작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사람의 생명을 끝마치는 분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허무하게 사라지느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느냐? 를 결정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날에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실천했는가?”입니다.
지난 일 년을 결산하면서,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 재산이 얼마나 늘어났는가?
얼마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갔는가? 세속에서의 명예와 존경을 얼마나 누렸는가?”
같은 것만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허무한 일입니다.
‘새해의 삶’을 계획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2020년의 계획은 무엇인가? 생활의 목표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노력할 것인가?
만일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허무한 것들만을 얻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런 것들을 얻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2020년을 어리석은 하루살이처럼 살겠다고 계획하는 것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야고 1,11).”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1-18: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하는 말이 진실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그 당사자가 얼마만큼 성실하냐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험한 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있고 나의 생각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가? 백퍼센트의 효과를 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모든 느낌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인간의 말로는 부족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말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큰 영향을 끼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순간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며 어떠한 말을 어떻게 해서 얼마나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 왔고 해가 되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자.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 9)
-한상우신부-
우리를 빛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내어주시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믿음의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빛 앞에
겸손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은
고요히 우리 내면을
비추어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하여줍니다.
사랑의 처음과
삶의 끝에는 언제나
빛이 함께합니다.
빛이 우리를
안고 어둠을 안고
길을 밝혀줍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나게되는
참빛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빛의 힘을 믿습니다.
위안과 평화를
주는 빛이 우리
삶의 자리를
비추어줍니다.
빛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참빛이 세상에
드디어 왔습니다.

-오상선신부-
2019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받다"는 말씀이 줄곧 다가오십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지난 한해와 각자의 온 생애를 돌아보는 것도 참 좋을 듯합니다.
먼저 복음사가는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정작 오셨을 때는 과연 자기들이 내세우는 조건에 부합하는지를 따지느라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당신께서 사랑하신 백성에게 거부당하신 하느님의 마음이 아리게 느껴집니다. 이 구절에는 하느님의 상처가, 그 통증이 서려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주님께서 아무리 엄청난 축복을 지니고 오셔서 이를 나눠주려고 하셔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십니다.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들을 일부러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피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결코 사랑을 억지로 떠안겨서라도 받아들이게 강압을 행사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선물하신, 너무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유의지'를 순결히 지켜주고 싶으시니까요.
그러니 주님 편에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 얼마나 고맙고 기특하시겠습니까! 마치 타인이 우리의 진심을 제대로 알아들어 줄 때 느끼는 흡족함, 고마움, 대견함, 뿌듯함 등과 감히 비교해 봅니다.
그렇게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녀는 없지요. 아버지를 인정하니 자녀로 인정해 주십니다. 작고 보잘것없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 능력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 우리 존재에 생깁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꿰어차기까지 우리가 한 공로라고는 "받아들임과 믿음" 뿐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하느님 자녀 되는 권한에 더하여 우리는 또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최상의 은총,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총을 뜻합니다.
은총은 우리가 고를 수 없고 하느님에게서 강탈하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분께서 주시길 기다려야 합니다. 은총 수여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있으니까요.
제1독서인 요한 서간의 저자도 우리가 받은 것을 상기시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요한 2,20).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담한 선언인지요! 성경에서 보면 임금이나 예언자, 선지자들에게 기름부음이 이루어집니다. "기름부음받은자"는 그대로 메시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이니 이 말씀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위임 받은 대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분"께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의 위상이 얼마나 고귀한지 강조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제도 안에서 직무로서가 아니라, 각자가 받은 소명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믿는 이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된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1요한 2,20).
서간 저자의 대담성이 한층 더 증폭됩니다. 무지하고 부정하며 우매한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니요! 우리가 감히 주님의 모든 진리를, 진리이신 주님을 어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앎은 사랑입니다. 얕은 지식이나 정보, 꾀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면 깨닫는 바가, 아는 바가 생깁니다. 어떻게 앎이 생기는지 딱히 설명하기 어려워도 앎이 "있게" 됩니다. 그 아는 바가 "모두"에 이르려면 단 한 번의 사랑, 단 한 번의 일치로써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때까지 반복적이며 성실한 과정이 필요하지요. 죽는 날까지 항구하고 지난한 "받아들임과 믿음"의 노력말입니다.
받아들임은 주님 앞에 우리 존재를 입구가 널찍한 그릇처럼 둥그렇게 펼쳐 그분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용어가 무슨 전쟁 용어처럼 좀 과격해집니다만, 그분이 우리 존재에 "침투"하시도록, "엄습"하시고 "점령"하시도록 과감하고 담대하게, 자유롭고 관대하게 존재를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지요. 그 다음은 그분이 하실 것입니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은 합일과 일치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기름부음받아 거룩해진 우리에게 쏟아부어진 은총입니다.
지난 한 해, 아니, 우리가 긴 인생 여정을 거쳐 오늘 여기에 있기까지 그분께서 주시고 우리가 받은 무수한 사랑과 은총을 헤아리며 감사하는 올해의 끝날 되시길 바랍니다. 이 감사의 여정에 동무되어 주신 벗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한해 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화답송).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8)
성체가 하느님이라면 그 성체를 영하는 사람도 하느님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하느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하느님이 되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이 하시는 행동이 됩니다. 자주 “나는 하느님입니다!”를 고백합시다. 조금씩 저급한 행위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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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요한 복음서의 서문을 읽었습니다. 공관 복음서는 구약에 예언되시는 분, 이방인의 구원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은 차원이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듯이, 시간과 공간의 유한함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은 빛이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눈이 먼 사람은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틀에서는 말씀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영적인 눈을 뜨는 사람은 말씀을 볼 수 있고, 그 말씀이 진리이며, 진리가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거라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어른이 되고,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꿈을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나의 삶과 같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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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이 말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입니다.
그 실천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실 ‘사랑’은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은 허무한 인간 존재 속에 숨어 있는
‘영원성의 씨앗’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사랑 실천’은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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