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Margaret K 2019. 12. 27. 20:08

2019년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2,13-18)


A voice was heard in Ramah,
sobbing and loud lamentation;
Rachel weeping for her children,
and she would not be consoled,
since they were no mo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빛이신 그분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제1독서). 요셉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고, 자신의 안위가 불안한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근처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동·서방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을 없애려고 헤로데가 살해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공경합니다. 어떤 옛 교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기들은 말도 배우기 전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아기들은 싸울 줄 모릅니다. …… 그럼에도 이미 순교의 가지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갑니다.”헤로데의 잔인함은 백성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한 아기에게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를 더 잔인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헤로데는 악행과 폭력의 탈을 뒤집어쓴 듯합니다. 그의 마음에 고통과 눈물, 외침과 불평을 불러일으키는 살인적인 분노가 끓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당화할 수 없는 참극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악행의 잔혹함은 아무 권력도 없고 오로지 믿음만 강한 요셉과 대조됩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오늘 복음은 과거에만 얽매이지 않고, 지금도 발생하는 믿기 어려운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백만 명의 아이들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고, 폭력과 납치, 착취와 억압의 대상입니다. 갈수록 무감각해지고 무뎌진 마음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의 잔인한 무관심 속에 아이들이 ‘새로운 죄 없는 순교자들’이 되어 목숨을 잃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과 대립, 이념과 갈등으로 순진한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잔인함은 온 세상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하는 말을 듣고 악행의 탈을 쓴 임금과 그 어리석은 종들의 살인적인 행위에서 요셉이 보여 준 행동처럼, 그리스도인들과 마음이 착한 이들은 잔인함에 맞서 분개하며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언젠가 우연히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 이종격투기 선수 한 명이 나왔습니다. 많은 승리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선수였지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명이 달려들어도 나를 바닥에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대결을 했습니다. 이 선수에게 10명의 일반인이 덤벼들어서 쓰러뜨릴 수 있는지를 본 것이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선수이기 때문에 10명이 덤벼들어도 1명의 선수를 쓰러뜨릴 수 없었을까요? 호언장담했지만, 그 10명이나 되는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오랜 훈련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그 누구도 자신을 쓰러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많아지니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이를 무시하고 그보다 더 윗자리에 올라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이기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냅니다. 헤로데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 버린 사건을 기억합니다. 헤로데는 왜 이렇게 역사적으로 커다란 비판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까요? 자기만이 가장 윗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오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죄 없는 아기들을 무참하게 죽여 버리는 행동으로 나왔던 것이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의 울음소리, 그 부모와 가족들이 겪었을 통곡 소리가 지금까지도 울려 퍼지는 것만 같습니다.

한 사람의 욕심과 교만에서 나온 무참한 죽음을 통해 헤로데는 그의 의도대로 가장 큰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세상의 온갖 영예를 누리면서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인 이상 그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손가락질받는 포악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면서 세상 안에서 강하고 큰 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 안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진정으로 강하고 큰 사람입니다.


의인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는 도끼에도 향기를 묻힌다(조르주 루오).



에펠탑

프랑스 최고의 작가로 추앙받는 ‘기 드 모파상’은 누구보다 파리의 에펠탑을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00미터짜리 흉물 고철 덩어리가 파리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망친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모파상은 에펠탑 안의 레스토랑에서 자주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싫어했는데 왜 그 안에서 식사를 했을까요?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에펠탑 안의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에펠탑이 세워진 지 20년 뒤에 이 탑을 철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철거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에펠탑을 세우고 나서는 얼른 철거하라고 격렬하게 데모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철거하지 말라고 격렬하게 데모합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 보다 보니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관한 생각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런데 생각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오히려 더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면 어떨까요? 특히 부정적인 모습보다 긍정적인 모습을 보려고 노력하면 어느 순간 함께 해야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관계의 친밀도는 상대를 무엇 때문에 만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전삼용신부-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거지가 다가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거지를 바라보면서 “형제여, 내게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금전이 없으니 용서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고맙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형제여’라고 불러준 것이 나에게는 금전을 준 것 보다 더 기쁩니다.”라며 기뻐했습니다. 한 번을 만나도 평생 만난 인연보다 더 친밀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엔 그 친밀함의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시작하여 자녀들, 친구들 성당 교우들과 직장 동료들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주관에 따라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내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보다 소원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그 긴 시간의 관계는 무엇이었나?’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이혼하면 그냥 남남보다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쏟는 것이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허사가 되지 않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무엇이 관계의 친밀도를 높이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가 진정 친밀한 관계일까요? 아무래도 이해타산 없이 하늘이 맺어준 관계가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보통 가족 간에는 이해타산이 없기 때문에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가족이니까요!”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장 동료들에 대해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먹고 살아야하니까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타산이 섞여있는 관계는 친밀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해타산이 없는 관계란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하늘의 섭리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만나는 관계가 더욱 친밀도가 높은 관계인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자신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관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를 어떠한 목적으로 보며 만나는 이해타산적인 만남입니다. 위 이야기의 톨스토이처럼 이웃을 형제로 바라보는 ‘나와 너’의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너’와의 관계가 완전해지려면 상대를 ‘형제’로 만들어준 초월자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초월자를 부버는 ‘영원한 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관계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명으로 여기기에 누구를 만나든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삽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순교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수님 때문에 순교하였기에 예수님과 매우 친밀도가 높은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면 될 수 있는 한 보상을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도록 섭리하셨다면 그 아기들을 그냥 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우리보다 더 나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병을 고치기 위해,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도깨비 방망이 정도의 ‘그것’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너’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건처럼 대한다면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땐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관계를 온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너, 영원한 너로 보아야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모든 아기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그분만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것이 큰 복이었습니다. ‘영원한 너’가 없는 관계는 남는 것이 없는 관계입니다. 그저 상대를 이용하는 관계밖에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가 예수님 때문에 맺어질 수 있다면 이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에서 운전하면서 교통법규를 잘 지키게 됩니다. 준법정신이 있기도 하지만, 워낙 범칙금이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조심해야 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학교 앞이나, 통학버스 앞입니다. 학생들을 먼저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판단력이 어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길에서 작업하는 사람입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작업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보호받아야 합니다. 길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차량에 우선권이 있다고 합니다. 다양한 민족이 살아가는 미국 사회에서 국가의 공권력은 존중받아야 하고,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아이들이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풍요로운 이 시대에도 가난, 질병, 기아에 방치된 아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입양원에서 새로운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의 상황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인격과 꿈을 키워주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능력과 기술을 먼저 가르치기도 합니다. 나눔, 배려, 사랑을 배우기보다는 경쟁, 능률, 성공을 배우기도 합니다.

 

어떤 분이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못 느낀다면, 아이가 추위를 못 느낀다면, 아이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전에 신체장애를 얻을 것입니다. 고통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통은 소중함을 알게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는 출산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쓴 작품들이 무척 소중할 것입니다.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장만한 집이 소중한 것은 그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어진 집은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소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통은 공동체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소방공무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른 새벽 환경미화원이 거리를 쓰는 것은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저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것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철저한 섬김이요, 나눔이었습니다. 권력을 지녔지만 사용하지 않았고,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성탄이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아기 예수님 탄생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저 세월이 흐르면 자동적으로 돌아오는 달력상 다른 날자와 똑같은 한 날자에 불과합니다. 그저 가슴 좀 설레고 파티를 열고 선물 주고 받는 연중 한번 있는 이벤트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삶의 전부일수도 있습니다. 그분 탄생으로 인해 내 삶이 크게 요동치고 뒤집히며 인생이 뒤바뀌는 기적같은 대사건이 될수도 있습니다. 더할나위 없는 큰 기쁨이요 환희, 은총이요 축복으로 다가올수 있습니다.

 

 헤로데의 경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충격적 공포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알량하지만 현재 붙들고 있는 왕권을 놓치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분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왕으로 좌정하시면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분께로 쏠리게 될것이고, 자신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고 마침내 축출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인류 역사 안에 가장 참혹한 살상극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헤로데나 나치,일본군국주의나 군사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대살륙 사건의 배경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인간의 과도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 힘에 대한 욕심, 지배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그 욕심의 끝은 죽음이요 멸망입니다.

 

 천천히 살펴보니 우리 인류 역사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봉사한 위인들이 등장했는가 하면, 지나친  권력욕이나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역사 안에 큰 오점으로 남겨진 불행한 인물들도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그런 인물을 찾아볼수 있는데, 부실한 자신의 왕권과 불안한 지지기반에 늘 전전긍긍했던 헤로데가 그랬습니다. 안절부절 우왕좌왕하던 헤로데는 인류 역사에 지울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한 그릇된 결정을 하고맙니다.

자기보다 더 크게 될 왕을 미리 제거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괜히 아무런 죄도 없는 두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튿날 날이 세니 그야말로 세상은 난리가 나있었습니다. 금지옥엽, 애지중지 키워왔던 애기들, 장래 집안의 기둥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살해되고 만 것입니다.

집집마다 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아기들을 품에 안고 대성통곡을 터트리는 부모들의 울음 소리가 나라 전체를 휘감았습니다. 한 그릇된 지도자의 질투심과 시기심, 권력욕과 그릇된 판단이 상상을 초월하는 대학살로 이어진 것입니다.

오늘 날도 상황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나라의 지도자, 정치인들의 지나친 야욕과 그릇된 결정은, 언제나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 국민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정치 현실이나 정치인들의 처신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헤로데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릇된 지도자들 앞에서 국민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명확하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정치 권력이 소수 특권층 개인의 이득을 옹호하는 목적으로만 행사될 때 미래는 위태로워집니다.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와 존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바탕으로 정치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정치는 참으로 사랑의 탁월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지도자들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희생당한 아기들, 오늘날도 불의한 정치로 인해 세계 도처에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순교자의 피

 -반영억신부-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 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낙태건수는 정부추정치만 년 40여만 건에 이릅니다. 출생아는 년 43만 건이라고 하니 소리 소문 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이야기가 뉴스거리였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마다 않고 지체 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 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이영근신부-


지금 우리는 기쁨의 축제인, 성탄 8부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8부 축제를 시작하면서 탄생의 기쁨을 기념하는 축제에 이어, 곧바로 죽음의 고통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제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을, 오늘은 죄 없이 죽은 아기들의 죽음을, 기쁨의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기 예수의 지상탄생의 기쁨과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과 꼭 닮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천상탄생의 기쁨을, 그리고 예수님보다 먼저 순교한, 훗날 예수님께서 꼭 닮게 될 무죄한 어린이들의 천상탄생의 기쁨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발생한 무죄한 아기들의 이 죽음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일입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 첫 순교자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순교는 삼중의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요, 그 어머니들의 순교요, 동시에 마리아의 순교입니다. 곧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아픔마저 끌어안으셨던, 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순교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또 다시 십자가의 아들의 순교와 함께 또 다시 순교를 당할 것입니다.

사실,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그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고통과 죽음은 그들에게는 한 순간이고 고통의 끝이었겠지만, 그들을 잃은 어머니들에게는 그쳐지지 않는 애끊는 고통과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아기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하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지고 아팠을 것입니다.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죄 없이 죽은 모든 아기들의 어머니들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서라도 다른 많은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했던 마리아는 때가 되면, 또 다시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가는 당신 아들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이것은 참으로 진정한 사랑의 순교일 것입니다. 아기 예수도 훗날, 그렇게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사랑으로 순교를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하잖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싸우기도 전에 승리하도록 하시고, 곧바로 거룩한 삶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죽은 죄 없는 아기들을 맨 먼저 그리스도를 증언한 첫 순교자들로 삼으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은 아기들그 아기들의 어머니들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인류 구원에 동참시키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의 구속신비를 드러내는 기쁨의 축일이 됩니다.

한편, 마태오 복음사가는 헤로데가 자행한 이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을 두고,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파라오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의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 곳 없이 반드시 이루지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졌습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그토록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13-18: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아기 예수님은 왜 이집트로 피신하셨을까? 그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호세 11,1)는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라 한다. 주님께서도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피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되었을 때 구원의 성사가 되기 위해 피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피신해야할 때조차도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피하셨다. 박해가 닥치면 믿음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달아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달아나지 않으려고 하다가 주님을 부인하였고, 요한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달아난 것이다. 아기 예수님은 동방박사들을 믿음직한 종들로 바꾸어 놓으셨다.

 

아기를 찾으려 한 것이 헤로데였는가, 아니면 악마가 헤로데를 통해 작용한 것일까? 악마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어떤 일을 하실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악마는 유대인들을 부추겨 그분을 거스르도록 하였고, 모사꾼인 그 악마는 아기일 때 그분을 이기려고 헤로데를 움직였다. 그는 아기에게서 앞으로 그분의 표상이 될 십자가, 우리를 위한 가장 위대한 승리의 깃발을 빼앗고자 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손에 잡히셨다면, 그분의 육신의 삶은 끝이 났을 것이다. 그것은 섭리로 마무리 되었다.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베들레헴으로 전갈을 보내,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이 아기들이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일까? 이 아기들의 죽음은 앞으로 오랜 기간 이어질 인간의 사악함의 시작이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18) 라마는 사울왕의 도성이었고 사울은 벤야민 지파였다. 벤야민은 라헬의 아들이며 베들레헴 가까이 라헬의 무덤이 있다. 아기들이 라헬의 묘비가 있는 베들레헴에서 학살당했기 때문에 라헬이 운다고 하는 것이다.(창세 35,16-20)

 

여기서 마태오는 아기들의 눈물을 울음소리, 어머니들의 비탄을 통곡소리로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큰 것을 알 수 있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 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 16)
-한상우신부-

소중한 생명의
새싹을 무참히
짓밟는 너무나
아프고 슬픈 사건이
우리의 역사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똑같은
아픔을 반복합니다.

성찰(省察)속에서
성탄이 빛납니다.

살인으로도
막을 수는
없는 구원의
강생입니다.

살인의
역사 안으로
우리의 역사 안으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십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이토록 아프고 힘겹고
고통스럽습니다.

하느님 모상을
닮은 사람이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한없이 잔인한
살인자로 추락합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의 욕망을 위한
희생물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살인의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탄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허황된 욕망을
정화합니다.

우리모두는
생명을 위한
사람이 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다시금 생명으로
돌아가는 성찰과
감사의 시간입니다.

역사의 과오를
멈추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를 기억합시다.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가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눈물겨운 성탄입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아기를 잃은
부모들의 통곡 소리를
기억합니다.

성탄은 이와같이
인간의 역사를
비추어줍니다.


-오상선신부-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가슴 아픈 죽음의 현장을 맞닥뜨립니다.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입니다.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사실 이 비극의 단초는 순진하게도 왕궁을 찾아간 박사들이 제공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서슬 퍼런 권력자 앞에서 임금의 탄생을 운운했으니 말이지요. 지금 누구 탓인지를 따질 때는 아닙니다만, 그만큼 성경이 전하는 비극이 처절해서 그렇게라도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마태 2,13).

오늘도 요셉은 꿈을 꿉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무시하고 치워버릴 수 있는 게 꿈이지만 요셉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꿈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를 접했고 하느님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믿었다는 것, 믿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발달한 시대도 아니니, 요셉은 오로지 꿈에 의지해 길을 떠납니다. 산모와 갓난아기까지 보호하면서 움직여야 하니 녹록치 않습니다. 게다가 "내가 너에게 일러줄 때까지"라니 기약도 참 모호합니다. 결국 그는 이국 땅에서 난민의 처지로 딸린 식구들을 보살피며 고된 삶을 충실히 꾸려가는 가운데 언제일지 모를 다음 꿈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순종함으로써 순종의 열매를 체험한 이는 순종을 멈출 수 없습니다. 당장은 기약 없는 불안정함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믿고 따릅니다. 그를 지배하는 메카니즘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를 움직이는 건 인간적 지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참으로 처참하고 참혹한 사건이 펼쳐졌습니다. 한 폭군의 야욕이 한창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기들을 무참히 난도질합니다. 아무 죄 없는 아기들이 메시아의 싹일 수도 있다는 이유로 생명을 잃어야 했지요. 그들은 아기 예수님의 생명 앞에서 온 몸으로 보루를 치고 막아선 가녀린 파수병들이었고,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그 메시아다" 하며 적들의 시야를 가려준 숨은 공신들입니다.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 13,14).

겉으로는 끝 모를 부와 권력을 누리고 산 헤로데지만 어찌 보면 참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하느님 축복의 변곡점이 되니 말입니다. 대놓고 축하하지는 않아도 헤로데 치하에서 잔인무도한 폭정을 겪은 이들에게 그의 죽음이 또 다른 복음이었을 테니까요.

제1독서에서 요한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친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1요한 1,7).

빛 안에 사는 이는 서로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친교 안에 있는 이였습니다. 그의 즉각적 순종과 충실한 보호가 말해주듯 하느님과 친교 안에 사는 이였고, 또 가족인 마리아, 예수님과도 친교를 사는 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헤로데는 누구와도 친교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 이익을 위해 극심한 불화와 관계 파괴를 조장하며 살다 간 어둠의 사람입니다. 진리이신 절대자와 친교를 맺지 못했기에 사람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었지요.

빛 안에 있다는 건 빛이신 그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속속들이 파고들어 세포마다 밝히고 정화하는 빛과 이미 하나 된 상태지요. 이미 주님과 친교 안에 있는 영혼입니다.

물론 죄인에 불과한 우리가 온전한 빛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친교를 나누는 이를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1요한 1,7) 준다고 하시니 믿어서 손해볼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믿어야 구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빛 안에서 주님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빛이신 그분 안에 참여하는 존재인 것이지요. 이처럼 빛 안에서 주님과 친교하는 이는 형제자매들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요셉이 보여주었고, 죄 없이 순교한 아기들이 참여한 길이며, 헤로데는 놓친 축복입니다.

오늘도 빛 안에서 믿고 순종하고 친교하는 성탄 축제일 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2,13-18)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거지가 다가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거지를 바라보면서 “형제여, 내게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금전이 없으니 용서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고맙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형제여’라고 불러준 것이 나에게는 금전을 준 것 보다 더 기쁩니다.”라며 기뻐했습니다. 한 번을 만나도 평생 만난 인연보다 더 친밀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쏟는 것이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허사가 되지 않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무엇이 관계의 친밀도를 높이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가 진정 친밀한 관계일까요? 아무래도 이해타산 없이 하늘이 맺어준 관계가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보통 가족 간에는 이해타산이 없기 때문에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가족이니까요!”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장 동료들에 대해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먹고 살아야하니까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자신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관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를 어떠한 목적으로 보며 만나는 이해타산적인 만남입니다. 위 이야기의 톨스토이처럼 이웃을 형제로 바라보는 ‘나와 너’의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너’와의 관계가 완전해지려면 상대를 ‘형제’로 만들어준 초월자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초월자를 부버는 ‘영원한 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관계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명으로 여기기에 누구를 만나든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삽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순교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수님 때문에 순교하였기에 예수님과 매우 친밀도가 높은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면 될 수 있는 한 보상을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도록 섭리하셨다면 그 아기들을 그냥 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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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릇된 지도자들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희생당한 아기들, 오늘날도 불의한 정치로 인해 세계 도처에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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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기쁨의 축제인성탄 8부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8부 축제를 시작하면서 탄생의 기쁨을 기념하는 축제에 이어곧바로 죽음의 고통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그제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을오늘은 죄 없이 죽은 아기들의 죽음을기쁨의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우리는 아기 예수의 지상탄생의 기쁨과 동시에예수님의 죽음과 꼭 닮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천상탄생의 기쁨을그리고 예수님보다 먼저 순교한훗날 예수님께서 꼭 닮게 될 무죄한 어린이들의 천상탄생의 기쁨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발생한 무죄한 아기들의 이 죽음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일입니다비록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못했지만분명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 첫 순교자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순교는 삼중의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곧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요그 어머니들의 순교요동시에 마리아의 순교입니다곧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아픔마저 끌어안으셨던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순교입니다또한 마리아는 또 다시 십자가의 아들의 순교와 함께 또 다시 순교를 당할 것입니다.

사실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그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아기들의 고통과 죽음은 그들에게는 한 순간이고 고통의 끝이었겠지만그들을 잃은 어머니들에게는 그쳐지지 않는 애끊는 고통과 슬픔이었을 것입니다더구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하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지고 아팠을 것입니다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죄 없이 죽은 모든 아기들의 어머니들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할 수만 있다면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서라도 다른 많은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이토록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했던 마리아는 때가 되면또 다시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가는 당신 아들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이토록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이것은 참으로 진정한 사랑의 순교일 것입니다아기 예수도 훗날그렇게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사랑으로 순교를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하잖게 여기지 않으십니다그들이 싸우기도 전에 승리하도록 하시고곧바로 거룩한 삶을 누리도록 하십니다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죽은 죄 없는 아기들을 맨 먼저 그리스도를 증언한 첫 순교자들로 삼으십니다.

그리하여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은 아기들과 그 아기들의 어머니들과 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인류 구원에 동참시키십니다그래서 오늘은 슬픔을 넘어서하느님의 구속신비를 드러내는 기쁨의 축일이 됩니다.

한편마태오 복음사가는 헤로데가 자행한 이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을 두고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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