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Margaret K 2019. 12. 25. 20:35

2019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스 테파노 성인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뽑은 부제이다.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의 하나로 뽑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일뿐 아니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진리를 증언하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또한 유다인들과 벌인 논쟁에서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사도 6,8)는 지혜로운 언변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함으로써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오 10,17-22)

 

When they hand you over,
do not worry about how you are to speak
or what you are to say.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St. Stephen the First Marty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평화를 맛보지만, 그를 죽이려는 자들은 화를 참지 못하며 평화를 잃어버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겠지만,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사랑의 복음을 전한 첫 열매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아드님을 지상에 파견하시고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오늘부터 여러 증인들의 기념을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강생하신 목적, 곧 사람들을 사랑으로 충만한 하늘로 데려가시려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대화에 속하는 복음은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곁에 영원히 함께 계시고, 그분의 영을 통하여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스테파노 첫 순교자는 스승을 본받아 희생된 첫 어린양입니다. 가말리엘 학파에서 바오로의 동료였던 스테파노는 사도들의 설교를 충실히 받아들였고 일곱 부제 가운데 사랑의 봉사를 위하여 선발되었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복음을 가만히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반대와 폭력이 쏟아져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믿음이 강한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주시고 그 박해자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청하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목숨을 잃는 희생의 순간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증언하였고 계속해서 증언하는 이들의 행렬을 이끕니다. 믿음의 영웅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뇌 신경학자 조나 레러는 6년간 부부싸움을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서로 마주 보고 싸운 부부가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이혼하지 않을 확률이 2배 이상 높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주 보지 않게 되면 싸우지 않아서 더 괜찮을 것 같지만, 회피나 무시가 오히려 더 큰 싸움으로 악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원한다면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먼저 마주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주 보는 것에서 모든 관계는 시작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마주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소위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마주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합니다.

이 마주함이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만 필요한 것일까요? 주님과도 마주해야 합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지금은 영적인 신앙생활보다는 세속적인 물질의 획득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때라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다고, 주님께 의지하는 모습은 자신의 약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렇게 주님을 외면하고 회피한다면 주님과 좋은 관계가 형성될 리가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생길 수 없으며, 주님의 말씀이 뜬구름 잡기식으로만 들려서 더욱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참 기쁨을 발견합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희망 안에서 참 행복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님과 마주하면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분명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스테파노 순교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주님을 증거하다가 돌을 맞아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면서 주님을 등진 것이 아니라, 주님과 철저히 마주하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순교하는 순간 하늘이 열린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마주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습니다.


절망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독제는 믿음이다(키에르케고르).



너무 귀한 존재인 우리

어떤 사람이 진주 목걸이를 골동품 가게에서 500달러에 구매했습니다. 오래되고 낡아 빛바랜 목걸이지만 그래도 그 자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500달러면 비싼 느낌이 들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계산했습니다.

며칠 뒤, 어떤 사람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자신에게 목걸이를 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격으로 자그마치 5만 달러를 부릅니다.

“색깔도 다 바랜 진주 목걸이인데 왜 그렇죠?”라고 묻자, 이 사람은 돋보기로 진주 목걸이의 한 부분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황제 나폴레옹.”

아주 많이 낡은 목걸이의 가치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의 손길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님의 손길이 묻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까지 오신 주님 사랑의 손길이 너무나도 많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낮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공연하듯 말하라

-전삼용신부-


제가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려본 영화는 ‘에비타’(1996)입니다.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의 별명입니다. 뮤지컬을 영화화 한 것인데 주인공은 마돈나였습니다.

      에비타는 창녀와 같은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영부인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다 생을 마쳤습니다. 그때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때였기 때문에 약간은 불안하던 시기였는데 앞으로의 나의 미래가 될 것 같기도 해서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사생활이 약간은 문란한 것으로 알려졌던 마돈나가 아르헨티나에서는 거의 성녀처럼 추앙받는 영부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좀 안 어울려보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의 연기와 노래에 홀딱 빠져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돈나의 영화를 보며 그렇게 감동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만약 마돈나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저에게 영향을 주려고 했다면 저는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돈나는 좋은 대본으로 공연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적어도 그 공연을 하는 때는 마돈나가 사라지고 에비타가 살아난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로는 누구를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그저 잔소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대본으로 공연하듯 살면 큰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대본으로 공연하듯 사신 분입니다. 그 대본이 곧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당할 때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런데 성령께서 누구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기념하는 스테파노 성인처럼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한 이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신을 온전히 봉헌했기에 당신 목소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가득 차 자신을 고발하는 이들 앞에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스테파노는 그들에게 이끌려 돌에 맞아 순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명작이 되어 하늘나라에 걸리게 됩니다.

      이 세상을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성령에 이끌려 연극과 같은 공연을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봅시다. 연극이 끝나는 때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 뒤에 그 연극 공연을 잘 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됩니다. 당신의 극본대로 잘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느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대사를 대신 읽어주는 공연장입니다.

      공연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내가 하는 대사를 통해 내가 배우고 더 믿게 될 것입니다. 마돈나도 공연하며 에비타의 삶을 배웠을 것입니다. 공연하듯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대사를 통해 자신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말의 진정성은 자신의 생각으로 말할 때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메시지대로 말할 때 말의 진정성이 생깁니다. 내가 개입된 말이 진정성 없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좋은 공연으로 만들어봅시다.


-조재형신부-


제가 있는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무실에는 평화(平和)’라는 글이 벽에 걸려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직접 써주신 글입니다. 31년 전에 시작한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이 미주 지역의 신앙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평화를 전할 수 있도록 추기경님께서 직접 써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 감사드리며,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추기경님의 자상하신 모습이 기억납니다. 1990년입니다. 부제 서품을 앞둔 신학생들은 추기경님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저도 면담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어떤 사목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서품성구는 무엇으로 정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긴장했던 마음은 풀어졌고, 저는 군종 사목이나, 청소년 사목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품성구는 시편 126장의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을 곡식을 얻으리라.’를 정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추기경님의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2000년입니다. 저는 적성성당의 본당신부로 있었습니다. 여름 어느 날, 추기경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대림 특강과 미사를 청하였습니다. 10월이 되어도 연락이 오지 않아서 포기하려 했을 때입니다. 외국에 다녀오신 추기경님께서 편지를 보셨고, 128일에 오시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오신다고 하시니 기쁨도 있었지만, 걱정도 되었습니다. 신자들, 군인들, 지역 주민들로 성당은 꽉 찼습니다. 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기에 추기경님께서 와 주신 것 같았습니다. 감사했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2019년 신문사 벽에 걸린 추기경님의 평화라는 글을 보면서 추기경님과 작은 인연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시간으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다음 날에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세상이라는 시간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것들에 묶여있는 우리에게 하늘의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무엇일까요? ‘, 명예, 권력입니다. 화려하게 보이지만 곧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거짓, 모함, 폭력, 억압이 필요합니다. 욕망이라는 것들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늘의 것들은 무엇일까요? ‘사랑, 희망, 믿음입니다.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공기와 바람이 소중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겸손, 희생, 친절의 거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나의 욕심이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웃의 아픔과 이웃의 고통을 먼저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스테파노를 통해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길이기도 합니다.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죽음의 순간에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란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순교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끝까지 견디는 이

 -반영억신부-

 

성 치뿌리아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존재 자체는 희망과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믿음이 그 열매를 맺으려면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그러나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인내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시는데 나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화를 내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는 것은 그저 구호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갚아야 속이 후련합니다. 내 자신이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남을 쉽게 그리고 엄하게 판단하면서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에 스테파노는 깨우침을 줍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해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고 마침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사실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이는 바로 나보다 잘난 꼴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가득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59-60)하고 외쳤습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었기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할 수 있었고 오히려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할 뿐입니다. 스테파노는 그 몫을 해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성 에드워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십자가위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은 양순함”(마태10,16)으로, 강한 것을 부드러움으로 이깁니다. 사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통을 감당하고 용서를 당연히 여기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박해와 모욕을 끝까지 견디라고요?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고 스테파노가 그 길을 따랐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이 그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인내심을 잃어버릴 때 기억하십시오! 죽음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그리고 스테파노와 에드워드…성인성녀들을! 그리고 특별히 나의 결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참아 주시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구원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어리석음과 부족함, 영적으로 메마른 이들과 심지어는 사악한 이들까지 참아 견뎌야 합니다”(함께야). 왜냐하면 “하느님은 최악의 상황에 놓인 우리들까지 언제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더라도 일을 완전히 망쳐 놓더라도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탄생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천상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또한 그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인간)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오심으로 얻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이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서서 기도했지만, 원수들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사도 7,60 참조),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 그것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송영진신부-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5-60).”

스테파노는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이기도 하지만,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을 목격하고 증언한 첫 증인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예수님 승천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것만 보았고,
그 후의 모습은 못 보았습니다.
그랬는데 스테파노가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고,
그것을 증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도행전을 바칠 때마다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느님과 구분되면서도 동등한 위치에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스테파노는 앉아 계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는데,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모습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셨다는 것은,
스테파노가 구원을 받았음을, 또 영원한 생명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테파노의 증언은,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스테파노의 증언에 대해서, “그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는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라고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테파노의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을 바탕으로 해서 그 증언을 믿을 뿐입니다.
‘증거’가 없어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순교할 때에 스테파노가 본 것을 보고,
스테파노와 같은 증언을 한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한국 순교자들 중에도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을 보면,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사도 바오로’ 라고 불리게 될 ‘사울’입니다.
스테파노 순교자가 흘린 피는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사울이라는 청년의 영혼 안에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라는 말에서
‘증인들’이라는 말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었다고
거짓 증언을 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신성모독죄를 지은 죄인에게 돌을 던질 때에는
증인들이 가장 먼저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돌을 던지기 전에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의 발 앞에 둔 것은,
사울이 박해자들을 지휘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사울은 박해자들의 두목이었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를 박해하게 됩니다(사도 8,3).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극적으로 회개했고,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결국 그 자신도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느님의 섭리’를 잘 나타냅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고, 허무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2-23).”
이 말씀에서,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아도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약속입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은, 순교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순교는 신앙을 증언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물론 순교는 신앙을 증언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그래도 박해를 피할 수 있다면 다른 곳으로 피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따라서,
스테파노의 순교 후에 교회가 큰 박해를 받기 시작했을 때,
당시의 신자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서 각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사도 8,1).
그리고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신자들은 숨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계속했고(사도 8,4),
그리스도교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박해가 복음이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한 것도 역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 순교자들도 위대하지만,
박해를 피해서 깊은 산속 같은 곳으로 가서 교우촌을 만들고
신앙생활을 계속한 분들도 위대합니다.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있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없애려고 해도 절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마지막 승리는 예수님 쪽에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 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나 또 어디서나 박해를 받으며 살아왔다.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들이 법정에서나 형장에서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그들의 변론은 현장에 있던 박해자들을 감동시키고 반론을 펴지 못하게 한 적도 많았던 것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굳은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7)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19-20)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하고 걱정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하고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기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나에게는 신앙심이 없다고 자책을 한다.

 

그러나 매 순간을 우리의 몸으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의 싸움을 충실히 해 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 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10, 19)

-한상우신부-

걱정이 아니라
내어맡기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제대로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기다림 뒤에
탄생이 오듯
믿음 뒤엔
평화가 옵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참된 은총입니다.

가장 중요한 은총은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사랑또한 성령에
힘 입지 않고서는
뜨거워질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성탄과 순교또한
성령을 통한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성탄과 순교는
지극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성탄과 순교는
같은 믿음의 길을
하나가 되어
걸어갑니다.

그때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생명의 의미와
목적은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던 첫 순교자
스테파노처럼
우리또한 우리
본연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길
간절히 청합니다.

성탄과 순교또한
사랑에서 출발하고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만나는
사랑과 봉헌입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뜻은
우리의
걱정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빛나는
사랑의 봉헌입니다.


-오상선신부-


교회 전례는 성탄 축제의 기쁨으로 일렁이고 있는 우리를 마치 시기라도 하는 듯, 스테파노의 죽음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사도 7,54).

초대 교회 때 일곱 봉사자 중 하나로 뽑힌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사도 6,8)하여 "큰 이적과 표징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의 적대자는 그런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어 결국 그에게 돌을 던져 목숨을 빼앗지요.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을 대항할 수 없었다"(사도 6,10).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사도 7,55).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에서 재차 '성령'이 언급되고 있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주님의 승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기술된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천 년 전 성자의 강생으로 구약, 성부의 시대에서 신약, 성자의 시대로 넘어옵니다. 그리고 성자의 승천 이후 성령, 교회의 시대로 이어졌지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며 하느님 백성을 이끌고 계십니다. 교회 전례는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제 우리가 맞이한 성탄 바로 다음 날에 교회 역사 초입의 사건을 조명하며 우리의 힘을 북돋아 줍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제자들이 겪게 될 고난의 길을 예고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도움을 약속하십니다.

태초에 어둠과 혼돈의 물 위를 감돌던 영, 판관들과 예언자들을 일깨우시던 영, 성자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시고 그분 공생활 중에 함께하시던 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신 그 영이십니다. 또 오순절에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불꽃 모양의 혀들"(사도 2,3) 모양으로 내리신 그 성령이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영께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가 그분의 자유로운 활동에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해 온 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삶이 세속적인 꽃길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 먼저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인데 우리가 달리 무얼 욕망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박해와 미움,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견디라고 하십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간적 힘으로는 단 일 분 일 초도 못 견딜 일이지만 성령의 힘으로 인내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끝은 구원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스테파노는 자신의 영을 주님께 넘기고, 그가 방금 유심히 바라보았던 성부와 성자의 현존 상태, 곧 천상으로 들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산화한 첫 순교자로서 스테파노는 사랑하는 성 삼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이 지상에서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으면서도 피하고 싶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연 질긴 동반자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함께라면 동행이 영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이처럼 성령께 모든 걸 맡기고, 삶이 쏟아내는 고통의 파편들을 성령과 함께 묵묵히 견디어 나가는 동안 이루어지는 기적이고 신비일 겁니다.

성탄 팔일 축제 중 둘째 날인 오늘, 우리는 구유 속 연약한 한 아기와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함께 바라봅니다. 세상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찬 응답이 이 아기라면, 이 아기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응답이 스테파노의 증거입니다.

어제 미사를 봉헌하며 저마다 준비한 구유 예물을 봉헌하셨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구유 안의 예수님을 경배하며 드릴 예물은 무엇보다 이 믿음과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첫순교자 성 스테파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성 스테파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2016년 12월 26일 월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오 10,17-22)


사람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해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고 마침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사실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이는 바로 나보다 잘난 꼴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가득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59-60)하고 외쳤습니다.

 성 에드워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십자가위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은 양순함”(마태10,16)으로, 강한 것을 부드러움으로 이깁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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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 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고 하신다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조욱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