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Margaret K 2019. 12. 24. 20:22

2019 12 25일 수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한다(제1독서).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제2독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낮 미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더욱 깊이 묵상하게 해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시온에 오신다고 전합니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참으로 주님 성탄 대축일은 모든 이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당신 아드님의 탄생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심오한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됩니다. 이 작은 고을에 감추어졌던 사건, 곧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든 민족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제2독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이의 위대함, 곧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옛날처럼 당신 종들과 예언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드님께서는 우리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탁월한 방식으로 당신 현존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인류를 위한 구원 계획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의 맏아드님으로서 하느님과 유일한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복음에서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음을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생명을 위한 빛입니다.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머무르고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빛을 드러내시고 당신 생명을 전하시고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다

-임상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로마 황제로부터 세금 부과를 위한 호구 조사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초라한 목자들에게 전해진 구세주 탄생에 관한 소식이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루카 2,1.3.6-7)

이 둘은 역사적으로 같은 시기에 전해진 소식이지만 전자는 서민들에게 더 이상 숨 쉴 자리마저 허락하지 않는 절망적 소식이고, 후자는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희망의 기쁜 소식이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깨지면 매우 실망한다. 이 실망감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절망이 된다. 이스라엘이 그랬다. 끝없는 로마의 폭정과 탈취 그리고 유다 지도자들의 파렴치로 백성 모두가 고통과 절망감으로 몸부림쳤다. 이때 하느님은 희망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당신 백성 모두를 어루만지신다.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돈 없어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 모두 나에게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이하) 이 기쁜 소식은 그동안 삶의 질고와 돌이킬 수 없는 절망감에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희망을 주었고, 버겁지만 다시 한 번 삶의 의미를 찾게 하였다.

예수께 대한 희망은 예수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한다.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미래가 새롭게 잉태되고(마태 1,23), 우리의 삶과 역사는 ‘임마누엘’, 즉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시간 속에서 새로워진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탄의 참된 의미이다.

우리를 위해 강생하신 예수 안에서 과거의 생활, 관계, 소유 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과 얽힌 모든 삶은 다 버려져야 한다. 대신 새로워지려는 마음, 새로워지겠다는 삶의 의지로 예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등 돌렸던 우리의 삶을 전환해야 한다.

파스칼은 “성탄절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마지막 카드가 도착한 날”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성탄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다. 그러기에 예수 탄생의 소식은 사랑이 메마르고 이기적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메시지이다.

이 사랑은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그런 상호주의 사랑이 아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그냥 무조건 내려주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며,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하고 필요한 것인지 성탄으로 시작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사랑을 완성하신다.

올해 성탄절은 예수님을 비루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게 만든 옛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으면 한다. 모든 사람에게 참 희망이 되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먼 길을 찾아 믿음의 황금과 기도의 유향 그리고 희생의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한 동방박사의 모습으로, 일상의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예수의 탄생을 알리던 목자의 모습으로 아기 예수를 맞이하고 이 소식을 널리 알리는 새사람이기를 청해본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함께 계시다

-김혜윤수녀-


누군가의 모습을 관찰하고 감상하며 그저 마음의 우상처럼 여기고 살고 싶다면 먼 거리가 필요하겠지만, 삶의 매 순간을 함께 하며 진정성 있는 도전과 기쁨으로 일상을 채우고 싶다면 가까이 다가가려는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제 대림(待臨)의 절정에 도달한 교회는 멀리 계시던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성큼 가까이 다가오심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대림 4주일의 성경 본문들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는지 그 민감하고도 신비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지극히 높이, 그렇게 멀리에 계시던 ‘하느님’께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시고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다는 내용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가문과 족보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두에 두고(1,1-17) 이어서 바로 오늘의 본문을 배치합니다.(1,18-24)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장엄히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이던 요셉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법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수태고지’.


■ 다윗의 후손이신 분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서(마태 1,19) 율법에 성실한 이였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은(신명 22,23-27) 한 남성과 약혼한 여성이 부적절한 관계로 임신하였을 때 이를 불륜으로 간주하고 해당 여성과 남성에게 투석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혼을 허락하고 있었기에(신명 23,13-21; 미쉬나 소타 1.1,5) 요셉은 고뇌 끝에 이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하기로 결심합니다. 공개적으로 처리하여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20절)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두려워하다’는 ‘포베오마이’로서 ‘두려워하다, 겁을 먹다, 섬뜩해서 놀라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셉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공포를 느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를 ‘꿈’이나 ‘초월적 중재자’를 통하여 전달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적용됩니다.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20절) 마리아의 임신이 윤리적으로 부정한 사건이 아님을 밝히고 두려워하고 있던 요셉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은 이 사건이 하느님의 주도면밀한 구원 계획 속에 이루어진 위대한 역사임을 믿게 되고 이후 자신의 사명을 과감하게 실행합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마리아에게 전달된 루카복음과는 달리 마태오복음에서는 천사의 메시지가 요셉에게 주어지는데, 이 메시지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사야에게 주어졌던 신탁의 실현임을 명시합니다. 이때 인용된 예언서 본문은 이사야서 7,14의 칠십인역이며 히브리어 본문의 ‘알마’(젊은 여성)가 그리스어 ‘파르테노스’(동정녀)로 의역되어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로는 ‘베툴라’와 ‘알마’가 있는데 ‘베툴라’는 그야말로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동정녀를 의미하고 ‘알마’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젊은 아가씨를 지칭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젊은 여인’으로 되어 있던 단어가 굳이 ‘동정녀’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진정한 ‘인간’이셨지만 동시에 동정잉태라는 신비로운 사건을 통해 태어나신 진정한 ‘하느님’이심을 강조합니다.

■ 임마누엘이신 분
복음이 제시하는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탄생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장엄히 선언한 내용이었습니다.(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했던 기원전 8세기는 남하(南下)하는 아시리아를 저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동맹을 맺고 남 유다 역시 여기에 동참할 것을 강요받던 시기였습니다. 남 유다의 왕 아하즈는 이 난국을 군사적 대응과 외교적 동맹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이때 예언자는 동맹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과 믿음’임을 역설합니다.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예루살렘이지만 결코 멸망당하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으라는 것인데,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은 하느님의 승리를 약속하는 이 신탁을 믿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허술한 신앙을 살짝 겉꾸며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12)라는 말로 하느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자기기만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의 부족을 교묘히 포장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려 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아하즈의 이러한 행동이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13절) 이때 ‘성가시게 하다’라는 표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라아’이며, ‘지치게 하다, 무력하게 하다’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아하즈의 겉꾸민 충성심은 충분히 하느님을 지치게 하고 난감하게 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구한 관용과 인내로 계획하신 표징을 변함없이 내려 주십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14절) 낳을 것이라는 표징입니다.

다윗의 후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
제2독서의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로마 1,1) 받아 복음을 전한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2-3절)이며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4절)라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한 ‘인간’이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증명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위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과, 반대로 고통과 위험, 굴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내려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증거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열망, 그 견고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세상의 어둠과 악을 없애시려 홀연히 인간이 되어 우리 안에 오신 분, 이 주체적 다가옴이야말로 성탄이 주는 진정한 선물이며 우리가 고이 간직해야 할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단단히 구축하시고자 우리들 가운데 오신 성탄은 그 어떤 불행이나 위악(僞惡)도 방해하지 못할 완벽하고 일관되며 두려움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염수정추기경-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온 세상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천 년 전 이스 라엘의 산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하느 님의 아들이었으며 죄에 물들어 멸망하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습니 다. 이번 성탄에 우리 가운데 오시는 그 구세주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께서는 성당에 오시면서 예쁘게 꾸며진 성탄 구유를 보 셨을 것입니다. 마구간 안에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잠자고 계신 아기 예수 님, 천사들과 양 떼를 지키는 순박한 목동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 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마구간 안에 가축이나 동물 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인 구유에 아기 예수님께서 누워있다는 것은 커 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은 교만과 이기심으 로 죄를 짓고 결국 고통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느 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 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 은 스스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 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의 지혜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성탄의 신비입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로 인간의 더러운 죄와 악행, 교만과 이기심 그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것입니 다. 먹이 그릇인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구세주께서 먹히는 존재가 되셨고, 인간과 세상을 위한 구원의 희생을 준비하고 계심을 암시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 구원을 완 성하시려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당신의 아드님을 주셨고,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 가 되는 소중하고 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12 참조).

 

올 한 해도 주님 성탄의 기쁨을 맞으며, 오늘날 우리 가 사는 세상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니 고 있으면 대화와 공존의 노력보다는 내 것만이 옳다 고 주장하며 반목과 대립을 반복하는 세태는 우리 사회 를 위태롭게 만듭니다. 이러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못 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지난 11월 프란치스코 교황님 께서는 일본 사목 방문 중 도쿄돔 미사 강론에서 다음 과 같이 말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자신에게 만 유용하고 득이 되는 것만을 찾는 세속적 태도는 결 국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재물의 노 예로 전락시킬 뿐만 아니라 조화롭고 인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원폭 피해 지역도 방문하여 피해자들 을 만나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핵무기 폐기를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을 당부하고 모든 나라들이 핵무기 금 지 조약에 참가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 력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을 실천하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우리 신앙인 공동체는 솔선수범해서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과 도 사랑을 나누고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 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만 을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말하십니다(마태 5,44-46 참조). 주님께서 알려주신 이 사랑에 세상의 불안과 불신, 불목과 다툼을 해결할 모 든 해답이 있습니다. 사회와 국민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과 역할은 막중합니다. 먼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도자 들은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인내심 있고 끈기 있게 대화를 지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보다 먼저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특히 가장 약하고 상처받고 힘없는 이들의 대 변자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다시 한번 함께 기뻐 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 게 가득 내리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 하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루빨리 한반도에 평화의 은총이 가득하도록 평 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도 전구를 청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김현국신부-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성탄의 기쁨과 의미를 느끼게 해줄 좋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1914년 프랑스 북부 독일군 점령지역, 독일과 프랑스, 영국군은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때는 1914년 12월 24일,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 를 당겨야 하는 참혹한 전쟁 중에 군인들은 성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먼 저 영국군 진영에서 백파이프 연주가 울려 퍼집니다. 그러자 독일군은 노래로 화답합니다. 전쟁 중 맞은 성탄절, 각자의 진영에서 성탄을 자축하던 음악과 노랫소리가 서로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성탄 이라는 공통분모로 소통하게 된 그들은 성탄절 단 하루만이라도 전쟁을 멈추자고 이야기하며 휴전 협정을 맺습니다. 그리고 한목소리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함께 성탄 인사를 나눕니다. 짧은 휴전이 끝나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간 군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총을 겨눌 수 없었습니다. 성탄의 기쁨과 그 의미를 같이 나눈 그들은, 이미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 전쟁을 멈추게 하신 이 이야기를 통해 저는 ‘성탄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총이나 칼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 니다. 사람을 변하게 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은 총이나 칼이 아닌, 아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에서 나옵니다. 하느님께 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 무한한 사랑과 겸손, 우리가 본 받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그 사랑과 겸손이, 우리를 세상의 어 려움과 풍파 속에서도 꿋꿋하게 합니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모든 분 에게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더불어 이번 성탄을 통해,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 을 깊이 체험하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그 사랑과 겸손을 전하고 실천하는 복된 성탄 시기 지내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조환길 대주교-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추운 겨울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아기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교회는 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마다 성탄절을 지내며 구세주의 오심을 기념하 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일 년 가운데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 가까이에 성탄을 지내는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이 가장 깊을 때 빛은 더 밝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우리 신앙의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구원 신비의 시작입니다. 구 세주께서 위대한 왕이나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나약한 어린아이의 모 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 니다. 대개 세상 사람들은 권력으로 남들을 억누르며 더 높아지려고 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겨 더 부유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구세주께서는 더 낮은 모습으로, 더 나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사 랑을 가르치십니다.

  오늘날 지구촌에는 춥고 어두운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테러와 범죄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음의 위험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어린아이들도 아직 많 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해 자유세계를 찾아오는 난민은 넘쳐 나고 있지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 는 강대국들은 난민의 어려움을 외면합니다. 우리나라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갈등이 심해지고, 서로 간의 혐오와 증오의 골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 상 황은 불안하고, 경제 현실은 어렵기만 합니다. 청년들은 취업난에 허덕이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 면서 많은 노인들이 가난과 외로움에 처해 있습니다. 서민들의 겨울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 다. 정치적 혼란과 경기 침체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맞는 성탄절의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빛이 어두운 세상을 밝고 따스하게 해 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성탄이 이 사회를, 그리고 여러분 의 마음을 더욱 밝고 따스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마음 안에 빛을 밝힙시다. 그 빛으로 세상을 더욱 밝고 따스하게 밝혀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구는 2018년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맞아, 초대 교구장이셨던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 우리 교구를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했던 그 정신으로, 그리고 루르드의 성모님께서 주셨던 메시지대로 삼 년을 살고자 하였습니다. 첫해를 ‘회개의 해’로 시작했고, 지난해 에는 ‘용서와 화해의 해’를 살았으며, 2020년 새해에는 ‘치유의 해’를 살고자 합니다. 올해는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특별 전교의 달’ 선포가 있었고, 우리 교구는 ‘냉담교우 회두와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교우들이 노력하고 활동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교우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새해에도 계속 이러한 활동을 펼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교구는 2020년 새해를 ‘치유의 해’로 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 교구민들이 대내외적으로 입은 상처에 대해 성모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가톨릭 신 자로서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가 되고 선물이 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상처 난 현실을 치유하는 데 있어서 우리 교우들이 먼저 노력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 신앙인으로서 끊임없이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들을 좀 더 기울였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새해에는 우리가 특별히 성체를 공경할 뿐만 아니라 성체를 자 주 영하고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힘으로 먼저 나 자신이 치유되고, 치 유받은 내가 나아가 다른 상처 입은 이웃들을 치유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치유를 위해 예수님 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성탄을 기뻐하며 축하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울러 2020년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남 북한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도와 한반도에 평화가 깃 들기를 바라며 열심히 기도합시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매년 맞이하는 이 성탄을 단순히 하루 쉬는 날로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그 기쁨의 체험을 하실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어느 마을에 자기밖에 모르는 심술 맞은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자기 뒷마당에 동네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는 그날로 철조망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이웃집 고양이가 이 뒷마당에 들어오자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할아버지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정말로 이 고양이가 죽은 것입니다. 그 집 마당에 놓은 쥐약을 고양이가 먹었던 것이지요. 동네의 어른들은 모두 복수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고양이를 키우던 꼬마 아이는 훌쩍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 할아버지는 아주 외로운 분이신 것 같아요.”

실제로 화내는 사람은 자존감이 떨어진 아주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낸다는 것이지요. 아이는 할아버지에게서 이 외로움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도 보는 이 외로움을 어른들은 왜 보지 못했을까요? 복수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큰 외로움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이 외롭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만 있어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면서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이 세상은 외로운 세상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때 진정한 성탄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가장 나쁜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다(토마스 플러). 



여행

예전에 몇몇 신부들과 해외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여행사에서 다 해 주는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저희가 일일이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자유여행이었지요. 마침 체코에서 교포 사목을 하는 동창 신부가 있어서 그 친구의 차로 이동해서 몇 나라를 둘러보는 일정을 짰습니다.

너무나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패키지여행이 얼마나 편하고 쉬운 여행인지를 알게 해 주었던 여행이었지요.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는 여행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좋은 숙소에서 잠을 자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일들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는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여행을 다녀온 뒤에 “다시는 이런 자유여행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을까요? 아닙니다. “다음에 또 이렇게 가자.”라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더 기억에 많이 남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삶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평탄하기만 하다면 정말로 재미있을까요? 어쩌면 어렵고 힘든 시간이 많을수록 기억에 많이 남게 되고, 자신의 삶을 더욱더 활기차게 살아가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도 모든 어려움의 시간은 감수하시고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하면서, 쉽고 편안한 길 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의미 있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포기하지마, 내가 있잖아!"입니다.

-전삼용신부-


독일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농촌에서 성실하게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하게 살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밤에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동쪽으로 12km정도 가면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베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부부는 노인의 말대로 큰 나무를 찾아 베었습니다. 그러자 나무가 쓰러지면서 가지에 있던 둥지에서 새 알 두 개가 나왔습니다.

      두 개의 새알 중 하나에서 새끼 새가 나와 “다른 새알을 까보면 금반지가 하나 나올 것인데 그 반지에게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날아갔습니다.

      젊은 부부는 금반지를 두고 무슨 소원을 빌까를 의논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참으로 희망찬 순간이었습니다. 집을 달라고 할까, 소를 달라고 할까, 땅을 달라고 할까, 돈을 달라고 할까를 의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열심히 일하면 다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그냥 금반지를 잘 보관하고 열심히 일해보자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반지를 잘 싸서 옷장 속에 넣었습니다. 무슨 소원을 들어달라는 요구보다 반지가 있다는 사실에 든든해하며 희망과 기쁨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힘든지도 모르고 전보다 열심히 일해 땅도 사고 논도 사고 소도 샀습니다. 나중에는 큰집도 장만해 부자가 되었고 아들 삼 형제까지 두었습니다. 이러는 동안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보다 더 귀한 것이 희망과 사랑, 성실과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들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평화롭게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아들 삼 형제는 부모로부터 “금반지 유언”을 듣고 금반지를 꺼내 소원을 두고 의논을 했습니다. 그때 큰아들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더 이상 무슨 욕심을 낼 것인가. 부모님은 소원을 풀지 않고 희망 속에서 행복하게 사셨는데 우리가 소원을 풀면 되겠느냐? 금반지 때문에 서로 갈라질 것이 아니라 금반지를 그냥 부모님 묘소에 묻어 버리고 희망 속에 살자.”

      다른 두 형제들도 이 의견에 모두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그 반지는 부모의 묘소에 함께 묻었습니다. 물론 삼형제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항상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반지를 통해 무언가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지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괜찮다는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반지는 모든 것을 청해도 되기는 하지만 결국 무언가를 청하게 되면 지금의 행복을 잃게 만드는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성탄은 기뻐야 합니다. 그렇다고 다 기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벌어졌던 일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성탄 날 기뻤던 이들은 예수님의 부모님과 그들을 방문했던 목동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이들 몇 명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목동들은 어떻게 이 성탄의 기쁨에 초대받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들만이 하늘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하늘은 모든 사람이 원하면 바라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목동들만 하늘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는 땅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욕구’를 말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땅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하늘의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나더라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해줄 새로운 다윗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탄만으로는 기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도 사용법이 있습니다. 그 사용법에 따라 성탄이 기쁠 수도 있고 금방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처럼 소원을 빌어버리면 기쁨이 감소되고 그냥 그 반지를 품은 것만으로 만족하면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는 이 아기예수님 사용법을 성체성사를 통해 연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것이나 성체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성체로 우리 마음 안에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성체성사를 영하면서 기쁘지 않다면 성탄도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기쁘지 않은 이유는 성체를 영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또 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언가 들어주셔야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체 안에 담긴 사랑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 위의 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욕심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거처로 삼으시기 위해 오시는 것만으로 기쁨에 넘칩니다.

      우리도 성체를 보며 더 이상 청할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래야 성탄도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만 있으면 기쁠 수 있듯, 우리는 성체만 있다면 그 기쁨을 다른 어떤 것에도 빼앗길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유일한 보물이 함께 있어주는 것이었습니다.

      1999년 투어 드 프랑스 사이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랜드 암스트롱이라고 하는 청년입니다. 그는 3기 암 환자로서 이 엄청난 일을 이룬 것입니다.

      암스트롱은 25세에 고환암이라고 하는 사형선고 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생존 가능성까지도 희박했습니다. 폐와 뇌까지 전이되어서 너무나 쑤시고 아파서 식사도 잘 못하고 신문은 물론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볼 수가 없을 만큼 머리가 터지게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병중에 열심히 사이클을 훈련을 했습니다.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있었던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왕을 알현하는 그런 기쁨과 영광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 힘이 들어서 선수생활을 접어 두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는데 자기가 가는 길에 환한 빛이 나타나면서 길에 글이 쓰였습니다. 그 글은 역시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입니다. “ 내 아들아,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이 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뒤에 이어서 “장애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되어라.”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시 자전거를 열심히 탔습니다. 그리고 1999년 프랑스에서 금메달을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 5월호 가이드포스트에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1등이냐, 2등이냐, 금메달이냐, 그것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 암투병에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 불행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은 요술 방망이처럼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포기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며 내 옆에 계십니다. 대신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믿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요술방망이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오늘 이 성탄을 즐길 준비가 된 것입니다. 행복한 성탄절 되시길 빕니다.


-조재형신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 위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성탄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특별히 기쁜 것은 그분은 창녀나 세리에게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노인이나 어린이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죄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하루하루가 바로 성탄입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로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연도와 날짜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2000년 교회의 역사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Ecclesia)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교회라는 말은 로마 시민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는 강한 군사력으로 막강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로마의 시민은 특혜를 누릴 수 있었고, 특별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민은 경기장에서 검투사의 목숨을 건 결투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와 포로들은 로마 시민을 위해서 일해야 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황제였습니다. 이방인, 노예, 포로, 가난한 이, 병든 이는 교회에 속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시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여인, 노예, 포로, 세리, 이방인도 회개하면 교회의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든 교인은 한 형제요, 한 자매가 되었습니다. 신분, 학력, 계층, 세대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하게 살았어도 마음을 바꾸어 돌아오면 받아주는 교회입니다. 불의한 삶을 살았어도 마음을 바꾸어 돌아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받아주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가짜별을 본 것이 아닙니다. ‘믿음, 사랑, 희망이라는 진실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성탄절은 가난한 아이의 모습으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주님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또다시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시고 추운 겨울날, 말구유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 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장소! 생각할수록 놀랍고도 파격적입니다. 왕중의 왕이신 분이신데, 화려하고 쾌적한 왕궁에서 탄생하셔야 마땅했습니다. 따뜻하고 안락한 방 정도만 되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 장소는 한없이 초라하고 서글픈 곳, 말구유였습니다. 태어나신 아기에게 입힌 옷은 티로산 고급 자색 비단이 아니라 허름한 포대기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정치적·군사적 파워를 지닌 혁명가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던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허름한 포대기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그 포대기로 죄의 밧줄에 묶여있는 우리를 풀어주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최초에 입고 있었던 영원불멸의 옷을 되찾아주시기 위해 가장 작고 나약한 인간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 강력한 표현이 마굿간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의 과정은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그분은 안다는 사람들,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들,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꼭꼭 감추셨습니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 양떼를 돌보는 순박한 목동들, 마리아와 요셉처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믿으려는 겸손한 이들에게 당신 나라의 신비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성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 성탄을 한 평생 자신의 화두로 삼았던 예로니모(AD 340-420) 성인이십니다. 성인께서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해서 신앙의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성탄이 수 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 태생의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으로서 신비가이자 대 영성가였던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권고를 올 성탄 기도주제이자 묵상거리로 삼아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이루어 낼 때, 비로소 한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 옛날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랬듯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다가오는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그랬듯이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본능과 이기심, 자기중심적 삶을 철저하게도 배제시켜야 합니다. 안개 자욱한 낯선 길을 떠나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멸시를 꿋꿋이 견뎌내야 합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인류 역사상 가장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하느님의 배려로 인해 인류 모두는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이토록 헤아릴 길 없는 큰 은총 앞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침묵 가운데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분을 우리 내면에 다시금 탄생하시게 우리 영혼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영근신부-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기쁜 날이라고 말들 하지만, 참으로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 역사 안에서 둘도 없는 당혹스럽고 황당한, 신비롭고 믿기지 않는 대체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날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일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뜻으로 말씀 곧 하느님이 육을 지닌 사람의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합니다.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곧 거처를 사람인 우리 가운데 두고 우리와 함께 사람으로 사신 것을 말합니다. 천막(장막)이란 당신의 임재와 현존을 상징하는 단어로, 육화의 새로운 변화와 심오한 의미를 전해줍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특정한 장소나 건물에 머무신다고 여겨 성전을 세웠고, 그 성막과 성전에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렀다면, 이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표현처럼, ‘성막이 공간 속의 성소이고 안식일이 시간 속의 성소라면, 이제 사람이 하느님의 성소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1절에서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하느님이 사람으로 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를 두고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밝혀줍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그리고 이에 대한 초대교회의 찬미가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밝혀줍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이처럼,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 사랑의 표징임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같이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크리소스토무스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신분이 높은 이의 영예는 전혀 손상을 받지 않지만, 신분이 낮은 이는 자신의 비천함에서 들어 올려 진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정약종이 <주교요지>에서 임금이 신하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에 비유한 것과 같습니다. 곧 임금이 신하의 딸과 혼인한다고 해서 임금의 신분은 낮아지지 않지만, 신하의 딸은 왕비의 신분으로 격상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살이 말씀에 덧붙여져 썩어 없어질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일, 사람이 드높아진 일, 곧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러기에,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셨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오시어 바로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나아가서는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가운데 사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가운데함께 계시고, 그 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거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의 공동작업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함께 벌이는 사랑입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 사랑의 행위가 바로 강생의 신비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 이 극진한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으니,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빛을 입었으니 일어나 빛을 비추어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내려오시니 우리도 따라 내려가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비우시니 우리도 비워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우리도 가난해져야 할 일입니다. 참 생명을 받았으니 새 인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사랑과 기쁨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주님!

오늘 제가 빛을 입었으니 일어나 빛을 비추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을 꽃피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려오시니 저도 따라 내려가게 하소서.

당신께서 비우시니 저도 비우게 하소서.

당신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저도 가난해지게 하소서.

참 생명을 받았으니 새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사람이 되신 말씀과 그 영광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1-18: 사람이 되신 말씀과 볼 수 있는 영광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1-3).

 

이 생명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이분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아듣게 되었으며 참 주님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잠깐 밤 미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 성탄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그 참된 의미를 보기 때문에, 지금 탄생하신 그분은 힘없는 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바로 당신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생명에 함께 하시려 하심이다. 즉 우리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한다. 그분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큰 축일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마리아,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믿은 목동들의 모습을 본다.

 

그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셨고, 다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하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며,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계속적으로 태어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과 같이 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를 보는 이들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다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사업을 즉 구원사업을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잉태하며, 낳아주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인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렵게 된다.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체험이 바로 말씀을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이겨보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사회적 관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등으로 많은 경우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능력이 많다고 자부하는 것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부모이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면에서도 이 모든 것은 작용한다. 그래서 용기를 잃고 되는대로, 감정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이 용기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성탄의 신비를 언제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머리와 어떤 몸의 지체인지 생각하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와 광명으로 옮겨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더러운 행실로써 그 성전에 거하시는 고귀한 손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의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봉헌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자.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번제물이 아니라 자선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의 삶이며, 사랑의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생활이며, 말씀을 낳아주는 삶이며 성탄의 삶이다. 봉헌 예절을 통해 이러한 결심을 함께 봉헌하도록 하며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자.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 10)

-한상우신부-

하느님을
간절히 기다린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탄생으로
답을 하여 주십니다.

큰기쁨은 이렇듯
단순합니다.

단순함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합니다.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이렇게
드러납니다.

구유처럼
비어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 탄생입니다.

비어있어야
울릴 수 있는
성탄의 울림입니다.

누추하고 초라한
구유에서
하늘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가장 지극한
성탄의 모습입니다.

울림과 울음 사이에
생명의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놀라운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탄생에
기쁘게 무릎 꿇으며
경배합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단순한
구유의 탄생에서
하느님의 기쁨을
하느님의 소박함을
만나는 기쁜 성탄
되십시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성탄의 이밤을
함께 기뻐합니다.


-오상선신부-


주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계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탄생을 경축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오신 분이 누구이신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오늘 복음 대목인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성부 하느님과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매우 직관적이고 신비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내용 안에 한처음부터 성자의 강생, 수난과 죽음과 부활, 하느님의 자녀인 미래의 교회까지 다 담겨 있지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빛이 누구만을 선택적으로 비추지 않듯이, 참빛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인종과 국가, 성별, 심지어 종교까지 주님의 빛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군주가 백성의 삶을 살피러 잠시 암행은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처럼 아예 함께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말씀께서 사람 사이에 들어오시기 위해 스스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존재와 같아지고 싶으셔서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떠안고 들어오셨지요.

약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약함을 몸소 겪는 것,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몸소 가난을 겪으며 사는 것 사이에는 많은 층위가 존재합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실존을 바닥까지 떠안으신 그분께는 인간의 약함과 한계, 가난이 남의 일이 아니라 더 절절하고 애끓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비와 용서에 당신 목숨을 거십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하느님은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으신 신비이십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해 인간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인간 앞에서 벌거벗으신 것이지요. 그분은 아드님을 통해 당신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사랑 때문에 온갖 약함을 다 입으십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한없이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에게 권위와 과시, 억압으로 힘 자랑을 하고 있다면 진짜 사랑인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사랑은 영원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약함의 최고 절정인 죽음까지 떠안긴 신비입니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이사 52,8).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 나타난 "주님의 돌아오심"을 성자 예수님의 강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인간과 함께 거니시던 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고 광야에서 함께 동행하신 분께서 세기를 건너고 또 건너 오늘 이 세상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이사 52,9).

그 목적은 위로와 구원입니다. 오늘 마굿간 구유 안에 누워 계신 성자께서는 어둠과 그늘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는 당신 백성을 찾아 위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러 오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계시의 절정이고 완결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지요. 하느님을 찾고 알고 사랑하기 위한 또다른 표징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확언합니다.

구유가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하게 장식되었더라도, 그 앞에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여관방 대신 묵게 된 마구간과, 짐승 먹이통인 "구유", 그리고 벌거벗은 한 아기의 진실을 잊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히브 1,2) 왕실의 영화 대신 가난을, 폭풍같은 권위 대신 아기의 연약함을, 추상같은 심판 대신 고요한 침묵으로 세상에 돌아오셨습니다.

고요하고 거룩한 오늘, 우리 각자가 지고 있는 가난과 약함과 부족함을 아기 예수님 곁에 내려놓고 그분과 함께 쉽시다. 평안히 잠든 아기 예수님 곁에서 불안과 우울, 근심과 두려움으로 날선 정신을 그만 내려놓읍시다. 그분은 바로 이것들 때문에 오신 것이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성탄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과 아기 예수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2016년 12월 25일 일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12웟 25일 수요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8)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자존감이 떨어진 아주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낸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큰 외로움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조명연신부-

---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목동들은 어떻게 이 성탄의 기쁨에 초대받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들만이 하늘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하늘은 모든 사람이 원하면 바라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목동들만 하늘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는 땅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욕구’를 말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땅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하늘의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나더라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해줄 새로운 다윗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탄만으로는 기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도 사용법이 있습니다. 그 사용법에 따라 성탄이 기쁠 수도 있고 금방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기예수님 사용법을 성체성사를 통해 연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것이나 성체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성체로 우리 마음 안에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성체성사를 영하면서 기쁘지 않다면 성탄도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기쁘지 않은 이유는 성체를 영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또 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언가 들어주셔야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체 안에 담긴 사랑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 위의 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욕심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거처로 삼으시기 위해 오시는 것만으로 기쁨에 넘칩니다.

      우리도 성체를 보며 더 이상 청할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래야 성탄도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만 있으면 기쁠 수 있듯, 우리는 성체만 있다면 그 기쁨을 다른 어떤 것에도 빼앗길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유일한 보물이 함께 있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은 요술 방망이처럼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포기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며 내 옆에 계십니다. 대신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믿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전삼용신부-

---

 독일 태생의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으로서 신비가이자 대 영성가였던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권고를 올 성탄 기도주제이자 묵상거리로 삼아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빛이 누구만을 선택적으로 비추지 않듯이, 참빛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인종과 국가, 성별, 심지어 종교까지 주님의 빛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말씀께서 사람 사이에 들어오시기 위해 스스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존재와 같아지고 싶으셔서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떠안고 들어오셨지요.

약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약함을 몸소 겪는 것,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몸소 가난을 겪으며 사는 것 사이에는 많은 층위가 존재합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실존을 바닥까지 떠안으신 그분께는 인간의 약함과 한계, 가난이 남의 일이 아니라 더 절절하고 애끓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비와 용서에 당신 목숨을 거십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오상선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