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2019년 12월 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가 1,39-45)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여인은 연인이 다가오는 소리에 설레며, 지난날 자신에게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을 떠올린다(제1독서).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자 친척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간다. 성령으로 가득 찬 두 여인은 서로 축복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는 연인을 생각하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연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밖으로 나가 봄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기자고 청합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마치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라는 권고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계획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에 달려가십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지금 태어나시려는 당신을 맞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요청입니다. 복음에서 엘리사벳과 태중에 있는 아기 요한은 메시아의 어머니께서 방문하셨을 때 기뻐합니다. 두 여인과 태중에 있는 두 아이의 기쁜 만남!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쁜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외친 큰 소리, 곧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를 반복합니다. 이 소리는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나자렛 예수님께 보낸 찬사에서 그 울림을 찾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마리아는 믿음과 말씀의 행복을 받아들인 첫 여인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나중에 파스카 발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토마스 사도에게 전하실 믿음의 행복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고, 두 여인의 기쁜 마음에서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지만, 이 중에 두 마리는 다른 사람이 키우던 개를 받아서 키우고 있습니다. 이 개들이 처음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또 밥도 잘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제가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는지 저를 기다리고 저를 반겨줍니다.
만약 제가 밥을 주러 들어가는데도 나오지도 않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이 개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향한 강렬한(?) 사랑으로 인해 저 역시 강렬한 사랑으로 키우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인사말을 듣자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즐거워 뛰놉니다. 아직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지만, 태중의 아기인 세례자 요한은 영으로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성령으로 인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성령의 활동은 겸손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직접 방문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겸손의 모습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엘리사벳 성녀 역시 큰 겸손으로 응답합니다. 즉, 자신이 손윗사람이라면서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말씀하시면 겸손한 모습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도 겸손의 덕을 간직하고서 주님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단순히 성탄절이 가까이 왔다면서 어떻게 놀까를 궁리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더 큰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이 땅에 오신 주님 역시 큰 기쁨으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큰 의미 있는 성탄이 되지 않을까요?


지난여름에 어느 공원 내에 있는 성지를 방문했다가 잠시 쉬려고 공원 안의 어린이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미끄럼틀도 있고, 시소도 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기구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 놀이터를 이용하는 아이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하긴 요즘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요. 아이를 보려면 학원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어렸을 때부터 경쟁의 정글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물론 공부도 중요합니다. 공부를 통해 견문을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공부는 좋은 성적을 얻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함께 살아감의 소중함을 어렸을 때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신나게 함께 뛰어놀았던 어렸을 때의 추억이 지금 저에게 큰 힘으로 작용합니다. 함께 있는 것, 그래서 함께 사는 것도 큰 공부가 아닐까요?

은총을 받으려면 주님 뜻의 피난처가 되어라
-전삼용신부-
텍사스 시스코의 한 호텔 방에서 한 젊은이가 절망스러운 신음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탁자에는 하얀 색 알약 수 십 알이 널려 있습니다. 한참 몸부림을 치던 젊은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느님, 어릴 적 어머니께서 ‘세상 사람은 모두 널 잊고 버려도 하느님은 널 잊지 않으신다. 그 분은 너에게 참 피난처, 요새가 되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피난처 되신 하느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눈을 떴습니다. 무엇인가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꽉 쥔 채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투자자 여러분, 여러분이 투자하신 그 귀한 돈을 다 날리고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을 뵐 면목이 없어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사서 호텔에 투숙했다가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 하느님이 저의 피난처이시라는 말씀이 생각나 밤새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이 자리에 용기를 얻어 나타났습니다. 한 번만 용서하시고 상환을 유예해 주시면 원금과 이자 모두를 쳐서 갚겠습니다.”
그 후, 투자자 가운데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두 명의 투자자가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습니다. 그의 새로운 사업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이 사람이 세계적인 호텔 체인 ‘힐튼’의 창업자 N. C. 힐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피난처로 여기는 이들을 또한 당신의 피난처로 여기십니다. 하느님을 피난처로 여기는 길은 하느님의 뜻 안에 숨는 것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품을 때 하느님의 피난처로 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품을 때 하느님께서도 내 안에 숨으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주려는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 그 사람 안에 피신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 이때 성모 마리아를 통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전 세계에 엘리사벳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엘리사벳만이 하느님의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품은 하느님의 뜻이 태중의 요한입니다. 은총은 아무에게나 흘러가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를 요한을 통해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장차 당신 길을 닦을 세례자 요한에게 성령을 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은총의 통로인 성모 마리아를 통해 엘리사벳에게로 향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기쁨입니다. 성령께서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을 향해 오셨습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품고 있었고 하느님의 뜻에 영양분을 주기 위해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을 품고 있는 엘리사벳에게로 향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품은 사람에게 은총이 모이기 때문에 모든 축복을 받고 기쁨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작은 물들이 계곡으로 모이고 그 계곡이 시냇물을 형성하며 그 시냇물들이 모여 커다란 강을 이루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이 넘쳐납니다. 우리 각자도 하느님의 뜻이 모이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향하려고 하는 바다를 향해 자신을 깎는 아픔을 참아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내 뜻을 포기하면 나는 하느님의 뜻이 흐르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면 나도 기쁘고 이웃도 기쁩니다. 모든 축복은 세례자 요한처럼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이끌려는 사람에게로 모입니다. 나의 삶이 우울하다면 나의 삶의 목표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는지부터 살펴야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오시는 성령님을 전해주시러 찾아오시도록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길을 닦으려는 뜻을 품었듯이 우리 마음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으려는 마음을 품으면 주님께서 주시려는 모든 은총을 충만히 받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1979년의 기억입니다. 40년 전입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가기 전입니다. 전주로 가는 동양고속 버스를 탔습니다. 고모부 댁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속버스에는 승무원이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들었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곡예사의 첫사랑’ 조금은 슬픈 느낌의 노래였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모부와 고모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고종사촌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3살 위의 형은 저를 고향 선산으로 데려가 주었습니다. 눈이 소담스럽게 내렸고, 선산에서 제게는 친할아버지이고, 형에게는 외할아버지의 묘소에 절하였습니다. 산 중턱에 있는 선산에서 내려보면 마을 아래 저수지가 보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사촌 형제들이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밤에 같은 이불을 덮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를 고향 선산으로 데려가 주었던 형도 저와 같이 사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나면 다시 고향 가는 버스를 타고 싶습니다.
엘리사벳의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만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겁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이 감동적인 스토리로 변화됩니다!
-양승국신부-
나자렛의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서둘러’ 길을 떠나셨습니다. 목적지는 친척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아인카림(히브리어로 엔 케렘)이라는 곳입니다. 아인카림은 유다 산악 지방에 위치해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아인카림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유일하게 루카복음사가만이 막연하게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언급하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곳을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이 이루어졌던 곳,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장소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서둘러 길을 떠나 아인카림으로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분 마음 속으로 직접 들어가보지 않았기에 정확하게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너무나 뜻밖에 다가온 혼전 잉태 사건 앞에, 마리아는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난감해했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시게 된 일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어린 소녀로서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일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 개인적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인생의 큰 기로 앞에 대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석달 간의 영신수련 대피정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정길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 직선거리로는 약 120킬로미터, 요르단 강 옆으로 난 계곡길을 따라 돌아서 가면 약 160킬로 가까이 되는 먼 여행길이었습니다.
나자렛의 한 시골 소녀가 감당하기 힘든 큰 사건을 겪고, 나름 고민하고 기도하고 갈등하면서 걸어갔을 그 긴 여행을 생각하니, 제 마음까지 덩달아 막막하고 착찹해집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씩씩하게 길을 떠났습니다. 마리아는 길을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을 불렀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했고, 마음 속으로 골백번도 더 다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지금 당장은 제가 너무 어려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족한 이 소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겠다니 감지덕지하면서 길을 나섭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당신의 초대 앞에 용감하게 Fiat! 이라고 응답했지만, 제 앞에 펼쳐질 길들이 솔직히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 같은 길이지만, 기꺼이 제 신앙여정을 시작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을 통해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구약시대 옛 백성 전체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마리아는 새로운 시대, 하느님의 새 백성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사람의 만남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기구하고 비극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한 여인 마리아는 십대 미혼모였습니다. 또 다른 여인 엘리사벳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는 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노산(老産) 중의 노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은 만나자 마자 서로를 끌어안고 반가워 죽습니다. 서로 크게 환영하며 기쁨과 환희의 노래를 주고 받습니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 사람들이 돌았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힘이 참으로 크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불행이 즉시 행복으로 바뀝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이 감동적인 스토리로 변화됩니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오늘 우리네 삶 속에도 계속되고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기쁘게 순명할 때, 우리들 삶 속에서도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이 환희로 변화되는 기적인 계속될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일컬어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 ‘내 주님의 어머니’‘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는 최상의 칭호를 사용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마리아의 위대성과 복되심의 이유에 대해서 눈여겨봅니다. 우리도 꼭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셨고 직접 출산하셔서 복되시기도 하지만, 더 복되신 이유는 예수님을 낳으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반영억신부-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되면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고,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마침내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이루기에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말씀에게도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또 하나의 복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얼마나 벅찬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교제하며 사귀고 친교를 이루며,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자신을 헌신하는 봉사가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말씀이 삶으로 쓰여 지고, 마침내 말씀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려고 말씀은 우리 안에 잉태되십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 요한이 동생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닦겠지만, 분명 예수님이 먼저 요한을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곧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자케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자케오를 찾아와 이름을 부르며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하느님이 먼저 찾아와 부르시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는 모세를 먼저 찾아와 부르시듯이,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어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을 반겨 맞아들이고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방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1) 아멘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러나 그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거나 의심을 품었거나, 천사가 알려준 증거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보고 있다. 성경에 이르기를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예레 1,5) 이 일은 큰 표징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요한이 아직 목소리로 기쁨을 드러내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없었기에 그 어머니가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고, 그 다음에는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아들 덕분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된 다음에,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 진 것이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 지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 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자기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이는 엘리사벳에게 옳은 말씀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이루자.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 43)
-한상우신부-
믿음으로
행복을 맞이하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불러들입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올바른 믿음은
마음의 지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믿음이라는
마음 없이
그 먼길을 찾아
나설 수는 없습니다.
마음 없이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알고
서로를 알게하는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은
살아가는 법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답을 찾게합니다.
하느님께로
마음이 기울어진
그곳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안에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는
대림이 있습니다.
대림은 만남을
만남은 믿음을
믿음은 행복을
향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활기 넘치는 움직임, 환호에 가까운 노래소리가 어우러집니다. 말씀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흥이 절로 올라옵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아가의 여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연인의 소리를 알아차립니다. 사랑이 온통 그쪽을 향해 열려 있는 까닭입니다. 여인이 외치는 소리에는 고된 기다림의 시간을 단박에 날리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아가 2,10).
이번에는 연인이 속삭입니다. 그는 노루나 젊은 사슴처럼 활기차게 뛰어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기쁨으로 맞이할 여인과 얼굴을 마주하길 원합니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아가 2,14)
연인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는 여인을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활짝 열고, 안전한 은신처를 박차고 나오길 촉구하는 겁니다. 사랑의 광야로, 모험의 창공으로 믿음을 가지고 날아오르길 독려합니다.
아가(雅歌)는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연인과 여인의 관계로 표현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대목은 창조주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이며 그분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가슴 떨리는 사랑의 해후 장면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복음은 성령 잉태에 순종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는 대목입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서둘러"라는 말씀 안에는 마리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제 막 시작된 신비를 안고 하느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해 주신 다른 여인을 향해 달려가는 중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제1독서인 아가의, 뛰어오르고 뛰어넘어 여인을 향해 달려오는 연인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하느님께서 지금 마리아의 태중에 계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루카 1,41).
모든 피조물을 대표해서 창조주를 맞이하는 이는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던 아기입니다. 아직 비상할 때가 되지 않은 비둘기처럼, 숨어 있으나 영으로 주님을 감지하고 기뻐 뛰는 미래의 세례자 요한이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엄청난 만남의 순간에 엘리사벳이 외친 이 고백은, 마리아의 담대했던 Fiat의 순종을 확증해 줍니다. 아울러 앞으로 믿음과 행복이 고통과 함께 마리아의 삶을 관통하리라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그 하느님을 알아보고 환호하는 피조물이 두 여인의 육신 안에서 서로를 향해 활짝 열립니다. 본래 하느님과 우리는 이런 관계입니다. 설렘 가득한 기다림과 애타는 줄달음질 끝에 만나고 일치하고 하나되는 사랑의 관계 말입니다.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사랑을 가득 안고 달려오고 계십니다. 어서 만나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 마치 노루나 젊은 사슴처럼 겅중겅중 뛰어오르십니다.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과의 만남을 못견디게 고대하고 있다면 멀리서도 그 소리와 진동과 내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가까이 오신 그분을 향해 기쁨 가득한 환호를 올리며 더 가슴 뛰고 더 애타게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외칩시다. 가슴이 터져나갈만큼 기쁨으로 전율하며 외칩시다.
"임마누엘 저희 임금님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소서"(복음환호송). 아멘.

조심스런 은총 관리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0123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마태오 . 1,18-24)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가문과 족보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두에 두고(1,1-17) 이어서 바로 오늘의 본문을 배치합니다.(1,18-24)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장엄히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이던 요셉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법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위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과, 반대로 고통과 위험, 굴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내려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증거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열망, 그 견고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김혜순수녀-
12월 21일 토요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가 1,39-45)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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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교회는 마리아의 위대성과 복되심의 이유에 대해서 눈여겨봅니다. 우리도 꼭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셨고 직접 출산하셔서 복되시기도 하지만, 더 복되신 이유는 예수님을 낳으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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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분!"
이 만남으로 그들도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금 남아 있었던 불안이 말씀히 사라지고 자기들의 임신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임을 서로에게서 확인하며 함께 행복 충만하였을 겁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듯
그 복됨과 행복을 아는 사람만이 그렇게 ㅁ라할 수 있는 거기 때문이고
그 복됨과 행복을 아는 것은 자신도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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