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12. 11. 19:42

2019 12 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오11,11-15)

“Amen,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been n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온갖 죄로 벌레와 구더기 같은 삶을 살아온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자처하시며 당신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예언자가 그러하듯이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복음).

☆☆☆

오늘의 묵상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고 오히려 두려움과 실망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요즘 국제화 시대에서는 세상이 너무 크게 보여 두려움과 불신의 감정에 더욱 쉽게 젖어 듭니다.오늘 독서에서 예언자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현존을 깨닫게 해 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보루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이시며 사로잡힌 이들의 해방이십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와주러 오십니다.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탈출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는 첫 번째 해방보다 더 심오한 해방이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다음 광야를 걸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이 바위에서 솟는 샘물로 갈증을 없앴다면, 이제 주님께서는 광야 전체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당신 백성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함께 지내시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목숨을 내주셨던 예수님을 통하여 그 정점에 이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보아 알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주님께서 2천 년 전에 하신 약속은 “세상 끝 날까지”(마태 28,20)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지내는 것은 사랑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것,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것, 이보다 더 설레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만약 여러분의 자녀나 손주가 의대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겠다고 말한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또 교육대학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겠다면 혹시 도시락 싸 들고 적극적으로 말리시겠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나 교사는 현대에 존경받는 직업이며, 안정된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로마 시대에 교사나 의사는 노예의 직업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귀족 출신 아이가 부모에게 “나는 커서 의사나 교사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화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을까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 그 지위를 이용해서 끊임없이 억압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지위는 절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어떨까요?

“제가 살아있을 때 이런 지위를 누렸습니다. 저의 재산은 이렇게 많았습니다.”라는 말들이 의미 있을까요? 의미 있지 않습니다. 또 세상의 지위와 재산이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했고, 사랑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하시지요. 바로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세속의 뜻만을 주장하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펼치기보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모습으로 산다고 해서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지위와 재산이 하늘 나라에서도 그대로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하며, 세상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어떤 사랑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했는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단번에 그와 같이 높은 곳에 뛰어오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에 단잠을 잘 적에 그는 일어나서 괴로움을 이기고 일에 몰두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생은 자고 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속에 있다. 성공의 일순간은 실패했던 몇 년을 보상해준다(로버트 브라우닝).



노예제도는 지금도 있지 않을까?

노예제도가 처음 시작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타 부족, 타 씨족을 정복하면서 하층민으로 부린 것으로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이 노예제는 19세기 초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지요. 우리나라 역시 엄격한 신분 사회로 노예제도가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나 천부인권 사상에 근거해서,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가진다면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인 지금에는 이 노예제가 완전히 없어졌을까요? 강자가 약자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모든 곳에 노예제는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만들려는 곳이 바로 노예제가 유지되는 곳입니다.

인터넷 안에서도 익명성의 벽 뒤에 숨어서 악성 댓글로 폭행을 쓰는 것,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모습 등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이 있는 곳이 노예제 잔재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이런 모습을 원하실까요? 약자의 편에서 늘 사랑을 펼치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의 잘못된 노예제는 사라지고,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올 것입니다.                   

나에게 폭력을 쓰지 않으면 남에게 쓰게 된다

--전삼용신부-


 인도 영화 ‘당갈’(2016)은 한 때 인도의 레슬링 전국 챔피언이었던 아빠가 두 딸을 레슬링 선수로 키운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아들을 낳아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를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는 그만 줄줄이 딸 넷을 낫게 됩니다. 아버지는 첫째와 둘째 딸에게 레슬링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여성이 레슬링을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상 공식적인 레슬링교육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들이 14살이면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하는 인도 여인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논 위에 모래사장을 만들고 딸에게 직접 레슬링 훈련을 시킵니다. 머리가 길면 모래가 모리에 박히기 때문에 삭발까지 시켰습니다.

      첫째 딸 기타는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몇 년 뒤 전국대회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가 국립체육학교에서 훈련을 받아야했던 기타는 새로운 코치의 말에 따라 그동안 배운 것들을 모조리 버립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배운 기술들로 아버지까지 이겨버립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구식 기술을 비웃고 지금까지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것에 대해 원망합니다. 머리도 기르고 화장도 하고 세속에 물들어갑니다. 물론 세계대회에서 기타는 매번 예선탈락을 합니다.

      패배의 쓰라림에 고통스러워하며 기타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초심으로 돌아갑니다. 머리를 다시 삭발하고 아버지식대로 자신을 혹독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방어가 아닌 공격위주로 경기를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이어갑니다. 이에 코치는 분노합니다. 기타가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기타는 2010 영연방 경기대회 55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동생 바비타는 51kg에서 은메달을 획득합니다. 인도 역사상 국제대회에서 여성이 메달을 획득한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두 자매는 국제대회에서 총 29개의 메달을 따며 인도 여성도 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에 딸도 더 이상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동안 수고한 아버지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잘해줬음에도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사랑을 폭력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딸은 나중에서야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한 폭력이 좋은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 혹독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보답하는 길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직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상에 유익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당신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주인이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만이 우리의 행복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하느님 나라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너무나 혹독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낮엔 뜨겁고 밤엔 추운 곳에서 생활하며 짐승의 가죽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옷을 지어입거나 곡식을 경작하지 않은 극기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가르침을 버렸기 때문에 그 파견한 분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려면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새로운 요한인 교회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폭력의 결말은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비록 극기의 삶이고 자신을 죽이는 삶일지라도 그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 하늘나라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영광의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분야에서든 자수성가했다는 사람들은 다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항상 5시에 일어나고 7시에서 9시까지 강의를 하고 이후 12시 45분까지는 집필활동을 하였습니다.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했는데 정확히 오후 1시에 의사나 상인 등을 초청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3시 30분에 산책을 하며 다리를 건넜는데 사람들은 칸트가 다리를 건널 때 시계를 맞출 정도였습니다. 산책 후 다시 연구에 몰두하다 밤 10면 정확하게 침대에 누워 하루를 마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라며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는 칸트를 어리석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모든 사람들을 비웃는 꼴이 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데 왜 폭행을 가하느냐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폭력을 가해 하느님과 이웃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과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조재형신부-


신문사를 찾아온 자매님과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36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합니다. 눈에 염증이 생겼는데 치료를 제때 하지 못해서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답답했다고 합니다. 의사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본당에 피정이 있어서 참석했고,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옆을 볼 수 있었고, 뒤를 돌아볼 수 있었고,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은 시간 성지순례를 다니고,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이를 위해서 써 달라고 감사헌금도 주고 가셨습니다. 비록 한쪽 눈은 실명되었지만,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발로 차고, 화를 낸다고 합니다. 돌부리를 발로 차니 더 아프고, 화를 내니 부주의했던 자신이 한심해 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파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돌을 치우니 운동도 되고,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했으니 보람이 있습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됩니다. 저도 크게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28년 전입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중환자실에 보름간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치료가 있었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기도해 주셨고, 어머니께서 곁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남은 시간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난민이 생기고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피어나지 못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파괴로 더불어 살아야 할 생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철책과 장벽으로 가로막혀 형제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교만과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교만은 타인의 소중함을 보지 않습니다. 열등감은 자신의 소중함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미주에는 120여 개의 한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의 문을 열면 됩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뀝니다. 우리는 그걸 회개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걸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낡은 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구원의 빛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사람들은 무척이나 궁금해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대체 누구인가? 또 후발주자인 예수님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세상 사람들의 궁금증 앞에 세례자 요한은 이미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쾌하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묶을 자격조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저 그분이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선구자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주인이시고 나는 종입니다. 그분은 주인공이시고 나는 조연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듯이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그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분, 그분이 저기 오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내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분을 따라가십시오. 저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저분의 제자가 되십시오.”

 

 참으로 쿨하고 쌈박하면서도 지극히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았으며, 마지막으로 멋진 레드카페까지 쫙 깔아놓은 세례자 요한은,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자,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구세사의 무대 뒤로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언뜻 들으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는 것 같은데, 또 동시에 그를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살짝 세례자 요한을 디스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구약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역사 안에서 과도기적인 인물로 반은 어둠 속에, 반은 빛속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새시대가 도래했으니 그의 역할은 끝났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활짝 여신 새시대 사람들은 그분의 빛과 사랑에 힘입어 새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은 그분의 은총과 축복속에 있으며, 구원된 사람으로서 구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예언의 시대는 가고, 완성의 시대,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시대 사람으로서 그에 걸맞는 삶을 계획하고 실천해야겠습니다. 낡은 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구원의 빛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반영억신부-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1독서>는 이 새로운 질서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갈증을 풀어주고,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 41,17-18 참조).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는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 기울여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0-18)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한 엘리야라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방치하고나 빼앗겨도 안 될 일입니다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마태 11,15). 아멘.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거나 폭행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이오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한 그의 증언도 믿을 것이고,
그의 증언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구약시대 사람들’을 뜻합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요한은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주님보다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에(루카 1,76)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메시아께서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시대입니다.
(구약시대는 ‘구원’을 희망하고 기다리기만 했던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구원’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합니다.)

신약시대는 구원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시대이면서
동시에 그 일을 방해하려는 사탄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라는 말씀은,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요한을 박해자들이 박해했고,
주님이신 예수님도 박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시를 뜻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글자 그대로 ‘지금까지’입니다.
사탄의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종말이 올 때까지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탄에 맞서서 싸우는 신앙인의 싸움은,
또는 신앙인이 받는 박해는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라는 말씀은,
사탄과 박해자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이 땅에 하늘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폭력’이라는 말은,
박해자들의 의도와 방법이 모두 악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그 박해가 신앙인들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도 암시합니다.
신앙생활은 꽃길만 걸어가는 생활이 아닙니다.
걸어가다 보면, 꽃길을 만날 때도 있지만, 가시밭길을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언제 어떤 길을 만나더라도, 멈추지 말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에 편하고 쉬운 길만 걸으려고 하고, 힘들고 어려운 길은 피한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 외에는 메시아를 준비한 예언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외에는 메시아가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라는 말씀은,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인데,
사실상 “내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말라키서를 보면,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라는 예언이 있습니다(말라 3,23).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1,1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습니다.
이 두 증언은 사실상 하나의 증언입니다.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는 말씀은, “믿고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믿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알아도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믿는다면 그 ‘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또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생각만 하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진짜로 믿는 사람은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고백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온 삶으로’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앙인답게 살면서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될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삶의 기준’을, 또는 ‘행동의 기준’을
‘주님의 가르침’에 맞추어서,
그대로 살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점점 더 ‘신앙인다운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고,
해야 하는 일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11-15: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고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 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는 말이 맞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이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 12)

-한상우신부-

무엇을 위한
폭력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폭력과 모순
폭행과 집착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늘 나라입니다.

폭력속엔
하늘 나라가
없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사람만큼
모순된 존재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의
분명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폭력인 아닌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기다림을 믿는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폭력 앞에서는
모두가 작아지고
기다림 앞에서는
모두가 큰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은
기다려주는
사랑입니다.

폭력을 멈추고
기다림을 사랑하는
은총의 대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다림의 길위에
하늘 나라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폭력의
가면을 벗고
기다림을 배울
때입니다.

예언서의 말씀인
기다림과 순명을
귀기울여
들을 때입니다.

-오상선신부-


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을 때부터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지요(루카 1,44 참조). 그런데 지금 요한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마태 11,2-3 참조). 예언자적 소명의 완성인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외친 바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

예수님께서 요한의 물음에 답을 하신 뒤(마태 11,5-6), 이번에는 요한에 대해 증언하십니다. 그는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그분의 길을 닦아놓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입니다(마태 17,10-13 참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그는 모든 인간을 통틀어 가장 큰 인물입니다. 광야에서 보여준 극기와 절제의 삶은 물론, 세상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끈 통찰력과 지도력, 자신의 자리를 아는 겸손,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순교의 영예 또한 예수님은 잘 아시지요.

세례자 요한은 "일찍이 주님의 가르침을 깨달은"(입당송 참조) 존재이며, 이사야 예언자가 묘사한 "날카롭고 날이 많은 새 타작기"(이사 41,15)입니다. 그 타작기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산들을 부수고 언덕들을 낮추며 허영에 찬 세상을 무너뜨리는 힘이지만,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는"(이사 41,16) 그분의 종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땅이 열려 구원자 예수님을 피어나게 하도록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이고 구름이 뿌리는 의로움'입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또한 그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린"(영성체송) 모든 인류의 원형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의 도래와 메시아의 오심을 외쳤지만 오히려 하늘 나라와 메시아는 세상 힘에 의해 난폭히 다루어집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와 있는 하늘 나라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까닭입니다.

세상이 섬기는 우상과는 다른 하느님, 세상이 좋아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와는 다른 질서, 세상을 충동질하는 쾌락, 탐욕과는 다른 가치에 이물감을 느끼는 세상은 하늘 나라를 자기네 구미에 맞게 재구성하고 편집하려 합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폭행당하고 탈취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힘을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하늘 나라를 준비시킨 세례자 요한도, 작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주인이 되는 하느님 나라를 열어 주신 예수님도 세상 힘에 의해 목숨을 잃을 터이지만, 그늘은 작은 씨앗에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처럼 무성히 번져가는 하늘 나라(마태 13,32 참조)를 어쩌지 못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미완적 상태로나마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 명백한 증거이고 증인이지요.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이사 41,17).

하느님의 이 마음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늘 나라를 지키는 힘입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과 함께 굳은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오른손을 꼭 붙잡아 주고 계십니다!(마태 41,13 참조). 아멘.


-김찬선신부-

부지불식간에: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7935

나도 하늘라라 폭행자는 아닐까? : http://www.ofmkorea.org/115455

결코 빼앗길 수 없는 하늘나라 : http://www.ofmkorea.org/11545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14일 목요일  2015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11,11-15)


어리석은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발로 차고화를 낸다고 합니다돌부리를 발로 차니 더 아프고화를 내니 부주의했던 자신이 한심해 보입니다지혜로운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파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합니다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합니다돌을 치우니 운동도 되고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했으니 보람이 있습니다같은 상황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됩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카인이 아벨을 죽인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교만과 열등감이 있습니다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교만은 타인의 소중함을 보지 않습니다열등감은 자신의 소중함을 보지 못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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