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9. 12. 10. 20:25

2019 12 11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워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위대함과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자만은 눈을 멀게 하여 인간의 나약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언자는 각자의 삶과 온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작품을 보도록 우리의 눈을 들어 올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선은 스스로 안전과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여기는 자기 숭배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우리 자신의 첫 ‘우상’은 곧 ‘나’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여기고는 합니다.그러나 주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도움과 위로, 지지와 힘을 받습니다. 젊은이나 어른 모두 오로지 하느님만을 신뢰하라고 권고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보루이시고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삶의 수고 안에서 절망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 현존에 맞게 걸어가는 새로운 힘을 얻을 것입니다.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분의 권능과 능력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순하게 제시되십니다. 하느님 자비의 최고 표현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함께 나누기를 바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친밀감으로 들어 높이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은 무한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많은 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즉, 언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벌었을 때? 높은 지위에 올라갔을 때? 물론 이때도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을 때 행복했습니다.

돈이나 명예 등에 집착하는 이유 역시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집중할 때 불안감을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것을 통해서는 욕심과 이기심이 나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경제적인 이득은 없어도 기도나 봉사에 집중할 때 분명히 행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기억은 꽤 오래 남으며, 집중하면서 오히려 편안함을 얻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봉사 단체에서 열정적으로 봉사하다가 자신의 사업이 너무 바빠서 봉사활동을 잠시 멈췄었다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업과 봉사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몸이 너무나 피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쉬게 되었는데, 쉬는 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도 않고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업에도 문제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시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 안에 진짜 기쁨과 행복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시더군요.

자신이 얻으려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시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주실까요?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인정받을 수 있는 지위를 주실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넓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을 찾는 곳이 어디인지를 다시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 안에서, 물질적인 것에서가 아닌 영적인 것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하늘은 아무런 행운도 없는 자를 태어나게 하지는 아니하며, 땅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를 길러내지는 않는 것이다(명심보감).



소인배

소인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 씀씀이가 좁고 간사한 사람을 가리키며 쓰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안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없을까요? 이 소인배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1) 대부분 아주 똑똑하다.
2) 다른 사람들(특히 윗사람, 상사)이 자기에게만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3) 자신의 이익이 궁극적 목적이다.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의 손해는 괜찮다.
4)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악당과 달리 친구의 얼굴을 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런 사람이 꽤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소인배들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나 자신 안에 탐욕이나 욕심이 없으면 쉽게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욕심이 가득하면 늘 그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망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손오공을 만드는 것은 여의봉이 아니라 금고이다

-전삼용신부-


영화 ‘곤지암’(2016)은 CNN이 선정한 세계 7대 소름 끼치는 장소인 대한민국 공포체험의 성지라고 불리는 곤지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공포영화입니다. 유튜브 조회수를 높여 순간적으로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젊은 청년들이 곤지암에 있는 폐정신병원에 잠입하여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입니다.

처음엔 그들이 유튜브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상으로 무서운 사건들을 연출하여 조회수를 올려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실제로 예전에 생체실험을 당해 죽은 유령들이 있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청년들이 하나둘씩 죽어가지만 그것이 조회수를 급격하게 올려 수억 원의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담당자들은 그들을 그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귀신이 있는 것이 확실한 줄 알면서도 돈에 눈이 멀어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이 진짜 공포로 다가옵니다.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결국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한 이들도 귀신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사람은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힘과 권력, 혹은 명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그것의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다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합니다. 노예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듯이 인간들은 각자의 욕구에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엔 자신의 삶을 공포영화로 만들어버립니다. 자신들이 가졌다고 착각하는 작은 것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욕구의 종살이를 하며 자기 삶을 공포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주시려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그 안식이라는 것이 결국 또 목에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멍에는 주인이 소를 부리기 위해 목에 짊어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멍에를 두른다는 것은 그분의 노예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 자아의 욕구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노예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는 멍에를 메야합니다. 멍에는 자아의 돈에 대한 욕심, 육체를 만족시키려는 욕심, 더 높아지려는 마음을 묶어놓는 오랏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멍에에 자신의 욕구를 통제시킬 때 비로소 ‘자아숭배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원숭이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힘이 세고 난폭해서 금방 원숭이의 왕이 됩니다. 돌원숭이에 불과했던 손오공은 자신이 타고 날아다니는 근두운과 무적의 무기인 여의봉을 가지게 되어 점점 더 무서운 것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석가여래에게도 반항을 하게 되는데 석가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석가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벌을 받아 500년 동안 오행산에 갇히게 됩니다. 그에게 그런 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바로 삼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하도 천방지축이라 그를 통제하기 위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웁니다. 손오공이 육체의 본성대로 나가려고 할 때 삼장법사가 기도로 그 금고아를 줄입니다. 그러면 손오공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게 되고 비로소 정신을 차려 본래의 소명으로 돌아와 요괴를 무찌릅니다. 그렇게 서유기는 손오공이 악의 존재인 돌원숭이로 태어났지만 자기 본성을 죽이고 신의 소명을 따를 때 참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원숭이가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는 자’란 뜻의 ‘제천대성’이 된 이유는 구름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를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힘은 끊임없이 산 밑으로 자신을 가둬 인생이 공포영화가 되게 만듭니다. 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게 만든 것은 삼장법사가 그의 머리에 씌워준 머리띠인 ‘금고아’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어주시는 멍에, 즉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원숭이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메고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만 하지만 그것이 원숭이로 날뛰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욕구를 죽이는 멍에인 십자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동글 동네 모돌이를 읽었습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에 좋은 글을 써 주시는 한영국 선생님의 소설입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글입니다. 제게는 감동이었습니다. 모돌이는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집안의 사정으로 엄마와 누나는 한국에 남고, 아빠와 미국에 이민 왔습니다. 낯선 미국에서 어린아이가 사는 이야기입니다. 엄마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낯선 곳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도 있습니다.

 

모돌이의 그리움, 외로움, 열등감을 채워주는 장소와 사람이 있습니다. 그곳은 모돌이가 하얀 집이라고 말하는 수도원입니다. 모돌이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는 모세 수사입니다. 할아버지 수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공과 출세를 향해서 무한 질주하는 세상에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원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나누고, 모두가 이해하고, 모두가 사랑하는 세상이 된다면 수도원은 필요 없을지도 몰라.’

 

책에서 모세 수사님은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이미 젖은 자는 비가 와도 다시 젖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그리움, 외로움, 열등감은 있을 겁니다. 누구나 시기, 질투, 욕심 때문에 괴로워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의 발걸음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나그네는 어딘가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 소설 속의 모돌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 안에 쉴 때까지 내 영혼은 지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영성가도 번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몸에 큰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는 시편 23장의 내용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나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네. 주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를 깊이 묵상했다고 합니다. 사고 전에 찍었던 사진은 앳되고 아름다운 여대생이었습니다. 40번을 넘게 수술을 한 지금의 얼굴은 많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지선 씨는 절망 중인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홈페이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을 것입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마주 앉아있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휴식, 행복이요 구원인 존재!

-양승국신부- 

 

혹시 여러분의 인생 여정에 이런 사람 한 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칠고 높은 세상의 파도에 시달리고 넘어질 때 마다, 즉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 찾아갈 때 마다 언제든지 두팔 활짝 벌리고 환대해 주는 사람.

 

 ‘억울하다! 괴롭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 털어놓을 때마다, 함께 힘겨워하며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람. 그 어떤 말을 해도, 그 어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도, 그러려니 받아주는 사람.

 

 그의 존재로 인해 그나마 이 세상이 살만하고, 쉼쉴만하고, 다시 한번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존재 자체로 기쁨이요 희망, 위로요 구원인 존재! 그와 마주 앉아있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휴식, 행복이요 구원인 존재!

 

 ‘에이! 요즘처럼 각박한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있겠냐?’며 손사래치실지 모르겠지만, 잘 한번 주변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인생길을 천천히 한번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 존재는 그 누군가 다른 인간 존재로 인해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우리 삶이 좀 더 가치있고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그런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지난 삶을 아무리 샅샅히 훑어봐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슬퍼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행히도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 복음 11장 28절)

 

 예수님께서는 그릇되고 왜곡된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수도 없이 가지에 가지를 치고, 새끼가 새끼를 낳은 잡다한 율법 조항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거짓 목자와 지도자들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삶은 당시 백성들에게 그 자체로 큰 상처요 고통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례 규정이며, 성전 봉헌 규정이며, 극도로 비인간화된 율법을 준수해야지, 세금도 꼬박꼬박 바쳐야지, 거짓 목자들 생계도 책임져야지, 백성들의 허리는 휘청휘청 휠 정도였습니다. 결국 거짓 목자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제정된 율법을 세부화시킴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짐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은 율법학자들이 제시한 세세한 율법 규정을 잘 준수하지 못함으로 인해 언제나 큰 죄책감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율법학자들 스스로도 율법은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부당한 현실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셀수도 없이 세부화된 율법조항들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고 단순화시키셨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새로운 계명인 ‘사랑’ 안으로 쏙 들어온 사람들에게 더 이상 율법은 짐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복음 11장 29~30절)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절대로 무거운 짐이나 힘겨운 멍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봉사 활동이나 단체 활동 역시 무거운 부담으로 여겨지면 곤란합니다. 뭘 하든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얼굴로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반영억신부-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11,28).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의 심판인 벌을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벌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해 멍에를 거두어주고 짐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우리 삶의 여정에는 각자가 지고가야 할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다고 해서 그 짐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없애주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홍해를 갈라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고달픈 삶의 무게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연민의 눈길로 보아주시고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 함께 해 주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살아나듯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그분의 말씀과 눈길은 매섭고 날카로운 바리사이, 율법학자를 넘어 큰 힘이 됩니다. 사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냉철하고 날카로우며 차가운 율법학자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이 가벼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이영근신부-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멍에또바리바지게처럼, 머리에 얹어 짐을 받혀주거나, 등에 메어 짐을 질 수 있게 하여 짐을 편하고 가볍게 해 주는 것을 말하며, 또한 소나 말 등의 동물에게 쟁기를 채우거나, 써레나 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 목과 등에 감아 거는 기구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 그것은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이토록, 멍에는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동행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 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정녕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그러기에,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모방하라혹은 당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를 넘어서, 당신과 함께 멍에를 메고 짐을 지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을 제시하는 스승인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가시는 동행자요 안내자이며 동시에 바로 자체이신 분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한 멍에를 잡고 함께 밭을 가는 것입니다. 함께 수레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곧 구원의 멍에를 매고 공동으로 구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멍에로 우리 몸에 감아 두르는 것입니다. 이토록,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시고,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이 마음을 우리 마음에 품어야할 일입니다. 곧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품는(필립 2,5) 일입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 마음에서 사랑을 퍼 올리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송영진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여기서 ‘고생’과 ‘무거운 짐’을 유대교의 율법들로 해석할 때가 많은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런 해석은 별로 의미가 없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인생살이의 고달픔’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에서
‘모두’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는 어떤 차별도 없고, 자격 제한도 없습니다.
민족, 인종, 직업, 신분, 남녀, 학력, ...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막지 못합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믿음’입니다.)

여기서 ‘안식’은 ‘편안한 휴식’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모든 억압과 압박에서 해방된 상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상태, 영원하고 참된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곧 ‘구원’입니다.
이 ‘안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주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해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는 말씀은,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는 안식을 받으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참된 안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내 계명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너희에게 편안함을 주는 ‘해방’이고, 내 가르침은 너희의 짐을 없애서
너희를 가볍게 해 주는 ‘자유’다.”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내 멍에’, ‘내 짐’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이 표현은 ‘반어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은 결코 멍에나 짐이 아닙니다.
온갖 멍에와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덜 괴로운 멍에, 덜 무거운 짐’으로 해석하면서
“정말로 괴롭고 무거운 멍에와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무리 가볍고, 쉽고, 편안하더라도 멍에는 멍에고, 짐은 짐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멍에와 짐을 가벼운 멍에와 짐으로 바꿔주시는 분이 아니라,
멍에와 짐 자체를 없애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은,
‘힘들고 싫어도 감수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뻐하면서 실천하는 ‘기쁜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예로 들어서 생각하면,
이 계명은 증오심, 원한, 복수심, 또 그런 것들에서 비롯된 죄의식 같은
멍에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또 다른 멍에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가르침은, ‘교만’이라는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낮춤’을, 또는 ‘겸손’을 멍에나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이니까 어쩔 수 없이 실천한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낮춤’과 ‘겸손’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만’이라는 멍에 위에
‘위선’이라는 멍에를 더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주일을 지키는 일을 멍에와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주일을 지킨다면, 주일은 그냥 괴로운 날로 변질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날이라면 주일을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날이고, ‘기쁜 날’입니다.
(‘노는 날’이 아니라, ‘쉬는 날’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또 만일에 ‘기도’를 멍에와 짐으로 생각한다면,
미사 시간과 기도 시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하기 싫은 기도를 억지로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강제 노동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일이고, 기도 시간은 우리를 억압하는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는 시간이고, 안식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만일에 고해성사를 멍에와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고해성사를 본다면,
그 고해성사는 ‘회개’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서 억지로 보는 고해성사는 참으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고해성사는 우리를 짓누르는 죄에서 해방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고해성사를 본다면 참된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늘나라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기도 하고,
지상에서부터 미리 참된 안식을 누리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는 기쁨과 평화는,
하늘나라에서 얻게 될 참된 안식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은총이기도 하고,
그 안식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강제 노동이 아닙니다.
나중에 얻을 안식을 생각하면서 지금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간절하게 원해서 하는 생활이고, 내가 기뻐서 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데, 힘이 들고, 허덕인다는 것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모습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인데 그분 때문에 불편해진다든지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을 벗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이는 율법에 매여 그 참 뜻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 우리는 그분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높이 올라가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기초를 닦기 위해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그 길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시 동안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지금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세상의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한상우신부-

너무나 서두르고
너무나 분주한
우리들 일상입니다.

노동과 휴식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주님안에서
참된 휴식이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일부분또한
소중한
휴식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쉬어가는 휴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휴식을 통해
우리는
생기를 다시
불어넣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됩니다.

삶의 일부분인
아주 중요한
휴식입니다.

휴식을 통해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휴식도
배워야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
모든 걸 맡기는
휴식말입니다.

그 휴식으로
고생하며
무거운 일상이
편하고 가벼워집니다.

주님께 참된
휴식이 있고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입해 구원을 이루시는지 알려 줍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짐은 다양합니다. 그중에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이 당한 사고나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서 오는 책무도 있지만, 또 우리가 돌보지 않은 내적 상처와, 우리가 지은 죄에 기인한 짐도 상당합니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이사 40,27).

이 푸념이 낯설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견뎌야 할 무게가 너무 벅찰 때, '주님이 나를 잊으신 건 아닌지, 그분이 이제 내게 관심을 끄신 건지, 내 죄 때문에 그분이 내게서 영영 눈을 돌려버리신 건 아닌지, 지금 내가 벌 받고 있는 건지, 지금 내 꼴이 나에 대한 그분의 최선인지...' 약한 우리 마음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밀고 들어오지요.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이사 40,27-28).

우리의 이 실망 어린 한탄은 곧바로 주님 귀를 뚫고 들어가 그분 마음을 흔들어 놓고 애간장을 녹입니다. 모든 사랑이 다 헤아려질 수는 없지만, 오해받은 사랑은 꽤 아프기 때문이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어떤 처지인지 잘 아십니다. 겉으로 그럴싸하게 꾸미고 표정 관리도 하면서 살지만 예수님은 속속들이 우리 실존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하시네요. 저마다 다른 형태로 지고 있지만 버겁고 무겁기는 매한가지인 각자의 "짐"에 대한 예수님의 첫째 요구는 거두절미하고, 다 괜찮으니까 주저하지 말고 당신께 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화답송).

예수님은 당신께 다가온 우리에게서 죄와 상처에 기인한 짐을 덜어주십니다. 추궁하거나 수치를 주지 않으시고 그저 용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이것으로도 우리 어깨는 한결 편해지고 가뿐해집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9).

그분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아주 밀접히 자리하시면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속속들이 개입하고 싶어하는 분이시지요. 단, 우리가 바라고 허용할 때에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분 사랑의 개입은 우리에게 "안식"을 줍니다. 외적인 편안과 무탈함 이상의 존재적 안식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과 함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이사 40,31).

이 지상의 순례길을 살아가면서 세상 걱정과 무게를 온전히 다 벗어버리기는 어렵겠지만, 진정 무엇에 기대고 누구에게 바라느냐에 따라 영혼의 내성과 복원력에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넘어져도 일어날 힘, 무너져도 추스를 힘, 깨져도 회복할 힘... 도전과 공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무성해진 도전과 공격에도 꿋꿋이 설 수 있는 힘, 다시 싱싱하게 날아오를 힘은 평소 우리 영혼이 그분 안에서 누리는 "안식"에서 나옵니다.

이 대림시기에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러, 우리의 안식이 되시러 오시는 그분을 달려나가 맞이합시다.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 환호송). 아멘.


-김찬선신부-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7550

짐은 무거워도 마음이 편한 법 http://www.ofmkorea.org/11540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2015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멍에는 주인이 소를 부리기 위해 목에 짊어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멍에를 두른다는 것은 그분의 노예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 자아의 욕구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노예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는 멍에를 메야합니다. 멍에는 자아의 돈에 대한 욕심, 육체를 만족시키려는 욕심, 더 높아지려는 마음을 묶어놓는 오랏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멍에에 자신의 욕구를 통제시킬 때 비로소 ‘자아숭배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원숭이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힘이 세고 난폭해서 금방 원숭이의 왕이 됩니다. 돌원숭이에 불과했던 손오공은 자신이 타고 날아다니는 근두운과 무적의 무기인 여의봉을 가지게 되어 점점 더 무서운 것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석가여래에게도 반항을 하게 되는데 석가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석가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벌을 받아 500년 동안 오행산에 갇히게 됩니다. 그에게 그런 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바로 삼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하도 천방지축이라 그를 통제하기 위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웁니다. 손오공이 육체의 본성대로 나가려고 할 때 삼장법사가 기도로 그 금고아를 줄입니다. 그러면 손오공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게 되고 비로소 정신을 차려 본래의 소명으로 돌아와 요괴를 무찌릅니다. 그렇게 서유기는 손오공이 악의 존재인 돌원숭이로 태어났지만 자기 본성을 죽이고 신의 소명을 따를 때 참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원숭이가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는 자’란 뜻의 ‘제천대성’이 된 이유는 구름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를지를 안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힘은 끊임없이 산 밑으로 자신을 가둬 인생이 공포영화가 되게 만듭니다. 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게 만든 것은 삼장법사가 그의 머리에 씌워준 머리띠인 ‘금고아’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어주시는 멍에, 즉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원숭이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메고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만 하지만 그것이 원숭이로 날뛰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욕구를 죽이는 멍에인 십자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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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이미 젖은 자는 비가 와도 다시 젖지 않는다.’

누구나 그리움외로움열등감은 있을 겁니다누구나 시기질투욕심 때문에 괴로워할 겁니다우리는 모두 어쩌면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입니다나그네의 발걸음은 힘들기 마련입니다나그네는 어딘가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습니다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 안에 쉴 때까지 내 영혼은 지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영성가도 번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을 것입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가난한 이굶주린 이아픈 이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우리가 절망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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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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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한다고 합니다그러니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멍에란 또바리나 바지게처럼머리에 얹어 짐을 받혀주거나등에 메어 짐을 질 수 있게 하여 짐을 편하고 가볍게 해 주는 것을 말하며또한 소나 말 등의 동물에게 쟁기를 채우거나써레나 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 목과 등에 감아 거는 기구입니다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그것은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이토록멍에는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동행합니다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곧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그러니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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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내 멍에’, ‘내 짐’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이 표현은 ‘반어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은 결코 멍에나 짐이 아닙니다.
온갖 멍에와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 같은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예로 들어서 생각하면,
이 계명은 증오심, 원한, 복수심, 또 그런 것들에서 비롯된 죄의식 같은
멍에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또 다른 멍에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가르침은, ‘교만’이라는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낮춤’을, 또는 ‘겸손’을 멍에나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이니까 어쩔 수 없이 실천한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낮춤’과 ‘겸손’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만’이라는 멍에 위에
‘위선’이라는 멍에를 더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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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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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바라는 이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이사 40,31).

이 지상의 순례길을 살아가면서 세상 걱정과 무게를 온전히 다 벗어버리기는 어렵겠지만, 진정 무엇에 기대고 누구에게 바라느냐에 따라 영혼의 내성과 복원력에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넘어져도 일어날 힘, 무너져도 추스를 힘, 깨져도 회복할 힘... 도전과 공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무성해진 도전과 공격에도 꿋꿋이 설 수 있는 힘, 다시 싱싱하게 날아오를 힘은 평소 우리 영혼이 그분 안에서 누리는 "안식"에서 나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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