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12. 9. 20:04

2019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준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태오 18,12)

 

 What is your opinion?

If a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goes astray,
will he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hills

and one of them goes astray,
will he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hills
and go in search of the stra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되찾은 양의 비유’로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는 백성이 놓인 유배 상황에 체념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믿는 이들은 나약하고 불확실한 삶을 성찰하면서, 도와주러 오시는 주님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광야에 길을 곧게 내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까지 오시게 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라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는 모든 이가 위로의 말씀을 듣게 말해야 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주님께서는 권능을 떨치며 부드럽게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목자처럼 오십니다.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내적 친밀감의 표현인 당신 마음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드러내십니다. 목자의 표상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강생의 비밀, 곧 작은 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잃어버린 양들에게 부드럽게 행동하실 뿐만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시는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요한 10,11-18 참조).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감기에 대해 가장 면역이 강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를 다양한 직업군에서 뽑아 조사했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일하는 잠수부 직원, 공사장에서 일하는 건강한 일꾼, 운동선수, 종교지도자 등등 다양한 사람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면역이 강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주님의 일을 하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면역이 강한 사람은 신혼부부였다고 합니다. 신혼생활이라는 친밀한 시기를 통해 면역기능이 상승하더라는 것입니다. 하긴 입맞춤은 균을 옮기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통해 오히려 나쁜 균을 죽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포옹을 통해서는 심장이 튼튼해진다고 하지요.

이렇게 사랑은 면역력까지 높여줍니다. 즉,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사랑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사랑에 집중합니다. 여기서 사랑에 왜곡이 생깁니다. 나의 눈에서만 보이는 사랑, 남들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랑, 즉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모범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만을 봐도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십니다.

양 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습니다. 길을 잃은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목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 양의 잘못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네가 잘못한 것이니 너를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양이 잘못했지만, 목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양을 찾습니다. 바로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품에서 종종 벗어납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주님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짓는 죄로 인해서 주님 품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고 있는 목자처럼 우리를 찾아 다시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부르십니다.

이 사랑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사랑을 반성했으면 합니다. 내게 이익이 되어야지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내게 먼저 사랑을 줘야 나도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의 사랑을 따라서 우리 역시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향해서 따뜻한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우선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멀리 내다보면 친절과 사랑은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되돌아온다(류해욱).



부탁을 받고...

예전에 아는 형제님께서 모 회사에 자기 딸이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추천서 한 장을 부탁했습니다. 추천서 한 장이 뭐 어려울까 싶어서 좋은 내용으로 써 주었습니다. 마침 그 회사의 인사 담당자를 알고 있어서 전화까지 해서 관심을 좀 가져달라고 부탁도 했습니다. 좋은 인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회사에 적합한 인재 같아서 추천했다는 말씀도 드렸지요.

제게 부탁했던 형제님의 딸은 그 회사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인사 담당자인 형제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부탁을 받고 오랫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 기준에 너무 못 미쳐서 도저히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얼마나 고민을 하셨을까 싶더군요. 곤란한 부탁을 드려서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이런 다짐을 하게 되었지요. 세속적인 부탁은 절대로 하지 말자고 말입니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한 부탁은 서로에게 곤란한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이익을 위한 부탁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지요. 세상의 일과 주님의 일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입니다.                   

나의 크기는 나의 사랑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와 같다.

-전삼용신부-


로마 멸망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 출발점은 한 사건으로 귀결됩니다. 서기 378년 한 로마 병사가 잘못 쏜 화살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트족이 훈족에게 밀려 로마 접경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롭게 살 수만 있다면 로마인으로 사는 것도 받아들이려 하였습니다. 동서로 나뉜 고트족 중 서고트족은 이미 로마 지배하에 있는 땅에 정착할 수 있는 약속을 받아놓는 상태였습니다. 동고트족 역시 같은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동고트족이 서고트족에서 도망친 이들을 포섭한 상태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도 쓸데없는 전쟁은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화평 회담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양측 기마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격태세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로마 병사 한 명이 긴장한 나머지 화살 한 발을 고트족에 쏘았고 그 때문에 고트족 호위대가 이에 대항해 공격하였으며 이를 본 로마 기병대는 공격 진영을 갖춰 고트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좌우 숲 속에 숨어있던 고트족 기병대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고트족이 로마를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전투로만 4만 명의 로마 군인이 전사하게 되었고 로마 병력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로마는 이 전투 이후로 두 번 다시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참조: ‘세계사를 바꾼 49가지 실수; 화살 하나가 바꾼 역사’, 빌 포셋, 생각정거장]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가 일개 병사 한 명의 잘못된 실수로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을 볼 때 세상에 가볍게 여길 사건이나, 무시해도 될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쉰들러 리스트’(1993)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1,100명의 유태인을 구하고 자신은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한 유태인이 자신의 금니를 빼서 만든 반지를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하는 장면이 나입니다. 그때 그 반지에 새겨진 탈무드의 명언이 이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을 구함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이 무사 귀환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해합니다. 밀러 대위는 라이언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라이언 ... 값지게 살아 ... 값지게 ... ”

      값지게 살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전투의 베테랑이었던 자신이 일개 병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그렇게 가장 작은 사람들까지도 목숨을 내어줄 수 있게 살라는 말일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라이언 부인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이 대답은 실제로 무덤 속에 있는 밀러 대위로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들어야합니다. 내가 값지게 살라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우리 각자를 위해 피를 흘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아주 작은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저 부끄럽지 않게 살았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최고 부자인 손정희 회장도 병중에서 죽음 직전에 있을 때 자신의 딸과 같은 저 멀리의 한 아이를 웃게 해 주고 싶은 소망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건강이 회복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갓 태어난 자신의 딸만 잘 살게 해 주고 싶었다면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저 먼 세상의 굶고 있는 아이에게까지 퍼져갔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 확장되니 하느님께서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이 루카복음에도 나오는데 그 쓰임새가 다릅니다. 루카복음의 99마리 양은 결국 버려져야 할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복음에서는 99마리의 양을 ‘광야’에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99마리의 양을 ‘산’에 둡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99마리 양을 주님께로 이끌었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양이라도 더 찾아내 꼭 데려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크신 분이실까요? 세상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심지어 가리옷 유다와 같이 마귀가 다 되어버린 인간까지 사랑하여 구해주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의 크기는 그 사랑이 도달하는 거리와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까지 퍼져나갑니까? 나 자신입니까, 가족입니까, 친구들입니까, 나라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작은 피조물들까지입니까? 어디까지 나를 확장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살기도 하고, 작은 사람으로 살기도 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성당 주일학교 친구가 워싱턴에 산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뉴욕에서는 차로 5시간 정도 걸립니다. 1981년에 만나고 못 만났으니 38년 만의 만남입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있을까? 만나면 무슨 이야길 할까? 친구의 남편에게는 어떻게 인사할까? 가는 길에 조금 걱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친구의 얼굴을 보니,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눈망울도, 목소리도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제게 고등학생 때 같이 찍은 사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납니다. 언젠가 여름 성당 마당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성당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가족 이야기, 이민 온 이야길 하니 하루가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진눈깨비가 왔지만,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해준 도시락을 먹으니 진눈깨비도 그치고 다시 날이 맑아졌습니다. ‘7080’이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서 맺은 인연이기에 더 소중하고, 반가웠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오랜 시간의 골짜기는 우정이 있으니 매워졌습니다. 권위와 직책은 학생 시절로 돌아가니 하나가 되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도, 오랜 이민 생활의 고달픔도 함께 만나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좋은가 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 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길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운과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이영근신부-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그러니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기쁨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떨 때 기뻐하는가?

나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뻐하는가


2019년 대림 판공성사를 위한 몇가지 팁!

 -양승국신부-

 

또 다시 우리 교우들께서 은근 부담스러워 하시는 판공 시즌이 다가왔습니다. 고백성사가 부담스럽기는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몇십년 동안 반복해온 죄를 또 다시 고백해야 하고, 고백한다고 한들 나아질 기미도 안보이고, 무엇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신부님께 부끄러운 내 치부나 흑역사를 드러낸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짐이요 십자가가 아니라, 선물이요 은총이란 사실입니다. 고백성사는 우리 가톨릭 교회만이 소유하고 있는 빛나는 신앙의 보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사정상 오랫동안 고백성사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 기회가 되서 성사를 봤는데, 정말이지 성사에서 오는 은총과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켜켜이 쌓인 죄들을 그냥 껴안고 지낼 때와, 훌훌 털어놓고 난뒤 영혼의 상태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그래서 판공성사를 앞두고 꽤나 부담스러워 하시는 교우들을 위해 몇 가지 팁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지은 죄를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고 정리하십시오. 판공 때만 되면 연세 꽤나 많으신 한 자매님이 머릿 속에 떠오릅니다. 당신 죄는 하나도 고백하지 않으시고 남의 죄만 잔뜩 고백하십니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첫째 며느리, 둘째 아들, 셋째 딸의 죄를 순서대로 쭉 훑으시니, 시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나, 주고 받은 대화 내용까지 다 나열하시면, 뒤에 서 계신 교우들이 순서 기다리다 또 죄 짓게 되니, 판공성사 때는 죄를 최대한 요약하고 또 요약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죄책감 탓인지, 우물우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니, 전혀 안 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사제께서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셔서, 핵심만 정확하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녀님들께서는 늘 작은 노트에 메모를 하고 들어오십니다.

 

 2. 그러나 지은 죄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솔직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고백하셔야 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어르신을 봤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죄를 엄청 많이 지었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그게 다입니다!” 그 어르신께서는 죄를 요약해도 지나칠 정도로 요약하셨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점은 없었는지? 십계명 가운데, 크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없는지? 조금 더 성찰하셔서, 요약하시면 좋겠습니다.

 

 3. 가장 큰 죄, 너무 수치스러워 감추고 싶은 죄, 고백하고 싶지 않은 죄를 제일 먼저 고백하십시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신부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엄청 혼나는 것은 아닐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고백성사의 비밀은 이천년 교회 전통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행되어 온 가장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사제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 처럼 큰 죄인일수록 더 크게 환영합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 청한다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백번 천번 용서하십니다.

 

 4. “지난 보속이 뭔지 잃어버렸습니다!” 고백소 안에 앉아 있을때, 가장 황당하고 이해하기 힘든 순간입니다. 신부님들께서 엄청난 보속을 주신 것도 아닐텐데...어떻게 보속도 이행하지 않고, 또 다시 고백소로 들어오실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보속은 미루지 마시고, 고백소에서 나오는 즉시 이행하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혹시라도 기억이 안나시면, 그냥 들어오셔서 ‘보속을 못했습니다.’라고 하지 마시고, 들어오시기 전에 보속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 한번 바치고 들어오시면 좋겠습니다. 보속이다 생각하시면서 어려운 시설이나 단체에 후원금 조금 내시고 들어오시면 되겠습니다.

 

 절대로 고백소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자비하신 주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어린 양 한마리 되찾는 것을 당신 삶의 가장 큰 보람이요 기쁨으로 여기시는 주님께서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오 복음 18장 12~13절)


하나가 소중하다

 -반영억신부-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 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크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보면,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완벽한 사람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얼마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못된 사람도 결코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고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 일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인 주님께 의존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잃은 양인가? 되찾은 양인가?>

-송영진신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그런 죄인도 다 구원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은, 부러진 갈대를 살리려고 애쓰는,
또 연기 나는 심지를 다시 살리려고 애쓰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라는 말씀은,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다른 양들을 실제로 버려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또 “양을 찾게 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 한 마리에 대해서만 기뻐하고
아흔아홉 마리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그 양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게 슬퍼했기 때문에 되찾았을 때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되찾지 못하고 영영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하나도 잃지 않고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또 예수님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지만,
배반자 유다처럼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유다 자신이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목자와 함께 살고 있는 양인가? 나는 되찾은 양인가? 나는 잃은 양인가?”
‘되찾은 양의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만일에 사제나 수도자가 ‘되찾은 양의 비유’에 대해서 말하면서
‘잃은 양’을 ‘그들’이라고 표현하거나 ‘여러분’이라고 표현한다면,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잃은 양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면,
그 사제나 수도자는 위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잃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다.
내가 바로 ‘잃은 양’이기 때문이다.” 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에 대해서, “세례 받기 전의 나는 예수님이라는 분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잃은 양이 아니었다.
또 세례를 받은 뒤에는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했다.
주일미사에 빠진 적도 없고, 바쳐야 할 것은 모두 성실하게 바쳤고,
십계명과 대재, 소재 등을 모두 다 잘 지켰다.
그러니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말과 아주 많이 비슷한 말이 루카복음에 나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를 한 그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8,14).
교만과 위선을 버리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거짓 생활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사이비 신앙생활’입니다.

< 판공성사 때마다 “고백할 죄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일 년 전에, 또는 몇 년 전에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말하면서도,
고백할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천사처럼 완벽하게 살고 있든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있든지, 아니면 자기의 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해사제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천사인지, 거짓말쟁이인지,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인지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아마도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죄가 죄인 줄 모르거나
죄 지은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죄가 없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향해서 “너는 죄가 없다.” 라고 선언하는 일은,
하느님(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올해가 저물어가는 이때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또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데도 하지 않은 일들”을 잘 반성해야 합니다.
생각만으로 죄를 지었을 수도 있고, 말로 죄를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마음이 떨어져 지낸 일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세속 일에 한눈을 팔고, 세속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각종 잡념에 빠져서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기타 등등...
그런 때가 바로 ‘잃은 양’이 되는 때입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 성녀들은 예외 없이 모두,
고해성사를 자주 보았던 분들입니다.
죄가 남들보다 더 많아서가 아니라, 더 깊이 성찰하고 반성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심각하게 ‘잃은 양’이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일생 동안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그 단계까지 간 분들입니다.
(한 번 ‘되찾은 양’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방심하고 자만하다가는 또 다시 ‘잃은 양’이 되어버립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8,12-14: 목자와 길 잃은 양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라고 하시고 나서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착한 목자는 이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나머지 양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이 목자는 길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

 

이 목자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리 2,6-8) 분이시다.

 

백 마리의 양떼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것은 목자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양이 무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양은 태초에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다. 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천사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류 전체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부르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길잃은 백 번째 양을 찾으면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모두가 한 몸’(1코린 12,12-31 참조)이 되려면 모자라는 부분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모자라거나 빠진 부분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 또한 윤리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저주받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냉대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면 그들과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실 만큼 기뻐하신다. 그것은 예수님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시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신분의 귀천 없이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는, 그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되도록 모든 교우들이,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를 한다고 하면서도 조건이나 기억을 가지고 대하지만 하느님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기쁨만이 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갖고 살도록 노력하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 14)

-한상우신부-

길을 잃은
우리를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길을 잃은 우리를
되찾으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회개는 길을
잃은 사람들이
길을 되찾는
기쁜 소식입니다.

길을 잃은 곳에서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길을 떠난
이들만이
길을 잃고 길을
다시 발견합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길을 잃은
우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십니다.

애타게 찾아
나서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하나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뜨겁게 스며드는
회개의 대림되시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우리를
되찾으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모두가 이렇게
어여쁘고
소중하다는 것을
믿게됩니다.

부르시고 찾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중, 입당송, 제1독서, 화답송, 복음 환호송에는 "오신다"는 말씀이 반복되어 선명히 언급됩니다. 우리를 향해 기쁘게 서두르시는 주님의 경쾌한 발걸음이 그려지고 있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길 잃은 양"(마태 18,12).

그동안은 이 복음 내용의 주제를 '목자의 기쁨'에 집중해 묵상했는데 오늘은 길 잃은 양이 더 눈에 밟힙니다.

양들은 목자의 뒤를 따라 양치기 개들의 호위를 받으며 목초지로 이동합니다. 아무래도 양의 수가 많다보면 이탈하는 양도 생기게 마련이지요. 제 고집에서건 어리석음 때문이건 아니면 속도를 못 쫓아가는 약함 때문이건 낙오된 양은 두려움에 휩싸일 겁니다.

황량하고 물 없는 광야, 굶주린 맹수들, 어둠과 적막, 천재지변, 강도떼... 주인의 보호에서 벗어난 양에게 세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다들 제 탐욕을 채우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볼 뿐이지요. 목자의 품에서는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기다릴 건 잡아먹히거나 다치거나 굶어죽거나 그중 하나의 결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양이 얼마나 애타게 목자를 기다리겠습니까! 방향성을 잃은 까닭에 스스로는 더 이상 목자와 양 떼를 찾을 힘이 없으니, 오직 하나 남은 희망이라면 목자가 자기를 찾아주는 것 뿐입니다. 이처럼 간절하고 절박한 양의 심정에 머무릅니다. 오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희원(希願)이 이러해야 하지요.

"그가 양을 찾게 되면 ...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

고맙게도 목자는 양을(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양들의 안전을 뒤로 하고 보잘것없는 한 마리 양을(나를) 찾아 온 광야를 헤집고 다닌 것 같습니다. 목자에게 양은(나는) 무수한 재산 목록 중,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곁에 두고 싶어 애가 닳는 사랑이고, 행여 상하고 다칠까 간을 졸이는 자식입니다. 목자에게 그 양은(나는) 목숨을 걸어도 좋을 소중한 존재입니다.

"양을 찾게 되면"

잔뜩 긴장해 있던 양은 비로소 안도합니다. 이젠 살았습니다. 양은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리라 신뢰했고, 그가 반드시 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기뻐한다."

그런데 양도 기쁘지만 목자가 더 기쁩니다. 양을 품에 안은 목자는 그 양이 자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존재에서 존재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기쁨과 양의 기쁨에 함께 머무릅니다. 두 존재의 기쁨은 하나입니다. 찾은 이와 찾아진 존재가 하나 되어 누리는 기쁨으로 두 존재 모두 위로를 받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은 당신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 사람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주시리라"(영성체송).

이상하지요? 의로움의 화관이라면 적어도 일생동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한 이에게 수여되어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고작 한 일이라고는 당신이 오시길 애타게 기다린 것 밖에 없는 사람에게 주신다니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곧 믿음입니다(로마 3,28 참조). 그리고 믿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이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리라 믿고 희망하듯이, 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애타게 기다린 이는 이미 의롭습니다. 의로운 행위 이전에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으니 오시는 주님께서 그에게 합당한 "의로움의 화관"을 씌워주시는 겁니다.

묵상을 맺으며 오늘 제1독서에 나타난 주님과 우리 관계의 표상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주님은 이처럼 정성스럽고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몫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애타게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날 의로움의 화관은 우리의 것입니다. 아멘.

나의 목자적 정체성은?
-김찬선신부-


매일 강론을 올리다 보면 전체 주제를 잡은 다음 그것을 묵상하고
풀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떤 때는 어느 한 구절이 마음에 꽂혀
그것을 중심으로 묵상도 하고 강론을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의 경우는 독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여기서 <-하지만>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은 것이고
사람은 이렇지만 하느님은 저렇다는 뜻으로 와닿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하느님은 대비되는 것이 숱하게 많습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하느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의 존재이지만,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인간은 힘이 없지만, 하느님은 힘이 세시고,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의 말씀과 연관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길 잃은 양을 우리는 찾지 않지만, 주님은 찾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론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주님 사랑과 천지차이이기 때문이지만
그 사랑의 차이가 주님은 당신을 양들의 목자라 생각하시는데 비해
우리는 자신을 양들의 목자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어린 나이에 관구장을 할 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형제들이 수도회를 떠나는 것인데 그 마음을 돌리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끝내 떠나려고 하면 그냥 버려버리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다른 한 편에는 나이 어린 제가 책임을 맡아 왜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원망이 똬리를 트는데 이 원망이 많은 경우 주님께로 향하지만
어떤 때는 형제들한테로도 가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나이 많은 형제들도 많은데
왜 어린 저를 관구장에 뽑아놓고 자기들은 룰루랄라 하며 지내고
저는 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냐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한 편에는 나가려는 형제를 버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무거운 책임을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겁니다.
형제도 버리고 책임도 버리고 싶은 거지요.

그럴 때마다 제가 주님과 같은 마음이라면 이런 마음이 들까 생각을 하고,
주님까지 가지 않고 여러분 부모들만 생각해도 말썽부린다고 내가 부모된
것을 원망하며 자식도 버리고 책임도 벗어버리려 할까 반성을 하곤 했지요.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고,
길잃은 양을 당연히 찾아나서지 않겠냐고 목자적 당연성을 말씀하시는데
자신을 목자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당연하겠지만 목자적 정체성이 없으면
제 멋대로 떠난 말썽꾸러기 양을 뭣하러 찾느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당신과 똑같은 목자적 정체성을 당연히 갖고 있지 않느냐고
물으시는 것이 한 편으로는 되게 부담스럽고
다른 한 편으로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는 인간, 곧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지요.
앞서 봤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릅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며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 책임이시고
우리의 사랑은 나 하나 사랑하기에도 헉헉거립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도 당신과 같은 목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나에게 영광입니까, 아니면 부담입니까?
이것을 성찰케 만드는 오늘 복음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준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태오 18,12)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이 루카복음에도 나오는데 그 쓰임새가 다릅니다. 루카복음의 99마리 양은 결국 버려져야 할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복음에서는 99마리의 양을 ‘광야’에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99마리의 양을 ‘산’에 둡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99마리 양을 주님께로 이끌었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양이라도 더 찾아내 꼭 데려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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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양"(마태 18,12).

황량하고 물 없는 광야, 굶주린 맹수들, 어둠과 적막, 천재지변, 강도떼... 주인의 보호에서 벗어난 양에게 세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다들 제 탐욕을 채우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볼 뿐이지요. 목자의 품에서는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기다릴 건 잡아먹히거나 다치거나 굶어죽거나 그중 하나의 결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양이 얼마나 애타게 목자를 기다리겠습니까! 방향성을 잃은 까닭에 스스로는 더 이상 목자와 양 떼를 찾을 힘이 없으니, 오직 하나 남은 희망이라면 목자가 자기를 찾아주는 것 뿐입니다. 이처럼 간절하고 절박한 양의 심정에 머무릅니다. 오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희원(希願)이 이러해야 하지요.

"그가 양을 찾게 되면 ...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


목자의 기쁨과 양의 기쁨에 함께 머무릅니다. 두 존재의 기쁨은 하나입니다. 찾은 이와 찾아진 존재가 하나 되어 누리는 기쁨으로 두 존재 모두 위로를 받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은 당신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 사람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주시리라"(영성체송).

이상하지요? 의로움의 화관이라면 적어도 일생동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한 이에게 수여되어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고작 한 일이라고는 당신이 오시길 애타게 기다린 것 밖에 없는 사람에게 주신다니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곧 믿음입니다(로마 3,28 참조). 그리고 믿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이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리라 믿고 희망하듯이, 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애타게 기다린 이는 이미 의롭습니다. 의로운 행위 이전에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으니 오시는 주님께서 그에게 합당한 "의로움의 화관"을 씌워주시는 겁니다.

묵상을 맺으며 오늘 제1독서에 나타난 주님과 우리 관계의 표상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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