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11. 25. 19:36

2019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가 21,5-11)

 

 Jesus said, 
“All that you see here?

the days will come 
when there will not be left
a stone upon another stone 
that will not be thrown down.”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풀이하며,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려 주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하시며, 그 전에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습니다. 성전 현관 기둥들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순금으로 만든 큰 포도나무로 성전 전체를 꾸몄다고 합니다. 이 순금 포도나무의 포도송이가 사람만큼 커서 멀리서 성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성전이 마치 순금의 눈으로 덮인 산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감탄하고도 남을 듯합니다.사람들은 이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성전을 꾸미고 하느님께서 참으로 이곳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했나 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웅장하고 화려한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신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성전, 웅장한 성전을 지으면서도 그 내면에 불의함과 부정함이 가득 차 있던 유다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 예루살렘 성전과 더불어 그들 모두가 파멸하게 되리라고 경고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합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70년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성전 기물은 모두 약탈당하여,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에 등장하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완전히 파괴한 바빌론 임금입니다. 다니엘은 그 앞에서 임금의 나라도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와 그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할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종종 삶의 의미를 못 찾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물을 때는 언제였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주로 사는 게 허무하거나 불안할 때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들 때,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삶이 분주할 때, 가족과 또는 친구와 동료들과 함께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는 삶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로 충만해 보이지 않습니까?

아이들과 놀다가 ‘이렇게 노는 것이 정말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라면서 멈춰서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을 때는 삶의 패턴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입니다. 결국, 이렇게 의미를 찾으면서 고민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할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단순히 노는 데에만 집중하면 될까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시간만 나면 술집을 향한다면 어떨까요? 잠시의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날이 되면서 후회가 되면서 다시금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밖에 세속적이고 쾌락적인 것들 모두가 그렇지요. 오로지 의미가 있는 것은 주님 뜻에 맞는 행동을 했을 때입니다. 즉,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주는 쾌락을 넘어서는 기쁨의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예수님도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시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의도와 달리 성전 파괴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나고 그때 어떤 표징이 나타날지를 묻습니다. 아마 성전 파괴를 막을 수 있는 길을 알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전 파괴를 막을 방법을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때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또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어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만을 따르면서 세상의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전의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하늘의 거처들에 견주면 화려하다고 말하는 성전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주님의 말씀 안에서 희망을 품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참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내가 당신으로부터 떠날 때, 나는 살아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꼭 붙어 있으면, 나는 죽어도 산 것입니다(할레비).



행복

행복은 우리의 권리입니다. 설령 어릴 적 행복하지 못했던 불행한 기억이 있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누구의 잘못이라면서 탓만 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누구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다면서 원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원망을 하고 있다고 해서 과거가 변화될까요? 그리고 그 당사자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생이란 여러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곳이 아닙니까?

나 자신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그 일들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겠다는 의지를 간직해야 합니다. 이는 다른 누군가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이 가능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면, 이는 행복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의지를 세워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을 쏟아 보십시오. 이렇게 힘을 쏟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도 큰 힘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닥칠 최악의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시작하라

-전삼용신부-


1908년 독일에 살던 한 청년이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매려고 허리띠를 풀어 목욕탕 고리에 걸고, 의자 위에 올라가 목을 매단 후 의자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런데 허리띠가 낡아 끊어지는 바람에 죽지도 못하고 그냥 바닥에 처박혔습니다. 바로 그때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다행이다. 죽을 뻔 했네.”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보니 조금 전과는 달리 모든 것이 희망차 보였습니다.

      “그래, 다시 살아보자.”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됐습니다. 바로 쇼팽 음악의 최고 권위자인 루빈스타인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저 정도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의 최상위에 오른 정치인도,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사업가도,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목숨을 끊는 이유는 당연히 삶이 힘겹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호화롭게 보여도 그 사람은 큰 고통을 감내하며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삶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겉모습만 보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표징은 무엇일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도 하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허물어지는 때는 그 성전에 모셔야 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입니다. 그분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 때 성전은 뱀의 소굴이 되고 뱀의 소굴은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

      이 세상도 하느님께서 계시는 큰 성전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섬길 때 자연이 파괴되고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결국은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까지도 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의 성전을 잘 지켜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서 이런 충고로 마무리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어떻게 이런 재난이 갑자기 닥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늘 당장 죽더라도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감사’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직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죽음이 오더라도 그 죽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 모든 신자분들께 감사 일기를 쓰라고 공책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이 그 일기를 꾸준히 쓰셨습니다. 그 분이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두 개가 기계에 들어가 잘렸을 때 그분은 곧바로 손가락이 부족한 손을 들고 “주님, 감사합니다. 손목이 아니라 손가락만 가져가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감사가 몸에 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나에게 힘든 일이 닥칠 때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루살렘 성전처럼 완전히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침기도를 통해 오늘 하루 일어날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기도로 항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으로 깨어있을 때 나는 어떠한 시련에서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성전이 됩니다. 이것이 깨어 기도하는 삶이고 그런 사람들만이 인내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에서 뉴저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다리 이름을 조다리라고 불렀습니다. 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줄여서 부른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 익숙해지면 뉴욕 사람이 될 거라고 합니다. 처음에서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차츰 조다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뉴저지 강변의 아름다운 도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도로의 이름을 팰팍이라고 불렀습니다. 팰리세이드 파크웨이를 줄여서 부른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 익숙해지면 뉴저지와 친숙해질 거라 합니다. 아직도 팰팍은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뉴욕에서 뉴저지로 가는 셔틀버스도 알았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편하게 갈 수 있습니다. 시간만 맞으면 이용하기 좋은 교통수단입니다. 영화관에 처음 들어가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밝은 곳에 익숙한 동공이 어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둠 속에서도 눈은 작은 빛을 찾아냅니다. 밥은 이 들어야 하듯이, 때로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 많습니다.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멸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대략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행성과의 충돌, 강력한 화산 폭발, 빙하기, 해빙기는 지구의 생명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생명은 그런 멸종의 순간에도 살아남았고,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감각으로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또 다른 격변의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다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생명은 어머니인 지구에서 살아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겁니다. 지금의 삶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인류의 역사에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었습니다. 강력한 힘과 조직을 가졌던 나라, 어둠을 밝히는 철학과 사상을 가졌던 나라, 고도의 문화와 문명을 자랑했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흥망성쇠로 인한 단절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는 사라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사상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깨달음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바라는 걸 남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남에게도 권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도 역사의 이어달리기에 함께하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행운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달아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 하나!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그간 은밀히 접근하던 신천지 이단이 최근 본격적인 가두 선교에 나섰습니다. 어제만 해도 저는 열차역에서 신천지 홍보 전단지를 두장이나 받았습니다. 본당 안까지 들어와서, 대놓고 자신들을 신천지라고 소개하며 신자들을 현혹시킵니다.

 

 교주 이만희의 가르침은 너무나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하느님께서 초림 예수님에게 장가들어 하나가 되셨던 것처럼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 한 목자를 아내로 삼아 장가드신다.”그는 요한 복음 10장 30절의 말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구절을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혼인하신 걸로 곡해한 것입니다.

 

 교리나 성경 해석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와 거짓 가르침으로, 명백한 이단이 분명한 신천지가 다양한 전략을 짜고, 그럴싸한 미끼를 던지며, 젊은이들 속으로 파고 듭니다. 이단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미래가 정말이지 걱정됩니다.

 

 정체를 의심케하는 자칭 한 목회자의 망언 앞에 할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집회에 안 나오는 분들은 생명책에서 이름 지우겠다.” 이게 정녕 목회자로서 신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싶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말인 동시에 어불성설의 말입니다. 메시아께서 하실 말씀을 직접 하고 계시니, 이로서 스스로를 과대망상증 환자요, 이단임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예수님 경고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8절)

 

 예수님 시대 당시 여러 사람들이 메시아임을 자처하며 등장했습니다. 로마 총독 시대(AD 44~45년) 테우다스가 나타나서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며 ‘위대한 인물이라고 소개했습니다.(사도행전 5장 36절)

 

 그 후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타나 백성들을 선동하였습니다.(사도행전 5장 37절) 뿐만 아니라 여러 거짓 목자들은 날짜를 꼭 찍어 종말이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라며 사람들을 기만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당신의 재림과 이 세상 종말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삼가해야 마땅합니다. 종말을 꼭 찍어 예언하며, 자신이 오기로 되어 있는 재림 예수라고 외치는 자들을 모두 사기꾼들이니, 그들에게 속는 일도, 그들을 따라가는 일도 없도록 당부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 합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복음 21장 7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거짓 목자나 예언자, 자칭 메시아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혹시라도 어떤 목자가 어느 특정한 날짜를 꼭 찍어 종말의 때를 이야기한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뛰쳐 나오셔야 합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요지는 명백합니다. “끝날이 곧 오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오는 것도 아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 하나!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믿되 거짓 메시아들의 예상 날짜는 믿지 않아야겠습니다. 그저 오늘이 그날이라고 여기며 늘 준비하고 깨어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휘둘리지 않는 삶

 -반영억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 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송영진신부-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인생이라면,
너희가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하다고 찬사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들의 인생은 완전히 다 허물어질 것이다.”
(아직도 과거의 독재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눈에는 그 독재자의 업적이 대단히 위대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자들의 인생은,
즉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인생을 살았던 자들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고,
그 업적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때가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전부 다 허물어질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업적들과 영광들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바벨탑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7-11)”

여기서 사람들의 질문은, 종말의 시간과 종말의 표징에 관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종말이라고 생각하는 사건들과 재난들이 많지만,
그런 사건들과 재난들은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앞의 17장을 보면, 사람들이 종말에 관해서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종말은 이미 왔고, 종말이 완성되는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은
없다는 대답을 하셨습니다(루카 17,20-21).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는 일을 종말의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이천여 년 전에 이미 허물어졌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은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짜 그리스도’와 ‘사이비 종말론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그자들이 가장 위험하고,
또 그자들의 폐해가 가장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그자들의 활동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자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곳으로 끌고 가고,
구원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그자들은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자들입니다.
< ‘재림 예수’ 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마지막 날 그 날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은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루카 21,27).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예수다.” 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또 자기 마음대로 종말의 날짜를 계산해서 예고하는 자들도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마지막 날 그 날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고(마르 13,32),
실제로 그 날이 닥치면,
온 세상 사람들은 그 날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루카 17,24).>

‘큰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흔히 종말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면 “종말이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안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방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그 전쟁 자체가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들은 회개할 틈도 없이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마지막 날이 닥쳤다고 속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런 식으로 종말과 재림의 날이 미리 예고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큰 지진, 기근, 전염병 등도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서 마지막 날이 닥쳤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종말의 재난’을 그런 일들로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마지막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들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등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일들,
즉 인류에게 맡겨진 숙제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일들을 마지막 날이 닥치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경고성 표징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들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고,
“우주적인 어떤 재난이 생기거나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어떤 천문학적 현상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로 해석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21,5-11: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고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을 당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 8)

-한상우신부-

신앙은 끊임없이
새로워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새로워지는 삶이란
자기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랑의
삶입니다.

함께하는 사랑의
삶이란 우리의
어리석음을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삶입니다.

무너지고
사라져갈 것들을
쫓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종말은 하느님께
맡기고 순명하는
가장 강력한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종말과 재림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종말과 재림은
진정한
사랑의 삶으로
들어가고 맞이하는
전적인 투신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뜨거운
봉헌이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을 읽는 제게 주님께서는 코헬렛의 첫 구절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루카 21,5).

대개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이 성전의 의미나 현존하시는 분께 대한 사랑보다 호화롭고 아름다운 장식에 크게 감동하고 예수님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실제로 당시 지어지고 있던 성전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그 성전이 얼마나 귀한 봉헌물과 보물들로 꾸며졌는지,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기술이 모였는지에 관심을 가집니다만, 사실 그 그늘에 얼마나 아픈 눈물과 착취와 부상과 죽음이 가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눈에 보이는 애쓴 결과에 뿌듯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예수님께서 간담이 서늘해질 말씀을 하십니다. 이토록 영화롭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이 설마 또... 그들은 믿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창 피어날 때에는 시듦을 떠올리기 어렵고 이 생명이 영원할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슬프지만 이 말씀은 채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실현이 됩니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8-9).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성전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거짓 메시아가 판을 치며 사람들의 정신을 흐트릴 것이고 전쟁과 반란 소문도 들리겠지만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않도록 마음의 심지를 곧게 세우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희망과 위로의 대목(루카 21,12-19)은 내일을 기약하면서 호흡을 잠시 끊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제1독서는 다니엘이 네브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풀이하는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빌론 임금의 꿈을 통해 앞으로 이어질 역사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거대하고 번쩍이는 상이 서 있었는데 ...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아랫다리는 쇠이고 ..."(다니 2,32).

금은 바빌론, 은은 메디아, 청동은 페르시아, 쇠는 그리스 왕국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차례로 나열되는 왕국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게 영향을 미친 서아시아 지역 흥망성쇠의 자취입니다.

한 왕국이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과 피땀이 필요한지, 그러다 그 왕국이 다른 신흥 세력에 무너질 때 또 얼마나 큰 파괴와 죽음과 손실이 자행되는지, 잘 살펴보면 전혀 모를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저 왕국 이름으로만 가벼이 나열되지만, 그 역사의 현장은 결코 가볍지 않은 피의 역사인 셈이지요.

한 나라의 제도와 문명이 꽃피었다가 스러지고 또 다른 나라의 제도와 문명이 일어났다가 지고 또 다른 나라가... 인간의 힘과 노력의 결과물이 얼마나 한시적이고 불완전한가를 보여줍니다. 또 인간의 탐욕스런 영화가 다른 인간의 참혹한 실패를 딛고 있다는 진실 또한 외면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다시 외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은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다니 2,44).

다행히 오늘 말씀 안에 빛이 던져집니다. 영원히 무너지지도 멸망하지도 않을 나라가 존재한다는 예언 자체는 엄청난 희망의 소식입니다. 게다가 그 나라는 "영원히 서 있을 것"(다니 2,44)이라 합니다.

세상 권세와 힘은 허무합니다. 아무리 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지녔고 부와 동맹이 탄탄하며 현란한 외교정치술까지 갖추었다 한들 영원한 왕국은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순리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새로운 왕국, 하느님 나라는 다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어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나라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 나라는 폭력과 전쟁, 착취와 전리품 위에 세워진 피의 왕국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 평화의 왕국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소유한 이는 왕국이 망하고 정권이 바뀌고 천지가 뒤집혀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가 참여하고 그를 차지한 그 나라가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허무한 것 맞습니다. 그렇다고 맥없이 손 놓고 그냥저냥 되는 대로 살라는 게 아니지요. 바로 그 허무함 때문에 더 그리워하게 되는 영원을 붙잡자는 말입니다. 다행히 그 영원한 나라, 충만하고 복된 주님 현존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허물어질 것은 허물어지도록 흘려 보내고 손을 뻗어 붙잡읍시다. 영원을 소유합시다.

절망이 장기화하고 절망에 안주할 때  >
-김찬선신부-


같은 현재를 보면서도 현재를 보는 눈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고
오늘 복음의 경우는 사람들의 눈과 주님의 눈이 다릅니다.

현재를 보는데 현재만 보는 눈과
과거와 미래 안에서 현재를 보는 눈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전의 현재 모습만 보고 감탄을 하고 있고,
그중의 일부는 과거를 뒤돌아보며 폐허의 상태였던 성전이 
이제 다시 세워졌고, 그것도 아름답게 지어진 것에 대해 감탄을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새로 세워진 성전이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이 아름다운 것이 자신들이 세운 거라 생각하니 무척 뿌듯하였을 것이고,
그것도 폐허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기에 더더욱 뿌듯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지금 이 성전의 미래를 내다보시며 이 성전이
다 허물어져 돌들이 하나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거라고 하시는데
참으로 뿌듯함과 감탄을 크게 안겨주는 성전이
미래에는 그 컸던 뿌듯함만큼 오히려 허무감만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말씀은 현재의 성취에 감탄하고 뿌듯해하는 사람들에게
현재만 보지 말고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다보지 못하고 현재만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잘못에 빠질 수 있습니다.
희망을 보지 못하고 절망할 수 있고,
파멸을 보지 못하고 안주할 수 있습니다.

현재만 보는 사람은 현재의 모습이 초라할 때 미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기에 미래의 희망을 도무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과 이런 공동체에는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도 안 계시고
이런 사람과 공동체에게는 하느님도 희망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이 안 계시다니 그런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공동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나를 보고 절망하고 이웃을 보고 절망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자주 경험하듯이 하느님 없이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면
먼저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그래서 혹시 이웃에게는 희망이 있을까
생각하고 이웃을 보면 이웃에 대해서도 실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없이 보면 너를 보든 나를 보든 
사랑으로 보지 않고 욕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않으면서
하느님 대신 인간이 하느님과 같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관상을 아니 하면 당연히 인간 관상만 하게 되고,
하느님 대신 서로가 서로의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다보지 못하고 현재만 볼 때 빠지는 두번 째 잘못이
바로 파멸의 때를 보지 못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것인데
절망이 장기화되면 이제 절망에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바로 튀어나오지만
물에 집어넣고 서서히 끓이면 자기가 죽는 줄 모르고
그 안에서 서서히 죽어간다고 하지요.

우리 공동체가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주님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하고 묻는데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인해
절망하는 사람과 안주하는 사람이 대다수가 되고 절망이 장기화되면
개구리처럼 어찌 되겠지 안주하며 뭘 어찌 해보려 하지 않게 되지요.

그런데 바로 그럴 때 우리 공동체는 망하게 되고
그럴 때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파멸의 때일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28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예수님께서 이르셨다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가 21,5-11)

 

  우리가 예루살렘 성전처럼 완전히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침기도를 통해 오늘 하루 일어날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기도로 항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으로 깨어있을 때 나는 어떠한 시련에서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성전이 됩니다. 이것이 깨어 기도하는 삶이고 그런 사람들만이 인내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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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멸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대략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소행성과의 충돌강력한 화산 폭발빙하기해빙기는 지구의 생명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생명은 그런 멸종의 순간에도 살아남았고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감각으로는 헤아리기 어렵지만또 다른 격변의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다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생명은 어머니인 지구에서 살아남으리라 생각합니다중요한 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겁니다지금의 삶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깨달음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걸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바라는 걸 남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내가 원하지 않는 건남에게도 권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그런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도 역사의 이어달리기에 함께하는 겁니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행운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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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 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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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재림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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