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2019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21,1-4)
I tell you truly,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rest;
for those others have all made offerings
from their surplus wealth,
but she, from her poverty,
has offered her whole liveliho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길 젊은이들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뽑힌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궁핍하지만 헌금함에 생활비를 다 넣은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칭찬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헌금함은 성전 뜰 안에 놓여 있었는데, 그곳은 여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성전에 봉헌하려는 이는 헌금함을 지키는 사제에게 얼마를 봉헌하는지, 또 어떤 지향을 가지고 봉헌하는지를 알리고는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에 계시다가 눈을 들어 헌금함에 큰돈을 봉헌하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생활비를 예물로 넣은 가난한 과부가, 가진 것 중 일부를 헌금한 부자들보다 훨씬 더 큰 봉헌을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집중하신 부분은 헌금의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부유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기에 기꺼이 이웃과 나누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재물이 하느님과 이웃의 희생으로 얻게 된 것이기에 자신의 소유라 여기지 않으며, 약은 청지기처럼 이웃을 위하여 기꺼이 내어놓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부유하지만 가난한 과부처럼 큰 봉헌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자신의 것을 내어놓기 어려워합니다. 더 많은 재산을 쌓아 두어야 안심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재물을 더 많이 쌓는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는 욕심은 우리를 근심에 빠트릴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죄짓게 만들며 하느님을 멀리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6,13 참조).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가난한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6,20 참조). 모두가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오늘 제1독서인 다니엘 예언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세 젊은이의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려운 일을 시작할 때 태도가 그 무엇보다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론 쉽지가 않지요. 그러나 태도를 바꾸면 가능성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 가는 태도를 바꿔서 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드는 태도를 내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형제님께서 성당에 봉헌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힘들어 죽겠는데 누구를 도울 수 있습니까?”라면서 봉헌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형제님도 계십니다.
“비록 적은 봉헌이지만 이것도 기쁘게 받아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누가 더 기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부자들의 헌금이 과부의 헌금보다 월등하게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은 다른 이의 눈치를 보면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봉헌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했겠지요. 문제는 하느님께서도 이런 마음을 보고서 충분하다고 생각하실까요? 그보다는 봉헌 액수에 상관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기쁘게 봉헌하는 모습을 더 값지게 보십니다.
하느님께 기쁨을 봉헌할 수 있는 선행에 낯선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태도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가난해서 겨우 먹고살 뿐 남 도울 겨를이 없다는 이유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기쁨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저울은 눈에 보이는 예물의 양을 달지 않습니다. 영혼의 확고한 뜻을 가지고 하늘의 저울은 무게를 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은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워낙 고생해서인지 소유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 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재산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렇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나누지를 않네.’라면서 수군거렸지만, 이 형제님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재산을 모으는 데 더욱더 힘을 쏟았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께서는 몸이 너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진단 결과를 듣게 되었습니다. ‘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렇게 욕심을 내니 하느님께 벌주신 거야.”
정말로 그럴까요?
하느님께는 이 세상의 재물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봉헌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잘못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형제님의 질병은 이제까지 잘못한 일에 관한 결과가 아닙니다.
물론 나누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했던 형제님이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섣부르게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인 양 말하고 있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봉헌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전삼용신부-
40세에 천억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 젊은 나이에 천억이나 벌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40세 천억 부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3가지만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습니다. 첫째 약속은 꼭 지켜라. 둘째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어라.”
그러자 사람들은 “그런 건 누구나 다 아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인데?”라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때 그는 3번째 습관을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셋째, 저는 ‘거래하는 파트너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만 연구했습니다.”
논어에도 “내가 일어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일으켜 세우고 내가 성공하고자 하면 먼저 남이 성공하도록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조: ‘천억을 부르는 3가지 습관’, 북올림, 유튜브]
어떤 조리사가 사장에게 앙심을 품고 가게를 망하게 하려고 조미료를 과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히려 더 몰려드는 것이었습니다. 망하면서까지 더 퍼주려고 하면 자기가 더 잘 되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이 법칙을 안다고 다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야합니다. 오늘 과부는 어떻게 자기 생활비의 전부를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었을까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봉헌에 의해 측정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을 전부 주셨는데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것은 자신의 힘으로 챙겨야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소득의 십분의 일도 바치기 어렵습니다.
과부가 가진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말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받으시고 그냥 계시지 않으실 것을 안 것입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굶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는 것은 또한 하느님을 남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입니다. 서로서로 다 내어줄 수 있을 때 남남이 부부가 됩니다. 인간관계의 친밀도는 내가 사람들을 얼마나 자비롭게 보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느님을 자비롭게 볼수록 하느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것입니다. 남남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내어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당신도 아버지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러니 내가 봉헌하는 것이 남인 그리스도에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품고 계신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진 사람은 봉헌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 같아 아깝지 않습니다.
봉헌하는 것이 십자라가 하면 되돌려 받는 것이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로 이어지기에 결국 내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봉헌하는 것이 됩니다. 자비를 믿는다는 것은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 부활시켜 주실 것도 믿기 때문에 더 많이 봉헌하게 됩니다. 봉헌을 통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을 키우는데 봉헌만큼 큰 도구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헌금통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많이 바치는 과부를 찾으십니다. 당신을 더 내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관계의 친밀성과 직결되기에 결국 사랑으로 바치는 봉헌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는 사복을 많이 입었습니다. 사제복은 주로 성당과 전례를 준비하면서 입었습니다. 사제라는 걸 드러내기가 어색한 적도 있었고, 사제복을 입기에는 마땅치 않은 자리도 있었습니다. 10년, 20년 세월이 지나면서 웬만한 자리는 사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른 옷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제복이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편하기 때문입니다. 동네 산책할 때도, 여행 갈 때도 사제복을 입곤 합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제복 때문에 도움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주자 등록증을 신청하는 면담에서입니다. 직원은 사제복을 입은 저에게 강복을 청하면서 환하게 웃었습니다.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고, 면담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운전 면허시험에서입니다. 한국에서 오래 운전을 했지만, 무척 긴장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강사의 도움으로 연습했지만, 더 긴장되었습니다. 시간이 돼서 경찰이 탑승했고,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경찰은 저의 사제복을 보고 인사했습니다. 자기도 성당 다닌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긴장된 마음이 풀리고, 연습한 대로 면허시험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미사 중에 기도하겠다고 하니, 경찰이 고마워했습니다. 사제복의 힘이 큰 것이 아니라, 사제복 뒤에 계신 주님의 사랑이 크심을 새삼 알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다니엘, 아나니야, 미사엘, 아자리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젊은이들입니다. 바빌로니아의 문화, 음식, 사상‘은 이스라엘의 것과 달랐습니다. 화려하고, 색다르고,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야채와 물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살도 찌고,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한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따르는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그 때에 네 백성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양승국신부-
이번 주간 내내 우리가 봉독하게 될 첫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는 아주 특별한 책입니다. 구약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의 묵시문학’입니다. 다니엘서는 서술 형식상 설화와 환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를 읽다보면 알쏭달쏭한 꿈들과 기이한 사건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하나 나타나 왕궁 벽에 글자를 쓰기 시작합니다. 왕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 다니엘이 불려와 글자를 해석합니다. 모함 받은 다니엘이 사자굴에 떨어지지만, 그 다음 날 가보니 그는 사자들 사이에서 해맑은 얼굴로 앉아있었습니다.
묵시문학들은 대체로 종말 계시의 수령자로 상징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런 면에서 다니엘 역시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높이 추앙받던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예언자를 넘어 거의 메시아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거대한 네 마리의 짐승이 수시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또 등장합니다. 다니엘은 언제나 이 네 마리 짐승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리치고 극복해야 할 적이요 원수들입니다.
네 마리의 짐승은 이렇습니다. 1. 사자 같은데 독수리 날개를 달고 있습니다. 2. 곰처럼 생겼는데 입에 갈비 ㅋㅋㅋ 세개를 물고 있습니다. 3. 표범처럼 생겼는데, 등에 새의 날개가 네개나 달려있고, 머리도 네개가 달려있습니다. 4. 앞의 녀석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생겼고, 뿔 열개와 쇠이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개의 뿔이 끝에는 눈들이 달려있었는데, 건방진 말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위 네 마리 짐승들은 집요하게 유다 백성들 끊임없이 괴롭히던 주변 강대국들을 상징합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4마리 짐승들 가운데 유독 제일 크고 지독한 네번째 짐승에 촛점을 맞춥니다. 이는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과 그의 사후에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등장한 헬레니즘 시대의 여러 제국들을 가르킵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더 좁혀 들어가서 셀류커스 왕국과 안티오쿠스 4세 왕(BC 175~163)의 통치 시대에 촛점을 맞춥니다. 선친인 안티오쿠스 3세 왕(BC 223~187)은 왕국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대패하자, 나라의 재정이 급격히 고갈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4세가 왕좌에 등극한 것입니다. 야심으로 가득한 그는 위축된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재정 확보에 골몰했습니다.
바로 이때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는 권력 투쟁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메넬라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자산가 그룹이 예루살렘 성전 금고를 모두 털어 바친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안티오쿠스 왕에게 제시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부가 시리아로 넘어갔습니다.
점점 더 욕심이 커진 안티우쿠스 4세 왕은 충실한 하수인 메넬라우스 일당의 협조 하에 유다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살육과 약탈을 계속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이방인 군대에 짓밟히고 유린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유다 백성들은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착취당하던 민중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반 셀류커스 왕국, 반 안티우쿠스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민족의 반역자 반 메넬라우스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반 헬레니즘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유다의 사회·정치·경제적 상황과 오늘날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이 어찌 그리 흡사한지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을 유심히 읽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고초와 우리 민족의 고초가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극단적 자국 중심주의의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 그들은 언제나 호시탐탐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자국에 유리하게 활용하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여러 유형의 민중 봉기와 저항을 위한 노력이 있었는데, 자연스레 마카베오 가문이 주도한 봉기 아래 결집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 왕조(BC 586~140)가 몰락한지 거의 450년만에 하스몬 왕조라고 하는 독립 왕조가 탄생하게 됩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마카베오 가문이 등장하기 전,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씌여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라 상황은 여전히 비참하고 열악했으며, 주권 회복의 희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일일 번제, 파멸을 가져오는 저 죄악, 성소가 넘겨지고 군대가 짓밟히는 일, 환시에 나타난 이 일들이 언제까지 지속되겠습니까?”(다니엘서 8장 13절)
그러나 다니엘은 탄식과 절망에 빠진 동족들, 그러나 끝까지 저항의 깃발을 내려놓지 않는 민중들을 향해 하느님의 종말 계시를 전합니다.
“그 때에 네 백성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다니엘서 12장 1~4절)
다니엘이 예언한 ‘그 때’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때로서 바로 지금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구언의 때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임을 강조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약소국의 서러움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주변 강대국들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투쟁하고 참여했습니다. 그런 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통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다 민족의 수난사를 통해 오늘 우리 민족이 처한 난관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 어느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불의한 외세와도 굳건히 맞서야겠지만, 더 교묘하고 사악한 내부의 적과도 부단히 맞서야겠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통성과 강점을 극대화시켜야겠습니다.

부분은 전체보다 많을 수 없다
-반영억신부-
오래 전의 일입니다.‘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비교를 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 현임지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안하고 전 임지와 견주었습니다. 추수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물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 한 적도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키지 못하고, 믿음을 성장시켜드리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마음의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지만 머리로만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인생자체가 담긴 것이라면 가장 많은 돈이 됩니다. 가장 적은 것이라도 보아주시고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정성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한 때는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봉헌한 현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이 물질에 휘둘렸습니다. 그 후로 ‘물질의 봉헌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자!’다짐했습니다. 봉헌을 아까워서 마지못해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는 헌금을 하느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크면 모두가 주님의 것이요, 감사하게 될 것이니 믿음을 키우는 것에 마음을 두자. 믿음의 성장에…. 그러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데 익숙해진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분은 부분입니다. 전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께 바칠 것을 떼어놓고 나머지를 가지고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 어떨지요? 물질뿐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 재능도 말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도둑의 뉘우침
한 성직자가 물건을 훔쳐 나가는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깊이 반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물건을 훔쳐 나오면서 발자국을 닦지 않았어요. 바로 가서 닦아야 하겠어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여기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라는 말씀과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다 바친 것을 칭찬하신 말씀으로만,
그리고 봉헌이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의도가 그런 것일까?
(봉헌에 대해서 강론을 할 때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예로 들면서
가난한 과부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그 과부의 마음과 정신을 본받자고 말하지 않고
가진 것을 전부 다 바친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강론이 될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힘들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강론을 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되기는커녕 고문당하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열의만 있으면’이라는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바치는 것이면’이라는 뜻이고,
‘형편에 맞게 바친다.’ 라는 말은, 명예욕이나 허영심 같은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만큼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형편에 맞지 않게 바치는 것은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서,
즉 명예욕 때문에 지나치게 많이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기꺼이 받아들여진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는 뜻입니다.
‘요구되지 않는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바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많이 바쳐도, 또 가진 것을 모두 바쳐도,
명예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동전 두 닢을 바친 가난한 과부의 경우,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칭찬받고 싶은 욕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형편에 맞게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바친 동전 두 닢은,
원래 가지고 있던 얼마의 돈 가운데에서 그날의 생활비를 쓰고 나서 남은 돈일까,
아니면 다음 날 써야 할 생활비일까?
헌금함에 넣은 동전 두 닢이 아마도 그 과부의 전 재산이었을 것이고,
그는 그 동전 두 닢을 바침으로써 ‘동전 한 닢도 없는 상태’,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을 텐데,
확실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생활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굶어죽을 작정을 하고 생활비를 모두 바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과부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34).”
라는 예수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는 성전에서 준 돈이었을 것입니다.
내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날마다 생활비를 주었기 때문에
내일의 일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내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모두 바친 것은 그 믿음과 정성에서 나온 일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본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그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믿음과 정성을 칭찬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과 믿음과 정성에 변함이 없다면,
혹시 어떤 사정이 있어서 동전 두 닢 가운데 한 닢만 바치고
한 닢은 그냥 가지고 있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무조건,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모두 바쳐야 한다.”
라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 형편대로 정성껏 바치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을,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경우에 적용하면,
그 부자들은 그들 자신들의 형편에 맞지 않게 아주 적은 돈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형편에 맞게 바치려면 훨씬 더 많이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열의’ 없이, 즉 정성 없이,
마음에 없는 헌금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돈의 액수만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바쳤을 것입니다.
칭찬받고 싶은 마음으로, 또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려는 마음으로,
동시에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바쳤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속마음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칭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칭찬하시기는커녕 속마음에 숨어 있는 교만, 명예욕, 허영심 등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사실 바리사이들은 율법 준수를 철저하게 한 것처럼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치는 행위’만 보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앞서 있었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삶’이 위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바치는 행위’도 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봉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액수도 아니고, 비율도 아닙니다.
사심 없는 마음, 또 진실한 믿음과 정성입니다.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전부 바치느냐, 일부만 바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바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 궤가 13개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나팔 궤 가까이 앉으시어 많은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 그 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돈이라고는 엽전 두 닢 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돈은 그 과부가 가진 것 전부였기 때문이다(3-4절).
부자들은 교회에서 선행을 하지 못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어두워진 눈에는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돈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에 그리 관심이 없다. 그러기에 주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지 않았고,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 대신 재물이 맨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궁핍으로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예물을 바친 과부가 나온다. 그 과부는 헌금함에 자신의 전 재산인 렙톤 두 닢을 넣었다. 이 과부는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다.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과부가 내 놓았으니, 그런 칭찬을 들었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행을 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신다. 이러한 예물이 ‘하느님의 예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하느님의 예물 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음을 지적하셨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손이었다. 그 과부야말로 거룩하신 심판관께 최고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다.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참된 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예물보다 가난한 자가 사랑과 열성으로 바친 예물을 더 즐기신다.
과부의 가난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는 풍요로운 부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 주라며 내놓은 두 데나리온(루카 10,35)도 그런 돈이다. 가난한 과부는 병자들이 치료받고 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예물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표상이 되었다.
친절을 베풀어도 온유해지지 않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선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선행 역시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선행에 낯선 사람이 되지 말자.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지다. 모든 동정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분은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 사랑을 드리자.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 3)
-한상우신부-
우리의
부족함과
가난함까지 따뜻한
예물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빈곤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의
부족함을
부끄러워
하지않습니다.
부족하기에
주님을 찾습니다.
부족함이
더 절실한
기도가 됩니다.
부족한
이 현실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기도또한
이 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쳐질 수 있는
현실이 나눌 수 있는
현실이 됩니다.
현실이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이
계시기에 기쁘고
행복합니다.
궁핍한 가운데서도
진심을 담는
사랑과 기도의
기쁜 날 되십시오.
진정한 봉헌은
진정한 마음이며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과 현실은
분리될 수 없는
기도이며
봉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의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루카 21,2).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과부는 대부분 가난의 짐까지 떠안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자주 등장하지요.
그녀가 넣은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 가운데 가치가 낮은 쇠돈이었습니다. 과부의 처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그런 보잘것없는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3).
예수님은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은 부자들을 비난하신 것이 아니라,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은"(루카 21,4) 과부를 대견히 여기신 것입니다.
과연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내놓는다는 게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쇠돈 두 닢이 헌금함 안에서 떨어지며 내는 소리로 현재의 가난이 발가벗겨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래에 예상되는 생명의 기대까지 내려놓는 것이겠지요.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런데 그녀가 쥐고 있던 작은 쇠돈과 대조되는 큰 배짱, 큰 용기, 큰 믿음이 보입니다. 사랑하고 경외하는 하느님께 가진 모든 것을 깡그리 다 드리고 싶은 '온전한 봉헌'이고, 다른 한편으론 사실 하느님께 엄청난 부담을 드리는 '온전한 의탁'일 겁니다. '제가 인간적으로 취할 수 있는 모든 걸 드리니, 당신께서 모든 걸 해주십시오' 하는 남도 모르고 본인도 모르지만 하느님만 아시는 청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 왕실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젊은이들 이야기입니다.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다니 1,8).
젊은이들은 호화롭고 사치스런 궁중 생활에 젖어들기보다 하느님의 법과 민족적 규범을 지키고자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 힘이 없는 데다, 자기들만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자칫 자기들은 물론 관리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모험입니다.
"주님께서는 ... 그의 손에 넘기셨다"(다니1,2).
"하느님께서는 ...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다니 1,9).
움직이시는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유다 젊은이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마음까지 움직이십니다. 이방인들은 이 일이 하느님의 큰 그림 안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순명하지요.
영양학적인 근거를 뛰어넘어 그들이 믿는 바가 이루어집니다. 채소와 물만 섭취하고도 "궁중 음식을 먹는 어느 젊은이보다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니 말입니다. 유배지 이국땅 왕실에서 그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합니다. 비록 현실은 녹록치 않아도 만물의 창조주이신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살리시리라 믿었고 결국 그대로 이루집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온전한 의탁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우리의 봉헌이 렙톤 두 닢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기도 합니다. 외롭고 힘 없는 처지도 허락하시고요. 이럴 땐 아무리 뒤져봐도 주님께 드리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한 예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텅텅 빈 채로 그분 앞에 선다는게 민구스러울 지경의 가난을 절감하게 되지요. 이때는 의탁만큼 커다란 제물이 없습니다.
"온전히 다 드립니다. 이것마저도..."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생명줄까지 내놓는 것이 의탁입니다. 현재는 물론 미래의 생명까지 내려놓는 진심어린 결행에는 이천 년 전 예수님을 감동시킨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무게 중심을 그분께 완전히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 내 삶의 무게는 그분께 넘어갑니다. 그 다음은 그분이 하실 겁니다.
가진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과부는 큰 재산의 소유자였어도 그리 했을 겁니다. 또 풍족하면서도 바치는 데 인색한 이는 없이 되어도 그대로일 겁니다. 중요한 건 소유의 양이 아니라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내어드리고 의탁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가톨릭 성가 221)

주님께서 더 어여삐 여기시는 것
-김찬선신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는 말은
물량적으로는 틀린 말이고 비율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비율입니까?
그것은 소유분의 봉헌, 곧 봉헌/소유이지요.
그리고 소유분의 봉헌이 바로 사랑과 정성입니다.
가진 것중의 얼마를 봉헌했냐가 사랑과 정성이라는 말인데
오늘 과부는 100분의 100을 봉헌을 했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생각게 합니다.
그는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주님께서 먼저 당신 전부를 우리에게 바치셨고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우리도 전부를 바쳐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전부를 바치는 면에서 주님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의 영광이요 유리함입니다.
부자는 바치는 것에서 가난한 사람보다 불리하고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부자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그리고 전부를 바치는 면에서는 더더욱 유리합니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그래서 내것이 없다고 늘 생각하고,
그래서 내것이랄 것이 없기에 내놓고 바치는 것이 쉽지만
부자는 내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움켜쥐게 되고
그래서 바치기 이전에 내놓는 것에서부터 어렵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 중에도 가난이 지겨워 더 집착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부자 중에도 드물지만 가진 것을 자기 거라 생각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대체로 가난한 사람이 조금 있는 것 마저 다 내 놓는 것이 쉽고,
부자가 그 많은 것 다 내 놓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을 저는 이런 식으로도 이해합니다.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그만큼 홀쭉해져야 하는데
배부르게 잘 먹어 뚱뚱한 사람이 그만큼 살을 빼는 것은
못 먹어 삐쩍마른 사람이 살을 빼는 것보다 당연히 훨씬 쉽지 않겠지요.
그리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단식하는 것보다
먹을 것이 있을 때 단식하기 어려운 것처럼
가진 것 많은 부자가 내려놓고 봉헌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요.v
그러나 오늘 주님에게서 받는 더 중요한 가르침과 격려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물량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신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더 어여삐 여기시는 것은 헌금보다 사랑이라는 겁니다.
돈을 좋아하고 그래서 뇌물을 원하는 우리 인간은
돈을 많이 받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돈을 받으시는 것보다 당연히 사랑 받으시는 것을 더 좋아하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의무나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헌금을 바치기 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꺼이 사랑을 봉헌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21,1-4)
믿음은 봉헌에 의해 측정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을 전부 주셨는데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것은 자신의 힘으로 챙겨야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소득의 십분의 일도 바치기 어렵습니다.
과부가 가진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말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받으시고 그냥 계시지 않으실 것을 안 것입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굶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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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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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다 드립니다. 이것마저도..."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생명줄까지 내놓는 것이 의탁입니다. 현재는 물론 미래의 생명까지 내려놓는 진심어린 결행에는 이천 년 전 예수님을 감동시킨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무게 중심을 그분께 완전히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 내 삶의 무게는 그분께 넘어갑니다. 그 다음은 그분이 하실 겁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가톨릭 성가 221)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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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생각게 합니다.
그는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
먹을 것이 없을 때 단식하는 것보다
먹을 것이 있을 때 단식하기 어려운 것처럼
가진 것 많은 부자가 내려놓고 봉헌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요.v
그러나 오늘 주님에게서 받는 더 중요한 가르침과 격려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물량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신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더 어여삐 여기시는 것은 헌금보다 사랑이라는 겁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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