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22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11. 21. 20:01

2019년 11월 22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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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루가 19,45-48)


Jesus entered the temple area and proceeded to drive out
those who were selling things, saying to them,
“It is written,
My house sha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thie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단을 다시 봉헌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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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마카베오와 형제들이 독립 전쟁을 치른 뒤 이민족들에게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여드레 동안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 축제’)를 지내는데,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며 빛을 밝히는 성전 봉헌 축제는 신약 성경, 특히 요한 복음에서도 이따금 언급되는 축제입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가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으로(마르 11,15-19; 마태 21,12-13; 요한 2,14-16 참조),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 자체를 정화하시거나 부수어 없애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고치고자 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무엇이 참으로 올바른 예배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보여 주던 행동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언자들은 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예배 행태를 비판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두 구절, 곧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7 참조)와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예레 7,11 참조)는 말씀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성전에서 이루어졌던 예수님의 예언자적 비판은 그분을 죽음으로 내모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제물 판매로 많은 수입을 얻고 있던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바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참된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이제 더 이상 성전에서 환전하고 물건을 사서 하느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 곧 예수님이라는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제물로 봉헌하는 참된 제사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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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을 애지중지 여기면서 보는 스타일입니다. 보는 책에 북 커버를 씌우고, 책에 밑줄은 물론이고 어떤 낙서도 하지 않습니다. 책을 접어서 표시한다는 것도 제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부분에는 북 클립으로 표시를 하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책에 직접 하지 않고 독서 노트를 책 옆에 두고서 메모합니다. 그래서인지 다 읽은 책이지만 완전히 새 책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은 책이 너무 새 책 같다면서 “신부님, 정말로 읽은 것 맞아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사실 책에 자기 생각을 남겨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어느 한 부분에 밑줄이 그어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밑줄에 눈이 가게 되었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왜 밑줄을 그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별 내용 아닌 것에 그어 있는 밑줄 때문에 괜히 시간 낭비만 했습니다.

책에 밑줄이나 메모를 할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 역시 그 밑줄이나 메모를 보게 되면 그냥 넘어갈 부분도 다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밑줄이나 메모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의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남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때가 참으로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소리를 키워서 힘차게 주장하는 것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행동을 하는 것 역시 은연중에 남들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남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신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입니다. 성전이란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 행위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행동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더 소외되고 하느님의 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사람들이 이렇게 장사하고 또 비리를 저지르는 행위를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도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쳤던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장사하는 곳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범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심을 내세우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과거의 탓, 남의 탓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인생은 호전된다(웨인 다이어).



감각이 예민한 사람(소심하거나 내성적인)을 위한 Tip

일자 샌드의 ‘샌서티브’라는 책을 보면 감각이 예민한 사람을 위한 팁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눈감기: 사람이 받는 자극의 80%는 시각을 통한 자극입니다. 그래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에서 자극을 받습니다. 따라서 감각이 예민해질 때 눈을 감아야 합니다.

2. 헤드폰: 청각 자극도 예민하므로 헤드폰으로 소리를 제한하면 좋습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5분 정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소리를 제한해 보십시오.

3. 설거지: 자신을 재정비하는 무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주 일상적인 활동, 예컨대 설거지하며 머리를 비우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닙니다.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몸을 다스려야 합니다.                   

효도하는 자녀가 행복하다

-전삼용신부-


영화 ‘똥파리’(2008)의 주인공은 용역소에서 일하는 깡패입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가슴 한편엔 온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픔이 시리도록 서려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한한 증오심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칼에 찔린 여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볼 때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의 가족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과 함께 그의 인간성도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아버지만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14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한없이 두들겨 팹니다. 그렇다고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 아버지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마음 안에서 그런 아버지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미워할 수 있는 가족이라도 있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김희아씨는 얼굴에 큰 모반이 있다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다 깎아내어 얼굴 모양까지 변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녀를 보면 사랑은 노력하면 발견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래도 자신을 뱃속에서 키워주시고 아픔을 감수하며 낳아주시고 다른 곳이 아닌 고아원에 버려주신 것을 감사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그런 감사할 거리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면 그녀는 똥파리의 주인공처럼 영혼 없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면 부모님은 나의 생명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 피 흘림을 묵상하면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도 감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모에게서 감사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증오하여 자신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행복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 감사를 찾아내고 못 찾아내고는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묵상하거나 그러기를 원치 않는 두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 지상의 부모가 자녀에게 생명을 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상의 부모는 그 생명을 전해주어 창조에 협조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어떠한 감정을 회복해야 할까요? ‘감사’입니다. 감사는 김희아씨처럼 노력해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감사 없이 불평만 하며 영혼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 당신에게 감사할 위대한 표징을 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피 흘림을 묵상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내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당신을 묵상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감사가 솟지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서 그 감사를 이끌어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이들이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마음에 감사가 솟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감사가 솟아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 자녀는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원치 않은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자신들을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느님 사랑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려 하지 않는 강도들의 소굴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사랑이 기도하는 집인 사람들에게 감사가 솟구치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예수님의 희생을 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감사하여 그분 뜻대로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는 기도하는 집이 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도들의 소굴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닌 기도하는 집이 된 이들만을 당신 가족으로 여겨주십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조재형신부-


신부님들이 오시면 찾아가는 곳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도시를 좋아하면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구경을 하러 갑니다. 새로이 명소로 등장한 허드슨 야드의 베셀(Vessel)’을 봅니다. 기하학적으로 참 아름다운 구조물입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도시의 전망도 봅니다. 성 패트릭 성당에서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배를 타고 강에서 시내를 봅니다. 저녁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봅니다. 뉴욕 시민들이 마음의 고향처럼 여기는 센트럴파크에서 도심 속의 숲을 걷습니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는데 손님이 오시니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면 차를 타고 근처의 베어마운틴을 갑니다. 아름다운 호수가 반겨줍니다.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등산하고 내려올 수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갑니다. 가는 길이 참 좋아서 조용히 묵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돌아올 때는 7개의 호수가 있는 길로 방향을 잡습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못내 아쉬워 가지에 붙어있는 늦은 단풍을 봅니다. 물가에 비추는 여울은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는데 손님이 오시니 때아닌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사과 몇 쪽과 커피는 산행의 즐거움을 더하는 덤입니다.

 

예전에 부르던 성가가 생각났습니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온 세상 만민이여 주님을 찬양하라.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 받들어라. 해와 달과 별들이여 주를 찬양하라. 그분이 영원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눈과 비와 우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엄위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바닷속의 고기들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전능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높은 산과 언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오묘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고, 자비하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중요한 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픈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배고픈 친구를 보면 나눠주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나보다 예쁜 친구를 보면 샘이 나기도 하고,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뺏고 싶기도 해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와 나쁜 마음을 주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자주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기에 이긴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뉴욕의 문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하면 아름다운 자연의 속삭임도 듣지 못합니다. 2019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곧 대림 시기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셨는지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참된 의미의 성전이란? 예수님 발치 아래 앉아,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 기간 내나 지속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거지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행동은, 가난하지만 착한 백성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십년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싹 내려가는 유쾌·통쾌·상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릴대로 구려터진 노회한 율법학자들과 이미 삯꾼으로 전락한 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야말로 쌍날칼이요 맵디매운 고추가루였습니다.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조용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퍼져야할 성전을, 장사꾼들과 사기꾼들, 야바위꾼들의 호객소리가 넘쳐나는 장터로 훼손시켜놓았습니다.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수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사제는 당시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린의 의장이었으니, 그 권한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상행위를 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검은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빼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속화될데로 속화된 성전 주변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모든 안타까운 현실을 당신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는 과격함과 뜨거움으로 타락한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루카 복음 19장 46절)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초강력 펀치 앞에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반면에 구린 속을 들켜버린 적대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다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고민하기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는 그들의 사악한 계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그분 주위에 뺑 둘러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파악할수가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말씀에 충실한 백성들! 그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성전인 것입니다.

 

 성전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의 영적 공동체를 먼저 건설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공동체 안에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와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건물은 그 후의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영적 성전 건립, 그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이 건립된다 할지라도, 그안에 주님의 사랑과 희생, 헌신과 나눔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아닙니다.

 

 작고 허름해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구성원들이 그분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 받을 아름다운 성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상거래는 하느님 집에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찬미하는 집, 무한하신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집, 형제적 친교를 나누는 집이어야 마땅합니다.


강도의 소굴

 -반영억신부-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쫓겨난 장사꾼들이 아니라,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입니다.
이것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바로 ‘강도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장사꾼들은 그 강도들의 하수인들이었을 뿐입니다.)

뒤의 20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일’, 그것이 곧 강도짓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법률 상담 등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냈습니다.
그것은 서민들을 착취하는 일이었고, 사실상 강도짓이었습니다.
사제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할 제물용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고,
그 수익금을 자기들이 차지했습니다.
하느님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채운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 라는 자들도 사제들, 율법학자들과 한통속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일 수가 없으니
허물어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전 건물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인들의 죄가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종교를 개혁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돈을 섬기는 타락한 종교는 허물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참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하는 일의 일차 책임은 사제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구약성경 미카서에 나오는 다음 예언에 연결됩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돈에 팔려 재판을 하고, 사제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라는 것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 하는구나! 시온이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 줄 알아라(미카 3,9-12.공동번역).”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성전이라고 해도, 그것이 종교라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옛날 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미카서의 예언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언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야 합니다.
(중세 때에 심각하게 타락하고 부패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모든 악의 뿌리인 돈을 밝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죄를 짓는 일이 되지만,
더 큰 죄의 원인이 됩니다.
만일에 교회가, 또는 사제가 돈을 밝히고, 돈에 매이면 큰 불행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 구원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걸림돌로 추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3).” 라고
지시하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열두 사도만 실천하면 되는 지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하는 지시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일은 ‘돈의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돈이 없을 때에는 조금 불편하고 힘든 생활을 했어도
위기 상황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심각한 위기 상황은 항상 돈이 많았을 때에 겪었습니다.

< 돈과 재물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할 때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라고 말하면서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도 아니고,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말씀들도 아닙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생명의 말씀’입니다(요한 6,68).>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의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미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갈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궁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6)

-한상우신부-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기도의 집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움이 있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뜨거움의
거처에서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기도가
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만남으로 잃어버린
기도의 집을 드디어
찾게 됩니다.

성녀 체칠리아는
최선을 다하여
기도를 끌어안습니다.

서로에게 스며드는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집에는
화해의 신비가
일어납니다.

모든 여정에
함께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집을
향하는 성녀
체칠리아의 삶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충실한 기도의
여정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의 내용들은 성전 정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루카 19,45).

성전 정화 대목은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루카 19,28-40),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신 내용(루카 19,41-44) 뒤에 이어집니다. 우리는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그분이 이 성전의 주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하셨음을 감지합니다. "쫓아내는" 행위는 그저 잠시 들른 객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건 주인으로서의 권한 행사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성전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만큼 성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분 자신이 곧 성전이시니까요.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 머무르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일치하는 장소입니다.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모든 존재도 성전임을 우리는 예수님의 계시(요한 2,19-21 참조)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1코린 3,16 참조)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루카 19,46).

예수님께서 율법과 거룩함을 빙자하여 기득권층의 이익과 영리를 창출하는 통로로 전락해버린 성전의 모습을 이 한마디로 표현하십니다. 안타깝지만 정곡을 꿰찌르고 계시지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기도의 집"과 "강도들의 소굴"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섬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예식과 제물과 직위와 계급이 발생하고, 인간들이 너무 똑똑한 탓에 남용과 오용이 교묘히 횡행하다가 또 다른 제도로 고착되면서 이익집단의 사유화를 낳지요. 그러니 결국 "강도들의 소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정면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시커먼 속마음을 들켜버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몹시 분노합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니 약점이 제대로 건드려진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꿋꿋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뇌관을 건드린 탓에 당신께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 성전에서 날마다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십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루카 19,48).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권력에서도 소외된 소박한 민중이 예수님 곁을 지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흡수하는 스폰지처럼 온 존재로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을 먹는 듯, 그들은 귀로 말씀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혼이 배부르고 피어나고 생기를 되찾는 흡족한 시간입니다.

제1독서는 유다 마카베오를 선두로 한 마타티아스의 아들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교도들에게 더럽혀진 성전을 탈환한 뒤, 정화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성전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고 자긍심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이를 잘 아는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이 혐오하는 방식으로 부정하게 성전을 능멸해 그들의 기를 꺾는 동시에 힘의 구심점을 파괴했지요. 그러니 적은 수의 군대로 온전히 하느님 힘에만 의지해 되찾은 성소는 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보람을 안깁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1마카 4,55).

하느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거기에 머무르시다가, 모욕당하고 쫓겨나셨던 치욕이 말끔히 씻겨집니다. 백성은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며 새 희망으로 가득찹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단 봉헌 축일을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1마카 4,59)고 합니다.

하느님과 예배자의 관계성이 예식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형식과 의미가 적절히 잘 조화된 예식은 그래서 더 아름답고 진실한 감동을 남기지요. 주님과의 관계가 뜨겁고 친밀하고 열렬할수록 "주님" 하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하나에도 둘 사이에서 오가는 온갖 사랑의 자취가 담깁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요한 4,23 참조)하는 이는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의무란 사랑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하느님과 나누는 내적 관계와는 무관하게 의무와 규정에 꽂혀 그분과 건조하고 미지근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 주머니에만 관심을 갖는 이들은 형식과 제도, 예식을 치장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자기와 더 깊이 만나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의 갈증과 허기를 물질과 예식으로 보상하려 들지요. 그러다보니 성전과 예식이 화려하고 장황해져도 진정한 울림이 없습니다. 관계성 안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이 결여된 탓일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 머무르는 중에 마음과 영혼에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오갔습니다. 그래서 문득 멀리 갔다 싶으면 다시 되들아오길 반복하며 말씀하시는 주님 마음을 들으려 애써야 했지요. 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완벽히 깨끗하게 되면 그제야 사랑해 주시겠다는 결벽증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된 본연의 목적성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디 하느님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모습을 받은 존재니까요.

이 정화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일으키시는 은총입니다. 성전이 이미 일부분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면 내쫓고 뒤엎는 이 거룩한 손길이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지요. 완벽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기도의 집으로 가꾸며 지켜나가는 중이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나를 들쑤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께서 그것을 어떻게 쓸어내시는지 유심히 바라봅시다. 거기에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정화의 포인트가 숨겨 있을 테니까요. 내적 외적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공동체와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성전을 찾는 이유 ? 
-김찬선신부-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어제 오래 알고지내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흉허물없이 모든 얘기를 할 수 있는 분들인데
얘기를 하다보니 그분들 본당에 대한 얘기도 나왔지요.

본당을 짓는 과정에서 두 파로 갈렸다는 얘기인데
성당건축을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분들의 입김이 작용하여
신부님을 따르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갈렸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당에 왜 오나?
돈벌러 오나?
싸우러 오나?
주장질 하러 오나?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과 오늘 주님의 성전정화 얘기를 연관지으면서
다시 한 번 왜 성당에 오는지,
우리의 성당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정식으로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고 하느님 백성이 모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은 본당신부 중심이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고 신자중심이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며
그야말로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얘기를 왜 이렇게 하는가요?
그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실로 신부는 신부대로 자기가 주장이 되어 주장질을 하고,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신부가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고 반대하며,
그러는 가운데 신자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리고
어느새 하느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성당에서 실종이 되셨습니다.

이는 마치 형제들이 명절에 고향을 찾아 부모님 모셔놓고 식사들 하다
부모님은 완전히 제켜놓고 자기들끼리 재산 문제로 다투거나
정치 문제로 다투고 또 아이들 문제로 신경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에게 왔으면 부모님 말씀을 듣고 부모님 말씀에 대해 형제들이
서로 의논을 하고 나눔을 하는 것이 정상이듯 하느님 집에 왔으면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같이 찾으며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같이 실천할지 그것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성당에서 같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는 실패하고
혼자 하느님을 만나거나 같이 만날 경우에는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만나서 끼리끼리 좋아하거나 끼리끼리 싸웁니다.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것은 성당이 하느님 안에서
친교를 맺는 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교장이나 카페가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빼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은 성당이 사교장이나
카페만도 못한 격투기장이나 정치 싸움판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나누는 것은 성당이
거래를 하는 거래소나 상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성당에서 싸웁니까?
싸울 곳이 없어서 성당에 와서 싸우는 겁니까?
세상에서 내내 돈벌고 거래를 했는데 성당에 와서도 거래를 합니까?
밖에서는 주장질을 못하니까 성당에 와서라도 주장질을 해야겠다고,
그래서 성당에 오는 것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며 정화를 하시는데
우리도 성전 정화를 한다면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성전을 찾는 우리 개인의 더러운 의도들을 정화해야겠고
그런 다음에 나와 하느님이 진실하게 만나는 기도를 하고
그런 다음에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성전이 되게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2015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2013년 11월 2일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루가 19,45-48)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감사하여 그분 뜻대로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는 기도하는 집이 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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