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9. 11. 19. 20:06

2019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루가 19,1-28)

 

 Well done, good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in this very small matter;
take charge of ten citi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고 모두 죽음을 받아들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미나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는 어떤 귀족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인물은 헤로데 임금의 첫째 아들 아르켈라오입니다. 그는 헤로데 임금이 죽은 뒤 유다와 사마리아 땅을 물려받았는데, 아버지처럼 왕권을 인정받으려고 로마로 올라갑니다.그러나 그는 폭군이었기에 유다인들은 그가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뒤따라 로마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어 그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간청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왕권을 인정받지 못한 아르켈라오는 화가 나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던 이들을 찾아내어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더한 폭정을 펼칩니다. 결국, 로마 황제는 그를 소환하여 오늘날 프랑스 땅으로 유배시켜 버립니다. 이후 유다와 사마리아 땅은 로마 총독이 직할 통치를 하게 됩니다.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빗대어 종말과 관련된 이야기를 펼쳐 내십니다. 종말이 되어 주인이 돌아오게 되면, 맡은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였는지에 따라서 주인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지, 쫓겨날지가 결정되는데, 주인이 임금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오늘 제1독서인 마카베오기에서는 하느님께 참으로 충실하였던 일곱 형제와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죽음을 맞게 되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에게 생명을 다시 주실 것입니다. 그들과 달리 안티오코스 임금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누렸지만, 영원한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유튜브에서 시사 정치 문제를 다루는 채널을 즐겨보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자극적인 말로 현재의 시사 정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유튜버의 말에 공감하면서 그 역시 지금 사회를 비판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그 원인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침대에 누워서 자신이 즐겨 보던 유튜브를 더 즐겨봤습니다. 하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고 더 아픈 것입니다. 이제는 유튜브를 볼 힘도 없어서 그저 누워서 잠만 잤습니다.

이렇게 3~4일을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있었던 그는 점점 기력을 회복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워있을 때 아픈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유튜브를 보면서 얻게 된 자그마한 지식으로 계속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쏟아붓다 보니 주님께서 그런 생각과 말을 하지 못하게 아예 보지 못하도록 아프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제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좋은 모습도 너무 많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건강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니 좋은’ 곳입니다. 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보시니 나쁜’ 곳으로 만드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십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에서는 ‘미나’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각 사람이 받은 미나가 달랐습니다. 능력에 따라서 분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잘 활용해서 열 배로 또 다섯 배로 불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일을 했을 뿐인데 그 혜택은 종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수익을 우리가 차지합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받은 하나의 미나 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가 풍요롭게 되기를 바라는 주님께서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지금을 사는 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칭찬의 말일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혼나는 것이 아닐까요?
태도는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이 만드는 차이는 엄청나다. 즉, 어떤 마음을 갖느냐가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다(윈스턴 처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

옛날 한 왕국이 이웃 나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왕은 전쟁 영웅들을 불러서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참여했던 왕자가 자신에게도 상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왕은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하들에게 과인이 왕자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내리려고 했는데 왕자가 거절했다고 말하겠다.”

상을 달라고 청했더니 이상한 말만 하는 왕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동시에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지요. 그러나 며칠 뒤에 왕자는 깜짝 놀랄 체험을 하게 됩니다.

대장군의 지위를 거절한 왕자는 매우 겸손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왕자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더 큰 선물이었을까요? 눈앞에 놓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앞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지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나의 냉혹함을 보지 않으면 하느님을 냉혹하게 본다

-전삼용신부-


두 아이와 한 호두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목수가 되었고 한 아이는 백수가 되었습니다. 호두나무는 목수보다는 백수가 더 좋았습니다. 목수는 자신을 베어버릴 것 같았지만 백수에겐 자신이 그늘도 주고 호두열매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수는 호두나무를 이용해 임금의 의자를 만들고 싶었지만 이것을 눈치 챈 호두나무는 자신의 몸을 뒤틀어 목재로 쓰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호두를 따기 위해 자기에게 돌을 던지고 가지를 부러뜨리는 백수에게만 몸을 맡겼습니다. 그렇게 호두나무는 백수에게 충성을 다 바치고 백수와 함께 흙이 되었습니다.

      호두나무가 임금의 의자가 되어 귀중하게 쓰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열리는 호두를 따먹는 백수는 자아를 상징합니다. 자아가 좋게 보이면 자신을 변화시키러 다가오시는 하느님은 나쁘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을 받지 못하는 악한 종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악한 종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자신을 잘 살게 해 주려는 주인을 냉혹하게 보고 있다면 그 종은 주인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을 선하신 분으로 보고 자신을 나쁘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야합니다.

      아담도 죄를 짓고는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아담으로부터 생명나무로의 접근을 막은 것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면 그리스도의 뜻대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아를 주인으로 선택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의향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체도 무익하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10)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깨달아 돌아와서 성체를 영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완전한 악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는 성체가 그 사람 안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아를 섬기는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며 그 자아의 힘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려주시려 하십니다. 망하고 망해봐야 자아가 얼마나 냉혹한지 알게 되고 그 자아로부터 구해주러 오시는 주님을 참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위의 구절은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묻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이사 6,11)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이 주민 없이 황폐하게 되고 집집마다 사람이 없으며 경작지도 황무지로 황폐해질 때까지다.”(이사 6,11)

      황무지는 광야를 의미합니다. 광야는 자아를 죽이는 장소이고 숫자로는 40입니다. 자신을 죽일 줄 알기 전까지는 성체를 영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이는 일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소유욕을 죽이기 위해 소득의 10분의 1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자리 잡으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 이 땅에는 황량함이 그득하리라.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릴 때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이사 6,12-13)

      10분의 1이 봉헌되면 자아라는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리고 그 그루터기로부터 거룩한 씨앗인 그리스도께서 자라나 새로운 본성의 나무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악한 종은 하느님을 모진 분으로 판단하고 자신을 자비롭게 여겼습니다. 자아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바꾸어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성체를 아무리 모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자아를 모질게 보아서 오직 하느님만이 좋으신 분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주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자아는 뱀입니다. 대화할 상대도 아니고 친해지거나 그의 말을 따라줄 상대도 아닙니다. 자아를 뱀으로 명확히 볼 줄 알아야 눈이 열려 성체가 나를 변화시키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악으로 보일수록 주님은 선으로 보입니다. 선한 종은 자신을 악하게 보는 종입니다.


-조재형신부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입니다. 한국에서도 안식년 중인 사제가 왔습니다. 켄터키, 랄리, 뉴욕, 필라델피아에서 모였습니다. 워싱턴, 델라웨어, 코네티컷에 있는 사제들은 사정이 있어서 참석 못했습니다. 저처럼 이제 막 온 사제도 있고, 적응을 마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사제도 있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제도 있습니다. 저는 차로 3시간 운전해서 모임 장소인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비행기로 온 분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있으니, 먼 길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힘들고 외로울 수 있는데, 함께 모이니 위로가 되고, 용기를 얻습니다.

 

2019년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곧 새해를 맞이합니다. 안식년을 보내던 저에게는 삶의 둥지를 옮기는 해이기도 합니다. 2019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또 다시 만나기도 하고, 바라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또 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을 겁니다. ‘산해숭심(山海崇深)’이란 말이 있습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일에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높은 산은 모든 이을 품어 주고, 깊은 바다는 모든 이를 받아 주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과, 깊은 바다를 꿈꾸었던 시인 박노해의 시 동그란 길로 가다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글이 있습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하셨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나를 따라다니고, 나와 함께하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우리가 현재 삶의 어느 순간에 있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이란 극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소중히 하라. 배우자를 사랑하라. 친구들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게 잘 대해줘라. 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문을 열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절대평가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예수님을 조금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작은 일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내가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언어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주로 언어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들을 잘 써 먹고 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미나를 받은 종’과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언어를 배우지만 말하는 것이 유창하지 않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들으면 외국인인 줄 대부분 알아차립니다. 아주 종종 남방에서 왔냐고 하기도 하지만,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은 대부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국인이어서 좋을 게 있을까요? 예전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때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재료가 되었겠지만, 그런 것이 없는 지금은 대부분 바가지 씌우는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택시를 타도 그렇고 물건을 사도 돈을 더 요구합니다. 먼저 오신 선배님들은 그것이 다 언어를 배우고 정착하는데 필요한 교육비라고 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택시를 타거나 물건을 살 때 외국인인 것이 들키지 않도록 말을 아끼곤 합니다. 또 집에 작은 것들이 고장 나면 바가지 쓸까봐 직접 가서 사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사려고 하다가 맞지 않는 부품을 살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육비를 지불하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는 모습이 ‘한 미나를 받고 싸서 보관해 둔 종의 모습’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 수준의 말을 해서 오는 결과들을 두려워 하고, 더 잘 하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 너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여 그치고 마는 겁니다. 아마도 그렇게 내 생각과 판단으로 계속 멈추어 있게 되면, 복음에서와 같은 결말을 보게 되겠죠. 조금 움직여 보려면 내 생각이나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이 바라시는 바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비교나 두려움이나 큰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성실하기를 바라십니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과 상황과 시간 속에서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성실히 해 내기를 바라십니다. 그 일이 저에게는 아마도 보잘 것 없는 언어 실력을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아이 수준이지만 대화하고 다가가면서, 현지인들처럼 사고 고치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겠죠.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재능과 선물을 주셨는지,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잘 것 없다고 싸 두었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하고 있는지... 주님께서는 멈추어 선 우리가 아니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기쁘게 보아 주실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고기를 살 때 손으로

‘이 정도 잘라주세요..’ 하면,

대부분 내가 가리킨 것보다

크게 잘라 주신다. 


작은 일에 충실해야

-반영억신부-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 협력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여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달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 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 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 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 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 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미나의 비유

-송영진신부-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 19,12).”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4).”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 (루카 19,15ㄱ)”
“...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루카 19,27).”

‘미나의 비유’ 속에 들어 있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승천, 재림, 심판에 관한 비유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 고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짧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를 미워해서 그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한 백성은,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가 왕권을 받고 돌아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권은,
‘생살여탈권’을 포함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마태 28,18)입니다.
반대자들이 처형당하는 것은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그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자기들의 임금이 되기를 바랐다.” 라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메시아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메시아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출신을 싫어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들을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받기를 원해서,
즉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원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하느님께, 예수님이 아닌 메시아를,
즉 자기들이 원하는 다른 메시아를 요구하면, 하느님께서 그 요구를 들어주실까?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런 요구를 할 권한이 사람들에게 있을까? 없습니다.
어떤 메시아를 보낼 것인지, 또 그 메시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그 권한이 없다면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고, 그러면 하느님이 아니고,
하느님이 아닌 분이 보낸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위한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다수결로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최후의 심판이 ‘반대자들을 처형하는 일’로 표현되어 있어서
마치 앙갚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하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앙갚음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죄인들의 멸망은 그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처형’이라는 말은, 실제로 어떤 형벌에 처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곧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이 곧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루카 19,13).”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6-17)”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루카 19,20-21)”

‘미나의 비유’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는 최후의 심판을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한(마태 7,21) 신앙인을 뜻합니다.
자기가 받은 한 미나를 보관했다가 그대로 다시 주인에게 돌려 준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앙인입니다.
첫 번째 종이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고,
다시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받은 미나를 보관하기만 했다가 돌려 준 종은 그 미나를 빼앗기는데(루카 19,24),
그것은 ‘받은 은총’을 모두 잃게 된다는 뜻이고,
은총을 잃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벌은 없습니다.

그 종이 변명하면서 한 말에서 ‘냉혹하다.’ 라는 말은
‘계산이 철저하고 엄격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주님은 계산이 철저하고 엄격하신 분이 아니라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또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간다.” 라는 말은,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가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고,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당신이 직접 그 일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

<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 죄를 지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그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사람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루카 16,19-21).>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9,11-28: 열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왜 왕권을 받고자 하늘에 오르셨을까?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에게도 그것을 주셨다.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이 오른 쪽에 앉으시어”(히브 1,3) 당신의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게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고 한다.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요한 15,24)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마태오 복음에는 각 사람이 받은 탈렌트가 달랐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셨다고 한다(마태 25,15 참조) 가가 사람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보관해 두거나, “땅에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루카 19, 17)

-한상우신부-

착하고 성실한
삶이 무엇인지를
이 위령성월에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미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소중한 시간입니다.

맡기셨다는 것은
우리를 신뢰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헌신적인 사랑을
당신 삶으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시간은
우리를 위한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일상에
성실한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미나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위령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고
믿는 것을
펼쳐 나가는
멋진 여정 되십시오.

나와 너
우리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삶이 바로
미나를 늘리는
성실할 삶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심판에 이르기 전 우리가 거쳐야 하는 일들을 알려 줍니다.

복음 속 예수님의 비유는 목적이 분명합니다(루카 19,11 참조). 당신은 지금 수난과 죽음의 도성이 될 예루살렘을 지척에 두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메시아를 통한 해방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루카 19,13).

한 미나는 당시 화폐 단위로 약 100데나리온 정도라고 합니다. 1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 지금 우리 돈으로 하면 한 미나는 평균 700-1,000만 원정도라 보면 될 것 같네요. 병행구인 마태 25,14-30에서는 탈렌트 단위로 등장하는데 한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이니 그에 비하면 루카 복음사가가 언급한 단위는 훨씬 소액입니다.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 비유는 오로지 탈렌트의 활용과 그 대가라는 주제만을 담고 있는 것에 비해, 이 비유는 거기에 왕권 이야기까지 겹친 복합 구조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명을 굳이 이 비유 앞뒤에 배치해 언급하면서 이 도성이 주는 함의적 긴장을 비유에 섞어 넣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루카 19,15).

나누어 받은 것에 대해 셈을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누리기 전,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이하기 전 모든 인간은 이처럼 셈을 하는 자리를 거쳐야 합니다. 이 자리는 오늘 종들의 태도에서 보듯 일방적인 추궁이나 취조의 시간이 아니라, 받은 것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소신껏 밝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루카 19,17).

주님께 얼마나 듣고 싶은 칭찬인지요! 첫째 종은 장사 수완이나 투자 감각으로 칭찬받지 않고 아주 작은 일에 성실했다고 칭찬을 받습니다. 크건 작건 중요하건 덜 중요하건 소명에 충실한 이는 주인에게 착한 종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다른 종은 주인을 냉혹하다고 여기기에 혹시라도 손실이 날까 두려워 받은 것을 그냥 둡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주인에 대한 앓과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앎이 자기에게 올가미가 되어 버리지요. 주인이 그의 앎에 기인해서 그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심판은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관, 하느님관'대로 그분께서 내게 보답하시는 것이 심판이 아닐까 하는... 이 말씀에 따르면, 그 보답이 칭찬과 보상이 될지, 징벌이 될지는 '내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와 영 별개의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에 따라 하느님은 작은 분도 큰 분도 되시고, 냉혹한 분도 자비로운 분도 되십니다.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루카 19,27).

주인과 종의 셈하는 이야기에 묻힐 것 같았던 또 다른 주제가 함께 마무리됩니다. 이 역시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 전, 사람의 아들을 맞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심판의 순간입니다. 허락받은 생명과 소명에 대해 주님과 셈을 하는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갚음을 요구받는 심판의 시간은 이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막연하게 꿈꾸던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해 줍니다.

이 말씀까지 마치신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루카 19,28) 올라가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들떠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거치셔야 할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이교도들에 의해 일곱 아들의 순교를 지켜본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모른다 ... 내가 아니다"(2마카 7,22).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희망을 둔 지혜롭고 용감한 한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이 주님 앞에서 솔직히 고백해야 하는 근원적인 명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 처참한 고통의 순간에 이 어머니는 창조의 원리와 창조주의 능력, 육신에 깃든 목숨의 덧없음을 조목조목 일깨우면서, 그 거대한 존재 앞에서 지녀야 하는 인간의 기본 자세를 아들과, 현장에서 듣는 이들과, 지금 여기서 이 말씀을 읽는 우리 가슴에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모른다 ... 내가 아니다."

이런 자기 부정과 겸손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놀라운 인식으로 연결되지요. 모르는 것을 진실되고 겸손히 모른다고 하는 이는 실상 엄청난 앎의 소유자입니다. 당시 교육과 사회활동에서 소외된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통찰과 지혜는 여느 신학 못지 않게 거룩하고 명철한 진리입니다.

오늘 복음 속의 '다른 종'이 차라리 주인에 대해 몰랐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얼핏 듭니다. 그가 차라리 주인에 대해 몰랐다면, 모른다고 여겼다면, 섣부른 편견을 앎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넘겨짚거나 내 의식 안에 가두지 않는 이는 주어진 생명과 소명에 그저 성실히 임합니다. 크건 작건, 중요하건 하찮아 보이건,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관계 없습니다. 주인이 주셨으니, 주어진 또 다른 재화인 시간과 노력을 다해 충실히 임합니다. 그는 착한 주인의 착한 종입니다.

전례주년으로 한해의 끝을 향해 가는 요즘입니다. 거듭되는 종말, 사람의 아들의 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이야기가 "그때"의 무게와 강도와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지, 증가시키는지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앎, 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바는 그분께서 밝혀주시지 않은 것이니 모르는 채로 , 드러내시고 베푸신 것에 대해서는 깨닫고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아주 작은 일부터 성실히 꾸려갑시다. 착한 종은 착한 주인과 함께 살 것입니다.

 지켜야 할 자존감
-김찬선신부-


2년 전에도 이 독서를 가지고 그리고 같은 주제로 강론을 한 바 있기에
복음이나 다른 주제로 강론을 하려고 하다가 이번 유니클로건 때문에
다시 이 주제로 다시 강론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 마카베오서의 어머니는 일곱 아들을 하루 사이에 다 잃었는데
아들들을 어떻게든지 살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히 죽으라고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합니다.

“그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얘기를 읽으면서 아무리 교훈적인 얘기일지라도 가능한 얘기인지,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닌지, 이럴 수 있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럴 수 있는 어머니는 많지 않고 극히 드물지만
그렇다고 그런 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가 그런 분이고 오늘 제가 소개하고픈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는 안 의사가 돌아가시기 전 이런 편지를 씁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수의를 지어 보내니 그것을 입고 가라는 것도 너무 가슴 저미는 말씀이지만
다음 생에는 천부 그러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이
너무도 신앙인다운 가르침이고 격려이기에 가슴 뜨거워지게 합니다.
이제 너는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이지요.

이런 어머니였기에 안 의사가 나온 것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적 자존감과 신앙인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존감을 가져야 할까요?
죽음을 무릅쓸 정도의 자존감까지는 아니어도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자존감도 높은 법이니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이번에
유니클로에 가서 공짜 내복을 받은 사람들처럼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일본제품은 사더라도 한국 사람은 냄비근성이 있기에 얼마 안 가서
자기 제품을 살 거라고 도발을 한 유니클로 제품은 사지 말아야 하는데
내복 한 벌에 민족적이건 개인적이건 자존감을 다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입이 있다고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또 있는데 그들은
그 귀중한 선택의 자유를 내복 한 벌에 자존심을 파는 쪽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의 자유를 우리가 존중해야 하나요?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였기에 사지 못하게 막지 않은 것이지만
그 선택이 잘 한 선택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존감을 스스로 버려놓고는 다른 사람보고는 존중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꽃밭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쓰레기장에 쓰레기를 버립니다.
그러니 자신을 꽃밭으로 만들어야 하고
적어도 스스로 쓰레기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지요.

모든 것을 다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야 할 우리 신앙인의 자존감은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긴다는
바오로처럼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느님보다 가치있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2013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루가 19,1-28)


만약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을 선하신 분으로 보고 자신을 나쁘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야합니다.

      아담도 죄를 짓고는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아담으로부터 생명나무로의 접근을 막은 것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면 그리스도의 뜻대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아를 주인으로 선택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의향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체도 무익하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10)

자아는 뱀입니다. 대화할 상대도 아니고 친해지거나 그의 말을 따라줄 상대도 아닙니다. 자아를 뱀으로 명확히 볼 줄 알아야 눈이 열려 성체가 나를 변화시키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악으로 보일수록 주님은 선으로 보입니다. 선한 종은 자신을 악하게 보는 종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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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해숭심(山海崇深)’이란 말이 있습니다산은 높고바다는 깊다는 뜻입니다눈앞에 보이는 일에 너무 기뻐하지도너무 슬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높은 산은 모든 이을 품어 주고깊은 바다는 모든 이를 받아 주기 때문입니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글이 있습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나는 깨닫는다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이제야 나는 깨달았다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하셨다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그 기억들이야말로 나를 따라다니고나와 함께하고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우리가 현재 삶의 어느 순간에 있든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이란 극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가족 간의 사랑을 소중히 하라배우자를 사랑하라친구들을 사랑하라너 자신에게 잘 대해줘라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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