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11. 17. 20:46

2019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8,35-43)

 

Jesus asked him,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He replied, “Lord, please let me see.”
Jesus told him, “Have sight; your faith has sav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은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율법서를 불태우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자, 그의 믿음을 보시고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시리아 임금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 속에 최악의 이방 지배자로 기억됩니다. 왜냐하면 유다교 자체를 멸절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전에 자기 상을 세우며 성전을 더럽히기까지 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전에 세워진 그의 상을 두고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표현합니다.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나섰다는 데 있습니다. 그를 따라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지 않는 의인들도 많았습니다. 그중 많은 이들이 순교를 하였는데, 이것이 유다 독립 운동의 밑거름이 됩니다. 결국, 유다 땅은 마카베오로 말미암아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의인들의 피를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막바지에 소경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 사람들과 소경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나자렛 사람 예수”라 부르지만, 소경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자비를 간청합니다.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진정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눈먼 이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을 막으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결국 눈먼 이만이 참으로 눈을 뜨고 구원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지니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뵙지 못하는 눈먼 이로 남습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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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님께서는 늘 어디가 아팠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힘이 없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함이 밀려듭니다. 큰 병이 생긴 것 같은 불안감에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병원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별 이상이 없다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운동에 집중하기를 권했습니다.

평소에 운동을 잘하지 않았던 자신을 떠올리며, 곧바로 아침에 일어나 걷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하지 않았던 운동이기에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사실 운동하면 힘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운동은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발을 떼어 앞으로 내딛는 것도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고, 운동기구를 드는 것 역시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이 자매님은 중력을 이겨내기가 너무 힘들었나 봅니다. 다시 예전처럼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고 싶어지면서 이러한 비관적인 말이 나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냥 포기하면 어떨까요? 아마 앞으로 그 어떤 운동도 하지 못하고 계속 힘들다고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력을 이겨내야만 비로소 운동의 즐거움도 얻을 수 있습니다.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입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운동을 할 힘이 없는 것처럼, 세상을 이길 힘이 없을 때 손쉽게 할 수 있는 저항이 바로 비관입니다. 비관하는 것에는 에너지 소비가 적기에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낙관적이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겨낼 힘과 의지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비관이라는 손쉬운 선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힘과 의지를 키워야 할 것입니다.

눈먼 이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으면 더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비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어도, 또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실 주님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힘과 의지를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힘과 의지를 보였기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즉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비관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또한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힘과 의지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큰일을 하는 경우에서는 기회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눈앞의 기회를 잡도록 힘써야 한다(라 로쇼푸코).



섞인다는 것.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군대의 비극은 섞인다는 것이다.”

개별적 다름이 섞여서 개인이 인정되지 않기에 슬픈 일, 즉 비극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섞이는 공간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저로서는 인정하기가 조금 힘듭니다.

신학교 7년, 군대 3년. 이렇게 10년 동안 서로의 다름 안에서 섞여 살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기도 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섞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 안에서 더 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사회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섞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더 편안함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섞이지 않겠다면서 상대방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혼자서 도저히 살 수 없는데도 말이지요.                   

믿음은 하느님의 좋으심을 묵상함으로써 커진다

-전삼용신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기저기 버려진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한 들판에 유난히 코스모스가 응집되어 피어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가보니 코스모스들은 어떤 병사의 몸에서 피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군번줄로 신원을 확인해보니, 그 병사는 전쟁터에서 아무도 묻어줄 수 없는 병사들을 위해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휘날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자신의 몸에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를 안고 전쟁에 출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어 썩어진 몸에서 코스모스가 피어 바람에 향기를 휘날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묵상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썩은 시체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 가득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도 이러한 자세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한다는 분들에게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느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여러분 가방에서 돈을 훔쳤다고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냐고 물으면 웃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자비로우면서도 하느님은 과일 몇 개 먹었다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모진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비를 더 잘 알기 위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서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옷을 만들어 입고 숨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라고 한 것 하나에만 집중하며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판단해버렸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몹쓸 종이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셔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 25,24-25)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긴다면 공부만 한 것이지 기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묵상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믿음을 줍니다.

      저의 어머니도 저에게 매우 모질게 대하신 적이 있습니다. 혼낼 필요가 없는 것도 혼내시고 학용품 살 돈도 안 주셔서 울려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부모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엄한 훈육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중하면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분과 사는 것은 고통 자체가 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의 어머니인 것을 믿기 위해 어머니의 손과 발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굳은살이 박이고 관절이 휘어져 있었습니다. 생선의 어느 부위를 드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언제나 머리 부분만을 드셨습니다. 몸통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나에게 먼저 주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새참으로 받으신 우유와 빵을 당신은 안 드시고 저녁 때 저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좋으신 분임을 묵상할 때 어머니가 나의 참 어머니가 맞는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성장시키지 않는 성경공부는 무익함을 넘어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소경이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데도 큰 소리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비록 소경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에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주실 것임을 오랜 시간 묵상해온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묵상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믿음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기도가 끝나건, 성경 읽기가 끝나건 항상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며 끝나야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증가한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증가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가시키는 데 쓰이도록 합시다.


-조재형신부-


제가 있는 곳은 브루클린 교구에 속해있습니다. 교구는 매년 ‘Shining Star’라는 행사를 주최합니다. 다양한 공동체가 브루클린 교구에 있습니다. 교구는 각 공동체에서 빛나는 봉사자를 선별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축하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번에는 폴란드, 중국, 한국 공동체에서 봉사자가 선별되었습니다. 신앙에 충실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서 공헌한 사람이 선별되었습니다. 한국 공동체에서는 태권도를 가르치는 형제님이 선별되었습니다. 교구장님은 각 지역 공동체와 함께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봉사자를 위한 교구의 배려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행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특별히 격려하시고, 칭찬하셨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별하신 ‘Shining Star’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을까요? 많이 배웠던 사람, 율법 학자, 바리사이파, 제자들도 있었겠지만, 뜻밖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헌금의 액수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헌금을 내면서 과시하는 사람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지만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던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부유한 사람의 헌금보다 더 귀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부유했지만 영적인 갈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백인 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 대장은 하인의 병을 고치시러 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굳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제 부하에게 말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부하의 병도 치유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 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강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가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죽음의 순간에 강도는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십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뉘우치면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오늘 낙원으로 갈 겁니다.’

눈먼 소경의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소경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해 주길 원합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은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뉘우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뉘우친 걸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받고, 희생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2019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의 삶은 어떠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양승국신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때가(수난과 죽음의 순간)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약속된 장소 예루살렘으로 향해가고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40여킬로 남겨둔 예리코로 들어가시기 직전이었습니다. 예리코는 지구상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해저 258미터) 오아시스 도시로 유명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이제 지상에서 예약된 당신 사명의 수행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머릿속에는 세속적인 왕권에 대한 욕심이나 세상 사람들의 환호나 열광, 승리에 찬 행군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쓰디쓴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시는 것, 끌려가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묵묵히 수난을 견디는 것,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가에 도열한 군중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유다인들은 구약 시대 자신들의 선조들이 주님의 권능에 힘입어, 마른 발로 요르단 강을 지나, 당시 적군들이 정복하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성지(聖地) 예리코를 함락시켰던 사건을 회상했습니다.

 

 군중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그 일을 몸소 수행하시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전지전능한 세속적 왕권의 행사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압제나 허약한 헤로데 왕권을 단숨에 제압하고, 그토록 꿈꾸던 새로운 왕국, 초강대국 건설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허황된 꿈이나 기대를 완전 개무시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의 대대적이고 열광적인 환영 앞에 일말의 반응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 사랑의 눈길을 필요로 하는 한 가련한 인간을 바라보십니다. 삶 자체가 고통과 눈물로 가득했던 인간에게 다가가십니다. 군중들의 환호소리와 박수소리에 묻혀 가느다랗게 들려오던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 누구도 관심주지 않던 한 가련한 인간으로부터 들려오던 구원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복음 18장 38절)

 

 예수님 당신을 환영하는 수많은 군중들의 요란한 환호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한 눈먼 사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복음 18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의 열광이나 엄청난 기적에 대한 헛된 기대, 세속적인 성공이나 승리보다, 지금 당신 눈 앞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 존재를 눈여겨봐주시고, 돌봐주시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눈먼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수많은 군중들의 목소리를 제쳐두고 오직 내 절박한 목소리만을 귀담아들어주신 주님이 얼마나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물어봐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아마 오늘도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절박한 우리 각자를 눈여겨 보실 것입니다. 간절히 외치는 오늘 내 목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상한 목소리로 물어보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사실 예리코에는 눈먼 거지 뿐만 아니라 수많은 눈먼 이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그 수많은 눈먼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군중들이 아직도 새로운 눈,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눈먼 이들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참된 실체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도 예수님으로부터 세속적인 기대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 결국 아직도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눈먼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눈만 뜨면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반영억신부-

 

시력이 6.0 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 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 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 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빛’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저 막막하기만 할 때,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인생이 어둠 속에 있다고 느껴질 때,
또는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껴질 때,
예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고,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꼭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만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특별히 어려운 상황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걸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둠’을 만나더라도 어둠 속에 빠지지 않게 되고,
복잡한 갈림길을 만나더라도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5-39).”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예리코의 눈먼 거지’의 모습은,
꿈도 희망도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나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꿈도 희망도 목표도 없이 ‘어둠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을 희망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그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말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소문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간청이기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달라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데도 더욱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는, 그날의 만남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로
생각되었을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예수님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을 ‘하느님의 섭리’로 생각하더라도,
이 장면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은 스쳐 지나가시는 분으로만 보입니다.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면,
즉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래서 곧바로 외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가셨을 것이고,
바르티매오는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즉시’ 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예수님은 스쳐 지나가시는 분이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쪽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응답이 필요합니다.
곧바로 응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고, 예수님께서 ‘나를’ 찾으시는데도
그냥 지나가시라고 예수님을 밀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르티매오의 ‘간절함’과 ‘곧바로 응답하는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0-43).”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말은,
대개는 몇 푼의 돈을 달라고 간청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가 간청한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만일에 이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새로운 인생’은 ‘새로운 직업’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르티매오가 ‘새로운 직업’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원했고, 그것을 청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 청해서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 영혼의 구원’입니다.
바르티매오가 단순히 다시 보는 것만 원했다면, 그는 예수님께 감사드린 후에
그냥 예수님을 떠났을 텐데, 그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과 같은 수준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고,
영원한 생명과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것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 청하는데,
큰 것을 청해서 얻는 사람도 있고, 작은 것만 청해서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것을 주셔도 누구나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고,
자기가 원하고 청하는 만큼만 받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중입니다.
그래서 바르티매오는 영원한 생명과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행했다고,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위로써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들은 눈먼 거지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시 믿게 하시려고 빛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 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고 한다.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 뿐 아니라,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 모습을 바라보며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그러한 기적을 청하자.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

-한상우신부-

믿음은 볼 수 없는
우리 자아의
가장 확실한
해답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세상을 보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우리의 절박함과
가난함에서
믿음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눈 먼 우리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를 청하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비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제대로 보게 되고
제대로 사랑하게
제대로 따르게
됩니다.

주님께
우리자신의
볼 수 없는 부분을
청할 때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찬미와 따름의
놀라운 삶입니다.

다시 보듯
다시 찾은 것이
우리의 잃어버린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은
새로워집니다.

다시 보게 되는
믿음의 기쁜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은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 어떠한 난관에도 무너지지 않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복음 내용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예리코의 눈 먼 이, 두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군중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인 군중은 늘 좋은 역할만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루카 18,35).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눈 먼 이가 구걸하고 있는 예리코에 "가까이" 가십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 방향성과 운동성으로 시작합니다.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루카 18,36).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청력이 예민한 그는 지금이 여느 날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예수님을 보러 나온 군중이 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들은" 이는 바로 그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루카 18,37).

궁금해 묻는 그에게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군중에게 예수님은 "지나가시는" 존재에 불과한가 봅니다. 절실함이 없어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방향성과 운동성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시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나가시는" 예수님 곁을 떼지어 걸으며 그분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끼어듦, 개입"이 없습니다. 그저 서로 타인일 따름입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 그는 더욱 큰 소리로 ... 외쳤다"(루카 18,39).

눈 먼 이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예수님께 목청껏 외칩니다. 그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행동 반경의 제약이 큰 그는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님을 놓칠 수 없습니다. 소문에 듣던 예언자를 그저 평온히 감상하러 나온 이들에게 그의 절규가 불편하고 거슬렸을지 모르나, 그에게는 간절함을 넘는 절박함입니다. 그의 고통에 무감한 이들, 관계없다고 느끼는 이들의 방해도 그를 멈추지 못합니다. 눈 먼 이는 군중의 악역을 꿋꿋이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데려오라고 하셨다"(루카 18,40).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들으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소리를 그가 들었고, 지금은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그분께 가 닿았습니다. 예수님은 곧 걸음을 멈추십니다. 뭔가 일어날 징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큰 권능이 드러났던 예리코 성읍(여호수아기 참조)은 이제 신약성경에서 지명으로만 슬쩍 등장하고 마는, 예수님께서 그저 지나가신 고장으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리 나는 곳을 찾아 직접 움직이시지 않고 군중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움직이기 싫은 게으름이나 권위주의 때문이 아니라, 눈 먼 이에게 호의도 베풀다가 때에 따라서 악역도 자행하는 군중을 이 사랑의 기적에 참여시키시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군중은 그를 찾아 데려오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귀찮아하고 꾸짖던 이의 존엄함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박해자에서 돌보고 이끄는 이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루카 18,40).

이번에는 눈 먼 이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옵니다. 예리코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께 그곳의 눈 먼 이가 "가까이" 다가갑니다. 물론 예수님을 에워싼 군중은 진작부터 물리적으로 그분께 가까이 있기는 했지만 진짜 관계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눈 먼 이는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달립니다. 누군가의 바람을 경청하고 이루어 주는 것은 예사의 관계를 넘어섭니다. 서로 깊숙히 들어갑니다. 관계가 형성됩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은 건 눈 먼 이의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에 예수님은 발목이 잡히십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눈의 빛을 얻습니다. 즉시 시력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18,43)고 하지요. 이미 본질을 향해 영혼의 눈이 열려 있던 그가 육신의 눈마저 뜨게 되니 남은 것은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일뿐입니다.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유로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를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3).

해피 앤딩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주인공인 예수님과 눈 먼 이의 흡족한 결말뿐 아니라 군중까지 변화가 되니까요.

사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하느님과 나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조연이거나 엑스트라거나, 배경 정도로 등장하는 이도 있지요. 그들이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위해 늘 좋은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여러 경로로 일찌감치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호의와 실수, 악역은 그들 인생 안의 역동일 뿐 하느님과 나와의 영원한 행복까지 무너뜨리거나 책임지지 못합니다.

때로는 그들을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착각해 많은 혼란과 왜곡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들으려 하고, 들으시게 하려고,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쓸수록, 두 주인공이 꿋꿋이 굳건하게 서서 일관되게 바라고 자비를 입는 사이에 조연들의 마음에도 변화의 실낱같은 빛줄기가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기적처럼 변화된 건 눈 멀었던 이의 시력뿐만 아니라 냉담하고 이기적인 군중의 마음이었으니까요.

제1독서는 유다 민족의 독립 항쟁사라 할 수 있는 마카베오기 초반부입니다. 오늘 내용은 이민족에 대한 유다인의 항쟁이 본격화하게 된 배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 차라리 죽길ᆢ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갔다"(1마카 1,62-63).

오늘의 복음 내용처럼 독서에도 행복한 결말이 한 눈에 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치열하고 고통스런 항쟁사는 이제 도입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계약에 대한 신념으로 목숨을 바친 이들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위해 인간적으로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의 간절함을 넘어서는 절박함을 바라봅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안정으로, 영광의 시기에는 풍요로 하느님을 체험하던 이스라엘이 박해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피와 죽음으로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당장 겪는 순간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평화와 번영 만큼이나 저항과 순교도 하느님 현존의 증거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 역사의 두 주인공인 하느님과 자기들의 계약을 위해 처절히 싸워나가지요.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억압하기도 하는 이민족에게 하느님은 지나가시는 존재일 뿐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존재의 이유이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선물로 받은 내 삶의 두 주인공, 하느님과 나의 사랑은 괜찮습니까? 다른 조연들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거나, 조연에게 한눈 파느라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요? 가까이 오시는 그분이 그저 지나치시지 않게 하려면, 그분의 오심을 듣고 나의 마음을 들으시게 하려면 외쳐야 합니다.

내 바람을 불편해하고 거슬려하는 이들에게 매이지 말고 (금방 호의를 베풀다가 일순간 돌아서 방해하는 그들에게는 사실 내 문제가 자기 일처럼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꿋꿋하고 굳건히 외쳐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바람과 일관된 추구와 하느님 자비의 개입은 결국 모두를 선으로 변화시킬 겁니다.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치유도 받고 구원도 받은 사람  
-김찬선신부-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의 특유한 점이 잘 드러나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루카복음의 특유한 점이란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가 일어났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거나 예수님께 감사드렸다는 얘기에 앞서 꼭
예수님의 치유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언급하는 점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이 치유를 받고 이방인 한 사람만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사람은 열 사람인데 하느님을 찬양하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 뿐이냐고 하신 적이 있고,
오늘도 맹인이 치유를 받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름을 얘기하는데 이 얘기를 전하는 다른 두 복음,
그러니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하느님을 찬양하며'가 빠져있고
그저 예수님을 따랐다는 얘기만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루카복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치유받은 것만으로는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치유도 받고 그로 인해 하느님도 만나야지 구원받은 거라는 얘기지요.

치유받는 것과 구원받은 것은 실로 큰 차이입니다.
치유는 어떤 한 부분이 정상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암이 치유되었다면 위가 정상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구원받는 것은 존재의 한 부분이 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가 정상이 되는 것이고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도 이런 맥락에서 전존재적인 구원을 자주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유언에서 나병환자를 만나고 난 뒤의 변화를 얘기할 때 전에 역겨웠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바뀌었다고 얘기하고,
권고 15번에서 평화의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마음과 몸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이 진정 평화의 사람들입니다."고 얘기하지요.

그래서 치유만 받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치유만 받고 제 갈길을 가지만
구원을 받고 영육으로 전존재가 올바르게 된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이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얘기에서 이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도 따라하게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느님을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얘기는 이렇습니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군중이 본래는 이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자비를 청할 때 맹인의 불행쯤은 안중에 없었기에
입다물라며 나무라던 사람들이고 주님의 자비를 가로막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맹인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라고 불렀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저 '나자렛 사람'이고만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이제 무시하던 맹인도 무시하지 않게 된 것이고,
예수님도 그저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맹인이 치유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한 것이
군중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같이 찬양하게 한 것이고,
예수님도 이로 인해 하느님의 사람임이 드러난 것이며,
그래서 사람들이 시선을 예수님에게서 하느님께로 돌려 찬양하게 한 겁니다.

미사 감사송을 바칠 때 우리는 매번 이런 찬미를 주고받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 사제의 영과 함께.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립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끼리 서로 향하던 마음과 시선을
같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서로 도전과 자극이 되고 권면도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루가 18,35-43)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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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느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여러분 가방에서 돈을 훔쳤다고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냐고 물으면 웃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자비로우면서도 하느님은 과일 몇 개 먹었다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모진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비를 더 잘 알기 위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서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옷을 만들어 입고 숨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라고 한 것 하나에만 집중하며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판단해버렸습니다. 

말씀은 묵상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믿음을 줍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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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은 건 눈 먼 이의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에 예수님은 발목이 잡히십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눈의 빛을 얻습니다. 즉시 시력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18,43)고 하지요. 이미 본질을 향해 영혼의 눈이 열려 있던 그가 육신의 눈마저 뜨게 되니 남은 것은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일뿐입니다.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유로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를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3).

내 바람을 불편해하고 거슬려하는 이들에게 매이지 말고 (금방 호의를 베풀다가 일순간 돌아서 방해하는 그들에게는 사실 내 문제가 자기 일처럼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꿋꿋하고 굳건히 외쳐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바람과 일관된 추구와 하느님 자비의 개입은 결국 모두를 선으로 변화시킬 겁니다.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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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이 치유를 받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름을 얘기하는데 이 얘기를 전하는 다른 두 복음,
그러니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하느님을 찬양하며'가 빠져있고
그저 예수님을 따랐다는 얘기만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루카복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치유받은 것만으로는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치유도 받고 그로 인해 하느님도 만나야지 구원받은 거라는 얘기지요.
치유받는 것과 구원받은 것은 실로 큰 차이입니다.
치유는 어떤 한 부분이 정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은 존재의 한 부분이 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가 정상이 되는 것이고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도 이런 맥락에서 전존재적인 구원을 자주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유언에서 나병환자를 만나고 난 뒤의 변화를 얘기할 때 전에 역겨웠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바뀌었다고 얘기하고,
권고 15번에서 평화의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마음과 몸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이 진정 평화의 사람들입니다."고 얘기하지요.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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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우리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를 청하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비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제대로 보게 되고
제대로 사랑하게
제대로 따르게
됩니다.

주님께
우리자신의
볼 수 없는 부분을
청할 때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한상우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