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11. 14. 19:52

2019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
루가 17,26-37)

 

I tell you, 
on that night there will be two people in one bed;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And there will be two women grinding meal together;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신이라고 여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우둔함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음에도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정신을 빼앗겨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한탄합니다.이런 모습은 노아의 홍수가 닥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고, 여러 잘못으로 파멸을 겪게 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닥쳐온 심판이라는 현실을 끝내 직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롯이 소돔을 떠나는 그날까지 세상 끝이 절대 오지 않으리라 여기며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습니다.내일도 오늘과 같이 해가 뜨리라는 믿음으로 언제나처럼 우상 숭배를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하느님의 심판이 닥칩니다. 홍수가 닥치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은 모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아들의 날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는, 오직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에서 자꾸 뒤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뒤를 돌아보는 이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려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분노로 가득한 어느 형제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의 분노는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아내가 어느 날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경제적 무능력, 폭언과 폭행 때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 큰 병으로 치료 중인 남편 병간호하는 것이 힘들어서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병간호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효도를 그렇게 강조하는 우리나라에서도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 형제님의 아내도 완전히 지친 상태가 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남편은 아픈 자신의 몸만을 생각하면서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이지요.

아내의 어려움에 대해 형제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도 늘 고마운 마음이었고 또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자신의 아픔이 너무 커서 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다면서 후회를 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상태에 놓이게 되면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나의 처지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사랑도 내 입장을 통한 것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상대방은 지쳐서 도망치고 싶은 상황에 놓이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나만을 위한 사랑이 아닌, 남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을 때 후회의 삶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후회의 삶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당신께서 예고 없이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옛날 노아와 롯의 때에 그랬듯이 세상 끝 날이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후회의 삶을 만들지 않기 위해, 늘 깨어 사랑을 실천하는 올바른 주님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그에 굴복하여 영적 삶에서 육적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끝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세상 마지막 순간도 당연한 사실로 우리에게 언젠가 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을 위해 지금을 더욱더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는 적이 될 수 있는 자는 화해하면 더 가치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펠담).



이미(최영미)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얼마 전에 새롭게 출판된 최영미 시인의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 나오는 시입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인 것 같아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죽고 있다면 내 안에 생명이 있다

-전삼용신부-


며칠 전에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선종하신 최영훈 루카 형제님과 스테파니아 반장님과의 카톡 대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루카 형제님이 신앙으로 거의 1년간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읽으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저는 세례 받은 지 이제 일 년에서 이틀 모자란 초보신자입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주님의 온전한 사랑을 느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난 3월 29일 요양병원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던 중,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해야만 했던, 주 하느님을 나의 모든 것 위에 놓고,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아버지하느님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버린 날로, 아마 제가 태어난 이후 제일 많이 울었던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저를 꾸짖고 책망하소서. 저의 그 얄팍하고 가벼운 신앙으로 아버지 이름을 욕되게 하였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육체에 찾아온 그깟 고통 앞에서, 너무나 쉽게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싶었으며, 아버지를 저주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으며,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 주신 수많은 은혜들, 그리고 제가 겪었던 그 많은 성령체험들을 원망했습니다. 제게 그러한 은총을 내리신 뜻을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새끼손톱의 1/6보다도 작은 진통제 앞에서 저는 한없이 약하고 미미한 존재임을 뼛속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옳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옳은 일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게 주신 이 고통에는, 저는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옳은 뜻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아버지, 눈물로서 반성하고 회개하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오직 아버지께서만이 저의 생사여탈을 하실 수 있는 주권자이시며 권능자이심을 믿고 고백하오니, 아버지의 부족하고 미천한 아들 루카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언제나 살아계시고 제 안에 계시며 또한 저를 지켜주시는 주 하느님아버지. 모든 감사와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지금 이순간의 삶을 제게 허락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소돔 위에 유황불이 쏟아져 내릴 때처럼 그렇게 세상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리 각자도 그렇게 반드시 주님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소돔 땅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지만 소돔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 땅을 탈출하자 소돔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멸망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하는 롯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게 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죽음까지도 감사할 수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감사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 반드시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몰아내는 것이 진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카 형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2남 2녀의 막내로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어떤 마음의 상처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금년 1월, 주님께서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져 있던 상처를 한순간에 제 눈앞에 펼쳐보이게 하셨습니다. 정말 괴수와도 같은 울음과 눈물이 한동안 흘렀는데,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기도가 왜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제게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이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에 대한 미안함만이 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살아계시며, 항상 제 곁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제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기억이자 은혜였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아멘!”

      우리 안에 롯과 같은 분을 반드시 모시고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면 나는 죽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인 내가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십시다. 그러면 미움이 죽고용서가 살며, 절망이 죽고 희망이 살며, 화가 죽고 겸손과 감사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고 하느님의 기쁨이 샘솟는 것을 보면 절대 나를 그렇게 만드는 롯을 내어 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인터넷 덕분에 교구 홈페이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각 부서의 공문이 있습니다. 사목 자료실이 있습니다.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을 볼 수 있습니다. 멀리 있지만, 교구의 소식을 알 수 있으니 좋습니다. 홈페이지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건 성직자 사진첩이었습니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사진을 보면서 잠시 기도했습니다. 사목 현장에서 자리를 내주신 원로 사제가 있습니다. 건강상의 문제로 휴가 중인 사제가 있습니다. 함께 사목했던 사제, 반가운 얼굴의 사제도 있습니다. 같이 배우지는 않았지만, 이제 막 사제단에 합류한 후배 사제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성직자 사진첩의 맨 뒤에 있었는데 어느덧 중간보다 훨씬 앞에 저의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첩을 보니 사제의 삶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눈에는 총기가 있고, 활력이 넘치는 사제의 모습,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무난하게 주어진 소임을 수행하는 사제의 모습, 건강의 문제로 잠시 충전의 시간을 보내는 사제의 모습, 가톨릭 평화신문 미주 지사라는 소임과 함께 저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시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원로 사제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달릴 길을 다 달리신 원로 사제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 길을 충실히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제 뒤에 있는 사제들에게 선배 사제들처럼 모범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성직자 사진첩을 보면서 공자와 자공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말로써 진리를 배우고자 하던 제자 자공에게 주는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말씀을 아니 하시면, 성인(聖人)의 도를 어떻게 배워서 무엇을 가지고 도를 기록하고 남기겠습니까? 공자는 말을 들어서 도()를 배울 생각은 잘못이며 도는 성인의 행동을 몸으로 체험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들었느냐? 하늘은 말이 없어도 계절이 바뀌며 만물은 철을 찾아서 자라지 않는가. 그런데도 하늘은 말이 없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잘살 수 있도록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릇된 방향으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데, 재능을 사용합니다.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마약을 만들어 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는 노아와 롯의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길입니다. 권위와 독선의 길입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전쟁, 폭력, 기아, 가난, 난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제 목숨을 보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반영억신부-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 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토마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

-송영진신부-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읽거나 들을 때,
누구든지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종말은 곧 온다.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 지금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이천 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늘 듣는 말이라 상투적인 말로 들리기도 하고, 식상하기도 하고,
많이 무디어지기도 했고, 그래서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들어도
특별한 느낌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상황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오늘일 수 있다.” 라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노아 때 사람들처럼, 또 롯 때의 소돔 사람들처럼
태평스럽게 살다가 갑자기 멸망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과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확정되어 있는 일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니라,
즉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던 사람들처럼 살다가는
너희도 그들처럼 그렇게 멸망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너희는 늘 깨어 기도하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죄는 아닙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지금까지 오지 않은 종말이 도대체 언제 온다는 것인가?
정말 종말의 날이 오기는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종말이 온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시간이 많다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이 그만큼 짧아졌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인류 전체의 종말을 생각하면 막연한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각 개인의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고 생생한 현실입니다.
인간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평소에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장 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태평스럽게 사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언제 부르시든지 즉시 응답할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것을 준비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1-33).”

이 말씀은, ‘그 날’이 닥쳤을 때 실천해야 할 행동 지침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마라.” 라는 말씀과 “들에서 뒤로 돌아서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생명을 얻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라는 말씀은, 두고 온 재산을 아까워하다가
목숨을 잃은 롯의 아내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그렇게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인가?
절대로 버리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느님 나라로 그것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 즉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부라도, 모녀라도, 자매라도 회개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할 수 없고,
고해성사를 대신 보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버려두고 혼자서라도 구원받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 쪽의 입장에서 읽을 말씀이
아니라, 그 기도의 대상인 사람 쪽의 입장에서 읽을 말씀입니다.
지금 가족들이 ‘나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외면하고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족들의 기도를 헛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도 죄를 짓는 일이고, 가족들에게도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어떻게든 ‘나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고,
또 함께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가족들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7,26-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으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27-28), 노아 때에는 홍수가 닥쳐 한 가족 말고는 모두를 멸망시켰고, 롯 때에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하였다. 이는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 이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 돌로 비유하고 있다. 그 돌은 믿는 이들에게는 주춧돌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라고 하였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여 영적 삶에서 육적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에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 하느님의 말씀이 씨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하셨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에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과오가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진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한상우신부-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날과 그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두가 떠나가는
시간입니다.

어제를 떠나야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그러나 오늘보다는
어제를 그리워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야할 목적지를
모르기에 이렇게
혼돈스러운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을
낳습니다.

살리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소금기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종말도 창조도
그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마지막은 정녕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루카 17,26).
사람의 아들의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종말이라고도 하지요. 인간 편에서 볼 때 그날의 단점이라면 언제일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노아 때나 롯 때처럼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라 만회나 개선의 틈을 갖지 못할 것이니까요. 그런데 장점 역시 그날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평생 잘 준비했다 하더라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날이 소수를 제외하면 불안하고 두렵기는 매한가지일 테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기도 하네요.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숨이 보장된 듯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며 일상을 누리던 중에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했던 두 사건의 예를 드십니다. 둘 다 성경에 등장하는 재앙의 날, 징벌의 날이지요. 노아 때는 '물'로, 롯 때는 '불과 유황'으로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무지하고 무심한 가운데 악행 속에서 준비 없이 그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지요.

오직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호의를 베푸신 두 가족, 노아의 가족과 롯의 가족만 생명을 건져 인류의 생명이 이어집니다. 그러니 아무리 호된 멸망의 갈퀴가 들이닥쳐도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희망하게 됩니다.

"내려가지 말고 ...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예수님께서 그날 그 순간에 이르러 괜한 것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재산은 물론, 과거의 영화도 고통도 그 순간 자기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살아온 자취만큼 형성된 지금 모습대로, 향하던 방향성대로, 존재하는 위치에서 맞이하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내려가는 것도 돌아서는 것도 구원에서 비껴가는 역행이 될 것입니다. 만일 변화가 필요했다면 그 전에 충분히 이루어졌어야 했지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구원의 개별성을 말씀하십니다. 다소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은총의 영역을 잠시 미루고 살펴본다면 구원의 공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준하여 쌓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잘 나와 있듯 각자의 선행과 자선도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공동체성은 별 의미가 없을까요? 사실 구원의 공동체성도 개별성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함께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며 좋은 배경이 되어 줌으로써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으니까요. 단, 좋고 선하고 열심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물리적 조건만으로 자신이 구원된다는 생각은 너무 안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내가 열심한 신자니까, 우리 공동체에 성인이 있으니까 노력 없어도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고 여긴다면 오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겠지요. 대충 묻어가다가 얼결에 들어선 곳은 그리스도의 오른쪽이 아닐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들어찬 이들"(지혜 13,1)을 안타깝게 여기는 지혜서 저자의 탄식이 들립니다. 그들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분을 깨닫지 못하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것들에 눈이 팔려 우상으로 받드는 우매한 이들입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지혜 13,5)는데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지혜 13,7) 만 그들은, 복음에서 언급하는 이들처럼 그것들에 둘러싸여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던 중에 느닷없이 그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영을 품기는 커녕 알아보지도 못한 채 껍질과 허울 속에 파묻혀 검불같은 인생을 마무리하고 말겠지요.

오늘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이야기하시면서 멸망과 구원, 두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최종적 성취는 모든 이의 구원이지 선별적이고 차별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분은 어느 누구 하나도 제외하고 싶지 않으시니, 메시아 도래의 순간을 기쁨에 차 맞이하느냐 두려워 떨다가 숨어서 당하느냐는 우리의 준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날이 오기 전에, 당장 눈에 보이는 가치에 정신이 팔려 물질과 명예를 우상으로 섬기던 이들을 간곡히 일깨우던 지혜서 저자의 탄식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면 좋을 듯합니다.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진정 좋은 머리는?  
-김찬선신부-


지난달 오랫동안 아는 분들 그래서 1년에 한두 차례 만나는 분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다가 정치 얘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분이 얘기하다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왜 머리를 그렇게 쓰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 순간 저는 그런 머리는 좋은 머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였습니다.

좋은 머리를 좋은 쪽으로 쓸 줄 모르는 머리가 무슨 좋은 머리입니까?
좋은 머리를 가지고 사람 죽이는 데 쓰는 머리가 무슨 좋은 머리입니까?

좋은 머리는 좋은 일에 쓰는 머리가 좋은 머리인 거지
나쁜 일에 쓰는 머리는 아무리 IQ가 좋아도 나쁜 머리인 겁니다.
성능이나 능력이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사실은 쓰임이 좋고 방향이 좋은 것이 좋은 머리입니다.

아름다움도 그렇습니다.
얼굴이 아름다운데 마음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참 많아
자신의 아름다움을 허망한 것에 쓰거나
아름다운 미모로 남을 파멸케 하는 데 쓰곤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웬만큼 나이 든 분들은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를 잘 아실 겁니다.
제가 지금은 영화를 안 보지만 어렸을 때는 그가 주연한 영화를 봤는데
오드리 헵번이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름다워 자신의
미모와 명성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에 쓴 것은 잘 알려진 얘기이고,
이런 유명한 말들을 사람들에게 특히 자녀들에게 남겼다고 하지요.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우리가 오드리 헵번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이 주신 머리를 지혜롭게 쓰고,
그래서 하느님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하는 데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함을 오늘 지혜서는 안타까워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밖에도 지혜서는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한다면
그것을 만드신 분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아야 하고,
피조물의 힘과 작용에 감탄한다면 그렇게 만드신 하느님은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을 합니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왜 좋은 머리를 가지고 이 좋은 것들은 어디서 왔는지
생각지 않고 좋은 것을 만드신 하느님을 알고 찾는 데 쓰지 않을까요?

그것은 좋은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좋은 것들 안에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에 현혹이 되고 좋은 것으로 대리만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까지 필요치 않고 이것들로 만족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만족스럽던 것들이 만족스럽지 않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만족스러워도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의 천국 사랑은 나의 지옥'이라는 유행가처럼
행복을 주던 그 좋은 것이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이 문제지요.

좋아서 사랑했는데 싫어져서 미워하게 됩니다.
좋아한 것이 좋은 게 아니어서가 아니라 좋은 것이 완전치 않아서입니다.
이제 알 거면 더 깊이 알고, 좋아할 거면 더 좋은 것을 좋아하고,
사랑할 거면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7일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들어 두어라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가 17,26-37)


 소돔 땅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지만 소돔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 땅을 탈출하자 소돔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멸망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하는 롯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안에 롯과 같은 분을 반드시 모시고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면 나는 죽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인 내가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십시다. 그러면 미움이 죽고 용서가 살며, 절망이 죽고 희망이 살며, 화가 죽고 겸손과 감사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고 하느님의 기쁨이 샘솟는 것을 보면 절대 나를 그렇게 만드는 롯을 내어 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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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숨이 보장된 듯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며 일상을 누리던 중에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했던 두 사건의 예를 드십니다. 둘 다 성경에 등장하는 재앙의 날, 징벌의 날이지요. 노아 때는 '물'로, 롯 때는 '불과 유황'으로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무지하고 무심한 가운데 악행 속에서 준비 없이 그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지요.

"내려가지 말고 ...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오상선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