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11. 13. 19:39

2019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가 17,20-25)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cannot be observed,
and no one will announce,

‘Look, here it is,’ or, ‘There it is.’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



하느님 나라.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는 세상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어떤 장소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하십니다.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뜻합니다. 당신께서 그들과 더불어 있는 것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어떤 장소를 뜻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를 뜻하는데, 예수님이야말로 오늘 제1독서가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지혜, 곧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표현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머무시는 것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표현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종말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날을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표현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곧,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기 전에 수난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아들의 날은 세상 종말의 날이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날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그날을 늘 깨어 기다립시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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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한 가지만 하지 않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를 하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를 같이 합니다. 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순간이 운전할 때입니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운전해야지, 계기판도 봐야지, 거울 3개(백미러, 사이드미러)를 봐야 합니다. 이것뿐이 아니지요. 핸들도 잘 잡고 있어야 하고, 여기에 동승자라도 있으면 그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음악도 듣고 또 내비게이션에도 주목하고 있어야 합니다.

운전 하나를 하는데도 이렇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때 내 뇌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다른 차가 제 차 앞으로 끼어들어 사고가 날 뻔했다면 어떨까요? 평상시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화가 갑자기 튀어나옵니다.

누구에게나 숨겨져 있는 무엇이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나쁜 것이라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좋은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와서 큰 힘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중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은 꼭꼭 숨겨져 있으면 안 됩니다. 내 마음 안을 환하게 비춰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말뜻이 이해됩니다.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

주님 사랑이 가득한 내 마음이라면, 그래서 의로움과 평화, 기쁨이 가득하다면 분명히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이 될까요? 안타깝게도 악마의 나라 시민일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마음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불의가 가득한 악마의 나라를 만들어 악마와 힘들게 사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사랑만이 하느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에 있게 합니다.
If you think it, you can do it. 생각한다면 할 수 있다(디온 워웍).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사실 많은 이가 행복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감사함은 슬픔과 상심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내가 감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없을까요?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감사할 일은 가득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모델은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 마리아시다

-전삼용신부-


1941년 7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 14호 감방에서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습니다. 이에 몹시 분노한 수용소장 프리치는 그 대가로 열 사람을 골라내어 굶겨 죽이는 아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사형은 큰 고통을 주는 사형법입니다. 굶는 고통보다 물을 마시지 못한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입을 벌려 이빨을 보여라”

      이빨이 튼튼치 못하면 팔리지 않던 옛 노예 시장에서처럼, 분노한 프리치는 죄수를 고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열 번째 죄수가 가죠프니체크로 결정되자 그는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아아, 불쌍한 마누라와 가엽은 내 아들.”

      이때 마르고 야윈 어떤 사람이 대신 나서서 프리치 소장을 불렀습니다.

      “무슨 일인가? 이 폴란드 돼지야.”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너는 튜울립처럼 말라 죽을 것이다.”

      “저는 이미 늙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천주교 신부입니다.”

      그의 짧고 엄숙한 대답에 피도 눈물도 없는 소장은 그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아홉 명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형리들은 콜베 신부가 그들을 바라볼 때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리로 돌려!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고 외쳤습니다. 독주사를 맞고 죽은 콜베 신부가 화장장의 가마솥에서 소각되어질 때 모든 수감자들은 “오늘 콜베 신부님이 새롭게 탄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콜베 신부 때문에 생명을 건진 ‘가죠프니체크’는 독일의 패망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교황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지배하시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가죠프니체크에게는 콜베 신부님이 그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피 흘림’입니다. 피에 생명이 배어있기에 그 피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피를 준 사람에게 지배받게 됩니다. 그 지배받음이 가죠프니체크처럼 행복하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죠프니체크는 콜베 신부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1, 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 죽어야만 우리가 죄책감의 지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로마 14,17 참조)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 씻어주셨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의로움은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마음이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은 절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으면 심판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나의 지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분의 가죽옷을 입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고 그분의 의로움 덕분으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기쁨과 평화가 솟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사시는 그분의 뜻대로 살면서도 저 가죠프니체크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조재형신부-


신문사 옆에는 신협이 있습니다. 가깝기도 하고, 가톨릭 신협이기에 거래하고 있습니다. 신협 이사님들과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분이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디에서 사목했습니까?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미국 가톨릭 평화신문으로 온 건 영전입니까? 좌천입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입니다. 사제들은 순명을 서약했기에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면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좌천일 수도 있고, 영전일 수도 있겠지만 신앙의 기준으로 보면 새로운 도전이며, 새로운 기회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기회이고, 신문 제작이라는 조금은 설레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며칠 전입니다. 은행 지점장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거래하는 사람의 자산, 사업의 규모, 재무상태는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일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 그 일을 하면서 무슨 보람을 느끼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은행 지점장은 당연히 돈에 관해 말할 줄 알았는데 가치와 보람, 의미와 행복을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지점장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은행의 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신문을 만들면서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걱정도 있었습니다. 수입을 생각해야 하고, 홍보 가야 하고, 광고주를 만나야 하고, 저의 능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생각하니 편해졌습니다. 아름다운 글, 따듯한 글로 닫힌 사람의 마음을 열면 됩니다. 교회의 소식,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면서 하나의 신앙을 나누면 됩니다. 영성, 신학, 성서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잠들었던 신앙을 깨우면 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지식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지혜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1 독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걱정과 근심이 생길 때, 원망과 분노가 생길 때면 이렇게 질문한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노래를 불렀던가?

내가 언제 춤을 추었던가?

내가 언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가?

내가 언제 나와 이야기를 했던가?

노래하고 춤추지 않으면,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과 대화하지 않으면 영혼은 병들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하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 완수를 위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 더 나아가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는 중에, 바리사이들과 제자들을 향해 ‘짧는 묵시록’을 선포하십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긴가민가 확실치 않았던 바리사이들, 언제나 예수님 정체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대체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는 것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복음 17장 21절)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삶의 주제요 화두였습니다. 주변 강대국들로 인한 침략과 파괴, 훼손과 멸망으로 인해, 큰 고통과 깊은 슬픔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겨우 겨우 숨쉬고 견뎌왔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구체화되고 실현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이스라엘 모든 계층 사람들의 간절한 물음이었으며, 동시에 예수님 입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이 아니라, 5년 뒤, 아니면 10년 뒤, 그도 아니라면 30년 뒤...과연 살아생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이미 와있다고 하시니,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출발점은 이미 하느님 나라 출현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기에, 그간 활개를 치던 악령들이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고 지녔던 희망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오래전 약속된 구원의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그분께서 당신 교회에 보내신 성령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미 목격했던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구약 시대는 종료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하지만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교회는 긴장과 설렘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성취와 기대 사이에서, 소유와 희망 사이에서,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희망 속에서 기뻐합니다.’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서 12장 12~15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천동지할 뜻밖의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한 가운데 와 있으니, 이제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큰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사심없는 나눔과 봉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끝도 없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뻐라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나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하는 일

-김기현신부-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는 ...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말씀을 대하면서, ‘하느님이 당신의 빛으로 비추시는 어두운 부분은 어떤 것일까.. 만들어 가고자 하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라는 것을 생각 해 보았을 때 이런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스스로가 조금 바쁘게 지내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젊어서 힘도 있고 일하는 것이 재밌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제관 칠판에 할 일들, 공부할 것들, 참여해야하는 교육이나 세미나 들을 많이 적어 놓고 실행하려고 하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머리 속에는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조배실에 가서 성체 조배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고 있던 일에 대한 생각과 계획들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그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아마 성당 창문을 어떻게 공사할까.. 하던 때였던 것 같은데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보다가 문득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도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있네...’

 

왠지 마음속으로 ‘창문의 관한 일은 내가 더 많이 생각했으니까, 예수님은 뒤로 물러서 계세요.. 예수님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실 것 같은데..’ 이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 삶의 뒤로 물러나 계셨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광야의 느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게 되고,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자주 깨닫게 됩니다. 조금 얄미운 느낌이지만,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내 안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될 때야 비로소 그분을 찾고 그분에게 시선이 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원망하는 느낌이 많았고, 그 다음에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아마 여기서 살아가는 분들에게서 자주 듣는 그 ‘현존’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조금 이해했지만 마음과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올 초에도 답답한 마음에 다른 수녀님들이 계시는 곳에서 며칠 함께 지내며 성지 순례도 하고 같이 기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수녀님들과 저녁기도를 하고 성체현시를 했는데요. 성체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기 감실에 계신 예수님도 무언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구나.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면서 위로도 주시고 일하게도 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존재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살짝 바라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빛이 살짝 비춰왔을 때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혜가 ... 만든다. 하느님의 벗으로... 아마도 그것은 그분 없이는 안 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 안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지만 때로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가지 못하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지혜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그 빛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마음으로 배워 살아가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나이도 많지 않은데 깜빡깜빡한다.

어제는 부엌에 물 가지러 가면서

그것을 순간 잊어버려서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또 오늘은 사과 껍질을 깎고 내려놓았던 칼을 보지 못하고

원래 칼을 걸어놓았던 자리를 한참 살펴보았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

 -반영억신부-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두 가지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1) 종말은 언제 오는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뜻으로는 종말이 언제 오느냐는 질문입니다.)
2) 종말은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이 질문은, 종말이 오기 전에 어떤 표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은,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가 종말이 시작된 때입니다.)
2) 종말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종말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 같은 것은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종말의 날’이 아니라, ‘종말이 완성되는 날’로 질문을 바꾼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따라서 종말이 완성되는 날을 미리 계산하거나 예측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가짜 예언자들, 또는 사기꾼들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되면
전우주적인 어떤 표징이 있긴 할 것입니다(루카 21,25-27).
그러나 그 표징은 ‘미리’ 주어지는 표징이 아니라,
그 날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나타나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그 표징을 보고서야 그때서야 회개하려고 하면
너무 늦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이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루카 17,2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2-25).”

신앙인은 종말의 완성과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 날은 심판을 받는 날이기도 하지만, 신앙생활이 완성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종말’이라는 말을 들으면 재난, 불행, 고통 등을 생각하지만,
그 날은 그런 날이 아니라 구원받는 날이고, 기쁜 잔칫날입니다.
단,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겪을 고난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재림의 날은 모든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나는 날,
안식과 평화와 생명을 누리기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한다.” 라는 말은,
“빨리 죽고 싶다.” 라는 소극적인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는 적극적인 뜻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날이 언제인지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 재림 전에 죽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1테살 4,15-18).>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라는 말씀은,
가짜 메시아, 가짜 재림 예수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자들은 백 퍼센트 가짜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되고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그 날 구원 선고를 받을지 멸망 선고를 받을지는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잘 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재림은 큰 영광을 떨치는 일이지만(루카 21,27)
그 전에 먼저 십자가 수난을 당할 것이라고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인데,
거꾸로 생각하면, 십자가 수난을 당하더라도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으로서 겪는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재림의 날에 이루어지는 심판은,
신학이나 성서학이나 교리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보는 시험이 아니라,
얼마나 신앙인답게 잘 살았느냐를 보는 심판입니다.
따라서 그 심판에 대비하는 일은, 이론 공부가 아니라 ‘삶의 실천’이어야 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먼저 잘 알아야 실천도 잘하는 것 아닌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아는 일도 필요하지만,
아는 것으로만 그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몰라서 실천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오느냐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그들도 군중들도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십자가와 죽음이 당신을 덮칠 것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사랑과 인내로 그들의 비방을 비방으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1베드 2,23)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탄이 쫓겨나고 더 이상 죄가 다스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무지, 즉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나라나 사탄의 왕국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의로움에 대한 사랑이나, 죄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악마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희미하게 또는 은밀하게 내려오시지 않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이제 먼저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고 그러한 변화를 청하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한상우신부-

삶 가운데에
십자가가 있고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삶의 슬픔이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담아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같이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십자가에서
뜨거운 사랑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는
때는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십자가의 믿음을
통해 전달됩니다.

믿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줍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십자가로
하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만남의
나라 십자가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카 17,20)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언제"입니다. 대개는 삶이 팍팍하고 어려워질수록, 앞이 안 보이고 미래가 절망스러울수록 종말에 관심을 더 갖기 마련입니다만, 바리사이들이 실상 그런 처지는 아니지요. 그래도 하느님의 나라는 계층을 막론하고 유다인들의 공통 관심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방인과 강대국의 영향권 아래서 민족적 정체성을 어렵게 지켜나가면서, 메시아의 오심으로 새롭게 일어날 자유와 해방의 시대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으로서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지금 여기"가 곧 하느님의 나라임을 바리사이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 안에는 애써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을 외면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완성을 향해 가는 중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5).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고난과 배척, 즉 수난과 죽음의 강을 먼저 건너야 합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겟세마니 고뇌는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 순명의 기도였지요. 죽음을 거쳐 피어난 생명만이 건너감, 파스카를 완성할 수 있으니까요.

제1독서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혜를 가리키는 말씀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답고 유려한지 읽는 내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지혜를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가치로운 단어들이 가득 나열되었다는 자체는, 사실 어떤 인간의 단어로도 지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반증이 됩니다. 아무리 최고의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란다는 뜻이니까요.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 7,26).
지혜를 설명하는 이 모든 아름답고 훌륭한 가치들이 지혜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함께하시는 세상이야말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지혜는 ...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지혜 7,27).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이미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또 그분 지혜의 한 조각이라도 품고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벗이고 말씀의 사람인 예언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삶의 고뇌와 고통 중에 하느님과 누릴 영원한 일치의 희망을 놓지 않고 하느님 모상인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지켜낸다면,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 언제가 되어도 우리는 단박에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 환희와 영광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벗이요 예언자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또 오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모든 수험생들을 축복합니다. 애쓴 보람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김찬선신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사람의 아들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 배척을 받아야 한다."

복음을 보면 가끔 주님께서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동문서답은 아니어도 약간 빗나간 답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냐는 거였는데
주님의 답은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거나
여기 또는 저기에 있지 않고 너희 가운데 있다고 답하십니다.

그런데 언제 오는지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여기에 와 있다고 하시는 것이며 당신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이 아닌 미래 언젠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오복음 18장 19-20절에서 둘이나 셋이 모여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면 당신도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가 아닌 하느님 혼자 계신 곳이거나
그러기에 사람들을 떠나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거나 
사람들하고 있는 것은 싫고 하느님과만 있고 싶어서
  도망쳐 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주님 없이 우리끼리만 있으면 그것도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실로 수도공동체라는 곳도 말로는 하느님의 공동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은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만 있는,
속된 말로 하면 '지들끼리 찧고 까부는' 공동체가 많습니다.

정리하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안 계셔도 안 되고
하느님과 나만 같이 있어도 안 되고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 가운데 계셔야만 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차원도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오신 것도 사실이지만,
다시 말해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 것도 사실이지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완성되는 나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고 오셨지만
주님 당신이나 우리나 이 세상에서 죽어야 완성된다는 말씀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왕 축일에 또 보겠지만 주님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나라는 여기에/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주님의 대답은
당신의 오심과 더불어 이미 이 세상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이 세상을 넘어서 저 세상까지,
죽음을 넘어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성취되어 가는 거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것은 주님을 우리 공동체에 모심으로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고 그렇지만 동시에 공동체로서
천국의 순례길을 가는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가 17,20-25)


     콜베 신부 때문에 생명을 건진 ‘가죠프니체크’는 독일의 패망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교황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고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로마 14,17 참조)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 씻어주셨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의로움은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마음이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은 절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으면 심판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나의 지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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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걱정과 근심이 생길 때원망과 분노가 생길 때면 이렇게 질문한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노래를 불렀던가?

내가 언제 춤을 추었던가?

내가 언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가?

내가 언제 나와 이야기를 했던가?

노래하고 춤추지 않으면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자신과 대화하지 않으면 영혼은 병들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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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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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마태오복음 18장 19-20절에서 둘이나 셋이 모여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면 당신도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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