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2019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루가 16 1-8)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For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prudent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the children of ligh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드시며,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 이야기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주인의 재산에 해를 입히는 일종의 ‘배임죄’를 저지르는 약은 집사가 주인에게 도리어 칭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문맥 안에서, 특별히 루카 복음의 신학 안에서 면밀히 읽어 보면 그 메시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루카 복음서에서 재물은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보다 재물에 더 기대어 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재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것들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여 ‘친구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루카 16,9 참조).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 16,14)처럼 재물을 마음대로,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해서는 안 되고, 이웃을 위하여 내놓음으로써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방식으로 활용해야 합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면서도, 자신이 관리하는 재산으로 이웃을 돕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집사를 관리인 자리에서 내쫓으려 합니다. 그제야 집사는,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재물의 본디 목적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주인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시작합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자랑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랑하니 다소 어색하게 여겨질 만도 합니다만, 보통 바오로 사도가 무엇인가를 자랑할 때면 대개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를 자랑합니다.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낸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기에 기꺼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정말 올바른 집사의 모습을 지닌 사람입니다.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라고 맡기신, 본디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재물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십니까?”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에는 틈이 많습니다.”
누구는 시간이 없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누구는 시간이 많다면서 실제로 많은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삼자가 보기에는 시간이 많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늘 부족할 것만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시간이 없으며,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많은 것처럼 다가오는 법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에게 할 일이 밀려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불의한 집사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왜 이 비유를 들려주셨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이 불의한 집사 이야기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의한 행동을 했음에도 칭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주인을 속이고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집사는 횡령까지 하지 않습니까? 집사 자리를 잃은 뒤 안락을 얻기 위해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행동을 칭찬하기 위해 이런 예화를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이유는 주인을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속임수라 할지라도 미래를 위해 영리한 기지를 발휘해서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도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미래는 어떤 삶입니까? 바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삶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혹시 계속해서 시간이 없다면서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뒤로 미루는 것은 ‘기도’일 것입니다. 너무나도 바쁘고 할 일이 많아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하루에 잠시도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낼 수 없을까요? 어쩌면 시간이 없다고 하는 말 자체가 커다란 거짓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자매님의 고충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불러서 그것을 찾아달라고 말한답니다. 이러한 상황입니다.
“여보, 내가 어제 보던 책이 어디 있지? 아무리 찾아도 없네.”
“책상 위에 있잖아요.”
“정말 없어. 어디 있다는 거야?”
아내가 가보면 책상 위에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있잖아요.”라고 말하면, “그렇네? 나는 정말 못 봤어.”라면서 답답한 소리를 한답니다.
사실 남편이 아내를 골탕 먹이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이 책은 여기에 없어.’라고 단정을 내려다보니 코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스스로 규정을 내리고 단정 지어서 사고의 확장을 스스로 막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린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열린 생각을 하라고 많은 학자가 이야기합니다.
나 자신의 성장을 스스로 막지 마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당연하다 여기면 부족해진다
-전삼용신부-
제가 유학할 때 학교에 가는 길에는 항상 구걸하는 행려자들이 줄지어있었습니다. 저도 십일조를 내야했기에 거의 매일 행려자들에게 천 원 정도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더 받아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서 저를 따라옵니다. 그리고 돈을 더 받아내기 위해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사정이 딱해서 만 원도 주고 심지어 몇 십만 원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텐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이젠 아예 거액의 돈을 꾸준히 주지 않으면 미워하겠다는 눈초리를 보냅니다. 그러면 저도 무서워서 다시는 그 길로 다니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길로 다니면서 또 돈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다보면 천 원을 주던, 만 원을 주던 항상 감사해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따라오지 않고 주는 것에 만족해합니다. 그 사람이 돈을 청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위하고 이웃을 위해 청합니다. 거저 받은 것이라 그런지 거저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큰 액수의 돈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돈이 없어 눈인사만 하고 지나쳐도 그 사람은 저의 사정을 이해해주며 미소로 화답해줍니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돈이 생기면 또 그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지닌 것들 중에 당연한 것이 있을까요? 만약 내가 버려져 동물에게 키워졌다면 나는 두 발로 걸을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숨을 쉬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허락해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어제 죽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더 많은 은총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사해해야 하고 주님 말씀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더 받고 싶으면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나눌 줄 알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집사 한 명이 등장합니다. 그는 처음에 주인의 재산을 자신의 재산처럼 낭비하며 살았습니다. 주인의 것이 곧 자신의 것이니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는 당장 집사 일을 정리하라고 말합니다. 그제야 자신이 가지고 누리던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자각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정리하는 척 하면서 쫓겨날 자신을 받아줄 사람들을 만듭니다. 기름 백 항아리를 빚진 사람에게는 쉰 항아리로 탕감해주고 밀 백 섬 빚진 사람에게는 여든 섬으로 깎아줍니다. 자신이 받은 권한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자신이 쫓겨났을 때 받아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이 약삭빠른 종을 칭찬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불의한 재물은 부당한 재물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내가 가지기에 합당해서 가진 것들이 아님을 알 때 그 재물들은 나에게 부당한 재물이 되고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부당한 재물인줄 알아야 나눌 줄 알게 되고 나눌 줄 알게 되어야 친구가 생기며 그 친구들이 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보증이 됩니다.
내가 지닌 모든 것들에 항상 감사합시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당연히 받아야 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을 당연히 주셔야 할 의무는 없으십니다. 더 받으려면 받은 것을 감사하게 나눌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 중에 가장 부당한 재물은 ‘복음’입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만큼 가치 있는 재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내가 가진 복음까지 잃게 될 위기에 처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구원의 복음은 내가 가진 재물과 함께 이웃에게 나누어져야합니다. 이렇게 약삭빠른 집사가 될 때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충실한 집사로 그분의 모든 재산을 맡아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녹음기를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입니다. 영어 회화 테이프가 있었고, 그걸 녹음기로 들었습니다. 43년 전의 기억입니다. 이동식 카세트 라디오가 나왔습니다. 야유회를 가면 기타와 이동식 카세트 라디오는 필수였습니다. 잔잔한 음악, 신나는 음악은 야유회의 감초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마이마이’로 불리는 소형 녹음기가 등장했습니다. 영화 ‘라붐’에서 소형 녹음기를 듣는 주인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는 곧 등장한 CD(Compact Disk)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저도 상당히 많은 CD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음반은 케니 G의 음반입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CD는 프로그램 저장매체로, 음악 저장매체로 사랑받았습니다. 차에는 여러 장의 CD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장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CD도 자리를 내주는 기술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MP3입니다. 작은 용량에 많은 음악을 담을 수 있습니다. 저도 MP3 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원하는 음악을 검색할 수 있고, 쉽게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스마트 폰의 등장으로 이제 음악은 소장하는 개념에서 내려받는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스마트 폰은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음악, 문학, 철학, 경제, 역사, 종교의 모든 정보는 검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잠시 돌아보았지만, 세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소유의 개념이 공유의 개념으로 변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순수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인내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전해 주신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르지만, 여러분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습니다. 여러분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겠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면서 세상은 분명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소유의 시대에서 공유의 시대로 향한다면 이는 신앙인이 이미 시작했던 삶입니다. 공유의 삶을 살았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지금 이 순간, 각자 처한 자리에서, 자꾸 미루지 말고 하늘나라를 위해 신속히 결단을 내리십시오!
-양승국신부-
예수님 가르침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특히 가난하고 가방끈이 짧은 백성들을 위해서 자주 애용하신 교수법 중에 하나가 ‘비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백성들이 처한 일상 안에서 벌어지곤 하던 구체적인 상황을 예시하며 쉽게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열처녀의 비유, 그리고 오늘 불의한 집사의 비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여러 비유 말씀들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우선 비유 말씀을 잘 경청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강조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여러 비유 말씀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분이 바로 불의한 집사의 비유입니다. 오해와 악용의 가능성이 다분하니, 잘 새겨듣고, 깊이 있게 묵상하고,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각별히 필요합니다.
부자의 재산 관리인으로서 부정직한 처신 때문에 권고사직을 받게 되는 집사는 궁리에 몰리자, 빚문서 위조라는 더 큰 불법을 저지릅니다. 그가 보인 악행은 구속·수사감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를 칭찬합니다.
불의한 집사가 탕감해준 기름과 밀은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매매되던 가장 중요한 농산물이었습니다. 기름 백항아리는 약 150그루의 올리브 나무에서 나오는 소출로, 약 90갤런(20말) 정도의 양입니다. 밀 백섬은 약 100에이커(600마지기)의 밭에서 수확할 수 있는 양으로, 약 500가마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집사는 두 문서에서 각각 50퍼센트와 20퍼센트를 경감해주었습니다. 경감해준 양을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꽤 큰 액수를 횡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칭찬은 불의한 집사의 음흉한 속임수나 뻔뻔스런 몰염치에 대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칭찬의 이유는 영리하게 대처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탈출구를 찾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미래를 위해 지체없이 결단을 내린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러나 집사를 향한 예수님 칭찬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성경 본문은 ‘불의한 집사’라는 표현을 통해, 그는 끝까지 불의한 사람으로 남아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해서 그가 저지를 불의한 행동이 의롭게 되거나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닌 것입니다. 다만 긴박한 상황에서 그가 내린 미래를 위한 신속한 결단만이 높이 평가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의 비유를 통해 최종적으로 강조하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가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수 없는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각자 처한 자리에서, 자꾸 미루지 말고 하늘나라를 위해 신속히 결단을 내리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이웃 사랑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할짓 못할 짓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영혼의 유익,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할짓 못할 짓 다 하라는 것입니다.

영리한 선택
-반영억신부-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 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가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적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
-송영진신부-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1-2)”
우리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집사입니다.
주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충실하게 사는 것은 집사로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집사로서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모두 자신의 집사 임무를 주님 앞에서 평가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은
집사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인이 집사 일을 청산하라고 ‘미리’ 통보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지금’입니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주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설마 멸망을 당하기야 하겠는가?” 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살다가 그날을 맞이하는 사람은
주님의 심판 때에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집사의 모습을 심판에 대비하는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표현은 세속적이지만, 어떻든 대책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6,5-7).”
비유의 표현만 보면, 집사가 자기 살 길을 찾으려고,
주인 모르게 주인의 재산으로 장난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자기가 잘못해서 쫓겨나게 되었으면서도
더 큰 잘못으로 살 길을 찾으려고 하는 나쁜 행동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또는 주인이 나중에 그 집사의 행동을 칭찬했음을 생각하면, 집사가 자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그래서 자기를 쫓아내려고 하는
주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을 보면,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신명 23,20-21).”
아마도 집사는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이자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쫓겨나게 되자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처음에 정했던 이자를 모두 없애 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한 것을 바로잡는 일이 됩니다.
회개란,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칩니다. 회개합니다.” 라고
말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한 일을 바로잡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도둑질을 했다면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또 손해배상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살인을 했다면?
바로잡을 방법이 없으니 평생 보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는 동안 평생 보속해도 죄가 너무 커서 보속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옥에서의 보속이 필요하게 됩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단순하게 생각하면, ‘칭찬’은 잘한 일을 잘했다고 평가해 주는 일입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잘못한 일인데도 잘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주인이 진짜로 집사를 칭찬했다면, 집사가 한 일에 대해서
그 일은 전에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일이라고 인정했다는 뜻이 됩니다.
비유의 표현만 보면,
주인은 집사가 영리하게 대처한 것을 칭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에 큰 손해를 입힌 집사를 칭찬할 주인은 없을 것입니다.
칭찬하기는커녕 더 큰 엄벌을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에만 초점을 맞추면,
주인이 집사를 쫓아내려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집사가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안 믿고 있다가 심판을 의식하고서, 믿고 회개하게 된 사람들은
신속하게 회개하고 보속하는데, 처음부터 하느님을 믿었다는 너희는
왜 이렇게 회개하고 보속하는 것이 굼뜨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현재 상태만 보는 심판입니다.
이미 회개했고, 충실하게 보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회개한 현재 상태에 대해서만 심판받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전 생애가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심판의 시간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가 받는 최후의 심판도, 각 개인이 받는 사심판도,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신속하게 회개해야 하고, ‘지금’ 철저하게 보속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노예이기는 하였지만, 주인의 큰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청지기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 역시 교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지주들에게 지불되는 빚이란 흔히 임대료를 말하는데 그것은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소출로 지불되었다.
이 때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약은 청지기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을 하며 그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청지기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이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집사가 횡령을 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은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 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 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 8)
-한상우신부-
모든 건 바뀌고
변화합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소통이
중요합니다.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소통과
관계맺음은
참으로 어려운
숙제입니다.
생각과 마음만
바꾸면 언제나
소통의 길은 보입니다.
약은 집사는
자기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한 현실을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모색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삶을
반성해봅니다.
모든 길은
주님께로
이어져 있습니다.
편견에 갇혀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제나 기회를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그 어떤 처지에서도
소통하고 관계맺는
새로운 변화의 길임을
잊지마십시오.
아버지 안에
빛의 자녀도
세상의 자녀도
길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재산을 사용하는데 있어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기준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 줍니다.
복음에는 부자인 주인과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그리고 주인에게 빚진 이들이 등장합니다. 성경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주인'이나 '아버지', '임금'은 대부분 하느님을 가리키지요. 문제의 발단은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에서 시작됩니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2).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마치 제 것처럼 낭비했나 봅니다. 주인의 뜻에 맞게 집행하지 않고 제 이익을 위해 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집사 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집사는 실직 후에도 먹고 살 방도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길을 택합니다. 그래서 주인의 빛 문서를 날조해 빚 진 이들의 부담을 덜어 주지요. 집사와 빚 진 이들이 공모해서 주인을 속이는 행위는 명백히 범법이고 죄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이 말씀은 우리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아니, 지금 예수님이 주인을 속이고 재산을 축낸 그 집사가 잘했다고 하시는 건가?' 하고 말이죠.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집사에게 "불의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셨습니다. 주인에게 칭찬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불의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뜻이지요.
사실 가장 손해를 입은 이는 주인입니다. 빚 진 이들은 갚아야 할 빚이 줄었고 집사는 직업을 잃지 않으면서 칭찬까지 받았으니 저마다 필요한 이득을 본 셈입니다. 그러니 이 거래에서 주인만 바보가 된 듯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나는 괜찮다. 너희만 좋으면 나는 어찌되어도 상관 없다"는 그분의 관대함입니다. 비록 자기가 살기 위해 사람들의 짐을 덜어준 의도와 지향이 불순했고, 그래서 불의하다는 수식어를 벗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당신 재산의 손실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입은 도움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하느님은 세상 자녀들의 영리한(약삭빠르고 영악한) 거래를 통해서도 당신의 선한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온통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성소를 당당히 피력합니다.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로마 15,16).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 받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에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사실 사울이라는 열렬한 바리사이 유다인이 바오로라는 이방인 사도로 변모된 이 극적인 반전에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용했음을 우리는 알지요.
하느님께서는 자청해 나서서 새로운 길을 박해했던 사울을 괘씸하게 여겨 그를 무너뜨리시는 대신, 그 신념과 열정이라는 자질을 쓰시고자 그의 방향을 돌려놓으셨지요. 인간적으로 출중한 그의 능력과 스펙에 신념과 열정까지 더해지니, 새로운 길은 신학적 기반까지 형성하면서 온 세상으로 전파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당장의 박해나 눈 앞의 손해를 인내하시면서 길고 먼 안목으로 세상 자녀들의 영리한 거래까지 허용하고 쓰시는 분이십니다. 여럿을 살리기 위해 누구 하나는 손해를 봐야 한다면, 심지어 죽어야 한다면 그게 당신이어도 상관없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완전히 백 프로 의롭다고 자신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제법 열심하고 철저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느 면은 좀 부족하고 어느 면은 심지어 불의하기까지 하기도 합니다. 저마다 고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영혼의 가시가 존재하니까요. 이런 우리에게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장의 단죄와 내침으로 응하시지 않고 그 부족함과 불의함이 선을 이룰 수 있도록 길을 터주십니다. 그분은 굽은 자로도 직선을 그으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그렇게 주님은 오늘도 불의한 집사인 우리에게 이웃과 세상을 돌보라고 당신 재산을 맡기십니다. 당신은 손해를 봐도 좋으니 두루 도움이 되고 선익이 되도록, 특히 가난과 채무에 짓눌린 이들을 위해 재량껏 애써 보라고 장을 펼쳐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자질을 총동원해 주인의 뜻에 동참해야겠지요.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은 당신의 손해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대범하고 관대한 분이시니 두려워 말고 함께합시다.

봉사할 수 있는 행복
-김찬선신부-
저는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전 한때가 아니라 오랫동안 고민을 해온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민한 것인데 그것이 다름 아닌
사제직을 포기하고 평 수도자로 사는 문제였습니다.
교만한 제가 최고로 중요한 우리 영성인 작음을 살기 위해서는
사제보다는 평 수도자가 더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제가 제일 경계하며 살아온 것이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그만큼 제가 교만했고 지금도 교만하다는 표시지요.
그럼에도 제가 사제직을 택한 것은 제 손으로
미사성제를 드릴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고,
그래서 지금도 성변화 후 사제가 다음 부분을 기도할 때는
그저 입으로만 감사하지 않고 정말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또한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정녕 제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할 수 있다니!
아무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 죄인인 제가 아버지 앞에 나아올 수 있고,
또 더 나아가 미사성제로 봉사할 수 있다니!
이런 자격이랄까 역할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지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다고 노래하는 것보다
더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요.
나를 살리실 뿐 아니라 봉사까지 하게 하시니 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저와 같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하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은총을 베푸셨다고 얘기하고,
그 은총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제는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예수님처럼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
곧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 제쳐두고 열두 제자만 따로 불러
따로 상을 차려 빵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나눠주신 그 예를 거행하는 거지요.
이것이 오랜 저의 꿈이었고,지난 여기 선교 협동조합 설립 총회 때
바로 이 성찬례를 앞으로 할 거라고 약속을 했는데
드디어 어제 이 성찬레를 처음 거행한 것입니다.
어제도 바쁜 날이었지만 부리나케 시장을 보고 요리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반가량 강의를 하고 미사를 봉헌한 다음
조촐하지만 제가 요리한 것을 가지고 포도주와 함께 식사했습니다.
끝날 무렵 제 입에서 말처럼 하루를 달렸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는데
정말 새벽 일찍 일어나 저녁 7시 너머까지 북치고 장구치면서 달린
숨가쁜 하루였기에 그런 말이 나온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처럼 달린 하루였기에 그런 말이 나왔지만
생각해보니 하루종일 고생한 말이 아니라 행복한 말이었습니다.
사실 말이 병이 들어 더 이상 달릴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입니까?
그러니 제가 더 나이 먹어 하고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사랑을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오늘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 행복을 크게 느끼며 자랑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0일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