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2019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1-10)
"Zacchaeus, come down quickly,
for today I must stay at your house."
자캐오를 부르시는 예수님.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신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누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불안해하지 말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죄인으로 여기던 세관장 자캐오의 집에 가시어 묵으시며,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이따금 힘겹거나 어려울 때, 하느님께서 나를 싫어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우울함이 찾아올 때면 가끔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를 모르겠다며 절망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죄인마저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며, 그렇게 돌아오는 죄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 것이기에 소중히 여기십니다. 만물 안에는 당신 불멸의 영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멀어지며 죄를 지어 탈선하는 이의 죄를 물으시고, 거기에 합당한 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다시금 당신께 충실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훈계하셨습니다.하느님의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자캐오를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먼저 자캐오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발걸음에 자캐오는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행여 자신이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자캐오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습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주님
-정순택주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 위령 성월이 되면 누구나 한 해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게 됩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있듯이 우리네 삶에도 마지막이 있음을 묵상하게 되고, 먼저 가신 가족, 친지, 은인들의 안식을 기도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오늘 11월의 첫 주일에 맞는 연중 제31주일 복음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과 자캐오라는 세관장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 마지막 단계에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시점의 사건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붙잡히시고 수난받으실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요 부자라고 루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사실 세관장이라는 직책은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로마 제국의 하수인’ 정도로 여겨져서 배척받는 자리였습니다. 종종 거두어들여야 하는 세금 이상으로 거두어들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자캐오가 예수님이 예리코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보고 싶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키 작은 세관장이었던 자캐오에게 단지 작은 키만 문제였다면,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 앞줄에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을 기다릴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많은 사람 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 모습이 자캐오의 외로운 처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제국의 하수인이자 부정직한 세리이고 외로운 처지이기에 더더욱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의 환호 속에서도 외로운 한 존재의 갈망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군중에서 떨어져서 나무 위에 외롭게 올라있는 애타는 눈망울을 보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예리코의 한 세관장 이름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미리 아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어~이, 거기, 나무 위의 사람, 한 번 내려와 보시게’ 정도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는 자캐오 같은 죄인이요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를 ‘있는 그대로, 한 인격으로 사랑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에서 지혜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온 세상도 당신 앞에서는 천칭의 조그마한 추와 같고, 이른 아침 땅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습니다. …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한 해라고 하는 시간의 선물을 받았지만, 돌아보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고 ‘빈손’을 느끼는 우리 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오만과 외로움의 나무에서 내려오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며, 우리도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바쳐드립시다

그리스도인의 힘은 내 안에 모신 성체에서 나옵니다.
-장재봉신부-
위령성월, 만나고 헤어진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오래도록 마주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도 싶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과 첫 대면을 가졌던 자캐오를 생각하며 문득 삶 안에서 인연을 맺은 하고 많은 관계가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움을 담아 진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오늘 지혜서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자꾸 신명기 구절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신명 21,22-23)라며 시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구절이 마음에 맴돌았습니다. 비록 하느님께 저주를 받아 세상을 마감한 사람의 시신일지라도, 죽을죄를 지어서 백번 죽어 마땅한 죄인의 몸이라 하더라도 주님께는 혐오스럽지 않고 싫지도 않다는 뜻이라 새겨졌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라는 지혜서의 고백에 아멘이라 화답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물론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죽음 앞에서 몸가짐을 경건히 하라는 가르침일 터입니다. 동시에 그런 불쌍한 삶을 살지 않도록 스스로의 삶을 살펴 살아가라는 경고이기도 할 테지요. 성경은 그 이유가 주님께서 주신 땅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조처임을 곁들여 밝히는데요(23절 참조). 주님께는 주검마저 이렇게 소중할진데, 숨을 쉬고 살아가는 우리 몸은 얼마나 귀하게 여기실지 어림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몸은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신 귀하고 귀한 하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몸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한 고귀한 육체를 지녔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물드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오늘 자캐오에게 다가가시듯 세상의 모든 이에게 다가가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어드리며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깨우쳐주시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시면서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당신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신앙생활은 성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하늘의 힘을 얻어 세상에 파견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은 세상에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파견된 하늘 시민의 긍지를 잃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합니다. 손안에 쥔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는 일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모두 외롭답니다. 누구와도 통하지 않는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답니다. 그럴듯한 겉모습으로 공허감을 감추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저 눈만 뜨면 세상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곁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 현혹되어 집중하느라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진정한 관계가 아닌 소유의 극대화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소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 세상 핑계를 합니다. 달라진 세상 탓이라는 토를 답니다. 명백한 잘못이요 타락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오직 자신의 소유를 극대화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려 했던 카인의 비루한 방식인 까닭일 뿐이니까요. 삶을 사랑의 관계로 꾸려가라는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행태일 뿐이니까요.
이기고 군림하려 드는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지 못하십니다. 소유에만 골몰하여 타인과의 관계를 손익으로 따지는 피폐한 삶을 영위한다면 주님이 계시지 않는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카인처럼 하느님을 떠나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2)로 전락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럭저럭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아가니 어찌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순수한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강해집니다. 특히 하느님과의 만남은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가미되지 않고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기에 당신의 모든 것을 오직 살리는 일에만 사용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모시고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캐오를 변화시키신 주님 사랑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고스란히 주입되어 있습니다. 그날 자캐오보다 훨씬 월등한 주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으로 돋움하기 원하십니다. 자캐오처럼 주님을 뵙기 위해서 숱한 장애를 딛고 도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꼭 그날 자캐오처럼 몹시 귀하게 대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독한 삶에 갇혀 지내는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캐오처럼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며 움츠러든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공간을 제공해 주시려 쪼개진 빵으로 우리 안에 오시어 함께 하십니다. 카인처럼 사랑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그날 자캐오처럼 사랑하고 베풀며 살아갈 힘을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관계 안에서 관계를 통하여 자아를 고귀하게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힘으로 이웃과 사회에 덕을 끼치는 존귀한 빛을 비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맙시다.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니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니까요.
저는 지금 벅찬 마음으로 기도드리며 이 글을 적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주님께 자신의 하루를 보고드릴 수 있기를, 내가 먼저 변해서 상대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주님께 알려드릴 수 있기를, 하여 오늘 누군가를 용서한 마음자락을 보여드리고 자꾸 솟구치는 욕심을 깡그리 봉헌해드리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다사다난한 세상살이 중에서도 믿음으로 도약하고 희망으로 버티시길 기도드립니다. 마침내 우리의 매일이 변화되어 그날 자캐오처럼 기쁘고 행복하기를 소원하며 내처 주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또 원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찬미드리며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시려는 당신의 힘에 의지하여 당신의 힘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이 주간이시길 소원합니다.

바라봄
-조영수신부-
오늘 복음에는 총 네 가지의 ‘바라봄’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키가 작은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지만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았던 ‘선망 (羨望)의 바라봄’입니다. 이 때 자캐오의 바라봄은, 일방적으로 먼발치에 서 관찰하는 그런 바라봄이지요. 하느님을 보고 싶고, 소문처럼 대단한 분이신지 알고 싶어 하지만 이런 저런 장애들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느님 께 나아가지 않고 망설이는 모습, 피동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바라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다가오셔서 나무 위에 있는 그를 ‘올려다보셨’지요. ‘올려다보다’는 것은 순종적인 마 음,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를 뜻합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우러러보다’ 라는 것이 있지요. 낮은 곳에서 바라보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알 려줍니다. 즉, 예수님의 바라봄은 저 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낮은 곳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바라봄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과 자캐오를 향한, 사람들의 ‘판단의 바라봄’ 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심이나 자캐오의 진심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눈에 비친 대로 곧 보고 싶은 대로 볼 뿐입 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말이지요. 다른 이의 진심이나 사연을 알고자 하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판단하며 비난하는 행동, 때로 질투나 미움 같은 자기 감정에 휩싸여서 그런 시선으로 보 고 단정 짓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넷째는 다시 자캐오의 ‘바라봄’ 입니다. 자캐오의 이 바라봄은 ‘아멘의 바라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서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보십시오, 주님!”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바라봄’은 자기 삶에 주님을 초대하고 그분의 뜻을 그 중심에 놓는 바라봄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곁에서 함께 계시며 보아주십사’ 청하는 것이지요. ‘바라봄’이 곧, ‘함께 살아감’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보여드리고, 또 자신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태도인 겁 니다.
그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오로지 믿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누구일까요? 답은 자기 자신 이랍니다. 어디에서 본 넌센스 퀴즈였습니다. 넌센스 퀴즈이지만 이 짤막한 문답 속에 곱씹어 볼 만한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깊어지는 신앙은, 삶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점점 주님께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먼발치에서 보는 ‘선망’에서, 주님의 ‘수용’을 느끼고, 자기만의 ‘판단’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바라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임
-조현권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예수님과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 습니다. 부유하고 힘 있었던, 예리코에서 그야말로 잘 나가는 세관원이었던 자캐오가 어린아이처럼 나무에 기어올랐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자 한 것이지 요. 단순히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랬을까요? 자캐오는 자신이 가진 힘 과 재력 덕분에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경외를 받을 자리에 있었지만, 실상 사람들은 그를 피하고 조소하였습니다. 그는 사기를 쳐서 부자가 된 사람으로, 사람들이 혐오 하는 로마군에게 빌붙어 사는 세리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자캐오는 당시 독실한 유대인들의 눈엔 국외자 로서 세상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던, 요즘 말로 왕따를 당했던 그야말로 ‘소외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러기에 그는 사랑을 갈구하고 다른 사람들부터 자신에 대한 인정을 구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유에서 스스로 사람 들에게서 멀어져 고립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좋은 말이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멀어져만 가는 가련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자캐오도 그런 가련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습 그대로 그를 받아들 이셨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몰아세우지도 않으셨고 책망하 지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그가 그토록 찾고 갈망하던 인정과 따스함을 선사하셨 습니다. 자캐오가 느꼈을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 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의 이 말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가 받아 누린 기쁨을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하 셨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구원은총이 자캐오에게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것이지 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캐오에 대해서 하는 말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캐오의 집에 들르셨고, 내면적으로 상처 입은 자캐오에게 평안함을 선사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영혼의 위로가 되 신 것이지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캐오는 처음으로 자신이 열망하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설령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걷게 될지라도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심 을 오늘 복음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바른길을 벗어나 소외되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시려 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감사드리면서 그 사랑에 응답을 드리고 자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이 됩시다

세관장 자캐오
-김순곤신부-
예리코는 지중해 연안 도시 요빠와 예루살렘과 요르단 동부지역을 잇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면서 일종의 국경도시였기 때문에,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왕래는 물론 물건 수송도 잦은 곳이었고 그곳에 세관이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주로 인두세와 토지세를 징수했고, 통행세 징수는 지역 사람에게 하청을 주었었다.
이런 관례에 따라 자캐오는 예리코 지역의 세금징수권을 매입하고 자기 밑에 세리들을 고용해서 부당한 수수료와 뇌물을 챙겼을 것이다.
물론 동족인 유다인에게도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해서 로마 당국에 바쳤고 자신도 착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세리들에게는 늘 부정축재자, 민족의 반역자, 부정한 자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말하자면 세리들은 직업상 공적 죄인으로 치부되어 동족으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늘 배는 불렀어도 가슴은 시렸다.’
그렇게 살던 자캐오는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분은 세리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심지어 세리 마태오를 자기 제자로 삼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마태 9,9 참조)
자캐오는 이분이야말로 자신의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고,
늘 굴레처럼 자신을 옭아매던 오명들을 지워주실 것이라는 희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러나 키가 작았던 자캐오는 군중에 가려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체면도 불사하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의 말씀,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모든 이가 무시하고 따돌렸던 자캐오를 예수님은 용서하고 받아주시겠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자캐오는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횡령한 것에 대해서는 네 곱절로 갚겠다는 약속으로 구원의 기쁨을 드러냈다.
당시 유다 풍습으로 남자의 연 수입 중 1/5을 구제기금으로 내게 되어 있었고,
절도의 경우에는 갑절로 배상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속죄행위였다.(탈출 22,3.6)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말씀으로 자캐오의 구원을 선언하신다.
그렇다.
온 세상이 나에게 손가락질하고, 모두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은 결코 죄 많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자캐오라는 세리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리고를 지나실 때의 일입니다. 부자 세리 자캐오가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지만, 사람들이 많아, 그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자 나무에서 불러내려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집안에 모셔 들인 자캐오는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복음서는 자캐오에 대해 이 이야기만 보도하고, 그 이상 그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을 깨달은 신앙인들이 그 구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도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자캐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옛날 모세에게 하느님이 하신 말씀, “나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 12)는 말씀을 상기(想起)시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그분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이 모세와 함께 계셨듯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자캐오와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의「탈출기」는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33, 19) 일을 하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까, 자캐오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캐오는 그 시대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던 세리(稅吏)입니다. 그가 부자인 것은 세금 징수를 빙자하여 많은 돈을 거두어 착복(着服)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머문다고 유대인들이 투덜거립니다. 복음서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잘 어울린다’고 유대인들로부터 비난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부인하지 못할 사실로 보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다고 복음서들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지금까지 세리로 일하면서 치부(致富)하였고, 돈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웃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집안에 맞아들인 자캐오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의 반을 내어 놓겠다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세금을 핑계로 불의(不義)하게 거두어서 착복한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도 말합니다. 유대교 율법은 그런 경우에 두 배를 갚으라고 말합니다. 오늘 자캐오는 두 배의 두 배, 곧 네 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함께 계신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깨달음을 연장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하신 일도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돌보아주며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안에 모셔 들여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자기도 하겠다고 말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또 자기가 정직하지 못하여 마음 아프게 하였던 사람들을 위해, 그는 자비로운 실천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맞아들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자캐오의 결심을 들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자캐오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느님 나라의 일, 곧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구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복음서를 기록한 초기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에게 제물(祭物)을 바쳐서 얻어내는 혜택이 아닙니다. 종교들은 지킬 것과 바칠 것을 강요합니다. 민속(民俗)종교들도 지키고 바쳐서 사람이 원하는 바를 신(神)으로부터 얻어내는 길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한 그리스도신앙은 지키고 바쳐서 소원성취 하거나, 구원을 얻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게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이 하는 일을 우리가 자유롭게 실천하여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의 생명을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가르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얻어 살면서 아버지로부터 삶의 방식을 배우고, 그 삶을 산다고 믿던 시대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라는 자기의 직업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해 축재(蓄財)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이나 신분을 이용하여 자기의 미래를 자기가 보장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인간의 행복과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습니다. 자캐오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면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보았더니, 문제는 달랐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위해 이웃에게 불의하게 행동하였던 일들도 생각났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기 안에 영접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요한 1,14)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가르친 실천을 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옛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모세의 깨달음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를 지배하던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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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는 밑줄 그은 부분만을 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 나름대로 밑줄을 긋다 보니 남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책 옆에 노트를 함께 준비합니다. 이 노트에 밑줄을 그어야 할 중요하고 좋은 구절을 직접 적고, 또 이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저만의 생각을 적어나갑니다.
이렇게 적다 보니 노트의 양이 점점 불어났고, 이와 함께 하루에 제가 쓰는 글의 양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매일 글을 써야 하는 ‘저’로서는 최적의 방법을 찾은 것이지요.
만약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방식인 ‘밑줄긋기’에 계속 매여 있다면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익숙한 방식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방식에 철저하게 구속되어 있다면 나 자신의 발전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방식만 고수하다 보면 다른 방식을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높이 뛰기를 아실 것입니다. 지금이야 거의 모든 선수가 몸을 뒤로 눕혀서 뛰는 ‘배면뛰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만 해도 배를 땅 쪽으로 향하게 하고 넘는 ‘벨리 롤 오버’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 방법 외에는 높이 뛰기의 기술이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1963년 미국의 딕 포스포리가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높이뛰기를 포기하려다가 ‘거꾸로 뛰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으로 배면뛰기를 시도했고, 이를 통해 올림픽 금메달까지 따게 되었지요. 익숙한 방법이 정답이 아니라, 새로운 나 그리고 더 나아질 수 있는 나를 위해 변화시킬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자캐오의 집에 묵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면서 투덜거리지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익숙한 모습입니다. 동족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는 세리는 매국노인 동시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화폐를 만지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진 죄인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사랑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주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사랑의 확장은 무한대로 펼쳐집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은 어떨까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제약을 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소설가 김연우 작가는 말합니다.
“작가가 되기로 한 다음부터 매일 같이 무언가를 썼으며, 아무것도 써지지 않아 고민인 날은 그 고민에 관해 썼다.”
저 역시 글을 쓰다 보니 글 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쓰다 보니 어느 순간 글 쓰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고,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바라보면 또 다른 이야기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삶이 꽉 막혀서 도저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해결책이 도저히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냥 없다고 단정을 먼저 내렸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고,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바라보십시오.
새로운 길은 내게 늘 대기 중입니다.

예수님은 "내어주는 기쁨 자체"이시다
-전삼용신부-
어떤 구두닦이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 한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와서 소년에게 구두를 닦았습니다. 소년은 구두를 닦으면서 그 승용차를 자꾸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소년은 부자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저 차는 아저씨가 산 거예요?”
부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우리 형이 사주었어.”
그러면서 부자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도 그런 형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그런 형이 되고 싶어요. 제 동생이 다리가 불편해서 걸을 수 없거든요.”
부자 어른은 받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구두닦이 소년은 내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출처: 심종미 수녀님 복음묵상 중]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그 원하는 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향하십니다.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은 변화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캐오는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집에 구원에 내린 것이 아니라 당신을 모신 자캐오에게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은 집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면 구원을 모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 특징이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모신 기쁨으로 가진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다면 그런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만 알던 자캐오가 예수님 때문에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모시는 것과 가진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것과 결국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내어주는 것이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반대로 내어주는 것을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내어주라.’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기쁘게 내어주심’ 자체이십니다.
보슨톤에 가면 켄모어 스퀘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켄모어라고 하는 재봉틀 공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켄모어 회사에서 처음에는 재봉틀만 만들었었는데 지금은 냉장고, 세탁기, 전자제품들을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켄모어 회사에서 재봉틀만 만들어 시판할 때의 일입니다. 외판 사원들 가운데 어느 외판사원은 남들보다 두세 곱절씩 성적이 좋았습니다. 매년 한 번씩 외판 성적이 좋은 사원을 불러서 공로를 치하해 주고 보너스도 주었는데 그 외판사원은 내리 3년 동안 일등을 했습니다.
사장이 그를 불러 좋은 성적을 올리는 성공의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외판사원이 사장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장님,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저는 상품을 팔기 위해 남의 집에 갈 때에는 그 집 문 앞에 서서 제가 결혼했을 때 그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생각해보며 기쁜 얼굴로 그 집 초인종을 누릅니다.”
기쁜 얼굴을 하면 보는 사람도 즐거운 것입니다. 상품 하나를 팔아서 기쁨이 넘쳐흐르는 사람의 상품을 사게 마련인 것입니다. 기쁨이 이미 내가 내어주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니 기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도 전염되어 기쁘게 내어주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으니 내어줄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기쁘게 내어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본성상 기쁘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만약 기쁘게 내어주고 있다면 분명 하느님의 본성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내어줌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것이나 자녀가 성공하는 것 등의 모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빼내어 가난하게 만들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기쁘게 내어주려는 목적의식 없이 예수님께 다가간다면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나를 기쁘게 하여 이웃도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당신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기쁨의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그 기쁨의 힘은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당신 태중의 아드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모셔 기쁘게 재산을 내어주는 자캐오의 모습은 예수님을 잉태하여 당신을 기쁘게 내어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도 내어주는 기쁨을 배우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예수 그리스도만 함께 계시면 굳이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체가 나를 감염시켜 변화시키는 ‘기쁘게 내어주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사제 모임에서 ‘Real ID’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법이 강화되어서 내년부터는 운전면허증으로는 국내선 비행기 탑승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은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국내선 탑승이 가능한데, 미국은 신분을 확인하는 몇 가지 추가 사항을 운전면허증에 등록하나 봅니다. ‘Real ID’를 만들지 않으면 여권을 가지고 다니면 된다고 합니다. 미국에 왔으니 이것도 미국 법을 따라야 합니다. 신부님 한 분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비행기 탑승이 가격에 따라서 좌석에 등급이 정해지듯이, 미국에 살기 위해서도 다양한 등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건 거주자 등록증입니다. 운전을 위해서는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합니다. 관공서에 들어가거나, 비행기 탑승을 위해서는 더 높은 등급의 ‘Real ID’가 있어야 합니다. 외국인은 여권이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국가 간에는 방문하면서 격식과 예절이 있을 겁니다. 대통령이 오는 경우, 국회의원이 오는 경우, 정치인이 오는 경우, 기업인이 오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대통령이 직접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도로를 통제하는 때도 있고, 만찬을 하는 때도 있을 겁니다. 제가 뉴욕에 왔을 때는 전임 신부님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저도 시간이 허락되면 찾아오는 손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려 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능력, 재산, 지위, 업적에 따라서 자리가 정해지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며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사랑받는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의 조건을 ‘산상설교’에서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와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가득할 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볼 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Real ID’를 받을 자격이 있을 겁니다.
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느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지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는 회개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구체적으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비록 죄를 지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고, 반지를 끼워 줍니다. 회개한 아들의 잘못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면 회개하면 됩니다.
둘째는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말로는 회개했다고 하면서 행동은 세상의 뜻과 세상의 욕망을 따라간다면 이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게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낸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셋째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었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성인과 성녀는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재물보다 가난을 택하기도 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했고, 오래 살기보다 일찍 죽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회개의 삶을 산다면,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천국을 사는 겁니다.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죄인과 친구 맺기를 원하시는 주님!
-양승국신부-
며칠 전 한 뉴스에 한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맡고 계시는 반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그리 유쾌하지도, 듣기 좋지도 않은 별명들을 일일이 지어놓고 부르셔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원성을 크게 샀더군요.
저라도 존경해마지 않는 담임 선생님께서 제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셨으면 좋을텐테, 유독 내가 싫어하는 별명, 예를 들면 돼지코, 깜생이, 숏다리...이런 별명을 불러주신다면, 기분이 참으로 ‘거시기’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드는 생각 한 가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준다는 표현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친교의 다리를 놓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당시 교육자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십시오. 왜냐하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그 자체로 아주 좋은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전 세계 살레시오 교육 현장에서는 신학기만 되면 살레시안들이 아이들 이름 외운다고 ‘쌩고생’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 복음의 첫번째 가는 조연 배우인 자캐오 역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던지던 호칭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할아버지께서 공들여 지어주신 ‘자캐오’라는 번듯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캐오라는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들 그를 향해 참으로 듣기 싫은 별명을 불러댔습니다. ‘매국노’ ‘수전노’ ‘반역자’ ‘배신자’ 그리고 ‘숏다리’
그런데 예리코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돌 무화과나무 위에 숨어있는 자캐오를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사실 자캐오가 그간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웃 동료 인간들에 바란 것은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별명이 아니라 그저 본래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 평범한 이웃들 사이에 끼어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동료 이웃들이 자캐오에게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서글픈 것이었습니다. 쌓아둔 재물은 엄청났지만 자캐오는 사람들 사이에 끼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캐오의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신체적 콤플렉스(작은 키)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철저하게도 세상으로부터 왕따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그는 오로지 돈을 벌고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만 온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예리코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늘어날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자캐오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너무나도 친근하고 다정한 그분의 음성에 자캐오는 지난 모든 상처가 즉시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민과 사랑이 마음이 흠뻑 담긴 예수님의 한 마디에 그가 오랜 세월 쌓아올렸던 세상으로부터의 장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 것입니다.
저는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캐오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처량한 모습의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그의 내면 상태를 파악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을까, 그래서 제대로 한번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잔뜩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몹쓸 구제 불능으로 여기며 이름은 커녕 별의 별 듣기 싫은 별명을 다 불렀습니.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복음 19장 5절)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누군가가, 특별히 주님께서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신 것 하나 만으로 자캐오는 오랜 상처가 그 자리에서 씻은듯이 나았습니다. 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캐오 집 방문을 통해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지니신 사명의 본질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집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죄인에게 다시 한 번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죄인과 친구 맺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께서 오늘 이 아침, 2천 년 전과 똑같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십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요? 결국 구원은 주님의 부르시는 목소리에 응답함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또한 구원은 한 인간이 주님의 현존 앞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함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주님께서 기억해 주셨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경험이 회개의 은총에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이 시간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 싶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키가 작은 자캐오는 군중에 가리워진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곧장 달려가서 길가의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세관장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던 그는 그야말로 부자였고 한자리하는 사람이었으니 예수님을 보기위해 나무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체면을 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상관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자캐오의 인생을 추측해 보면 그는 무척 부유했지만 키기 작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임으로써 키가 작다는 열등감을 상쇄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리사욕을 채웠던 다른 세리들처럼 사람들을 쥐어짰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모을수록 유다인들에게 배척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소외되고 맙니다. 다른 사람을 작게 만들어야 자신이 크다는 것을 믿을 수 있고 자신을 사람들 위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더욱 외로워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스스로 왕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고립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위신 체면 다 버리고 나무위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당하게 될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어날 일에 대해 위축되지 않았으며 다만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장애를 극복해야 했고 그래서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정성이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는 마침내 자캐오를 쳐다보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고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19,8). 하고 말씀 드렸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의 쇄신에 대한 다짐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인정해 주고 보아주었다는 것을 알기에 삶이 바뀐 것입니다. 지금까지 집착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버릴 만큼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아직 깊이 만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캐오처럼 위신 체면 버리고 나무위로 올라가는 노력, 장애를 극복하는 정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을 무시한 은총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면서 스스로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선천적 약점인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체면과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나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에 기꺼이 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 새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완고한 저의 마음을 녹여주십시오.'하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자캐오라는 이름의 뜻을 말씀 드렸었는데 기억 하시나요? ‘즈카르야’(Zechariah)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여겼지만 주님은 그를 구원해야 할 사람으로 기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열정과 노력을 먼저 알아보시고 기억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당신의 귀한 작품으로 기억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기를 희망하며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의 대상으로 기억합니다.
이렇듯 구원의 문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캐오가 주님을 갈망하며 세관장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나무에 올랐듯이 단호한 결단으로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협력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하고 선언하시는 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마태7,7)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캐오의 집에 구원이 내린 것은 주님의 은총과 자캐오의 협력의 결실입니다. 예기치 않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주님께로 향한 나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의 손을 꼭 잡고 일어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자캐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여기서 자캐오가 세관장이었고 또 부자였다는 말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가 세관장이라는 것 때문에 그를 로마제국의 하수인이라고,
즉 민족의 배반자라고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부자였기 때문에 그를 ‘도둑’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정해져 있는 세금보다 돈을 더 걷어서 생활비로 썼는데,
그것이 그 당시의 관례였다고 해도,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세리들을 도둑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캐오는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으니,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캐오의 키가 작았다는 말을, 그의 처지를 상징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는 말도
자캐오와 사람들의 관계를 상징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군중은 자캐오가 자기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밖으로 밀어냈을 것이고, 그래서 자캐오는 사람들 속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서 떨어져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상황이 그를 더욱 외롭고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고,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사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됩니다.
물론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아무런 의식도 없이 살겠지만......
조금이라도 하느님을 의식하고,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고,
또 조금이라도 심판을 두려워한다면,
마음 편하게 살 수는 없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쓰는 자캐오의 모습은
그런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9,5-7).”
이 상황을 겉으로만 보면 자캐오가 예수님을 초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초대하신 상황입니다.
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묵는 것으로만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그 죄인을 당신의 품에 머무르게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고, ‘나’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로 바꿀 수 있는데,
이 말은,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또는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까지는
‘기쁨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얻으려면 자캐오처럼 기쁘게 응답해야 합니다.
응답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8-10)”
아마도 자캐오는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음식을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 또는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자캐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도들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던 사람들도(루카 18,36) 있었을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믿고 회개하게 되었을 것이고,
회개를 행동으로 실천하겠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자캐오가 자신의 결심을 나타낸 말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를 향해서 한 말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을 표현 그대로만 보면 횡령을 안 했을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데,
횡령을 했을 가능성과 안 했을 가능성이 반반인 것은 아니고,
그 자신이 횡령을 했을 가능성 쪽에 훨씬 더 무게를 둔 말입니다.
지금 자캐오는 “횡령을 한 적이 없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악의적으로 횡령을 한 기억은 없지만 양심이 편하지 않은 상태”로,
또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서(관례대로 행동하면서),
특별한 죄의식 없이 했던 일들이지만,
양심은 편하지 않은 상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은 없는데 양심이 불편하다면, 우리는 기억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양심이 불편하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죄를 짓고서도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마음 편하게 잘 살겠지만,
자캐오의 경우에는 양심이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자캐오가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의 반을 주겠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한 것은,
“마지막 한 닢까지”(루카 12,59) 철저하게 갚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회개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회개와 보속을 끝내면 안 됩니다.
주님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 라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언제 끝낼 수 있나? 저 세상에 도착할 때까지입니다.
회개와 보속이 부족한 사람은 연옥으로 갈 것이고,
완전하게 실행한 사람은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조욱현신부-
제1독서: 지혜 11,22-12,2: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11,26)이시라고 독서는 정의하고 있다. 이 ‘생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육체적인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달아드는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라면 영적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비와 사랑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참으시고, 당신의 분노를 억제하시며 달래신다(11,15-21). 그분의 기쁨은 ‘생명’을 널리 베풀어주시는 데 있다.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죄인들을 벌하고자 하지 않으신다. 사실 ‘생명’이라는 것은, ‘살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죄인들에게 ‘악에서 벗어나 주님을 믿게 할’(12,2) 시간과 기회를 제공할 때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의 이야기는 이러한 ‘생명’의 풍요로움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예리고는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 남동쪽에 위치한 나라들과 가까이 있는 국경도시였기에 세관원들이 잘 살 수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돈 많은 세관장’(2절)으로 자캐오를 소개하고 있다. 루가가 자캐오를 부자로 소개하는 것은 물론 당시의 세리들이 치부를 하여 잘 살았기 때문에 부자라고 소개를 하지만은,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보다 조금 앞에 ‘부자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재물에 매달렸던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했다(18,18-23).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18,25)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캐오에게서는 ‘어려운 일’ 아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18,27 참조)이 일어나고 있음을 루가는 강조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즉 ‘회개하기만 하면’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아무도 당신의 나라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신다. 이 ‘회개’의 과정이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에 의해 자캐오의 마음속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나자렛의 예언자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소문을 통해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을 가졌고, 자신이 키가 작기 때문에(3절)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일 등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캐오가 사회적 계급적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완전하게 자기 쇄신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도움을 바로 예수께서 주신다. 예수께서는 자캐오의 원을 아시고 그를 불러 내려오라고 하시며 그 집에 머물겠노라고 하신다. 그러자 세리 자캐오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6절).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기쁜 마음’과 세리에 대한 적개심이 담긴 마음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다”(7절). 복음에는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먹고 머신다’고 비난한다(루가 5,30; 15,2). 그러나 그 경우에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중들이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군중들에게 있어서는 그가 부자였다는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독점하려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승부의 대상이 아니시다.
이제 그리스도의 자비의 행위를 체험한 자캐오의 마음속에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예수께 말씀드린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8절). 우리는 이렇게 아주 뒤바뀐 상황을 맞고 있다. 인색하고 이기주의적이고 착취자였던 한 인간이 일순간 돈과 자기 자신을 떠나고 있음을 본다. 지금 그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만이 들어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9절)라고 선언하셨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부르심의 대상이며 회개하고 믿을 때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자캐오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변화하려는 확고한 의지 때문에 그를 죄인이라고 배척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10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어떤 체계를 미리 세워놓으시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구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에게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든 세리든, 가난한 이든 부자이든, 히브리인이든 로마인이든 상관이 없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을 여러 계층으로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을 받는 자, 선한 이와 악한 이 등으로 갈라놓으려 한다. 어떤 때는 복음을 팔아가며 서로를 거스르고 있다. 폭력까지도 동원되기도 한다.
자캐오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매우 느리고 고달프지만 ‘내적 회개’의 길을 추구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 길을 통해서만이 압박자는 압박자이기를 그치고 피압박자도 증오의 대상인 압박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불행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의한 상황에 운명적으로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복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의 힘에 의해 그 불의한 상황을 쳐부수라는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 기다림’의 분위기 속에서 살려고 한다면 최고의 사랑과 자기 쇄신의 의지를 실현시켜나가고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주님에게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2데살 1,12). 항상 하느님께로의 내적인 회개를 통하여, 그분이 베푸시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 5)
-한상우신부-
하느님
사랑 없이는
내려올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랑의 도움 없이는
부여잡고 있는 것을
놓고 아래로
내려올 수 없습니다.
내려옴은
사랑의 기쁜
체험입니다.
내려옴이
오히려 역설적인
감사와 존중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물음에
내려옴이라는
아름다운 답을
주십니다.
내려옴이
새롭게 시작하는
은총의 삶입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을
발견하게됩니다.
자캐오는
삶의 한복판에서
내려옴을 통해
회개를 체험합니다.
내려옴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고
하느님께 자신의
두려움과 열등감까지
나누고 봉헌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해
있는 삶은
내려오는 나눔이며
기쁨이며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향한
온전한 기쁨이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과 나눔이듯
기쁘게 내려오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신앙의 길은
내려옴의 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은 참 정겹고 아름다운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캐오가 되어 달려 봅시다.
세관장이고 부자인 그는 꽤 많은 걸 소유한 사람이지요. 동족이나 이웃에게 미움과 경멸을 받고는 있지만 누리는 것에 비하면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자칭 정결하다는 이들의 손가락질이 삶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그에게 관심을 끄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자기 같은 이들도 꺼리지 않고 친구가 되어 주신다네요. 그는 예수님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루카 19,4).
그가 작은 키 때문에 군중에 가려진 예수님을 보기 어렵게 되자, 달려가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요. 그만큼 그의 갈망이 컸다는 뜻입니다. 당장 무슨 결심이 선 것은 아니지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를 꼭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아래로 내려오신 분이 땅에서 고개를 들어 한 죄인과 눈을 맞추십니다. 낮은 곳에서 어둡게 살던 한 죄인이 위로 올라가 아래에 계신 분과 시선을 맞춥니다. 위 아래가 반복 교차되다가 한 지점에서 서로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더 올라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내가 더 괜찮아지면, 더 깨끗해지면, 더 거룩해지면, 형편이 더 나아지면 그분과 스스럼없이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요. 그분도 내가 더 정돈되고 말끔해져야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초라하고 엉망인 형편을 보이면 그분이 멀리 도망가 버릴 것 같습니다. 루저, 실패자는 하느님도 외면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헛된 것으로라도 치장을 하고 올라가려 합니다. 그분은 나를 만나러 일찌감치 저 아래, 내 원래 자리로 내려오셨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묵기를 자청하십니다. 자캐오야말로 신이 났지요. 환대는 집 주인이 손님을 기꺼이 기쁘게 맞아 섬기는 덕행인데, 지금 이 순간 집도 없으신 나그네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캐오를 환대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동족에겐 별로 못 받아보던 온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세상의 냉대를 비웃으며 자기 안에 갇혀 살던 자캐오를 세상의 문 앞에서 환대하시는 겁니다. 이제 자캐오는 외적으로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환대해 맞아들이지만 내적으로는 세상의 환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은 영혼이 먼저 깨닫습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 19,6).
그런데 이번엔 사람들이 편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지만 율법을 준수하며 바르게 사는 자기들보다 세관장을 택하시다니, '예수님도 돈을 좋아하시나보군' 투덜거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대는 돈에 대한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개방화된 물신주의 사회입니다만,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캐오를 손가락질해 온 이들은 깊숙히 감춘 부러움과 질투의 숨은 욕망을 율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정당화했을지도 모릅니다. 죄인인데다 부자이기까지 한 자캐오와 그의 집에 묵으시는 예수님이 그들 내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만 것이지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사람들의 시끄러운 내면이 들렸을까요? 자캐오가 예수님께 먼저 제 결심을 밝힙니다. 누가 감히 먼저 제시할 수도 없는 통 큰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갈망, 그분을 향해 달리고 오른 여정, 그분과의 눈맞춤, 그분의 부르심과 앞지른 환대가 그의 영혼 안에서 새창조를 이루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지혜 11,26-12,1).
죄인이라 내쳐진 자캐오를 소중히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의 안에 잠재된, 아직 선하고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지 못한 주님 불멸의 영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냉대와 소외, 비아냥거림에 익숙한 자캐오는 예수님의 환대로 제 본래 모습, 하느님의 모상성을 되찾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2테살 1,11).
자캐오는 이제 자신 안에 심겨진 부르심을 그분의 힘으로 완성해 가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한 사람의 회심이 가족 모두, 집안 전체를 구원합니다. 죄의 연대성을 넘어서는 구원의 연대성입니다. 자캐오의 결심은 자기 영혼과 집안 전체는 물론 자선의 수혜자들에게도 구원이 될 것입니다. 자캐오의 통 큰 결심에 이은 예수님의 통 큰 구원 선언은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는 말씀에 기인합니다.
구원은 앞질러 달려가 오른 저 높은 곳에서가 아니라, 다시 내려와 땅을 딛고 선 내 삶의 자리에서, 곧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캐오 회심의 실마리는 영 새삼스런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일상에서 아우성치던 소음 중에 들어 있던 것이었지요.
어둠 속에 머물던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눈맞춤이 그 영혼 속에 파묻혀 있던 하느님 모상성을 흔들어 깨웁니다. 소중히 여겨 주며 세상의 품으로 맞아 들인 환대가 얼마나 크고 광대한 선의 파급으로 이어지는지 오늘의 흥미진진한 복음의 대목은 보여 줍니다.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직도 더 오를 궁리, 더 나아질 기회를 찾아 달리고 있다면 이 말씀에 좀 더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 이대로도 좋다고 하십니다. 우리 회심과 구원의 열쇠는 이미 우리 안에, 우리 존재와 역사 안에 다 들어 있답니다.

죄와 자비
-김찬선신부-
어제 위령의 날을 지내고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을 때까지 제 마음 안에서
떠올라 계속 맴도는 것이 저의 죄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제 아침 성무일도 첫 번째 시편이 그 유명한 <미세세레>
곧 '하느님 자비하시니'로 시작되는 다윗의 시편 51편이었기 때문이었고,
오늘 읽은 지혜서의 독서도 하느님 자비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도 그 유명한 자캐오의 얘기이고
죄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회개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얘기인데
이 얘기를 읽으면서는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의 제 나이와 비슷할까 생각도 해봤고,
세관원이 아니라 세관장인 걸 보면 결코 젊지 않았을 텐데 일생 모은 것을
선뜻 다 내놓게 하고 회개케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젊었을 때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했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죄를 지어도 죄가 보이기보다는 돈만 보였을 텐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 죄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회개하게 된 걸까요?
사실 젊었을 때는 앞날이 구만리여서 그저 사는 데 급급하지만
나이를 먹게 되면 앞날은 백 리도 안 되고 죽을 날이 가깝기에
늘 죽음을 앞에 두고 살게 되고 죽음 앞에서 죄를 보게 되지요.
그리고 이때 신앙인은 죽음 앞에서 하느님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 앞에 중요한 문제랄까 과제가 놓이게 됩니다.
곧 나의 죄를 볼 것인가, 하느님의 자비를 볼 것인가?
신앙인이라면 둘 다 봐야지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을 보지만 자비는 보지 못하고 죄만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사실 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자비의 하느님을 체험치 못한 사람은
하느님이 히솝의 채로서 내 죄를 씻어주는 분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소심증 환자처럼 젊을 때의 죄를 성사 때마다 보고 또 보는 분이 있지요.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시라고 얘기하고,
독서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이유가 바로 하느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흔히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당신이 만드셨기 때문에 싫어하실 리 없다는 것이며,
뜻하시는 대로 만드실 수 있기에 더더욱 싫어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만드신 것을 보고 매번 좋아하셨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처럼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자기가 만든 것에
불만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도공이 기껏 만들고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도자기를 깨는 것처럼 자기가 만든 것을 싫어하고 파괴할 수 있지만
하느님은 당신 뜻대로 다 하실 수 있기에 그러실 리가 없고
당신 뜻대로 된 피조물을 좋아하시고 더 나아가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다만 인간만은 당신 뜻대로 만드셨지만 인간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기에 하느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을 수도 있고 하느님을 사랑치 않고
떠날 수도 있는데 하느님은 자유로 떠난 인간이 자유로 돌아오길 바라시고
더러워진 인간을 씻어주게 되길 바라시고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참 사랑이고 이것이 인간과 하느님의 차이입니다.
더럽다고 남의 새끼는 차버리는 인간도 제 새끼는 씻어주듯
인간은 더럽다고 버리는데 하느님은 더럽기에 씻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인간이 남이지만 하느님께는 남이 아니라
당신께 돌아와야 할 자녀이기에 주님께서는 오늘 스스로 집 나간 놈을
당신이 잃었다고 하시며 찾으러 오셨다고 그리고 되찾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내 앞에 받쳐 들고 돌아와 히솝의 채로
씻어 달라고 하는 것뿐임을 알고 오늘 그리 하면 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0월 30일 연중 제31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