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일 목요일 모든 성인 대축일
2019년 11월 1일 목요일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별도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이 축일은 609년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5월 13일에 지내던 이 축일을 9세기 중엽 오늘날의 11월 1일로 변경하였다. 교회는 이날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지상의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간의 연대성도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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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ㄴ)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큰 환난을 겪어 내고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한 큰 무리를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한다고 말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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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성인들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참행복 선언은 누가 그러한 성인이 될 수 있는지, 누가 이미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인지를 알려 줍니다.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철저히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느님의 뜻이 거부되는 상황을 슬퍼하는 사람,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들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온유한 사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곧 아버지의 의로움이 드러나기를 갈망하는 사람, 하느님께 자비를 입은 것처럼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사람, 몸과 마음을 주님 법으로 깨끗이 하며, 하느님과 인간, 이웃과 이웃의 깨진 관계를 다시금 잇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특히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바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아니 이미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입니다.제1독서에서 봉독한 요한 묵시록은 하늘 나라를 차지하여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이들의 수가 144,000명이라고 말합니다. 144,000은 구약의 이스라엘(열두 부족)과 신약의 이스라엘(열두 사도)에, 구원 역사 안에 현존하시면서 구원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의 기간인 1,000을 곱하여 나온 수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수한 성도들을 상징하는 수입니다.이렇게 되면 성인이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인 말고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가 말하듯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하나하나가 성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직접 ‘성도들’, 곧 ‘성인들’이라고 부릅니다.그러나 지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성도들, 성인들이라 불리면서도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참행복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인들처럼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미 성인 반열에 드신 모든 성인에게 다시 한번 도움을 간청합시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 치타의 먹잇감으로 톰슨가젤이 있습니다. 이 동물의 속력은 시속 80Km입니다. 그렇다면 이 톰슨가젤을 사냥하는데 성공률은 얼마나 될까요? 뛰어난 기술과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으니 거의 100%에 육박할 것 같지만,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기술과 조건 모두 앞서는데 말입니다.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톰슨가젤은 살기 위해서 죽어라 뜁니다. 이것이 기술과 조건을 뛰어넘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상황과 조건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그냥 포기한다면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죽어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또 다른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성인들은 이 세상 삶 안에서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매여 살면서,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언젠가는 떠날 유한한 이 세상 삶보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늘 나라의 삶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하늘 나라의 삶 안에 우리가 모두 살아가기를 원하시기에 ‘행복선언’을 선포하십니다. 이 행복선언은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하늘 나라에 맞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대한 다른 이들이 내리는 어떤 보상보다도 뛰어납니다. 진정으로 “행복하여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요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때를 떠올리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기죄 건수가 매년 24만 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기로 인한 피해액은 매년 3조 원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사기 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기죄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기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범죄를 통해 얻는 수익이 그로 인해 치르게 될 비용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바로 기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기준을 따르다 보니, 내 양심을 팔아먹고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죄를 범한 사람의 재범률이 77%에 이른다고 합니다. 10명 중 8명은 다시 사기를 친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유혹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인 만족이 전부일까요? 남들보다 재산이 많이 있다 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내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에 갈 때,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조재형신부-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11월의 11은 기찻길과 비슷하게 생겼고, 다리와 비슷하게 생겼고, 젓가락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11월 한 달은 나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께로 안내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11월 한 달은 교만, 이기심, 시기, 분노, 미움을 털어버리고 친절, 겸손, 인내, 사랑, 희망, 믿음의 동네로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정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가 있습니다. 제단 양옆에는 103위 순교 성인의 유리화가 있고, 제단 앞의 2층 벽에는 103위 성인 모두를 담은 유리화가 있습니다. 보통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빛이 들어오면 성인들이 성당을 감싸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당에 오는 모든 사람을 위해 성인들이 기도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인들께서 성당을 지켜 주는 느낌도 받습니다. 순교성인들께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드러나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숭고한 삶과 희생 그리고 순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모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했던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분들만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한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본당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신앙의 향기를 전해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본당에는 지체를 이루는 봉사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은 그런 건물과 조직, 봉사자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기에, 주보를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기에, 나눔과 희생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들이 나의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의 세포들이 늘 새롭게 태어나듯이, 우리의 생각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낡은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두려움, 좌절, 원망, 미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밝게 비추는 신앙의 별이 되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피와 땀을 흘려서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의 별이 되는 방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을 하다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전에 갈릴래아 호수로 성지순례를 하였었습니다. 행복선언 성당에서 기도한 후에 나눔을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행복선언’을 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은 진지하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들려주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녀 때문에, 건강 때문에, 직장 때문에, 친구 때문에, 돈 때문에, 가족 문제로 걱정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행복선언 성당에 있지만, 마음은 행복하지 못했던 분도 있었습니다. 몸은 행복선언 성당에 있으면서 마음은 다른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들려주고 싶은 ‘행복선언’은 무엇인가요?
저는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노래로 만든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성가를 좋아합니다. 저는 성가를 부르면서 저의 행복선언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오 하느님은 불변이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행복은 장소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은 삶이며,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낙엽 지는 가을 뒤엔 반드시 눈 내리는 겨울이 오듯이 우리의 삶도 반드시 어떤 종점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신앙의 별이 되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신앙을 물려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저 위에서 다시 만납시다!
-양승국신부-
은혜롭게도 성인성녀들의 삶과 죽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지들을 방문하면서, 냉랭하게 식어버린 우리네 신앙생활에 활력이 더해지기 위해서, 성인성녀들의 생애에 대한 앎과, 그분들의 전구와 통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순례하면서, 초세기 한국 가톨릭 신자들의 교회 설립 및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은 교황님께 눈물어린 편지를 쓰고 또 썼습니다.
그러한 조선 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의 노력에 기꺼이 부응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의 노력이 얼마나 영웅적이었는지를, 또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20대 초중반의 샛파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어딘지도 모르지만, 박해와 죽음 만이 기다리고 있는 머나먼 조선땅 입국을 시도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변장을 하고, 어두운 밤길에 별빛에 의지해서, 뱃길로 육로로, 천신만고 끝에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조선 땅을 밟았지만,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살을 깎는 추위와 굶주림, 박해의 칼날이었습니다.
젊디 젊은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들은 선배 선교사들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조선 선교사 파견이란 말은 백퍼센트 죽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조선의 고위 관리들은 우리를 위한 서슬퍼런 큰 칼들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더없이 환한 얼굴로 "예!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기 위해, 여기 대령했나이다. 기쁘게 조선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선교사 파견 미사가 끝나면, 신부님들은 동료들과 가족친지들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더 이상 지상에서는 만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기에, 다들 깊은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위에서 다시 만납시다!"
파리외방전교회 바로 옆에는, 성모님께서 기적의 메달을 보여주신 침묵의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1806~1876) 수녀님께서 생활하셨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수녀회 본원이 자리잡고 있더군요.
1830년 11월 27일 성모님께서는 카타리나 수련 수녀에게 발현하셔서, 이른바 기적의 메달 모형을 보여주시며, 부탁하십니다.
"이 모형으로 메달을 만들어라. 이 메달을 거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신뢰심을 지닌 사람에게는 한없는 은총이 내릴 것이다."
카타리나 수녀님은 이 특별한 사건을 고해 사제에게 소상히 말씀드렸습니다. 알라델 신부님은 그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면서도, 한 가지 당부를 덧붙였습니다.
"침묵 속에 겸손하게 수련생활을 계속하십시오!"
카타리나 수녀님은 지도 사제와 주교님의 조언에 따라 평생토록 침묵속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순종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물론 발현하신 성모님의 당부를 받들어, 장상들의 허락을 득한 후, 열심히 기적의 메달을 제작해 널리 전했습니다.
카타리나 수녀님은 1876년 선종하시기 불과 몇달 전, 평생에 걸쳐 간직해오셨던 성모님 관련 보고서를 장상 수녀님에게 제출했습니다. 1947년 7월 27일 카타리나 수녀님의 시성 미사를 집전하신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카타리나 수녀님은 침묵의 의무를 철저히 지킴으로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만년에 카타리나 수녀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나타나신 것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선택하신것은 우리가 성모님을 의심할수 없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행복하십시오!
-반영억신부-
교회가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을 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정하권).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는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도 성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사신 분들입니다”(함께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험난한 고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간수하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8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근원을 미래에서 찾아야 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슬퍼함이 행복이 아니라 위로를 받음이 행복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니 행복하고 자비를 입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되니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 큰 행복을 차지할 기회를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행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너희는 행복하다”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성인
-송영진신부-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성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성인이라고 선포해야만 성인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에 맞아들여 주신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내가 어찌 성인이 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1요한 3,2-3).”
여기서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라는 말은, “누구든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기를
바란다면,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예수님을 본받아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라는 뜻인데, 희망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는 행복”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인입니다.
성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글자 그대로 모든 성인들을 공경하는 날인데,
전례력에 들어 있지 않은 성인들을 특별히 더 기억하고 공경하는 날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공경하는 날이고, 그들을 본받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즉 우리도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이 서양에서는 세속적인 축제로 변질되었는데,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흉내 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할로윈 축제는 ‘모든 성인 대축일’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좁은 문’은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
그러나 희망하기만 하고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신학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재산을 아주 많이 바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바칠 것이 동전 두 닢밖에 없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사실 재산을 많이 바치는 것과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뜻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지, 또는 못 들어가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묵시록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시는 목자이신 분이기 때문에,
‘심판’은 한 사람이라도 더 떨어뜨리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합격시켜 주려고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ㅍ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선행입니다.
우리는 그 한 번의 작은 선행 덕분에 지옥으로 가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요한 15,13)만 사랑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작은 사랑도 사랑입니다.
(‘물 한 잔’에 관한 예수님 말씀에는, “사랑 실천에 대한 심판은 사랑의 크기로
따지지 않고, ‘실천했느냐, 안 했느냐?’로만 따진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여러 가지 여건과 능력이 부족해서,
신앙생활이 아주 많이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사랑 실천도 제대로 못한 것만 같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묵주기도를 수십 단, 수백 단 바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짧은 화살기도 한 번 바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런데 둘 중에 누가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들어갈지는 모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고 엄격하고 거창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작은 이들’, 즉 가난하고 못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멸시하고 천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며, 또한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날이다. 아무리 많은 성인을 모시고 그분들을 공경한다 하여도 내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그 성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성인이 되도록 결심하는 날이어야 한다.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산상 설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1절)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고서 그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한다면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세상의 부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하늘 나라는 이미 덕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다. 이렇게 복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고통이 끝남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슬퍼한다.’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죄 때문에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그리고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복음 정신으로 젖은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온유한 이들은 모욕을 하기보다는 모욕을 견디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타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하느님 자녀의 영광에서 오는 자유를 얻으면, 살아있는 온유한 이들의 땅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은 가난도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부를 낳는다. 하느님을 뵙는 것은 우리가 무로 사라지는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해지는 종말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대해 다른 이들이 내리는 어떤 보상보다 뛰어나다. 거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거지임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당신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끊고 믿음과 의로움을 실천하여 쌓는 행실로 하느님 마음에 든 사람을 의미한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본다.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와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느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평화는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말씀 아래 하나 되어 교회의 평화를 지키는 이들이다. 이 평화가 있는 곳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있으며, 다툼이 없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견디는 이들에게는 불안에 떨지 않고 그것을 견디는 은총이 주어진다. 사도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의로움을 위하여 받는 박해의 복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박해는 외국인에게서 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서도 의로움 때문에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1-12절)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나라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걸맞은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 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땅에서 걸림돌에 부딪히면 하늘의 영광을 그것에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 행복한 사람들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하늘나라를 얻는 우리, 즉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결심하고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는 오늘이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 12)
-한상우신부-
삶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모든 성인이
삶이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모든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모든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목적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가야 할 목적지는
정녕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께로
가야할 길을
모두 기쁘게
걸어가셨습니다.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그들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삶에 결코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삶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사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난
이들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깨워주는 모든
성인들을 통해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삶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기쁜
사랑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 12)
삶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모든 성인이
삶이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모든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모든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목적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가야 할 목적지는
정녕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께로
가야할 길을
모두 기쁘게
걸어가셨습니다.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그들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삶에 결코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삶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사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난
이들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깨워주는 모든
성인들을 통해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삶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기쁜
사랑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은 우리 모두의 축일입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기리는 분들은 물론, 이름이 남겨지지 않았지만 주님 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무수한 무명의 성인들도 기억하며 경축하는 날이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니?" 하고 물으십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10).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이 말씀은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알리는 고전적 표현 방식이기도 하지만, 명령형으로도 들리고 감탄형으로도 들립니다. 세상 논리로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행복하라!"고 명하시고 "넌 참 행복하구나!" 감탄하시니,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행복해야 하는 걸까요?
가난하고 슬프고 박해받는데 어떻게 행복할까요?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맨날 지고 사는데, 무너지는 정의 앞에서 속이 타는데, 맨날 퍼주느라 바보 소리 듣고 이용만 당하는데, 두 마음 먹을 줄 몰라 맨날 요모양요꼴로 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러고 살아! 재산도 좀 있고, 슬플 일은 피하고, 큰 소리로 내 권리 찾으면서, 원래 그런 거라며 불의도 슬쩍 넘길 줄도 알고, 자비도 손해 안 볼 만큼만, 이익이 된다면 양다리도 서슴없이, 당장 이익이 안 되면 평화는 무슨..." 하고 있다면 오늘의 말씀은 남의 나라 이야기, 사차원 언어에 불과할 겁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는 별개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지요.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가난 이야기를 하실 때 바리사이들이 비웃습니다(루카 16,14 참조). 아마 지금도 이 복음, 이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질 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지요. 못마땅해 할 수도 있고, 복음 속 부자 청년처럼 결국 슬퍼하며 떠날 수도 있겠지요(마태 19,22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기본이 되는 이 행복 선언은 실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가장 가난해지기로 작정하고 오신 예수님과 함께 인식의 전환, 가치의 전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저 액자 속 이야기로 그치고 말 겁니다.
한편, 현재 가난한 마음으로 슬픔과 의분을 다독이고 있다면, 큰 욕심 없이 착하고 순수하게 살고 있다면, 하느님 손에 전적으로 의탁하며 박해를 견디고 있다면, 내 성공이나 이익보다 온 세상이 두루 평안하고 무탈하길 기원한다면 이 말씀들은 엄청난 축복이고 위로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이 말하듯, 그들은 지금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묵시 7,14) 하는 중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렇게 사는 이들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영원한 생명을 지복직관이라 하지요. 이 지상의 순례 여정 동안 평생 그리던 님, 주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 곁에서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이 행복에 대한 희망은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주어진 삶을 소중히 안고 견디며 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게 된 삶을 감사하며 소박하게 성심껏 살면서도 이 말씀을 남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이 행복한 줄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나친 겸손 또는 완벽주의의 덫에 걸린 탓이지요. 내 가난과 의탁과 온유와 의로움과 자비와 깨끗함이 100%가 아니라서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물러서거나 스스로를 평가절하 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그야말로 "행복하라!"고, "넌 참 행복하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며 던지시는 겁니다. 성찰한답시고 자신을 난도질하고 부족한 부분을 파내느라 우울하고 의기소침하라고, 저의를 깔고 의뭉히 제시하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성인의 날은 무엇 하나 손색 없이 완벽한 성인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을 뿐더러, 완벽한 사람을 성인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항목을 다 갖추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하나라도 얻어 걸리라고 여덟 개나 말씀하셨으니 그 하나라도 겨우 커트라인 걸리듯 걸치기라도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마태 5,12)해야 합니다.
오늘의 대축일은 주님 품 안에서 행복할 자질 하나만 있어도 가슴 쭉 펴고 실컷 행복하라고 펼쳐 주신 대축제의 장입니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죽는 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지금 여기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덕은 덕을 부릅니다. 지금 완성되어 가는 덕이 하나라면 그 하나는 다른 덕을 부르고 또 다른 덕을 키우면서 차츰 조화롭게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모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지요. 우리는 모두 이미 성인이거나, 성인이 될 자질과 역량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우리 영혼과 인격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창세 1,27 참조)은 지워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야, 행복하니?" 하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열고 잠시 침묵해 봅시다. 내 마음이 무어라 답하는지 듣고, 또 주님께서 무어라 하시는지 귀 기울여 봅시다.
행복은, 진심을 다해 말씀드리는데, 결코 세상 가치들 순이 아닙니다.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스펙, 인맥, 명품은 잠시 허영심을 만족시켜주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깊은 내면의 행복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내 인생의 두 주연, "나"와 "주님"의 행복 이야기에 고요히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뭔가 피어날 것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벗님의 본명(세례명) 앞에 거룩할 聖자를 붙여서 불러보십시오.

행복은 행운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김찬선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작년에는 성인 의지에 대한 강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행복 의지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성인이라는 뜻으로 오늘 복음이 얘기하기에
성인 의지나 행복 의지가 같은 말이긴 하지만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행복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니.
과일을 먹으라고 할 때 저는 종종 싫다고 합니다.
그러면 권하는 분들 대다수가 과일을 싫어하냐고 묻거나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으시는데 물론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는다고 답하지요.
그런데 왜 안 먹느냐고 당연히 또 물으시면 귀찮아서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까서 먹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고,
귀찮은 것을 무릅쓸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그만큼 먹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정말 고프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옛날 배고플 때는 먹을 수만 없으면 그러니까 독만 없으면 뭐든지 먹었지요.
그래서 까마중이니 꽈리니 메니 지금 젊은이들은 뭔지도 모를 것들을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마찬가지로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고통을 무릅쓰면서까지 행복하고자 하는 행복의지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에 연결시키면 행복하기를 원하기는 하나
가난하면서까지 행복하고는 싶지 않고,
울거나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서까지 행복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지구를 떠나서 저 하늘에서 차지하는 행복은 싫습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의 경우처럼 이 땅에서 내가 가진 것 하나도 잃지 앟고
그대로 소유하면서 영원히 살고 싶지 하느님 나라 행복은 원치 않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행복한 사람이 성인이고,성인은 행복한 사람인데
부자청년의 경우처럼 하느님 나라 행복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행복하기는 바라지만 성인은 되길 원치 않고,
축복을 받기 원하나 축성되기는 싫은 것이며,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는 싶으나
마음속에 주님 상처를 깊이 새기며 사는 것은 원치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축복은 받기 원하나 축성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축복의 표시로 강복이나 안수를 청하는 신자가 많잖아요?
어떤 때 모임을 끝내고 끝기도와 함께 그냥 가려고 하면
축복을 해주고 가셔야 한다고 붙잡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이유는 축복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축성되었기 때문이지요.더 정확히 얘기하면
축복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축성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행복하기를 바라나 행복의지가 없는 것이나,
행복하기를 바라나 성인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나,
축복받기를 원하나 축성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열매를 먹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마치 나무 밑에 누워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입 벌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행복을 행운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행복은 행운이 아니라 축성되어 마리아나 성인들처럼 되는 것임을
오늘 우리는 깨달음으로 참 행복의 의지를 북돋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일 화요일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