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10. 30. 19:45

2019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루살렘아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가 13,31-35)

 

 Jerusalem, Jerusalem,
you who kill the prophets 
and stone those sent to you,
how many times I yearned to gather your children together
as a hen gathers her brood under her wings,
but you were unwill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냐며,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당신의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셔야 할 일을 설명하시며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비록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 해도, 피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셨던 일, 곧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쳐 주시는 일을 계속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결코 사람들의 손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으로, 하느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에 마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여정 속에서 그렇게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정이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끝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었지만, 동시에 하느님께 불순명과 배반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과 왕궁이 있는 곳, 곧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께서 뽑으신 임금이 머무르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에서 중심적인 장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았기에 결국 버려지리라는 선언을 듣습니다.그렇다고 해도 하느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하여 복음이 이스라엘 밖으로 전해져 온 세상 끝까지 전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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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홈쇼핑을 보면 종종 건강식품 선전을 볼 수 있습니다. 우연히 이 광고를 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은 분명한데 왜 좋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식물이 주는 암 예방 천연 항산화제인 파이토케미컬이 함유되어 있다는 제품, 아토피에 너무 좋으며 40대 여성에게 필요한 리놀렌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광고하는 제품도 있습니다. 또 면역기능을 도와주는 토코페롤이 있다는 제품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제품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파이토케미컬, 리놀렌산, 토코페롤... 모두 낯선 단어입니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파이토케미컬은 식물 속의 물질을, 리놀렌산은 필수지방산을, 토코페롤은 비타민 E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몸에 좋은 성분이 특별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상에서 먹는 음식만으로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성분이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광고를 해야 판매가 잘 되는 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더욱더 난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건강식품의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종류가 많습니다. 특히 건강식품에 대해서는 과학적 검증 절차가 없어도 등록할 수 있기에 효과에 대해서는 의심을 먼저 해봐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은 어렵게 이야기를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게끔 하는 모습입니다. 쉬운 말로는 상대를 유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최대한 쉽게 이야기해서 스스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못 알아들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들어야 더욱더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알아듣기 쉬워서 그럴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실 정도로 앞날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고,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의 사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계속해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당신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모르고 믿는 것은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그러나 알고 믿게 될 때는 어떤 장애물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이 의도를 기억하면서 쉽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도록 노력하고 또 굳게 믿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인정하면 그 다음에는 상대를 인정하기 쉬워진다(네모토 히로유키).



완벽한 건망증

한 병원에 환자가 찾아와서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합니다.

“의사 선생님, 제 기억력이 완전히 나가버렸어요. 아내 이름도 잊어버렸고, 애들 이름도 잊어버렸고, 직장이 어딘지도 잊어버렸어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의사의 얼굴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자, 진정하세요. 얼마 동안이나 이런 증세가 있었지요?”

그러자 환자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되묻습니다.

“무슨 증세 말입니까?”

완전히 잊어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힘들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조금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때 비로소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지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중간하게 알면 의혹만 커질 뿐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게 되면 주님 안에서의 커다란 기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처럼 완전히 모르면 더 좋지 않겠냐고요?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10월의 첫날을 여는 인사를 했는데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날 인사를 합니다. 1년 중에 오늘이 가장 바쁜 가수가 있습니다. ‘잊혀진 계절의 가수 이용입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가사가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게 했나 봅니다. 1982년에 발표되었으니 37년 전의 노래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28년 사제생활하면서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첫 부임지에서의 설렘이 있었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도 있었고, 자신 있게 갔지만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주파수가 맞으면 방송이 들리듯이, 같은 주파수를 공유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컴퓨터 통신이 등장하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동호회, 동아리 모임도 있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큰일을 맡아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수호천사가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 것 같았는데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 늘 있었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먼발치에서 응원해 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파수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제 곁에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음의 문만 열면 이웃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는 같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2달이 넘었습니다. 분명 넘어야 할 산이 있을 겁니다. 생각지 못한 일이 다가올 겁니다. 그러나 이곳에도 주파수가 맞는 분이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주파수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습니다. 믿고, 마음의 문만 열면 언제든지 느끼고 들을 수 있습니다.

 

순교자 축일에 주로 듣는 오늘 로마서의 말씀은 10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제게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주고 있습니다. 신발 끈을 매고, 주어진 길을 가도록 독려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주파수, 나눔의 주파수를 이웃에게 보내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자비와 사랑의 주파수, 용서와 온유함의 주파수를 받으면 어떨까요?


한 마리 여우

-반영억신부-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가 9,7이하). 그는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간교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랍비문학에서 여우는 간교함의 상징입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가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가12,50).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포기에 직면하게 될 때에도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가야할 길을 끝까지 가야합니다. 가야할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일지라도 가야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 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가13,34).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이요,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은 아닌지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받아들여 봅시다

-김기현신부-


제가 주로 시골이나 변방에 있다 보니, 주변 시선이 ‘시간도 많고 할 일도 없겠지..’라는 것이 많은데요. 실제로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하기 나름일 텐데요. 이러저러한 설명을 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어떤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설명해도 별로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아서 보통은 이런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는 노는 게 일이야~ 잘 놀고 있어~’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습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말은 논다고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그에 반하는 모습을 강요하곤 합니다. ‘젊은 나이에 놀면 되나 무엇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기도 안에서 더 깊어지던, 언어를 더 많이 공부하던,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다른 현장의 모습들을 봐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들로 스스로를 더 바쁘게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부하는 시간도 고등학생처럼 타이트하게 짜놓고, 틈이 나면 다른 곳에 가서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모임에 참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원형 탈모도 오고, 태어나서 처음 만나보는 몸무게도 찍어 보았습니다. 먹으면 다른 잡생각이 없어져서 인스턴트 식품들을 많이 먹었었거든요. 그리고 어느 날 머리에 손을 대어 보았는데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조금 뜨겁습니다. 또 쉬어도 잘 쉰 것 같지 않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진증후군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과 의사의 영상을 몇 개 찾아보았는데요. 그분이 뇌를 좀 쉬게 해 줘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분이 말하는 대로 하려고 하는 일을 절반으로 줄이고, 뇌가 쉴 수 있는 시간도 적극적으로 마련해 보았습니다.

 

원래 산책하는 동안에나 이동할 때도 말을 못한다는 불안감이 있어서 늘 헤드폰을 끼고 언어공부를 했었는데 헤드폰도 내려놓고, 하고자 하는 공부의 양도 반으로 줄이고, 특별히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억지로 찾아가서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는데요.

 

다른 고민자의 영상에 답하는 다른 영상을 보면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담 내용을 보내온 사람이 당시에 비교적 안정적인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하고.. 그런데 그러한 것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권태기인지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의사분이 이런저런 대답을 하는데, 그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분의 상황은 행복한 시기인데 그거에 익숙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또 특별한 고민거리가 없는 상황인데 인생에 있어서 그런 시기가 그리 많지 않으니 그 시기를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이곳의 상황이 살아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경제적 어려움이나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감바구니에 일을 담으려고 하는 느낌보다는 여유로운 시기를 조금 받아들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어제 일기를 쓰는데 ‘여기에서 주님이 보여주시려는 행복이 그런 게 아닐까..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 안에서 현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보라고 하시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에서 잔잔한 행복의 느낌이 올라왔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고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때로 우리도 그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모습의 예수님이 아니어서 거부하고 밀어내고 있는 모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일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그분이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직도 집에 모기가 있다.

밤에 자는데 모기가 윙윙 거리다가 이마에 앉아서,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때렸는데 잡았다.

그래서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도 모기가 윙윙거리다가 얼굴에 앉았는데,

몇 번 얼굴을 때리다가

모기는 못 잡고 맞아서 잠만 깼다...


오늘도 내일도 

-송영진신부-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헤로데에게 전하라고 시키신 것을 보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헤로데가 보낸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말은 충고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헤로데가 당신을 죽일 것이오.”
아마도 헤로데는 예수님의 활동이
자기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세례자 요한을 죽인 뒤에도 백성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까
자신감을 얻어서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은 헤로데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여우’로 표현하신 것은,
헤로데가 교활하고 간사한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의 협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께서 하시는 일을
헤로데 따위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라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당신의 활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라는 말씀은,
적대 세력이 아무리 방해해도 하느님의 계획은 차질 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또 그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가야 한다.’ 라는 말은 ‘의무’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헤로데 같은 인간들이 일시적으로 방해할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암시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모든 예언자의 활동과 삶과 죽음은
예언자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또는 추방하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로데의 음모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인간들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이 막혀서 실패한 일도 아닙니다.
그 일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일이고,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왜 꼭 그런 식으로 해야만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어떻든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라는 말씀은,
교회와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인류 구원 사업은
21세기에도, 22세기에도, 그다음 세기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종말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악의 세력은, 또 안 믿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은, 즉 하느님의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생을 마치게 될지는 몰라도, ‘신앙생활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계속 해야 합니다.
물론 신앙 여정이 항상 쉽고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어려울 때도 많고, 힘들 때도 많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보는 사람입니다.
중간 경유지가 아니라 최종 목적지만 보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곳으로는 절대로 갈 수 없다.” 라고
단단히 마음먹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3,34-35).”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헤로데 같은 자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헤로데 같은 자들을 향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헤로데 같은 자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복음을 배척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안 받는 사람들은 못 받게 됩니다.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여기서 “...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나의 재림 때가 되어서야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심판 때가 되어서야 나를 찾을 것이고,
살려달라고 나에게 애원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찾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살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3,31-35: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했건만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31). 바리사이파 사람이 와서 이렇게 일러드린 것은 어제 복음 말씀에서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올바로 살지 않아 하느님 나라를 빼앗기고 하느님 나라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셔서 예수님께 증오의 불을 댕겼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르게 되면 지도자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님께 떠나라고 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헤로데를 두고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32) 그 여우는 자기 자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젖먹이들을 학살했다. 젖먹이로 태어나신 말씀 대신 죄 없는 젖먹이들을 죽였던 것이다. 그 아기들은 입으로 주님을 고백할 수 있기도 전에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바친 맏물들이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3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까봐 염려했던 일을 하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언제 어떻게 육신의 죽음을 겪으실 것인지 다 알고 계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33)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많은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죄 많은 도시임을 밝히시면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도 빼앗기고,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져 자기들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가벼이 여긴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34-35)

 

그분은 모세를 시켜 그들을 가르치셨고, 바른 몸가짐과 칭송받을 만한 삶의 인도자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그림자이지만 그 안에는 참된 경배의 예형이 들어있다. 그분은 거룩한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타이르셨다. 그렇게 당신 날개 아래에서 당신의 권능으로 지켜 주려 했으나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축복을 잃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35)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당신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주님을 우리에게서 밀어내지 않고 그분의 뜻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 33)

-한상우신부-

죽음도 삶도
십자가의 시간입니다.

비참함과 영광은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자신이
중심이 되는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 중심이 되시는
은총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시간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는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우리의 죄를
보게됩니다.

섬김도 예언도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없이는
오늘도 내일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주님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 삶의
가장 깊고
가장 아픈 곳을
십자가로
품어 주십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십자가가 우리의
내면을 우리의
거룩한 성전까지
정화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주님의 비장한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시작부터 긴박한 위기감이 감돕니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한 이들이 "바리사이 몇 사람"이라고 하네요. 그들은 예수님을 경계하고 죽이려 "독한 앙심"(루카 11,53 참조)까지 품은 이들인데 갑자기 왜 이런 친절을 보이는 걸까요? 바리사이 중 니코데모처럼 예수님께 호의적인 이가 없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이 전갈이 전적으로 예수님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호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분이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속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0).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다가올 파스카 제사의 맛배기도 못 되는 이 정도 위협으로 백성을 위한 구마와 치유와 복음 선포의 소명이 중단될 수 없으니까요.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그 이유는 이처럼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야 할 길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겁니다. 하느님 현존의 장소인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구심점입니다. 그들 정체성의 본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곳은 또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선별해 박해하고 살해해 온 어둠의 힘이 기승을 부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루카 13,34)
예수님의 안타까운 탄식이 들립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인 듯 의인화되어 이름 불리웁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사람을 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는 저주가 아니라 용서가 향할 뿐입니다(루카 23,34 참조).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이름과 권력과 영광에 기대어 만행을 저지른 이들을 직접 부르시지 않고, 그들 모두가 속한 예루살렘을 빌어 그들의 죄악을 일깨우십니다. 이 순간 그들의 음모와 폭력과 악행의 그림자는 거룩해야 할 하느님 도성 예루살렘에게 드리워집니다. 슬프게도 인간의 죄는 도성에 부여된 영광의 이름을 바꾸어 버릴만큼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의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로마 8,36).
그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신의 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냐며 나열한 험한 단어들,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로마 8,35) 등만 봐도 사도의 마음이 읽힙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이 말씀을 내놓는 순간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온전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심장이 되고 그분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어떠한 위협이나 배척도, 죽음까지도 예수님을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그리고 순종과 소명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담담히 이 말씀을 완성할 것입니다.

세례받은 이로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아가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약하고 부족해서 이처럼 비장하고 결연한 말씀 앞에 서면 부담스럽고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고 싶은 하느님과 우리와의 사랑은 우리 쪽에만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지켜지도록, 우리가 당신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느님이 더 노심초사 애쓰고 계십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주님,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돌보소서 ... 저는 가련하고 불쌍한 몸 마음속에는 구멍이 뚫렸나이다"(화답송).
이처럼 구멍 뚫리고 가련하고 불쌍한 우리에게 맞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를 겸손히 청합시다. 당신과 우리의 사랑이 깨지지 않기를 우리보다 더 열망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에게 꼭 맞는 길이 자명합니다. 그 길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아멘.

주님 사랑의 밖에 있는 나? 
-김찬선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아주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
외부의 어떤 것도 주님 사랑과 나를 갈라놓거나 떼어놓을 수 없지만
내가 주님의 사랑에서 갈라서거나 떨어져나갈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하니 제가 참 슬픕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제가 너무 가여워서 슬픕니다.

지금 생각하면 절대로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빵이라고 하면서 당신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시자 사람들이 떠나가 버리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가겠냐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두고 자기가 어디 가겠냐고 할 때의 그 심정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버리고 떠났었지요.
그러니 저도 얼마든지 주님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박해상황이 아닌 지금 상황에서 
제가 주님을 떠난다면 그것은 진짜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사랑에 머물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것도 다른 누구의 사랑에 머무느라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음이 아니라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고 근심 걱정에 머문다거나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고 미움에 사로잡혀 있거나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재미있는 것에 빠져있거나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일에 빠져있거나 하는, 
그런 정도이고,그런 것들일 것입니다.

사실 지금 와서 주님 사랑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님 사랑보다 더 사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부지불식간에 일에 빠지고 재미를 보려고 하는 거지요.

그리고 주님 사랑에 머물 거냐 미움이나 근심 걱정에 머물 거냐? 
이렇게 정식으로 물으면 그 역시 저는 정신을 차리고 
그런 것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사랑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방심을 하고 있을 때에는 부지불식간에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이 맞습니다.
박해나 고통은 우리를 주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고
오히려 우리를 주님 사랑에 매달리게 할 것이며 우리가
  주님께 매달리는 한 주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말하는 거지만 진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때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말씀,
곧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는 
말씀처럼 외부의 적은 그 어떤 것도 주님 사랑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지만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고 그래서 주님 사랑을 힘입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도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주님 사랑의 밖에 있는 자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