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10. 28. 18:56

2019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가 부풀어 올랐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누룩과 같다.

(루가 13,18-21)

 

 “To what shall I compare the Kingdom of God?
It is like yeast that a woman took
and mixed in with three measures of wheat flour
until the whole batch of dough was leave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와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 비유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나 누룩처럼 그 시작이 비록 작을지라도 그 자체가 지닌 역동성 때문에 커다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 역동성은 온전히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속한 것이기에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겨자씨가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것이나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에 사람이 하는 일은, 오로지 씨를 밭에 뿌리고,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집어넣는 일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역동성은 사람이 언제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이루어지지만, 결국 커다란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이 비유의 의미가 이루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삶은 비록 소외된 땅 갈릴래아에서 남들 눈에 크게 띄지 않게 조용히 시작되었지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겨자 열매처럼 생기와 활력을 주고,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겨자 나무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였습니다.그 의미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 나라가 지금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있고, 또 자라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지속되고 그 완성에 도달할 때를 기다립니다. 그 완성이 언제 올지 안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역동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작용하고 있으며, 결국 커다란 결과를 만들어 내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대학교 안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지나가는 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더 많은 학생이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아마 쓰러져 있는 사람의 상황을 통해서 학생들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상황을 물어보지요. 아파서 쓰러진 것 같은지, 술에 취해서 널브러져 있는 것인지, 혹시 마약 중독자는 아닌지……. 또 깔끔한 옷을 입었는지 아니면 노숙자처럼 보이는지 등을 통해 지나가는 학생들의 태도가 결정될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어느 대학교에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지금 당장 급히 가서 과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학점을 얻을 수 없다고 공포했습니다. 학생들은 급하게 과제를 들고서 교수님께 가고 있는데 건물 앞에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학생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결과는 약 10%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학생들에게 급한 일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쓰러져 있는 사람의 상황에 상관없이 63%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떤 상황이냐도 물론 영향을 미치겠지요. 그러나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본인의 마음이었습니다. 본인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사랑을 베풀기도 하고 또 반대로 외면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종 조건이 채워질 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고, 또 그 사람이 사랑을 받기에 합당할 때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것은 내 마음에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나눠주려고 노력할 때 그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나 누룩과 같다는 것이었지요. 겨자씨는 엄청나게 작은 씨입니다. 그러나 이 겨자씨가 정원에 심어져서 큰 나무가 됩니다. 또 누룩도 그 자체는 별 볼 일 없지만, 밀가루 반죽을 크게 부풀게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사랑의 모습이지만 주님 안에서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갖추는데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것도 크게 만드시는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사랑 실천안에서 더욱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나를 사랑받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우리 삶은 이것으로 충분하다(제임스 라이언).



나이테 1(조남익, ‘한강의 새벽’ 중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한 마음의 둥근 결로
곱게 감은 나이테
하늘과 해를 잠시 내려다본다

평생을 살면서
안 보이게 터득한
오오, 그대의 진선진미
오래도록 찬물 한 모금으로 남는다

깊은 물은 고이고
넘치면 트는 데로 흐르는 물
애기 사뿐사뿐 걸어오는 길
나는 나무 이파리로 떨어진다

그대 천국으로
승천하는 나이테
모자라도 남고, 남아도 모자라는 것
나는 지금 가진 것이 없다

얼마 전에 출판한 10번째 시집에 실린 존경하는 제 작은아버지의 시입니다. 평생 시를 쓰신 분이라 그런지 이 안에 담긴 내공이 정말로 대단합니다.

모자라도 남고, 남아도 모자라는 것…. 우리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진 것 없음을 깨닫게 되는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나를 내세우기보다 주님과 함께해야 함을 다짐해 봅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가 되면 이웃에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된다

-전삼용신부-


어떤 남자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 친구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좋아 하기는 했지만 첫 번째 친구보다는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함께 가기를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자 성문 앞까지는 함께 가주겠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세 번째 친구를 찾아 갔습니다.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자네가 가자면 기꺼이 함께 가주겠네.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나가는 것이 친구 아니겠나?”

      이 이야기에서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라고 합니다. 제 아무리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음이라는 먼 길을 떠날 때에는 남겨 두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역시 묘지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 이후에는 혼자 갈 길을 가고 맙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평상시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죽음 뒤에도 그와 동행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 전설에도 마지막 심판 때에 “너는 기쁘게 살았는가. 그 기쁜 일이 이웃도 기쁘게 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내가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행복을 삼고 살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신 예수님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하나밖에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내가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증명해 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알지만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을 혼자 힘으로 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사랑하시면 나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하느님에 의해 지배받는 작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은 부모가 자녀를 지배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부모는 사랑을 통해 자녀를 지배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보호하고 양식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그 은혜에 보답하려 노력합니다.

      하느님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십니다. 바로 당신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당신 성자를 통해 양식으로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위로자 혹은 보호자 성령님이라고 하는 것이고 성자를 생명의 양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분을 모시고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가 되었다면 우리를 통해 분명 성령과 성자의 두 모습을 보이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는 마치 겨자나무와 같고 누룩으로 구운 빵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하느님 나라의 씨가 뿌려지면 나는 원하는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겨자나무와 같이 됩니다. 겨자나무가 새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이 겨자나무와 같이 이웃에게 휴식이 되어주는 사람은 성령님과 같은 모습입니다.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 선행들만을 나중에 주님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딱딱해서 먹기가 어렵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은 부드러운 빵이 되어 먹기가 쉬운 양식이 됩니다. 이웃을 위해 먹히기 쉬운 빵이 된다는 것은 이웃에게 힘을 주는 양식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양식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들어왔다면 나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누군가에게 먹히며 힘이 되어주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래서 이웃에게 휴식이 되고 힘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두 손인 성자와 성령을 통해 우리를 조작하십니다. 성자는 나를 통해 이웃에게 양식이 되는 모습으로 나를 조작하고 성령은 이웃에게 위로와 휴식이 되는 모습으로 이웃에게 다가가게 합니다. 이 두 모습이 나를 통해 표현된다면 그것이 선행이고 사랑실천입니다. 나를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러면 나도 기쁘고 이웃도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조재형신부-


백범 김구 선생님은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학교에서 백범 김구 선생님의 글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읽으면서 백범 김구 선생님의 기개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깊이 느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소원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대한의 독립, 우리나라의 독립,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나의 소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은 신기루와 같았습니다. 일본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약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좌절하였고, 일본의 식민통치는 계속되리라 생각하였고, 친일로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님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독립하였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군사 독재의 억압을 이겨냈고, 민주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걸 희망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을 나누고 싶습니다.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의 낡은 틀을 과감하게 버리면 좋겠습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를 도모하면 좋겠습니다. 시대의 엄중함을 바라보고, 국론을 결집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뿐인 분단국가의 오명을 벗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의 허리를 이어주는 도로, 철도가 연결되면 좋겠습니다. 북쪽의 학생은 남쪽으로 수학여행 오고, 남쪽의 학생은 북쪽으로 수학여행 가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의 비핵화가 실현되면 좋겠습니다. 경제, 문화, 여행의 교류가 자유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이겨낸 민족입니다.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꾼다면 그 꿈은 언젠가 현실이 될 겁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꿈,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꿈은 달빛을 받아 신화가 되었고, 햇빛을 받아 역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 각자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지상에서부터 미리 미리 천국의 삶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휴가가신 주방 자매님을 대신해서 아이들에게 미역국을 끓여준 기억이 납니다.

머리털나고 처음 끓여보는 미역국이라, 열명 정도 먹으려면 대충 이정도 미역을 넣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마른 미역을 넉넉히 큰 들통에 집어넣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후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얼마 안되는 것 같았는데, 마른 미역은 엄청나게 부풀어올라, 열명이 아니라 백명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하느님나라는 겨자씨나 누룩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만큼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을 훨씬 능가하고 초월할 정도로 풍요로울 것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장 우선적인 특징은 풍요롭고 보편적이어서,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개방성이 곧 하느님 나라의 가장 우세한 특징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개방적이어서, 거기에 들어가기란 식은 죽먹기요, 땅짚고 헤엄치기보다 더 쉽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입국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 노골적으로 하느님을 불신하거나 거부하고 모욕한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생애 동안, 지나치게 끌어모으는 데나 혈안이 되던지, 아니면 자신의 몸집을 부풀려, 마치 공룡 정도 크기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 사이즈는 그리 크거나 넓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 커진 분들, 나중에 하느님 나라 들어가시다가, 두툼한 살집이 문에 끼어 통과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 지상에서 부지런히 비우고 낮춰 그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춰야겠습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너무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보여, 들어갔다가 크게 실망하며 되돌아나올 가능성도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 이방 저방을 열어보고,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스타일과 너무 맞지 않아, 거기 있는 자체가 지옥이 될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방 종류는 주로 이렇습니다. 침묵과 기도의 방, 화해와 용서의 방, 회개와 정화의 방, 겸손과 온유의 방, 기쁨과 찬미의 방!

그런데 평생토록 경쟁과 다툼, 소비향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푹 빠져 살아온 사람들에게 천국의 삶과 문화는 그 자체로 충격이고 고통일 것입니다.

지상에서 부터 미리미리 천국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비우고 정리하고, 낮추고 내려서고를 무한반복하면서, 천국 시민 자격증 취득을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을 향해 작은 걸음을 계속 옮겨봅시다

-김기현신부-


보통 오전에 평일 미사에 참여하고 나서 산책을 갑니다. 대략 2시간 정도 성당 뒤쪽에 있는 산길을 걷는데요. 걷는 중에 여러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뛰는 분도 있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걷는 분도 있고, 삼삼오오 모여서 걷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기억에 남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청소하시는 분이신데, 걸으시면서 길에 있는 돌을 하나하나 길 밖으로 던지고 계신 겁니다. 마음속으로 ‘뭐 하러 저러실까.. 저 많은 돌들을 다 치울 수도 없을 텐데 괜한 수고를 하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 옆으로 빠르게 지나쳐 갔는데요.

 

그분을 지나쳐 가면서 복음의 모습이 문득 지나갔습니다. 겨자씨 하나, 그리고 작은 누룩이 가져오는 변화가 생각나면서, 돌을 치우는 청소부 아저씨의 모습을 저도 모르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저 아저씨가 돌 몇 개를 치우고, 다음 날도 그 자리에서 일하실 테니 또 돌 몇 개를 치우고, 저 아저씨 나이가 다할 때까지 일하시고, 그 다음에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또 와서 또 돌을 치우기 시작한다면... 돌이 많았던 길이 걷기 좋은 길이 될 수도 있겠구나...’

 

너무 멀리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복음이 그리는 모습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 모이고 가지를 뻗어서 이루어내는 큰 일들... 작은 일들을 해 나가다 보면 어느 새 그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됨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만 바라보고 기대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지금의 작은 일들이 보잘 것 없고 하찮아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턱걸이를 한 개도 못 하는 사람이 철봉에서 묘기를 하는 사람을 본다든지, 외국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원어민처럼 말하는 사람을 본다면, 지금 내 모습에 실망하거나 갈 길이 너무 멀다고 느끼며 포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그분과의 친교 안에서 누릴 완전한 행복을 기대하는 것도 때로는 그런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 시선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아마도 그 기다림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그런 기다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대로 작은 일들을 수행하며 걸음을 옮기는 그런 능동적인 기다림일 거라 생각합니다. 산을 바라보며 가야 할 곳을 생각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발걸음을 옮기는 겁니다.

 

그 일이 때로 기도 안에서 내 마음 안에 돌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치우는 일일 수도 있고, 몸을 움직여 땀과 함께 불순물들을 몸 밖으로 하나하나 덜어내는 작업일 수도 있겠죠. 그밖에도 아주 작은 일들, 인사하고 미소 짓고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로 세상에 거친 돌들을 하나하나 덜어낸다면 조금 더 깨끗해진 길,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시선을 두고,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보이는 아주 작은 일을 꾸준히 실천해 봅시다.



소리 없는 변화

 -반영억신부-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해서 아주 보잘 것 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큰 나무 역할을 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그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런지요.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에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 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내 생활의 동작 하나하나가 천상으로 치닫는 하나의 몸짓이고 자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 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몫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유다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다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다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8-19)”

어떤 씨를 받았을 때, 그 씨가 겨자씨라는 것을 모르면, 너무나도 작은
그 씨의 겉모습만 보고 나중에 나무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안 믿을 것입니다.
안 믿으면, 씨를 안 심거나, 심더라도 의심하면서 심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씨가 겨자씨라는 것을 알면,
나중에 나무로 자라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나무로 자라기를 기대하고서 그 씨를 심고, 돌보면서, 기다릴 것입니다.
이 말은, 겨자씨뿐만 아니라 모든 씨에 해당됩니다.
무슨 씨든지 간에 씨는 작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로 표현하신 것은,
그 나라가 시작할 때의 모습과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겨자씨 자체에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할 때의 모습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작은 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의 모습은 작은 씨를 심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씨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나무로
자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신 일도
작은 씨를 심으신 일이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당시의 사도단의 모습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작은 겨자씨보다도 더 보잘것없는 ‘작고 약하고 힘없는’ 씨앗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씨는 온 세상을 덮는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신앙인은 각자 하나의 씨가 되어야 합니다(요한 12,24).
겉으로 보기에는, 또는 자기가 스스로 보기에는,
자기 자신이 정말로 작고 약하고 힘없는 존재로 보일 수도 있고,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 실천하는 ‘믿음의 실천’과 ‘사랑의 실천’은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씨가 되어서
언젠가는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시작해야 하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씨를 심는 일과
그 씨가 나무로 자랄 때에 가꾸고 돌보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반대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일들은, 즉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속된 일들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든지 간에
그 일은 먼지처럼 허무한 결과로 끝날 것입니다.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려고,
즉 자기가 업적을 쌓았음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한
일이라면, 그래서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고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은 바벨탑을 쌓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겨자씨를 심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욕심을 심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20-21).”

적은 양의 누룩이 대단히 많은 양의 밀가루를 부풀게 한다는 ‘누룩의 비유’는,
이 세상을, 또는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힘’에 관한 비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복음으로 세상을, 또는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시간이 좀 걸릴 때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갑자기 변화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해서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크게 변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고,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고 해서 바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2) 복음으로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거의 항상 처음에는 작은 일이 계기가 되어서 시작됩니다.
두꺼운 성경책 전체를 한 번에 읽어 주고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말씀만으로, 한 번의 언행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다 읽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조금 움직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또 어떤 놀라운 기적에 압도되어서 인생이 갑자기 확 바뀌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앙인이 전해 주는 한 마디 ‘말씀’ 때문에,
또 따뜻하고 친절한 한 번의 언행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것이 차츰 큰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평소에 한 마디 말과 한 번의 행동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평소의 언행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3) 이 변화는 내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옛날 중세 역사에서 보듯이 군대를 앞세우고 가서 신앙을 강요하고,
그래서 그 나라 국민 전체를 개종시킨다고 해서,
그것을 변화라고(복음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먼저 마음이 움직여서 끌리는 일로
시작되어서 마음 전체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그러다가 결국 인생 전체가 바뀌는 일입니다.
바뀐 것 없이 세례만 받는 것은 변화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까닭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 마디로 왔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들음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고 믿음이 겨자씨와 같다면, 믿음이 곧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 나라가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와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고 말씀하셨다.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를 받았다(마태 16,19 참조).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써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당하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시다. 시장하실 때에는 씨앗이시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는 나무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고루 배어들어 영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우리는 이성적이며 거룩한 누룩을 마음에 받아들인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들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들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너무 작고 미약해서 잘 보이지도 않고, 자칫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들에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누룩과 같다"(루카 13,19.2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작고 흔하고, 그래서 가치가 적어 보이는 사물들입니다. 게다가 저 혼자서는 별 효력을 내지도 못하지요. 씨는 땅과 온도와 수분과 햇빛이 있어야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됩니다. 누룩도 무언가에 합해져서 온도와 수분이 주어져야 발효를 시킵니다. 혼자서는 그저 무생물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거대하고 어마어마하고 휘황찬란한 영광의 대국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띄지도 않지요.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말씀"처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 8,15)에게 열려 있는 보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알맞은 생장 조건을 만나야 엄청나게 확대되고 늘어납니다.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도 되고 여럿의 배를 불릴 빵도 되지요. 그러려면 우리들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하고 하찮아 보이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고 선택해서 품어야 합니다. 가난, 고통, 고독, 침묵, 비움, 포기, 양보, 용서 등 세상이 경시하고 조롱하고 외면하는 가치들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숨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하는 이들이 견뎌야 하는 탄식과 고통을 숨기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구원은 희망하는 이들의 것이니, 지금 눈 앞에 구원이란 이름으로 선명하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먼저 자신이 희망하고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아니라면 망상이나 신기루일 공산이 크지요. 우리는 희망함으로써 구원을 선취해, 구원 상태를 미리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희망한다면 기쁘고 충만하고 행복해도 됩니다. 그 자체가 구원의 표지니까요.

그런데 희망이 쉽지는 않지요. 희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또 작고 미약하고 비천해서 결과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남이나 제도에 눈 돌릴 것 없이 자신만 보아도 그렇지요. "하느님의 나라"라는 희미한 씨앗과 누룩을 알아보고 품기는 했는데, 새들이 깃들 큰 나무, 여럿을 배불릴 빵을 기대하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스스로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부족한 죄인에 불과한 자기에게서 과연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열매 맺을 수 있을지 매순간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루카 8,25).
누구보다 인간 실존에 연민을지녔던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인내심"을 제안합니다. 재깍 성장이 보이고 결과가 나오면 인내심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희망이 그렇듯이 말이지요. 그러니 구원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희망과 인내는 어느 하나도 놓치면 안 될 필수불가결 세트입니다.

자신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타인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공동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교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걸어 봅시다. 그분은 이천 년 전 지구 한 구석 변방에 가난하고 힘 없는 아기로 오셔서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나라와 구원을 선사하신 분입니다. 그 희망 하나로 우리의 희박하게 꺼져가는 희망을 부여잡고 인내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희망과 인내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신비입니다.

자신과 타인, 공동체와 교회, 세상의 잿더미에서 희망의 불씨, 인내의 불씨를 뒤적여 키워내는 오늘 되시길 기도합니다.-김찬선신부-

절망을 거스르는 희망  
-김찬선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란 또 무엇이고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보이는 세상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날,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얻는 날,
한 마디로 구원받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는 앞의 문맥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란 구원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면 희망이 절망인데
그 절망적인 것 안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들, 곧 신앙인의 희망이라고 로마서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적인 것 안에서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우리 신앙인은 희망의 씨앗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과 연결시키면 씨앗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아주 작고
그 작은 것 안에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씨앗 안에 가능성이 있음을 보고
그것을 자기 정원에 심으면 씨앗 안에 가능성으로 있던 것이 틔어나오고,
가능성을 보지 못해 자기 정원에 심지 않으면 그것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씨앗이란 가능성이 있는 작은 것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얘기하면 씨앗이란 현실태이자 가능태인데
이 가능성을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가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가능성을 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수녀님 두 분이 암을 얻었습니다.
한 분은 재발이고 다른 한 분은 초발입니다.
재발하신 분이 더 이상 수술과 같은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 후 같은 공동체의 수녀님이 암을 얻으셨는데
그 암이 초기임에도 아예 수술을 받지 않고 자연치유를 하겠다고 하십니다.

두 분 다 젊은 수녀님들인데도 수술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동체가 말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존중하는데 그것은
두 수녀님의 선택 안에 현세 생명에 연연해하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결코 현세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겠다는 대단한 신앙이 있음을 같이 믿기 때문이지요.

현세생명이든 영원한 생명이든 자신들의 생명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믿기에
한 편으로는 어떤 가능성이건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오늘 로마서가 얘기하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로마서는 이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거슬러 희망하는 존재이고,
이런 하느님의 자녀가 많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하느님의 자녀가 내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