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Margaret K 2019. 10. 26. 19:23

2019 10 27일 연중 제30주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Whoever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주님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은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드시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는 유다교 입장에서 완전히 대조되는 사람들입니다.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그것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면서 또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으로는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반면에 세리들은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 제국을 위하여 백성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반역자요 수탈자의 앞잡이였으며 종교적으로도 죄인 중의 죄인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이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먼저 바리사이는 양팔을 벌리고 자신만만하게 서서 자신은 죄인이 아닐뿐더러 단식 규정과 십일조 규정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임을 하느님 앞에 내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고 말씀하십니다.바리사이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거나 무엇을 청하는 내용은 없고 오직 자신을 내세우는 내용뿐입니다. 반면 세리의 기도는 간단하면서도 절실하고 진지합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고 하느님 앞에 그것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초대하시는 주님

-한민택신부-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 됨의 길에서 넘어야 할 관문은 겸손의 문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주는 덕목입니다. 겸손함은 강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인지 인정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나를 받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곳곳에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죄 많은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죄인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인간의 죄악이 아니라, 그러한 인간을 받아주고 용서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 결국 승리하며, 인간과 세상을 구원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 고귀한 인격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며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자격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참 제자가 되는 길에서 넘어야 할 유혹 중 하나는 마치 내가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하며 열심히 기도를 올려 하느님 앞에 설 자격이나 권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죄인인지 알지 못하며, 율법만으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그는 겉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왜곡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 또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로움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공로나 자격으로 그분께 요구할 수 없는 것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자신이 부족한 죄인이며 쓸모없는 종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게 합니다.

참 제자 됨의 길에서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유혹은 시련과 실패,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종종 삶에 위기가 닥칩니다. 그때마다 그동안 쌓아온 신앙생활이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그러한 시련이 모든 사람에게 생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련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시련 안에서 견디어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을 인정하도록, 하느님의 은총만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겸손의 덕을 다져줍니다.

나의 신앙이 타인에 대한 단죄나 하느님 은총의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나의 나약함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도록, 나를 비우고 버리는 삶의 길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소외된 기도

-김혜윤수녀-


어김없는 역사의 법칙 하나가 있습니다. ‘내용’이 없을 때 지나치게 ‘형식’에 매달리게 되고, 규율과 전통에 과잉 충성할수록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잔인하고 가혹한 사회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고발, 단죄, 보복…. 필요한 용기일 수 있지만, 때로는 자신만이 정직하고 올바르기에 타인을 단죄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도덕규범이라 하더라도 혹독한 억압과 권위적 체제로 서로간의 불안을 조성하고, 그런 공포 속에 모두가 불행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맹목적 충성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도덕과 규범 준수에만 도취되어 자신을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자평하던 바리사이와 비록 떳떳한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삶의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던 세리의 이야기가 이번 주에 선포되는 기쁜 소식입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의 본문은 기도에 대한 좋은 예와 나쁜 예의 명백한 대조를 통해 무엇이 진정한 기도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장소적 배경에 대한 것인데 “두 사람이 기도하러”(루카 18,10) 올라간 예루살렘 성전은 해질 무렵 유다인들이 함께 모여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와 세리가 보여준 상반된 모습은 그들이 유다 공동체와 맺고 있던 관계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유다 사회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특권층이었고 세리는 공동체로부터 그 어떤 존중과 인정도 받지 못하던 이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11절) 곧 공동체를 구분하여, 타인은 그저 ‘나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 불의를 저지르는 자, 간음하는 자, 세리’로 간주합니다. 그가 공동체와 자기 자신 사이에 두었던 철저한 구분은 하느님께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의 기도 안에는 하느님이 차단되고 배제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공동체의 비난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 처참함을 오히려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는 기회로 만듭니다. 아무리 공동체가 그를 고립시켜도 그들을 떠나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공동기도 시간에 참석하며 하느님과도 멀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리사이와 세리가 대조적으로 보여준 ‘하느님과의 관계맺음’을 성경은 ‘의로움’이라고 하며, 이 ‘의로움’이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주제입니다. 본문의 핵심이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음은 시작과 마무리를 통해서도 파악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던(9절)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한다고 밝히시며 시작하시고, 마지막에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고 하심으로써 의로움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규범과 도덕적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에게,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로움)를 통해 이루어짐을 분명히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 의롭게 되다

바리사이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보다 자기를 더 믿던 사람이었고 스스로의 영광에만 집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그토록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던 이유는 율법의 모든 규정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2절 참조) 반대로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 올바른 기도의 결정적 단서가 ‘기도의 주체와 주도권’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어서(“제가 다른 사람들과 … 같지 않고,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 저는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11절) 이야기합니다. 그의 기도는 그저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우월한 종교행위를 과시하는 의미 없는 나열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의 기도는 짧은 분량으로 되어 있고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구도 없으며 그저 자비를 청하는 것으로만 되어 있지만 오로지 하느님께로 방향 지어져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절) 여기에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표현은 “자비를 베푸소서!”와는 다른 어휘가 적용됩니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표현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어 ‘엘레이손’이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그리스어 ‘힐라스테티’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덮어주다, 가려주다, 감추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힐라스코마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구약의 ‘계약의 궤’의 뚜껑인 속죄판을 그리스어로 ‘힐라스테리온’이라고 하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속죄’와 연결됩니다. 자신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속죄를 간절히 갈구하던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13절) 못하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그리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임스 티소의 ‘바리사이와 세리’.

■ 하느님께로 향하기

복음에서 세리가 보여주었던 올바른 기도의 모습은 제1독서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 …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집회 35,20-21)합니다.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짓눌린 이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달려야 할 길

제2독서의 바오로는 탁월했던 바리사이였던 만큼, 복음의 바리사이 못지않게 철저히 종교적 행위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회개한 후, “주님께서 …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18절 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종교적 행위와 율법 준수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심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지금까지 바리사이로서 가지고 있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여정에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는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다.”(2티모 4,16)고 하면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도 거들어 주지 않는” 상황과 “그러나 주님께서 곁에 계신” 상황은 무엇이 진정한 기도이며 관계인지를 명시적으로 알려줍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그 어떤 감정도 숨기거나 덮을 수 없습니다. 그분과의 관계는 세상의 어느 관계보다도 직접적이고 일차적이며 원초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해주는 기도시간은 오히려 우리의 선과 악, 비열함과 간절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그다지 경건하거나 성스럽지 않은 시간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기도는, 자신의 죄와 한계, 허술함과 위선, 기묘하게 숨겨온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기에 더없이 거룩하고 경건한 시간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우리의 방황과 혼란, 위선과 불안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비추시고 치유하시는 구원의 은총이며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실현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기에, 있는 그대로, 의심 없이 다가서는 사랑이며 그 관계적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심판

-최승정신부-


오늘의 첫째 독서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는 ‘심판자’라고 설명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가난한 이 와 고아와 과부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집회 35장뿐 아니라 구약 전반에 걸쳐 하느님은 약자들을 돌보시는 분으로 일관되게 나타나며, 구약의 율법은 바로 그 점을 하느님의 거룩함과 연결합니 다. 나아가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행해지는 불의 와 폭력에 침묵하던 이스라엘의 제물에 하느님은 기뻐하 지 않으신다고 예언자들은 반복하여 경고합니다. 둘째 독서인 2티모 4장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삶을 하나 의 봉헌으로 이해합니다. 지혜서의 저자처럼 바오로 역시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알아듣습니다. 바오로의 현실은 암울 했습니다. 세속적 재판의 상황에서 아무도 그를 거들어 주 지 않았고 모두가 그를 저버렸지만, 그는 오히려 더 큰 희 망과 기쁨에 대해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심판관’이 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루카 18장은 어느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대비 시켜 전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는 바리사이의 감 사 기도와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 느님께서 누구를 의롭다고 하실지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아마도 당시의 청중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왜

냐하면 바리사이와 세리는 그 시대에 사람들이 실제로 대 면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는데, 세리들은 이스라엘 백성 들의 증오의 대상이었고, 바리사이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가장 충실한 이들이었기에 당연히 가장 의로운(!) 사람들로 여겨 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자만과 타인을 향한 우 월감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을 전하는 복 음사가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지녀야 할 겸손과 섬김의 자 세를 강조합니다.

오늘날 몇몇 윤리신학자들은 천국과 지옥이 서로 다른 장소가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란 모든 이가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곳이며, 모두가 자유 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곳인데, 많은 이들에게 그곳은 더 할 수 없이 기쁘고 행복한 나라이겠지만, 특권과 혜택이라 는 우월함을 누리기 위해 돈과 권력을 좇던 이들에게는 견 디기 힘든 곳일 것이라고 그들은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하 느님 나라가 곧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 나 라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나눔과 섬 김의 삶을 연습하며,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 그리고 소외 된 이들과의 연대를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의인이라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 하십시오

방기태신부-


예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소개한 내용의 기사를 본적이 있 습니다. 교황님 말씀의 요지는 “항상 완벽하고 엄격한 그리스도인들 을 조심하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황님 말씀의 요지가 어쩌면 오늘 복음의 내용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아 닌가 싶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도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했고, 율법과 계 명에 엄격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항상 ‘왜?’ 라는 단서를 달면서,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는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가?’ ‘왜, 그렇게 사 는가?’ 등,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마치 완전하고 완벽하게 보이려고 했 을 뿐, 그들의 내면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 씀으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고발하셨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루카 11,39)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사이들의 민낯이 오늘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무 리 중에 한 사람이 성전에 와서 기도를 올립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는 하느님 앞에 너무도 당당합니다. 그의 이런 당당함이 예수님 눈에는 너무도 교만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당당함을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마태 22,27 참조)라고 말씀하셨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사와 축복을 받은 의인임을 밝히지만, 그의 실체는 그저 겉으로는 완벽하고 엄격했을 뿐이지, 그의 마음은 예수님의 의해서 교만의 영 으로 가득차 있음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시선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리였습니다. 이 세리는 사람들 에게 찬사의 대상이 아닌, 비판의 대상이었고, 존경의 대상의 아닌, 만인지탄의 대상이었으며, 의인의 대상이 아닌, 악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세리는 자기 자신의 실체와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고, 자신을 죄인 중의 죄인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 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2) 교황님께서는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엄격한 사람들을 주의하십시오. 평신도든, 사제든, 주교든, 스스로를 ‘완벽’ 하게 보이게 하는 엄격한 그리스도인들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조심하십시오. 거기에는 하느님의 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 봐야 할 교황님의 말 씀이라고 봅니다.


반듯한 바리사이와 통회하는 세리

-오창수신부-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의인으로 더 인정 받은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율법 준수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겸손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고 합니다.(필립 3,9 참고) 따라서 세리는 기도할 자격조차 없는 자 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라고 통회의 기 도를 바쳤고,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고 바리사이보다 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강도 짓, 토색질, 사기 등 그 어떤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형식적이지만 사 회법규를 지켰으며, 반칙하지 않고 세금을 내고 단식과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죄인으로 보이는 세리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의롭게 잘 살고 있다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감 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자기도취에 취해 큰소리를 쳤습니다.    무리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선자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 나는 일들과 국가 지도층에 있는 유명 인사들과 정치인들이 생각납니다. 상식과 법을 뛰어넘어 불법을 저 지르고도 합법화하고, 아무런 죄의식도, 통회도 없이 설치는 우리 사회의 위선자들을 보면서, 차라리 복음 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이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듯한 바리사이와 잘못을 통회하는 세리가 한 사람일 수는 없을까요?’     신앙인은 위선자 바리사이를 넘어, 반듯한 바리사이와 통회하는 세리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법과 사회질 서를 지키고, 도덕적 상식과 양심을 따라서 사회에 헌신하는 반듯한 바리사이가 되어야 하고, 동시에 통회 하는 세리처럼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통회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집니다. 계절도 겸손을 알고 있습니다. 이 한 주간도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도 의로운 자가 되어 주님의 축복 가득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14)


세리의 마음으로 바리사이가 실천한 삶을!.

노영환신부-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합니다.

교만이 가득 배어 있는 오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자신은 주님 앞에 보잘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 하나가 보잘것 없는 모든 삶을 거룩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이 두 삶을 비교해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세리의 마음으로 바리사이가 실천한 삶을 산다면 참으로 이상적인 삶이 될 수 있겠다” 하고 말입니다.
정의롭게 살고 단식을 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마음속에 가득 찬 세속을 비우고 그 마음에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 마음으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삶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참다운 생명에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처럼 교만하면 세상을 비우는 대신 탐욕으로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그래서 단식과 십일조가 마음을 교만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겁먹은 새와 같다고 합니다. 조금만 부담스러워도 떠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겸손으로 기다릴 때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과 탐욕으로 자신의 열성을 과시하고 자신의 노력에 대해 댓가를 요구할 때 그 하느님은 부담스러워서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삶의 은총에 감사드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겠습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화(例話)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감히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예화의 바리사이는 실제로도 율법을 충실히 지켰을 것입니다. 유대교 신로 지킬 것 다 지키고, 바칠 것도 다 바쳤을 것입니다 . 그는 유대교가 요구하는 단식은 일주일에 한 번인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단식하였습니다그리고 유대교가 요구하는 십일조는 주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인데 그는 자기의 부수입까지 포함하여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한 마디로 그는 지키고 바치는 일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하느님이 감동하실 일만 남았습니다그러나 세리는 그 시대 모든 이들로부터 죄인이라 지탄받던 사람입니다그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도 겸손하라는 교훈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이 예화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하느님의 지평(地平)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인류역사 안에 신()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있었습니다그 이야기들은 모두 신이 준 계명을 잘 지키고, 제물을 잘 바쳐서 신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해서 소원성취 하라고 권합니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하게 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신에게 무엇을 바쳐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어떤 혜택을 받아 내겠다는 민속(民俗) 종교들의 발생을 지적하는 말입니다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비는 이들의 마음혹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이가 생각하던 종교입니다하느님의 힘을 빌려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이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인간이 자기 소원을 성취 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신앙은 내가 잘 지키고 잘 바쳐서하느님을 감동시키거나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서 나 한 사람 잘 되고나 한 사람 잘 사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소원성취는 인간 각자가 노력하여 할 일입니다신앙은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자기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비는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습니다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베풀어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視線)으로 보려 합니다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입니다잘 지키고, 잘 바쳐서 소원성취 하겠다는 마음은 독재자 밑에 사는 기쁨조가 하는 일입니다아니면조직 폭력배가 그 두목 앞에서 하는 행동방식입니다그것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의 혜택을 얻어내겠다는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독재자도 아니고, 조폭의 두목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하느님 덕분에 우리가 잘 살아보겠다고 붙여진 호칭이 아닙니다불쌍히 여기고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이어받아 그분의 뜻을 존중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면서 살겠다는 자녀의 결의(決意)가 담긴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그 아버지의 일을 실천한 예수님입니다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어머니와 대립된 아버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자녀를 낳아 기르고그 자녀가 사람노릇 하도록 가르치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옛날 남성(男性) 위주의 가부장(家父長)사회에서 자녀들과 관련지어 아버지를 말할 때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아버지는 생명을 주신 분아버지의 배려로 생명이 성장하고자녀가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여 산다고 말할 때아버지라는 호칭 안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부모가 자녀를 버리지 않고 세심히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 부모가 자녀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듯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우리가 부모에게서 세상사는 법을 배웠듯이, 우리가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생명을 살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가 잘 한 일에 만족하고 하느님 앞에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자만자족 현상입니다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우열(優劣)을 논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다른 사람은 우리의 경쟁자가 아닙니다다른 사람은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이웃입니다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모두 불쌍합니다그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 혹은 열등감은 현실을 바로보지 못한 착각입니다나만 바라보기에 생긴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하느님의 자비를 부르고 있습니다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 중에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십니다그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말씀입니다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살아 있을 것을 빕니다그리고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유대교가 죄인이라며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하느님의 자비를 당신 주변에 넘쳐흐르게 하셨습니다하느님이 자비하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죄인입니다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소신껏 실천하셨습니다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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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심리학자 로버트 M.여키스와 존 D.도스은 갑작스러운 자극이 개인의 생산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했습니다. 연구팀은 미로에 실험 쥐를 넣고 약한 전기충격을 주어 스트레스가 미로를 탈출하려는 노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폈습니다. 그 결과 낮은 수준의 자극이나 압박은 낮은 성과로 이어졌고, 여기에 좀 더 높은 자극이 가해져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지면 성과가 올라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극으로 불안감이나 긴장도가 너무 높아지면, 성과는 다시 낮아졌습니다.

이 실험 결과를 통해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극이 없으면 안일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자극이 너무 크면 그냥 포기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극이 우리의 삶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고통과 시련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고통과 시련이 있기를 바라고 있나요?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편안하고 쉬운 삶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의 자극이나 압박이 들어오면 남 탓을 하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누구 때문에 너무 힘들고, 누구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편안함은 자신이 잘살아서 그런 것이고, 자신의 불편함은 남 때문에 생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바로 고해소 안에서입니다. 분명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남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신부님께서는 고해소에서 제일 많이 고백하는 죄가 ‘남의 죄’와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힘을 쏟아서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스스로 죄 없다면서 하느님보다 더 의로운 사람인 척하는 것보다는 진정으로 뉘우쳐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당시에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인정받던 사람은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들은 기도, 단식, 자선 등을 실천하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이방인 로마에 빌붙어 살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 때로는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다인은 이 세리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가 더 옳다고 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기도만 하고 있지만, 세리는 진정으로 뉘우치며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기도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당연히 세리의 모습입니다. 이 겸손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변화, 즉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달리 본다(아나이스 닌). 



남을 이해한다는 것.

겨울에 눈이 오면 대부분 좋아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저 역시 눈이 싫습니다. 운전하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난 적도 있었고, 어렸을 때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 눈 치우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체험한 후로 눈이 정말로 싫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 연인들은 너무나 좋아하지요. 이렇게 사람마다 분명히 좋아하는 것이 다릅니다.

이 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만이 아닌 남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고,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남들 역시 힘들고 어려움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사랑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남을 바라보는 사랑을 통해 나 자신을 더욱더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봉헌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삼용신부-


어떤 마을에, 이교도 사원과 가톨릭 성당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습니다. 사원의 예배와 성당의 미사는 매일 같은 시간에 있었습니다. 한 마을 이웃에 사는 이교도 신자인 팜푸스와 그리스도인 키루스는 각자의 예배소로 가는 길을 나란히 같은 시간에 걸어가곤 하였습니다.

      이교도 신자인 팜푸스는 늘 자기 신을 위하여 바칠 희생제물을 들고 갔었으나 그리스도인 키루스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음이 의아하게 생각되어 어느 날 팜푸스가 물었습니다.

      “선생, 당신은 예배하러 가면서 당신 신한테 바칠 제물을 왜 가져가지 않는 거요?”

      이 말에 키루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배 드릴 때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바친답니다.“라고 말하자 팜푸스는 어리둥절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러한 제물도 가져가지 않았잖소?”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제물을 그분께 바친답니다.”

“그럼 과연 무엇을 당신 신께 바친다는 말이요?”

키루스는 대답했습니다.

“제 자신입니다.”

      물론 자신을 바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소유를 함께 바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바치지 않고 소유물만 바치는 것도 참된 봉헌은 아닙니다. 봉헌은 내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따라서 봉헌 없는 하느님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르면 이웃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하느님께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도 내어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께 무언가 얻어내려는 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도 이웃을 이용하여 무언가 챙기려는 속셈입니다.

      봉헌엔 나의 피가 섞여야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에 나의 주인이 되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섞는 것입니다. 감사가 섞이지 않은 제물은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제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빌라도가 갈릴래야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했다는 말을 예수님께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왜 진작 제물이 피를 섞지 않았느냐는 뜻입니다. 회개는 봉헌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참다운 봉헌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 봉헌했어야 할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참다운 봉헌은 나의 생명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봉헌은 이웃사랑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실로암은 ‘파견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이웃사랑을 위해 파견 받은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탑’은 ‘교만’을 상징합니다. 교만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했다면 봉헌하고 있을 것이고 봉헌은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봉헌은 주님이 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봉헌으로 돌아오는 것은 성령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 성령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이유는 그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봉헌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면 이웃 사랑의 열매는 맺힐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나의 봉헌이 나를 봉헌하는 것이어야 주님의 계명을 따름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처럼 당신의 천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할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느님으로부터 잘리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인정하여 무슨 뜻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이웃 사랑을 소명으로 여기게 됩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만간’ 주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열정을 접으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에 온 지 2달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절차가 있는 겁니다. 그 절차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미국 거주 등록증은 신청하고 1달 있으니 우편으로 왔습니다. 거주 등록증이 있어야 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필기시험 보고 2주 기다리니 임시 운전면허증이 나왔고, 그 뒤로 도로시험을 보아야 면허증이 나옵니다. 운전면허증도 1달은 걸려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신청하는 뉴욕이기에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거주 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관광객이 아니라, 주민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급행은 없습니다. 절차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뉴욕에 왔으면 뉴욕의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절차가 있습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도 절차가 있습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재물이 많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서 될 일도 아닙니다. 머리가 좋아서 될 일 또한 아닙니다. 어떤 절차와 순서가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게 아닙니다. 회개는 세례를 받아 성당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박해받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나병 환자 10명이 치유되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찬양을 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 사람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치유를 넘어서 영혼이 치유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게 있다면 4곱절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더라도,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행동으로 드러내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를 눈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이며,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누추한 마구간에 태어나신 사건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희생과 봉사를 만나면 사랑이 꽃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거든 저와 동생에게 좋은 자리를 주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서로 다투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좋은 자리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는 없다고 하십니다. 다만 십자가와 희생의 자리가 있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지만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분열과 갈등은 겸손이 사라지면서 생겼습니다. 겸손의 빈자리에는 교만과 욕망이 넘쳐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보다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셋째는 항구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기름을 준비한 사람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이웃을 위해서 나누는 사람이 더 많은 은총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시계는 언제나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는 시계가 아닙니다. 고장 난 시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 와도 소나무와 전나무는 여전히 푸르다.’라는 뜻입니다. 이 글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歲寒圖)에서 그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유배지에 있던 추사 김정희에게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 이상적은 스승 추사에게 책을 보내고, 안부를 전하였습니다. 스승 추사 김정희는 제자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지극한 겸손과 침묵, 인내와 환대의 성녀 벨라뎃다!
-양승국신부-

루르드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로서 성인품에 오르신 벨라뎃다 성녀(1844~1879)께서, 입회후 선종 전까지 생활하셨던 느베르 애덕 수녀회를 순례했습니다.

벨라뎃다 성녀께서 자주 찾아 기도하셨던 성 요셉 경당, 자주 거니셨던 정원 등을 둘러보며, 그녀의 살아생전 지극히 겸손했지만 동시에 빛나는 성덕의 길을 오래도록 묵상했습니다.

벨라뎃다 성녀의 수녀회 입회 과정을 따라가보니 참으로 놀라운 점이 많았습니다.

벨라뎃다가 루르드에서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후, 8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습니다. 이미 루르드 발현 소식이 널리 확산되어 그녀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본의아니게 기자들에게 둘러쌓여 인터뷰도 해야 했습니다. 순례객들 앞에 서서 발현 목격담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살아있는 성녀 대하듯 그녀를 우러러 봤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하이에나 떼같은 무리들이 접근해왔고,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별의별 작업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저희도 이태석 신부님께서 선종하시고, 남수단 톤즈에서 살레시오 회원으로서의 열정적인 삶이 세상에 알려지자, 별의별 '잡상인' 들이 마치도 '날파리떼' 처럼 날아들어, 쫒아내느라 혼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벨라뎃다 역시 그런 유형의 고통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벨라뎃다는 단순하고 겸손했지만, 동시에 당당하고 의연했습니다. 배운 바가 없었지만 열심한 신앙생활과 튼튼한 성모신심의 소유자로서, 나름 강단과 민감한 식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발현 후 8년이 지난 무렵, 벨라뎃다 나이 22살 되던해, 지역 주교님은 벨라뎃다에게 애덕 수녀회 입회를 권고합니다.

사려깊고 신중했던 벨라뎃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배운 것이 없어 무지하고 병약해, 애덕 수녀회 수도자가 될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주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벨라뎃다의 입회가 결정되고 나서, 느베르 애덕 수녀회 원장 수녀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자매께서 수많은 수녀회들 가운데 저희 수녀회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벨라뎃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애덕 수녀회가 추구하고 있는 카리스마가 너무 마음에듭니다. 저는 가난한 이웃들, 특히 불우한 소녀들과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무엇보다도 애덕회 수녀님들은 다른 수녀회 수녀님들과는 달리 저를 자기네 수녀회로 끌어 들이려고 애쓰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1866년 7월 8일 애덕 수녀회 입회 바로 다음날, 벨라뎃다는 300여명 남짓한 애덕 수녀회 수녀님들 앞에 서게 됩니다. 원장 수녀님의 부탁으로 수녀님들에게 루르드 목격담을 이야기하기 위해 강단에 선것입니다.

벨라뎃다는 목격담을 시작하기전 청중들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루르드 성모님 발현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전제 조건 하에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후 벨라뎃다는 평생토록 애덕 수녀회 수녀원 담안에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침묵과 기도, 순명과 적극적인 사랑의 봉사 속에 남은 수도생활을 불태웠습니다.

성모님 발현 목격자로서 참으로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처신이 아닐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영적 체험이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즉시 벨라뎃다 성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특별한 은혜, 각별한 사랑에 깊이 감사드려야 할것입니다. 절대로 여기저기 떠벌이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우쭐한 마음도 버려야할 것입니다.

그 특별한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며, 더 열심히 이웃사랑의 실천에 헌신해야 할것입니다.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지역교회 목자이신 주교님이나 대리자이신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그분들의 말씀에 절대 순명해야 할것입니다.

성모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탁월한 신앙의 증거자 벨라뎃다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한 나머지 본분을 망각한다거나 우쭐거렸으면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벨라뎃다는 늘 겸손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부당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토록 겸손한 벨라뎃다를 하느님께서는 참된 성덕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하느님의 시선

-김기현신부-


예전에 피정을 하는 중에 지도 신부님이 작은 선물이라면서 인쇄된 종이 두 장을 주셨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교황님이 사제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은 잘 나지 않고요. 하나 기억나는 느낌이 있다면 교황님이 사제를 기억해 주시고, 그 일을 계속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는 느낌이 있었다는 겁니다. 왠지 변두리에서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사제의 고생도 알아주는 그런 느낌이었는데요.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것보다 하느님의 시선이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공동체 안에서 주류로 생각되어지는 바리사이와 같은 사람도 있고, 아웃사이더 같은 세리도 있을 텐데요. 하느님의 시선이 그 멀리 눈에 띄지 않는 세리에게 가 있다는 것이 특별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을 것 같고, 왔다갔는지도 모를 세리의 목소리에 하느님은 귀 기울이고 계신 겁니다.

 

세리가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깨달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느님의 시선이 죄를 뉘우치는 그 사람의 마음에 가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저에게는 그 모습이 잔잔한 위안이 되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저도 세리와 같은 자리인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가만히 보면 주류에 있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인싸.. 아싸..’ 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저는 대부분 ‘아웃 사이더’였던 것 같습니다.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잘 하는 것도 없습니다. 학생 시절에 준비 위원회나 학생회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자리에 있어 본 적도 없고, 사제가 되어서도 주로 변방(?)에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나를 하느님께서 바라보고 관심을 가져주고 있다는 느낌은 특별하고 큰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시선이 느껴지고 깊어지면, 내가 어느 장소 있다는 것이 그리 중요해지지 않다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느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할 때에 구석에서 지휘자를 보며 작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 느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리나 역할같이 보여도 지휘자의 박자에 맞춰서 연주에 참여하고 이루어가는 거죠. 아마도 그 일을 만들어 내고 연주를 끌어내는 것은 지휘자의 시선일 텐데요. 오늘 그 시선을 새삼 바라보고 위안을 얻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시선을 느끼고 바라볼 수 있다면, 더 이상 가난하고 부정적이고 죄인의 느낌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의 연주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가난한 나를 바라보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고 느껴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중국 사람이 조선 담배를 보여주면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묘향’ 이라고 적혀 있어서,

아름다운 아가씨 이름인가 했는데,

찾아보니 평안북도에 있는 산 이름인 것 같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 빕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가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주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를 걱정하면서 자기들이 식민지 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듯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엄격하게 율법과 그 해설 조문을 지켰고 이들의 열심한 삶은 사람들에게 모범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관직을 유지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상납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동족을 착취하여 부를 쌓고 반역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하느님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세속인의 대표 격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들 보다는 바리사이들이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의 판결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8,14).

 

예수님께서는 왜 당시의 상식을 뒤집어 놓는 판결을 내리셨을까요?

바리사이의 기도를 보면,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18,11-12).하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 자랑에, 남을 무시하고 판단하며 자기를 내세웠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입니다.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나오는 범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태5,27)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남을 업신여길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중심, 속마음을 보십니다. 자기를 높이면 남들이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들이 또한 그를 또한 끌어내립니다. 자기를 낮추면 남들이 높아지고 높아진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여 줍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세상의 어김없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미사참례를 하며, 봉사를 한다고 해도 남을 무시한다면, 흉보고, 험담하며 남을 깎아 내려야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한 아무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허영과 자만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맙니다. 그야말로 ‘잘난 사람이 잘난 척’하면 그야말로 밥맛입니다. 자기만 의인인척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못난 사람이 잘난척하는 것도 꼴불견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어디가 아픕니까? 배가 아프죠. 배가 아파 괴로워하고만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더 넓은 땅을 사야죠. 더 큰 노력과 정성으로 땅을 살 생각은 않고 상대를 흔들어 떨어뜨리려 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존 포엘신부는 말합니다.“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들어오기가 무섭게 끊어 버려야지 머물게 하거나 입 밖에 내기만 하면 페스트나 마찬가지요, 무서운 독입니다.”교만은 인간을 눈멀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할 때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되는 줄 믿습니다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알베리오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것을 가지고 인간이 활용하고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18,13)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았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따돌림 받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죄를 지어버렸다는 것을! 이제는 무조건 용서를 빌고 은총을 간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마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세리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1독서의 말씀처럼 “겸손한 사람의 기도가 구름을 꿰뚫고 하느님께 전달된 것입니다”(집회35,21).

 

 하느님 앞에 겸손의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버림받은 자의 표시이고, 겸손은 선택된 사람의 표시입니다”(성 그레고리오).“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하느님을 자랑”(성 아우구스티노).해야 하겠습니다.

 

 내 자랑하지 말고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남을 인정하고 칭찬하며 상대를 높여주는 삶을 통해 기뻐하고 주님께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가 보내준 글입니다.

 어느 날 묵주에 달린 예수님들이 한자리에 모이셨답니다.

그런데 묵주에 달린 예수님들의 모습과 표정과 건강상태는 다 달라 보였습니다.

 

 한 예수님은 늘 차에 매달려 있어 멀미로 얼굴이 노랗고 어지럼증에 시달려

괴로워하고 계셨고,

 

 또 한 예수님은 주머니 속에 갇혀있어 오랫동안 먼지와 함께 있다 보니 편도선과 가래로 고생하고 계셨고,

 

 또 다른 예수님은 묵주 통에 긴 시간 담겨 있어서 온 몸이 녹슬어 계셨습니다.

 

 또  한 예수님은 서랍 속에 다른 물건과 엉켜있는 바람에 제대로 몸을 움직이질  못해 근육마비로 고생하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예수님은 팅팅 불어 계셨는데 그 예수님은 주머니 속에 담긴 채 세탁기에 돌려져 온 몸이 불으신 것 입니다.

 

 그런데 한 예수님은 얼굴이 뭉그러져 형상조차 알 수 없는데도 왠지 모를 빛을 발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궁금하여 물었더니 이 예수님은 어느 할머니의 묵주로 늘 매일같이 아주 열심히 기도 하시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하도 매만지는 바람에 얼굴이 다 닳아 형태가 없어졌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 묵주의 예수님은 너무도 행복해 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묵주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 입니까?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것은,
즉 하느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 것은,
그가 진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왜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까?
(하느님께서는 왜 그를 인정해 주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그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강도짓이나 불의나 간음을 하지 않았고,
세리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여기서 ‘불의’는 남을 속여서 재물을 가로채는 일을 뜻합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강도짓과 도둑질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속마음도 그럴까?
마음속으로 남의 재물을 탐내는 것도 십계명 위반입니다.
또 그가 간음죄를 짓지 않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속마음은 알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죄이고 십계명 위반입니다(마태 5,28).
또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세리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도 다르게 살고 있을까?
당시 세리들이 비난을 받은 것은, 그들이 로마제국의 하수인들이라는 점,
아무 거리낌 없이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즉 유대교 기준으로는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
부정축재와 횡령을 일삼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은 어땠을까?
바리사이들이 이방인들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는 세리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통치 질서와 경제 질서에 순응해서 살고 있었고,
사람들 모르게 부정축재나 횡령이나 착취를 하고 있었습니다(루카 11,39).

바리사이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는 것과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일이었고(마태 6,16),
그래서 그들의 단식과 십일조는 ‘위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그들을 ‘거룩한 사람들’로 존경했지만,
바리사이들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들은 ‘죄인들’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 지은 것은 ‘남을 함부로 판단한 죄’이고,
자기 자신을 의인으로 내세운 것은 ‘교만죄’입니다.
따라서 그런 죄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그가 바치는 기도는 거짓 기도입니다.
<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빈 말’만 되풀이하는 것과
같고(마태 6,7), 기도를 바칠수록 죄만 계속 늘어나게 됩니다.>
그 바리사이의 기도가 진정한 ‘감사기도’가 되려면
교만부터 버려야 하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는 일이 먼저 필요합니다.
진짜 감사는 진짜 겸손에서 나옵니다.
(부족하기만 한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
그렇게 감사드리려면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먼저 깨닫고 인정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리사이의 기도는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을까?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내용과 교만죄에 해당되는 내용과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는 내용은 모두 빼야 합니다.
“하느님!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기도만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하고, ‘삶 전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참으로 변화되었다면 결국 바리사이도 세리처럼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고,
사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진짜 의인은 자기가 의인인 줄을 모르고,
그래서 자기 입으로 “나는 의인이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의인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의 부족한 점만 반성합니다.
이 말은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입으로 “나는 겸손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한 줄 모르고 있고,
더욱 겸손해지려고 노력합니다.)

(레지오 회합 때마다 하는 ‘활동보고’에 대해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을 자랑하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군대에 속해 있는 사람이 지휘관의 지시 사항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를
지휘관에게 정직하게 보고하는 일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레지오의 총사령관은 성모님입니다.
활동보고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성모님께 보고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자기가 한 일을 부풀리거나 생색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활동보고를 할 때에는 ‘자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기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은 특히 겸손한자, 가난한 자의 기도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1독서: 집회 35,12-13.16-18: 겸손한 사람의 기도

1독서에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큰 희생제물을 즐겨 받으시는 듯이 하는 전례태도에 말려들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억압받는 자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그들의 기도는 진실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뇌물에 매수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 기도의 힘은 구름까지도 뚫으며, 그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이러한 내용은 오늘의 복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자 세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만, 자기의 공로와 선행을 내세우는 자 바리사이의 기도는 거절하신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기도에 있어서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비유의 전체적 의미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만심자기 합리화의 태도를 고발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9) 말씀하셨다고 루가는 밝히고 있다.

 

자기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되어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인 것은 확실하다. 비유의 내용이 올바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만심을 비난하고 계시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청해야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행을 자랑할 것 밖에 없다. 그는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 이상의 것을 행하고 있다. 즉 율법은 1년에 단 한번 속죄의 날(레위 16,29)에 단식을 하도록 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이나(. ) 단식을 한다든가, 생산자에게만 의무가 부과되는 밀, , 기름을 구입하면서도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든가 하는 것이다(12).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자신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11).

 

모든 내용이 그 자신만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의 자기만족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죄스런 상태에 있더라도 그들을 위한 도움과 자선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를 돋보이게 하려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데 더 신경을 쓴다. 그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다른 형제들을 내리 깎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13). 자기 잘못에 대한 세리의 겸손하고도 순박한 고백은 그가 대죄인 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없기에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을 기다리고 있다. 만일 그가 무엇을 얻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주시고 그를 새롭게 해주는 사랑일 것이다. 즉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은총이요 선물이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 세리의 태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되찾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올바름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분만이 자신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란 세리의 기도처럼 항상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바로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현대인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바리사이처럼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한다.

 

복음의 바리사이파 삶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 증오심으로 가득 차있는’ ‘거짓위선으로 싸여있는 인간의 상징이며,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만으로 족하다는 자만심으로 차있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퍼져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기 형제들과 교회의 바리사이즘을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과 복음은 어느 누구의 자기 찬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2독서: 2디모 4,6-8.16-18: 정의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았음을 알고, 동시에 그 구원에 협력해야할 의무를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7-8).

 

하느님 앞에 겸손된 기도를 바치면서 바로 주님께서 나 자신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 앞에 언제나 올바른 사람으로 서있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기도를 잘 하십니까? 오늘 미사 말씀들 안에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가득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루카 18,10).
예수님께서 신분과 평판이 극과 극인 두 사람을 비유로 드십니다. 복음사가는 이 비유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루카 18,9)이라고 아예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루카 18,11).
바리사이의 기도 내용은 "기도하였다"고는 하지만 마치 '잘한 일 발표하기' 같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아시고 또 흐뭇해하실 내용이지요. 그런데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라면 그는 지금 누구 앞에, 왜 있는지 잘 모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느님 현존 장소인 성전에서는 굳이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다소곳이 합당한 예를 갖추기 마련이지요. 지금 자기 앞에 누가 계시는지 안다면 말입니다. 또 상대를 앞에 두고 혼잣말을 한다는 건 실례지요.

사실 바리사이는 열심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정한 바를 지키는 열성으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모범 신앙인들이지요. 그런 그가 성전에까지 올라와 혼잣말을 했다는 것이 좀 안쓰럽습니다. 기도할 장소를 찾아오긴 했는데 누구와 어떻게 통교해야 할지 모르는 가련한 영혼 같아서 그렇습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루카 18,13).
세리는 이방인을 접촉하는 직업 자체로 죄인일 뿐만 아니라 동포를 착취해 남긴 이득으로 사욕을 채워 동포들의 원성을 사는 이들입니다. 누가 봐도 바리사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죄인이지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복음사가는 그가 "말하였다"고 표현했지만 실상 그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자비를 청하고 있으니까요. 그가 누구이건 간에 적어도 그는 지금 자신이 누구 앞에, 왜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아뢰는 중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예수님은 의롭게 되어 돌아간 이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고 하시면서 기도에 필요한 자세를 일러주십니다. 즉 "자기를 낮춤"입니다.

기도는 혼잣말도 아니고 이웃과 나누는 수다도 아닙니다. 대상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 대상이신 분은 우리의 온 존재를 속속들이 다 아시면서 미래까지도 섭리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자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집회35,15).
제1독서에는 주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시는 이들이 거론됩니다. 가난한 사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 고아, 과부,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 겸손한 이, 의로운 자... 이들은 모두, 정의나 진리마저 부와 권력이 좌우하는 세상 잇속에서 제외된 이들입니다. 세상은 이들의 권리에 관심이 없어도 주님은 다르십니다.

"가련한 이, 가난한 이, 의인들, 마음이 부서진 이, 영혼이 짓밟힌 이"(화답송).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그런 이들을 더 불러내어 덧붙입니다. 세상의 돌봄과 관심에서 빗겨난 이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에 나오는 이들은 자신을 애써 낮출 필요가 없는 이들이지요. 이미 낮을 만큼 낮아져 바닥을 친 이들, 더 내려갈래야 내려갈 곳이 없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그저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인식하고 인정하면 됩니다. 진실한 기도는 거기서 흘러나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티모 4,16-1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 때문에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던 순간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가장 고독했던 그 순간에 사도 바오로가 기도 상태에 있었음을 이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벌거벗고 나약했던 순간에 그의 존재 안에 현존하시며 힘과 위로와 용기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의 성실한 사랑은 그가 승승장구할 때보다 비참했을 때 더 진가를 발휘하지요.

이런 약함이 없었다면 주님과 사도 바오로의 관계는 열혈 유다교 신봉자였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칫 그는 성전에 올라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혼잣말로 공치사나 중얼거리다 내심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비유 속 바리사이로 남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눈 멀고 헐벗고 배척 당하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짓밟히면서, 주님의 자비를, 구원을 쟁취한 것입니다.

기도는 나와 너(당신)를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내 앞에 있는 너는(당신은) 누구인지, 너는(당신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너(당신) 앞에 나는 누구인지를 알아야 제대로 기도할 수 있지요. 은총을 입은 죄인이라는 자기 실존과, 죄인임에도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너(당신)의 존재를 깨달은 영혼은 주님 앞에 꼿꼿이 서서 온도 없는 보고 형식의 혼잣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이 세리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정수입니다. 나를 알고 주님을 아는 이라면 결코 잊혀질 수 없이 영혼에 각인된 절규입니다. 과연 우리가 청할 것이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성공도 아닌, 오직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자비'뿐입니다.

오늘 하루,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지 말고 "구름을 뚫는 겸손한 기도"(집회 36,20-21 참조)로 주님과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나 하느님을 만나리라! 벌거숭이로. 

-김찬선신부-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 바리사이가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그것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자랑의 기도를 한 것이고 감사를 드렸다고 하니 정말로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우월적 행복감을 토로한 것일 뿐일 겁니다.

바리사이는 무조건 안 좋은 족속이라는 선입관이 우리에게 있고, 그래서
그는 기도를 안 드렸거나 드렸어도 잘못된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하기 쉽고,
그래! 자랑을 하려거든 사람에게 하지 어디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께 자랑을 하냐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랑하기보다 하느님께 자랑하는 것이 낫다.
아예 하느님을 찾지 않는 교만한 인간보다
하느님께 나아가 자랑이라도 하는 인간이 낫다.

여기에는 저의 기도관이랄까 기도 신학이 기저에 깔려있는데
저는 기도가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만나든 하느님과 만나면 그것이 기도라는 얘기이고,
전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며
그 만남에 잘못이 있을지라도 기도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랑하는 기도도 기도이긴 하지만
거기에 중대한 잘못이 있고 그래서 잘못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의 잘못 또는 부족은 일방성과 수용성의 결여입니다.
하느님이 해주신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하느님 말씀을 들음은 없고 자기 얘기만 자랑조로 늘어놓으며,
나 혼자도 잘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이나 자비는 필요치도 않고,
그래서 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않으며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관계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오가는 사랑이 없습니다.
이는 잘 나가는 동창들끼리 얼마나 잘 사는지 서로 뻐기기 위해 만나기에
모이기는 자주 하지만 우정이 하나도 없는 동창회와 같습니다.

뻐기기 위해 만났으니 뻐길 것이 없으면 동창회에서 빠지고,
그런 자신이 비참하여 자살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어도 슬퍼해주는 동창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미해 뻐길 것이 하나도 없는 세리에게는
뻐길 것이 없기에 진실한 만남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명품도 없고 화려한 옷도 없으며 그래서
벌거숭이 같지만 가리는 것이 없기에 진실한 만남이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전통이 일본에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전에 제 조카가
아이를 낳았을 때 찾아가니 갓난애를 목욕탕에서 안겨주며
이렇게 하는 것이 일본의 전통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맨살로 아이를 안으니 참으로 그 아이와 저 사이에
아무런 걸치적거리거나 가리는 것이 없는 만남이 이루어지고
아주 묘한 친밀감과 애정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와 아이 간에 그리고 사랑하는 남녀 간에
진실로 서로 사랑하면 맨몸과 맨살로 만나는 것처럼
가난하고 겸손한 이는 하느님과 이렇게 만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를 다 보셨습니다.
앉으나 서나 나를 보시고 오장육부까지 샅샅이 나를 꿰뚫어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나는 감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하느님은 그런 나를
그대로 안아주시고 사랑해주실 것을 믿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3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