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2019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가12,54-59)
You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why do you not know how to interpret the present ti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의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냐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하여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고 질책하십니다.일기 예보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늘 자연을 살피면서 기후를 예측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었기에 바다가 있는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올 것을 예상하였고, 남쪽의 사막 지대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워질 것을 예측하였습니다.그렇게 하늘과 땅의 변화를 풀이할 때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 시대의 징표,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가르침과 기적을 주신 것을 보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냐고 질책하십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는데, 이때 말씀하시는 위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선한 척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리킵니다.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시대의 징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표징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서 신앙을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결코 시대의 흐름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도 주저하고 망설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로는 하느님을 알 수도, 신앙을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용기를 내어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을 통해서 앎이 깊어지고, 신앙생활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영화 예고편을 보고서 잔뜩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지만, 실망만 안고 돌아온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큰 기대를 하고 손꼽아 기다렸던 날이었지만 별일 없이 지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특별하다고 기다렸던 그 날도 그저 내 생의 하루에 불과할 뿐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기쁨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기쁨도 더 컸던 것이 아닐까요? 즉, 자신의 기대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기대하면서 사는 삶보다는 눈높이를 확 낮추는 삶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기대감보다는 일상 삶에 더욱더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노력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생각보다, 그 노력 자체에 집중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단순히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미래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만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대에 대한 풀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와 다투었다면 지금 당장 화해를 해야 하며, 어떠한 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일을 첫 번째 자리에 두고서 이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우선순위가 잘못 매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세상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이 노력의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십니다. 어떤 결과보다는 노력 자체에 크게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과 은총을 주십니다.


100번째 원숭이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지역의 어린 원숭이가 고구마를 물에 씻어서 먹었는데, 이를 따라 하는 원숭이들이 조금씩 늘어 그 숫자가 100마리까지 넘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100마리를 넘자마자 그 지역 대부분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서 먹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혀 교류가 없을 것 같은 다른 지역의 원숭이도 씻어 먹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세상 전체에 퍼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반성하게 됩니다. 사랑이 아닌 악이 세상 곳곳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 때문은 아닐까요?
작은 사랑의 시작. 그 마음이 100명만 넘어서도 다른 이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자신부터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관계만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전삼용신부-
한 여대생이 커플 시계를 맞추기 위해 선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커플 시계를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오다가 멀리서 남자친구가 동기여학생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자친구는 그 동기여학생에게 선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은 동기 여학생이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주었던 것을 양심상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본 여학생은 자신의 남자친구가 그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남자는 관계를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여자는 양다리 걸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교실에서도 여자는 남자를 본척만척 합니다. 남자친구의 왜 그러느냐는 말에 대꾸도 안 합니다. 나중에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자 친구는 남자친구에게 뭐 할 말 없느냐고 다그칩니다. 남자는 발뺌을 합니다. 여자가 그 동기 여학생에게 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남자친구는 자신이 동기 여자를 조금은 좋아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솔직히 말하기 싫어합니다. 그냥 별거 아닌 일이라고 변명합니다. 이에 여자 친구는 너무 힘들어 더 이상 못 하겠다며 헤어지자고 합니다. 남자의 자존심과 여자의 상상력이 만나면 이렇게 이별의 열매가 맺힙니다.
[참조: ‘대나무숲 웹드라마-팀플: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 ‘남자의 자존심과 여자의 상상력’]
자존심을 부리거나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두 사람의 미래가 과연 좋을 수 있을까요? 자존심이 사그라지고 믿음이 커지는 관계가 아니라면 그 관계는 언젠가 반드시 깨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항상 불 위에 있는 고기처럼 되어야합니다. 상대가 불 위의 고기처럼 먹기 좋게 구워졌을 때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불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을 붙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하셨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 자아를 죽입니다. 헛된 상상력을 죽이고 헛된 자존심을 죽입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먹히기 좋은 양식이 되어갑니다. 이런 관계라야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령의 불로 구워지기를 원치 않고 자신들의 행위로 하느님 마음에 들려고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결과는 자명합니다. 영원한 지옥입니다. 자존심만 세워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무당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비참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귀신들이 자신들을 이용하고 쓸모없어지면 해코지를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해코지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도 지금 성령의 불에 죽기를 원치 않아 뻔히 알면서도 지옥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불살라버려야 하는 죄의 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삶만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맛있고 매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자존심이 죄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런 것들을 태우지 않고 지니고 있으면 주님께 아무리 예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려도 즐겨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모기가 드리는 예배로 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통해 내가 자존심의 압제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면 하느님과 이웃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관계,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관계, 그것만이 영원합니다.

-조재형신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은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게 있을까요? 중독성이 강한 게 있습니다. 담배입니다. 많은 사람이 새해를 맞이해서 금연을 결심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금연을 포기합니다. 담배의 중독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4년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잘한 결정이고, 결심이었습니다. 술이 있습니다. 술은 모임을 원활하게 하는 효과가 있고,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음주문화가 필요하기에 금주하는 사람은 금연하는 사람보다는 적은 편입니다. 그렇지만 술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한 사람은 금주를 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술을 즐겨 마시는 편입니다. 금주까지는 아니라도, 절주가 필요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담배와 술과 같은 중독성이 있는 걸 이야기하지 않고 좀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선과 악’의 문제입니다. 기계는 고장 나면 고칠 수 있습니다. 기계는 입력된 명령을 수행합니다. 방 안에 있는 전기 포트는 물을 넣고 전원을 누르면 어김없이 물이 끓습니다. 벽에 있는 시계도 건전지가 작동하는 동안은 문제없이 시간을 알려줍니다. 매일 듣는 스피커도 그렇습니다. 전원이 연결되면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줍니다. 입력된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악을 행하는 자신을 봅니다. 바오로 사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선과 악을 넘나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계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넘나드는 인간은 세상 어느 존재보다 비참해지기도 하고, 세상 어느 존재보다 영광스럽기도 합니다. 신문과 방송은 인간의 비참함을 보도하기도 합니다. 테러, 폭력, 전쟁, 범죄, 자살, 마약, 도박, 모함은 인간의 비참함이 끝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존과 관련 없이 다른 생명을 죽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기 2번의 세계 대전은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념 때문에, 종교 때문에, 신분의 차이로 서로를 비난하고, 전쟁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다른 생명에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음악, 미술, 건축, 조각, 과학, 기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더 빛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글은 칼보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글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고, 글은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후손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삶을 전해줍니다. 인터넷은 지구촌의 모든 사람을 하나로 연결해 줍니다. 이런 모든 인간의 업적은 하느님의 선하심이 드러난 겁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걸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곧 더워지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표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자유의지를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찾는 것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하느님께서 곧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한때 가톨릭교회의 맏딸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지니고 있었던 프랑스 교회의 세속화와 급격한 쇠락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신 듯, 성모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이 나라 여러장소에서 발현하셨습니다.
1830년 파리에서부터 시작해 1846년엔 라살레트, 1858년엔 루르드, 1871년엔 퐁맹, 1876년에는 펠부아생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은 조금 생소한 이름의 퐁맹 성모님 발현지를 찾았습니다.
성모님께서 퐁맹에 발현하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년)의 조카루이 나폴레옹(1808-1873년)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1870년 7월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하고 굴욕적이었습니다. 불과 두달 후 파리가 함락되었고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1월 28일 프랑스는 막대한 금액의 전쟁 배상금을 독일에 지급하겠다는 문서에 사인함을 통해 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토록 어둡고 참담한 시기, 성모님께서 퐁맹에 발현하신 것입니다. 퐁맹은 라발(Laval) 교구의 북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종전이 선언되기 불과 열하루 전인 1월 17일, 독일군은 라발의 외곽까지 진군해있었으며, 총탄 소리가 온 종일 라발의 동서를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퐁맹 주민들에게 있어 가장 힘겹고 두려운 순간이었던 1871년 1월 17일, 저녁 6시에서 9시까지, 세 시간에 걸쳐 성모님은 퐁맹에 머무르시면서 당신 자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
당시 나이 12세의 외젠느(Eugene)와 10세의 요셉 바르베데트(Joseph Barbedettes) 형제는 창고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녁 6시경 외젠느는 날씨가 어떤가 보려고 창고 문을 열었는데, 이웃집 지붕 위 7-8미터 지점에서 빛나고 있는 엄청난 광채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온 몸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광채 속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인은 황금빛 별이 박힌 푸른 색깔의 길고 긴 망토를 입고 계셨고, 머리에는 검은색 베일을 쓰고 계셨는데, 그 위에 붉은색 줄무늬가 있는 금관을 쓰고계셨습니다.
외젠느는 아버지와 동생 요셉을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반면 요셉은 '오! 아름다운 여인!' 하고 외치며,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어머니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에 수녀님들을 불러 진위 여부 확인을 부탁하였지만, 수녀님들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고, 곧 주민 전체가 .
모여들었습니다. 본당 사제도 와 있었습니다.
본당 사제의 권고로 모든 이가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을 때, 성모님의 모습은 더 크게 변했고, 별들의 수도 늘어나 성모님의 옷과 주위를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묵주기도를 마친후 마니피캇을 노래할 때에는 1미터 넓이의 크고 평평한 흰색 띠가 성모님 발아래 펼쳐졌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글씨를 쓰는 듯, 금빛 글씨가 그 띠 위에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목격자들은 띠에 나타나는 문장을 한 글자씩 읽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 자녀들아, 끊임없이 기도하여라.'
성모 호칭 기도를 드리는 동안에는 이런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곧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모든 이들이 감격에 젖어 성가를 부르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실 것이다.'
그렇게 그날 성모님의 발현은 밤 9시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퐁맹 발현 소식이 세상에 퍼져나가기도 전에 성모님의 약속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다음날 독일군은 철수를 시작했고 열흘 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퐁맹 발현을 통해 우리는 성모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작은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잘 나가는 사람들, 번화한 도심이 아니라 가장 외지고 척박한 고을, 가잠 어둡고 힘겨운 순간을 견뎌내고 있는 작고 겸손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발현하셨는데, 이런 면에서 퐁맹에서의 발현이 가장 대표적인 발현인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인생에 있어 가장 어두운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지금 이순간 견딜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너무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 자녀들의 고통과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성모님께서 조만간 다가오실 것입니다.
울고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가만히 등을 두드려지실 것이며, 힘과 용기와 위로를 건네주실 것입니다.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늘 동반해주실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
-김기현신부-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구원을 체험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습니다.
그 질문을 마음에 담아 두고 하루를 보내면서, 두 가지 글귀가 마음에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미사 때 주님의 기도 다음에 있는 기도 가운데 있는 구절입니다.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 글귀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자비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넘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심을 바라보고 체험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자비로움은 때로 ‘이런 나의 모습까지 믿어주시고 받아들여주시는 겁니까.. 당신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자비에 의지해서 다시 시작하자.. 어제는 넘어졌지만 오늘은 새롭게 그분께 의지해서 가보자..’ 라는 마음을 가질 때마다, 그분이 나의 구원이심을 생각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한 가지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글을 읽다가, 그분이 대학에서 떠나 다른 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 느꼈던 일을 읽으면서입니다.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그분도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싶은 욕구, 불안과 불신, 두려움을 느끼셨던 것 같은데요. 힘들었던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감정을 파고들수록 문제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친구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때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상대방에게 조건 없는 사랑, 온전한 이해와 관심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그런 온전함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음이 좁아져 있을 때는 상대에게 더 많이 관심 받고 싶어 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모습을 원하고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망도 많이 했는데요.
얼마 전에 기도 안에서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고 믿어주시는 체험을 하고, 산책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집착하던 것들을 내려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느낌이 마음을 참 평화롭게 해 주었는데요. 아마도 그러한 체험은 공동체 안에 나와 너만 있다면, 또 내가 그 중심에 서려고 한다면 느낄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주실 수 있는 분을 중심에 모실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사랑 안에서 묶여져 있을 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상대방에게만 기대하고 실망하여 멀어지는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묶어주시는 모습이 또 저에게 있었던 작은 구원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나의 삶에 어떤 구원을 베풀고 계신지 생각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과일 가게 아가씨가 나를 부를 때
“잘 생긴 친구~” 라고 해서, ‘날 좋아하나..’ 하고 오해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통 모르는 사람 부를 때
‘미남, 미녀’ 라고 부른다고...

나는 아니야
-양승국신부-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에페4,26)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
-송영진신부-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4-56)”
여기서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라는 말씀은,
“날씨를 예측하는 일은 잘하면서” 라는 뜻입니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라는 말씀은,
“지금이 메시아 시대라는 것은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표현으로는 이렇게 되지만,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생각하면,
“왜 회개하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명백한 징조를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입니다.)
‘종말’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즉 ‘지금’은 메시아 시대이고,
종말이 완성되는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때이고, 회개를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뜻에 따라 다시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비가 올 것 같다고 생각하면 우산을 준비하고,
더워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 에어컨을 준비한다.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종말과 심판은 왜 대비하지 않느냐?”
또는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저축도 하고 여러 가지 보험에도 가입하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 대비한다.
그러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확실한 종말과 심판은 왜 대비하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날씨에 대한 대비는 잘하면서
종말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셨을까?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날씨 예측과 대비를 하는 것은
그 날씨를 주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고,
그들은 그것만 잘하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하느님 뜻’, 즉 회개, 사랑 실천 등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사실 ‘위선’도 넓은 뜻으로는 ‘어리석음’에 포함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위선에 빠지지 않고 진실하게 생활합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이 말씀에는 다음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1) 회개를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된다.
2) 회개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실천하지 않느냐?” 라는 뜻입니다.
‘올바른 일’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회개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라는 말은, ‘회개’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것과
‘구원’을 받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일차적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애쓰는 일, 즉 선교활동도
일차적으로는 ‘나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그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만일에 부모가 자녀들에게 성당에 잘 다니라고 훈계하면서
자기는 성당에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놀러간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그 훈계는 아무런 쓸모없는 말이 될 뿐입니다.
또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자기 자신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선교활동도 역시 ‘위선’이고,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회개해야 합니다.
남이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보속의 경우에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는 말은 선교활동을 할 때에 특히 명심해야 하는데,
‘내가 먼저’ 회개해야 다른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먼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세상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모가 먼저 회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라는 말씀은, “심판 받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느님을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재판관에게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법정에 언제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서 ‘도중에’ 라는 말은 ‘바로 지금’이라는 뜻이 됩니다.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자신의 회개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 안 되고, 회개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오는 ‘감옥’이 지옥이라면,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아무도 그곳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지옥은 회개하는 곳도 아니고 보속하는 곳도 아니고,
그냥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감옥’이 연옥이라면, 보속을 완전히 다 마친 뒤에는,
즉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은 뒤에는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우리가 연옥 영혼들의 보속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오랜 경험으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안다. 언제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지를 예측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이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신부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 왔다오.”(아가 2,10-12)
여기서 신부는 교회이며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봄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징조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본질을 알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도 또한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에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결국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재판관은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모두 치루기 전에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옥리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자.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 56)
-한상우신부-
단풍은 점점 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위에서 아래로
순리대로
흐릅니다.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지친 우리를 단풍이
위로해줍니다.
예수님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풀고 있는지를
제 자신에게
다시 묻게됩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
허약한 이 시대의
우리모습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감출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민낯입니다.
어디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아픈
자화상입니다.
서로를 품어주고
사랑하는 데서
우리는 잃어버린
길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단풍에서
이분법에 갇혀있는
우리가 비로소
자유로워지길
기도드립니다.
이 시대의 기도는
욕심과 어리석음을
내려놓는 새로운
변화이며 요청입니다.
이 시대를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
낮은 곳을 향하시는
하느님을 만납시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미사 말씀들 안에서도 대립되는 개념들 사이의 긴장이 보입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루카 12,56).
지금보다 훨씬 더 자연 현상에 영향을 많이 받던 시절에는 경험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 역시 오랫동안 축적된 시간의 두께와 함께 고스란히 농축되어 지혜로 쌓여 왔습니다.
농사나 목축업 등에 종사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은 물론, 사막 가까이에서 천재지변이나 자연재해에 쉽게 노출되는 유목민들에게도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은 생명, 더 나아가서는 부와 직결된 문제였지요.
"과연 그대로 된다"(루카 12,55.56).
얼핏 들으면 참 긍정적이고 좋은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읽는 자연 현상이 그대로 된다니 상당한 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변화와 순리에 적절히 반응하고 대응할 줄 안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두 차례나 반복하시면서 또 다른 이치에 대해 물으십니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개입도 그친지 오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침묵하던 긴 시기동안 이스라엘은 절망과 무력감 속에서도 메시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지요.
느닷없이 등장한 동방박사의 별 이야기나 구세주 탄생에 대한 목동들의 증언, 구세주를 만났다는 시메온과 한나의 증언,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진정한 메시아시라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 주시는 가르침과 기적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자연 현상 못지않게 질서정연히 이루어져가는 메시아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던 겁니다. 단,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야 보이는 순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이고 육적인 삶과 직결되는 자연 현상, 세상 이치에 밝은 이들이 오히려 영적이고 신앙적인 하느님의 순리, 섭리에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모습이 안타까우셨던 겁니다. 당장의 이익과 관계 없어 보이는 우주적 순리, 시대 흐름을 통찰하는 지혜는 성전 안 깊은 지성소에 하느님과 함께 고이 모셔 두고, 율법이 정한 때에만 기억하고 찾고 경배하며, 삶의 각성과 변화의 영역에서는 철저히 분리한 탓이지요.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
같은 내용이 등장하는 병행구절인 마태복음(마태 5,23-26)에서는 이웃과의 화해를 촉구하는 의도로 이 말씀을 배치했다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대의 표징과 연결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아직 가는 "도중에" 있을 때, 아직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마음을 되돌리도록 힘쓰라는 말씀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는 두 법칙, 두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곧 "선, 좋은 것, 하느님의 법, 이성의 법"과 "악, 죄, 다른 법, 죄의 법"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23).
영적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체험하는 여정입니다. 선하고 진실되며 아름다운 하느님의 손길이, 내게서 떼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긋지긋한 죄의 습성들과 약함에게 번번이 가로막혀 버립니다. 추구하던 하느님의 이치는 탐욕과 무절제한 욕구로 표현되는 세상 이치에 밀려나고 말지요.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죄의 법이 승리할 때가 더 잦은 것 같기도 합니다.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로마 7,21)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바싹 다가 붙어 있습니다.
세상 이치에 너무 몰입하고 집중하고 밝을수록, 그래서 안전과 부와 힘으로 대비하려는 욕망이 클수록 죄의 법은 기승을 부릴 겁니다. 거의 가까이 왔으니 조금만 더 오라고, 이 토대를 딛고서 똑똑해지고 부자되고 높아지라고 부추깁니다.
반면 선하고 좋으신 하느님의 이치는 내려가라고, 비우라고, 나누라고, 대신 죽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이지요. 은총으로 우리 안에 작용하는 이성과 사랑의 법이 우리를 그리로 끌어당깁니다.
그 앞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이에게, 아예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는 이에게 예수님께서 안타깝고 애처로워 한 마디 하십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좋고 선한 법과 죄의 법 사이의 승부는 사실 이미 판가름 났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로마 7,24) 있느냐고 처절하게 질문을 던지고는, 곧바로 이렇게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어쩌면 질문과 답 사이의 여백이 길어지면 우리가 너무 괴롭고 비참할까봐 서두르는 듯 보일 정도입니다.
선과 악의 시소 게임, 세상 이치와 하늘 나라 섭리의 파도타기는 영과 육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찌르고 잡아끌고 뒤흔들고 혼란에 빠뜨리기도 할 것입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결말은 이미 우리를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도중"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을 때 돌아서서 시대의 징표에 마음을 열고 우주의 표정을 살피면 좋겠습시다. 아직 "도중에" 있을 때까지만 입니다.

탄식도 하고 찬탄도 하는
-김찬선신부-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우리 인간성에 대한 비관적인 기조를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그러니까 선에 있어서 너무도 무력하고 무능함에 대해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비참한 것은 선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그런데 실은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바라는 대로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에 우리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바라면서도 선행을 하지 못하는 것에 우리 구원이 있다는 역설입니다.
그제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도 많이 내렸다고 했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래서 자신이 부처,
곧 깨달은 자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증득自己證得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불교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구원자로 믿습니다.
그런데 구원받는다는 것은 은총받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주는 분이 있어서 받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주시는 하느님이 계셔서 받는 것인데
하느님이 구원을 주시되 무상으로 주시기에 은총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요즘 계속 읽는 로마서에서 이것을 줄곧 강조합니다.
우리의 공로나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구원을 주시기에 이것을 믿기만 하면 은총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아무튼 저는 인간이란 존재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하나는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이라는 것을 생각하는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선을 바라고 갈망하는지 그것입니다.
없으니까 바라는 것이고 있으면 바라지도 않겠지요.
그렇지만 없는데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없는 것을 어떻게 바랍니까?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외계인이 없는데 외계인이 있는지 없는지 어찌 관심을 가집니까?
지구에 인간이 있으니 다른 별에 인간과 같은 존재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것인데 이 추측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능력이지요.
한자어로 추측推測이란 것이 바로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 아닙니까?
조선 후기 우리의 철학자 최한기(1803-1879)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의 기능은 본 것을 미루어(推) 보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測),
들은 것을 미루어 듣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익숙한 것을 미루어 익숙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있는 것을 미루어 없는 것을 헤아리는 것이니,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이 미루고(推) 헤아리는(測) 것 가운데 한가지일 따름이다”
우리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렇게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을 봅니다.
첼라노가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들이 그에게는 선이었다."라고 프란치스코에 대해 얘기하듯
우리는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을 있게 한 '이성과 원인'을
보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선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2첼라노 165번 참조).
그러므로 우리 자신만으로는 비참하기에 탄식을 하지만
은총으로 구원받는 우리는 복되기에 찬탄을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27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