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2019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49-53)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며, 한 집안의 식구들이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경 안에서 일반적으로 불은 더러움을 태워서 정화시키는 것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킵니다.또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불’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열망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는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미카 예언자는 구원의 때에 앞서 재난과 분쟁의 시기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가족들마저 신앙 때문에 갈라졌고,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분열과 불화가 마지막 때를 특징짓는 사건이 되고, 각각의 사람들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사건이 됩니다.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언제나 도전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을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에 큰불이 있어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열정으로 역사가 만들어지고 세상이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불이 꺼진 사람이 있습니다. 삶에 의욕이 없고 쉽고 편한 것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마음의 불을 다시 켜기가 쉬울까요? 본인 스스로 엄청난 노력이 있지 않고서는 그 불을 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에 큰 아픔이 있더라도 스스로 인내하면서 그 시간을 이겨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가장 큰 실수는 가만히 있는 실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은 바로 이런 유혹을 합니다. 도전을 못 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목을 자신의 등 껍데기 안에 집어넣을 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앞으로 나갈 때는 번쩍 고개를 들었을 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개를 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뜨거운 불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화재 사건이 많이 볼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방화범이 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 마음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오신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 안에서 분열이 생기기도 하고, 그 안에서 아픔과 상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세상의 뜻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순간의 만족과 조용한 평화를 위한다면서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주님의 일을 포기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아닙니다. 활활 타오는 불처럼 주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가짜 평화가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구원과 함께 얻게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시간이 없어서 여행을 갈 수 없지만, 이제 11월이 되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전국 지도도 한 장 사기도 했지요. 이런 계획을 말하니 어떤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누구랑 여행가게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혼자 가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혼자서 무슨 재미로 여행을 가요?”라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와 함께 여행 가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또 함께 간 적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함께 가기보다는 혼자만의 여행이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내가 기준이 됩니다. 또, 혼자의 여행은 남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서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침묵 속에서 주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더 겸손해집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서 주님을 만나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주님 체험도 뜨겁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삼용신부-
인도의 빈첸시오회 수도사제이자 유명한 피정 강사인 안토니오 사지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그분을 잉태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었습니다. 당시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사고 후 아기의 움직임이 사라졌습니다. 의사들은 사고 후에 아기가 죽었거나 혹시 태어나도 장애아로 태어날 것이기에 낙태를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게 해 주십시오. 장애아라도 좋습니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 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아기가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라 약 한 번 안 먹어보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이 때문에 지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제가 된 후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 위의 90%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의사들은 3개월 정도 살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미사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머니의 삶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 어머니께서 사시든 돌아가시든 오직 당신 뜻대로 해주소서!”
어머니는 수술 후 7일 만에 완전히 치유되셨고 몇 년이 지나서도 계속 건강하게 사십니다. 어머니는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너를 보호했었다. 이제는 네가 나의 치유자가 되었구나. 처음에는 내가 너의 치유자였다. 그런데 이제 네가 나의 치유자다.”
[출처: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사지, 바오로 딸]
만약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먼저 받지 못했다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은 만큼 할 수 있습니다. 불이 저절로 붙여지지 않는 것처럼 사랑도 받아야만 그것이 나를 태워 이웃을 따듯하게 합니다. 사랑은 그래서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사랑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그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불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깨어있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깨어있으려면 주인이 항상 함께 있는 것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불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불로 나 자신을 태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뜻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임을 알아도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미워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깁니다.
사랑은 피흘림입니다. 어머니의 피흘림이 자녀를 탄생시킵니다. 피흘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세례는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죽을 줄 알아야 새로 태어날 수 있기에 성령을 보내는 십자가의 죽음이 곧 세례인 것입니다. 죽을 줄 모르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배운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에 살 자격을 주십니다.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사랑을 가져야합니다. 이 사랑을 받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이는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기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동물들에게 키워진 아이들을 보여준 ‘서프라이즈: 모글리 현상’에서 아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아이들의 표정이 100이라 하면, 동물들에게 자란 아이들의 표정은 10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웃고 울고 화내는 표정조차도 누군가의 표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표정은 대부분 부모들이 넣어준 것입니다.
사람은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내어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사랑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해야 행복한 것을 안다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조재형신부-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면 김이 납니다. 계속 끓이면 뚜껑이 움직이다 열리게 됩니다. 뚜껑을 다시 닫는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이 계속 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조치는 불을 줄이는 겁니다. 그리고 뚜껑을 닫으면 됩니다. 그러면 뚜껑은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뚜껑이 열리는 현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뚜껑이 열리는 원인이 중요합니다. 서양의학은 현상을 따라가면서 치료합니다. 장점은 효과가 빠른 점입니다. 그러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재발할 우려가 있습니다. 동양의학은 현상이 일어난 원인을 따라가면서 치료합니다. 장점은 부작용이 적은 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립니다. 본인의 노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동양의학은 ‘정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평소에 그렇지 않은데 저도 급한 성격에 ‘뚜껑’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수양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욕심이 많아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원인을 따져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뚜껑을 닫아 버릴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힘과 권위가 강하기 때문에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원망은 휴화산처럼 마음 안에서 살아있습니다. 뚜껑은 엉뚱한 데서 열리곤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원인을 생각하면 해결되곤 합니다. 제 마음 안에 있는 분노, 원망, 교만, 시기, 질투, 욕망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뚜껑은 언제나 열릴 준비가 돼 있음을 압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현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가족이 서로 갈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다투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 처지가 원망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죽음이 온 것은, 세상에 분열과 전쟁이 온 것은, 세상에 가난과 억압이 온 것은, 세상에 절망과 고통이 온 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산이 많은 형제가 더 많이 갖겠다고 소송하고, 싸우는 걸 봅니다. 부모님을 모시지 않고, 서로에게 짐을 지우려고 하는 걸 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을 따른다면 뚜껑이 열리는 현상은 사라질 겁니다. 가난한 형제들이지만 기쁘게 나누는 걸 봅니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픈 아이를 입양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로, 남미로 선교하러 가는 분이 있습니다. 충분히 수고했고, 이제는 편하게 쉬어도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힘차게 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뚜껑이 열리는 체험을 할 겁니다. 그런 분들도 원망과 아쉬움에 눈물 흘릴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에 곧 마음의 평정을 찾습니다. 중요한 건 ‘뚜껑’이라는 현상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습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향한 열정으로 충만해있습니까?
-양승국신부-
몽생미셸(le Mont Saint Michel)이란 매력적인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해변, 작은 바위섬 위에 건립되고, 미카엘 대천사 성지로 명명된 이 곳은 오래전부터 순례객들로 붐볐더군요.
성지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708년 어느날 밤 오메르 주교님께서 잠을 자고 있는데, 미카엘 대천사가 꿈에 나타나, 저 건너 바위섬 위에 자신을 기념하는 성전을 지으라고 명했답니다.
두번이나 거듭 나타나 신신당부를 했건만 오메르 주교님은 개꿈이려니 생각하고 무시했답니다.
그러자 세번째로 나타난 미카엘 대천사는 주교님의 머리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대고 백만볼트 ㅋㅋㅋ 전류를 통과시켜 구멍이 나게 했답니다. 그제야 정신을 바짝 차린 주교님은 섬에다가 성전을 건립하기 시작하셨답니다.
우리나라 제부도처럼 조수 간만의 차가 엄청나서 밀물때는 엄청난 속도로 바닷물이 밀려들었다가 썰물때는 빠져나가는 신비스런 섬인데다, 풍광마저 환상적이어서 수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답니다.
때로 순식간에 너무 많은 순례객들이 몰려들어, 인파에 눌려 압사하는 경우, 썰물 때를 이용해,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을 통해 성지로 걸어가다가,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는 밀물에 휩쓸려 죽는 등,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한때 이런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들이 떠돌았답니다. '몽생미셸 성지 순례를 계획하는 사람은 출발하기 전, 유언서를 작성하고 떠나십시오!' 물론 요즘은 안전한 다리가 놓여 전혀 그럴 일이 없답니다.
'유언서 작성해 놓고 성지순례를 떠나라.'는 말이 오늘 하루 제 순례 여정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종신서원과 더불어 유언서를 작성합니다. 본인 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동산, 부동산, 저작권 등 제반 재산에 대해서는 수도회에 귀속시킵니다. 그 어떤 인위적인 연명치료를 거부합니다. 각막 및 장기는 기부합니다. 시신은 화장후 수목장을 원합니다. 등등.
유언서를 작성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고 비장해지더군요. 동시에 뜨거워지고 경건해집니다,
조만간 다가올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더 뜨겁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남아있는 하루하루를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더군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삶을 묵상하다보니 그녀의 생애 역시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24년 짧은 생애를 사신다는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아깝다고 느꼈던지,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열심히 충만히 사셨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열정으로 따지면, 소화 데레사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열혈 소녀였고, 열혈 수녀로 살다 가셨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언니가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은 갈멜 수녀원에를 얼마나 들어가고 싶었던지, 나이도 안된 소녀가 입회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원장수녀님의 대답은 노! 본당 주임 신부님? 뭐가 그리 급하냐? 조금만 기다리거라! 주교님! 허락해줄 수 없으니 기다리거라!'
상황이 그 정도면 그쯤에서 포기하고 기다려야 마땅한데,이 열혈소녀는 교황님을 찾아가 관면을 청합니다.
청원의 이유는 파리대학교 입학이 아니었습니다 수녀원 입회 때 적용되는 나이 제한에 대한 관면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생활과 영적생활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소화 데레사였습니다.
오늘 우리 내면과 정신,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열망은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평화를 누리려면
-반영억신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 지리라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속셈을 가려내어 거짓평화를 무너뜨립니다. 결국 각각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 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하더라도 영혼이 세속이라는 습기에 젖어들면 영혼의 불이 타오를 수 없습니다. 열정의 불이 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송영진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러 왔다.”,
또는 “나는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러 왔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주시는 분이고, 또 말로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안타까움’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복음 선포 후에도, 그리고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어도, 크게 변한 것 없는
인간 세상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안타까움을 ‘무능력’으로 오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은 인간 세상의 회개와 복음화에는 소용이 없는 것인가?”
“정말로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인간 세상의 일에 개입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시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의 답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다.”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을 한 마리라도 잃으면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양을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루카 15,4).
목자의 기쁨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양이 자기 발로 스스로 목자를 떠났다면,
또 목자를 다시 만난 뒤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목자는 양을 억지로 붙잡아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 때문에 크게 슬퍼할 것입니다.
그때의 그 슬픔도 사랑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에도,
먼 고장에서 방종한 생활을 할 때에도,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일 때에도,
마침내 제정신이 들어서 뉘우치고 집을 향해서 걸어갈 때에도,
작은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한 일들은 모두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한 일들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부터 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내버려 둔 것은 무관심도 아니고 무능력도 아닙니다.
아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준 ‘사랑’입니다.
비유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내버려 둔 것은 아니고,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에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고, 타이르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할 때에도, 재산을 다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일 때에도,
그를 찾아가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타일렀을 것입니다.
만일에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억지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면
종들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작은아들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회개’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도 많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많은데,
그 말씀들은 모두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타이르는 것과 같은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이르는 말씀이고,
돌아가는 방법과 길을 알려주는 말씀이고, 회개하고 돌아가면
틀림없이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그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용서를 했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일은
이미 주어진 아버지의 용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신 일입니다.
(죗값을 대신 치르신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인류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v 따라서 우리의 회개는 죗값을 치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주어진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고해성사의 ‘보속’은 용서를 받은 다음에 하는 일입니다.
처음에 받는 세례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성사는 전에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고 깨끗해지는 성사이기도 한데,
우리가 세례를 받은 뒤에도 계속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용서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보속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라는 말씀은,
십자가 수난 때의 고통에 대한 말씀으로도 해석되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그 고통을 포함해서, 인류 구원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예수님이 겪게 될 고통과 슬픔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을 보는 고통과 슬픔......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은 아직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보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인류 구원 사업 전체를 생각하면, 또 영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고통과 슬픔을 겪고 계시고,
그런 뜻에서 십자가는 지금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도 십자고상을 벽에 걸어 놓고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슬픔만 드리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지금 나를 보시면서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나의 회개는 충분한가? 나의 신앙생활의 수준은 어떠한가?”)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49-53: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주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신다. 이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지르시는 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이 불로 채워주시도록 청하도록 하자.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한다고 한다(로마 12,11 참조). 또한 이 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동반자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배운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다니며 속된 것,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것을 단련시킨다. 사랑은 그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다. 그래서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다. 사랑은 환해졌고 정의는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셨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는 피와 순교로 이루어지는 세례인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다. 이 세례는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는 숭고하고도 복된 세례이다. 즉 당신 육신의 죽음을 말한다. 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이 고통을 겪고 수난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공경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신앙을 가지면 가족과 불화하라고 하신 것일까? 만일 가정을 깨뜨려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지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면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자기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를 저주하신 분이(신명 27,16) 부모를 버리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고 그 다음이 사람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더 잘 공경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는가?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어찌 부모는 알아보겠는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되면 나의 이웃도 올바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서 올바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 이 둘의 싸움을 말한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
-한상우신부-
뜨거운 불처럼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영원한 사랑을
지향하는
예수님의
삶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타오르는
사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영혼도
예수님의 삶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타올라야 세상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우리의 차가움과
어둠을 먼저
밝힙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타오르는
복음의 불을
보아야합니다.
타오르는 불로
우리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불로
흐지부지한
그리고
뜨뜻미지근한
우리 삶에
해답을 주십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평화와 분열, 죄와 의로움, 죽음과 영원한 생명 등 상반되는 가치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집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성경에서는 불이란 표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대목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계약(창세 15,17)에서, 야훼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소명을 주신 불타는 떨기 대목(탈출 3,2)에서, 시나이 계약(탈출 20,18)에서,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일당의 대결(1열왕 18,38)에서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불은 음식을 익히고 단단한 금속도 부드럽게 변화시킵니다. 데워주고 온기를 유지해 줍니다. 또 닿는 존재를 태워 소멸시키기도 하고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불은 옮겨 붙은 대상과 둘로 가를 수 없는 한 덩이가 됩니다. 곧 타자를 불이 되게 합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50)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묵시 3,16) 세상에 당신 몸을 던져 불을 붙이시려는 겁니다. 세상 창조 이후 내내 뜨겁게 다가오셨던 성부 하느님과 열렬히 한 몸이 되지 못한 미지근하고 무심한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십니다. 당신 스스로 불이 되기로 하시는 겁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은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오셨습니다. 가족 안에서, 민족 안에서 서로 맞서고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 종교를 갖는 세태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진짜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분열은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던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를 통해 기존의 관념이 찢겨져 나가는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는 이들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이 불처럼 율법을 삼켜 사랑 안에 한 덩어리로 타오르는 광경에 경악할 것입니다.
가족, 민족,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끈이 온갖 불의와 탐욕, 배타적 우월주의, 이기심, 허영이라면 그 안의 누군가가 각성하고 회개하여 불이 되어야 합니다. 위장된 평화에 안주하거나 거기서 얻은 부정한 이득으로 배불리기보다 차라리 맞서고 갈라서고 찢겨나가야 합니다. 그 틈새로 새어든 불길이 모두를 소독하고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도록 내맡겨야 합니다.
유다인들, 특히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등 사회적 종교적 기득권층은 예수님께서 당신 친히 사랑의 불이 되어 이 세상에 지르신 불을 꺼버리고 싶어했지요. 유다교의 견고한 성역은 예수님에게서 촉발된 "새로운 길"(사도 9,2)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분노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신념 표출이니까요. 새로움은 늘 기존 질서를 진지하고 진정성 있게 지켜온 이들의 저항과 거부를 맞닥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건재합니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온 세상 곳곳으로 번져나가 태우고 뜨겁게 하고 정화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게 진리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 불 앞에서 거짓 평화는 검불처럼 타서 공중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악으로 결집된 관계도 무너지고, 선을 가장한 욕망도 형체 없이 녹아버릴 것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천 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피흘리고 박해받고 순교한 모든 증거자들 안에서 예수님은 짓눌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 한가운데서 제도와 고정관념과 물신주의로 탄압받는 가난한 이들, 의인들 안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짓눌리고 계십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란 순결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희생제사의 불길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신 그 순간에 시작되어 인류를 악의 손아귀에서 모두 다 빼내어 완전히 정화하시고 완전히 성화시키실 날,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고대하고 희망하는 날이지요. 비록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피조물 안에서 짓눌리고 계시더라도, 결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로 거짓 평화에는 분열을, 거짓 결속에는 새 질서를 선고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와 의로움에 대해, 죄의 결과인 죽음과 의로움의 열매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종으로 철저히 매여 살아온 이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의롭게 한다는 가르침이 낯설고 위험천만한 모험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게 하십시오"(로마 6,19).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성화에 이르는 방법으로 차가운 "율법서"를 제시하지 않고 뜨거운 믿음, 뜨거운 사랑으로 얻는 "의로움"을 제시합니다. 단죄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뜨거운 불 속으로 다가오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로마 6,23).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의 그 불에 정통으로 맞은 이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불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활활 타올라 흠도 티도 없이 순결해진 영혼은 그 자체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불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 불길을 통해 누리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먼 미래의 선물이 되기 전에 이미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선물입니다.

싸우는 것도 힘이 있어야
-김찬선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밤새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런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성을
비관적이랄까 성악설적이랄까 아무튼 안 좋은 쪽으로 성찰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싸운다.
인간은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싸운다.
싸우지 않으면 죽을 때가 다 된 것이다.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인 것입니다.
실로 양로원에 가면 그렇게들 싸우시는데
돌아가실 때가 되면 싸우시지들 않습니다.
그래서 양로원 종사자들끼리는 농담반진담반으로
아직 힘이 있으시니 싸우신다고 좋게 얘기합니다.
저도 힘이 있으니까 싸운다는 면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 싸움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지만
하느님 중심적인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의나 공동선을 위해 싸운다고.
실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 이익과 관련해서는 조그만 손해가 와도
그렇게 사납게 싸우지만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사회정의나
하느님 나라의 의와 관련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자기에게 손해가 올까봐 몸을 사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와 상관없는 일,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나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일에는 힘을 조금도 쓰고 싶지 않은 것인데
다르게 얘기하면 남의 일로 내 평화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평화를 좋아하고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고요.
또 다른 차원에서 싸우는 것을 싫어하고 평화를 택하기도 합니다.
나하고 가까운 사람과 싸우기 싫어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와 자식 간에 또는 고부간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싸우려 하지 않는데 사실은 거짓 평화입니다.
왜냐면 사실 자기가 싫은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때문에는
그렇게 잘도 싸우면서 사회정의나 하느님 나라의 의와 관련해서는
싸우려들지 않고 그런 것들로 관계가 깨지는 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거짓 평화일 뿐 사랑을 해서 싸우지 않는 것이어야
진짜 평화이고, 하느님 나라의 의와 부합해야 진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오늘 주님 말씀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희생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의를 위해서는 불처럼 일어나 싸울 수 있는 힘,
갈등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이런 힘이 신앙인에겐 있어야 하고,
이런 힘을 바탕으로 싸워 높은 차원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힘은 어떻게 얻을 수 있고, 어떻게 지닐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자기애를 넘어서는 참 사랑, 더 큰 사랑이 있어야만 되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바른 말을 잘하고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정의감이 대단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많은 경우 그들은
싸움꾼에 불과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의 사랑, 성령의 불에 의한 정의와 평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랑에 의하지 않으면 분열만 있지
분열을 이겨내고 넘어서는 일치와 평화는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일부 사람과 갈라서게 된 것이 바로
평화를 지향하지 않는 정의, 어쩌면 정의도 고작 불의를 고발하는 정의에
불과하기에 평화를 지향하는 프란치스칸으로서 같이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정의와 평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오늘 주님 말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