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10. 20. 18:53

2019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루가 12,13-21)


You fool, this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to whom will they belo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유산 때문에 갈등을 겪는 형제들이 예수님께 중재를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어느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자, 더 큰 곳간을 지어 곡식을 모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흡족해서 자기 자신에게 말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으려고 그 부자는 틀림없이 많은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땅도 있어야 하였겠고,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사람을 고용해야 하였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고 또 미래를 대비하려고 그 소출을 저장하려는 사람에게, 오늘 목숨을 거두어 가시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야속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자의 모습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미래를 준비하려고 애를 쓰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이 모아 놓은 것을 믿고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누리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것을 허락하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을 사용할 때도 나와 내 가족들의 필요와 안위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과 이웃의 필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고,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길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두 단어가 합쳐져서 더 깊은 의미가 있는 단어들이 참 많습니다. 가을과 하늘, 이 둘을 따로 분리하면 별 느낌이 없지만, 붙여서 ‘가을하늘’이라고 하면 괜히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나무와 잎, 이 역시 분리해 놓으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지만 ‘나뭇잎’ 하면 낙엽 지는 어느 가을을 떠올리며 옛 추억 속에 빠지게도 됩니다. 이렇게 따로 떼어 놓으면 별 의미가 없지만 합치면 큰 의미가 있는 단어들이 이밖에도 참으로 참 많습니다. ‘옛사랑’, ‘기찻길’, ‘눈꽃’…….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있음에 훨씬 더 깊은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인간 역시 혼자 있는 것보다 함께 있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함께할 때 자기 입장만 내세운다면 결코 함께할 수 없게 되겠지요. 여기에 상대를 부정적인 마음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면 짐으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만 내세우는 모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 즉 탐욕에서 시작됩니다. 더불어 둘이 하나를 이루어 낼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앞선 단어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서 의미 있고 예쁜 단어가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때 스스로 생각지도 못한 힘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는 짐이 아닌 힘이 되어주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거룩한 목적이 있어서 내려오신 주님께서는 재산 다툼을 해결해주는 재판관이나 중재인이 되는 속된 일을 거절하십니다. 이는 우리 역시 탐욕의 죄를 멀리하고 대신 거룩한 일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함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형제는 계속해서 상대방에 대한 나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같은 핏줄이지만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주님께 어떻게 말했어야 할까요?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가 아닌 ‘제 형더러 제 유산을 나누어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탐욕을 멀리하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놀라운 주님의 일을 이 세상에 펼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제각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나 모든 이가 그것을 볼 수는 없다(공자).



이해하려는 노력.

친한 신부들이 종종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책 출판하면 얼마나 벌어? 그런데 책값이 너무 비싼 것 아냐?”

책값이 비싸니 수입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꽤 많은 분이 책값이 비싸다고 하지만, 책 한 권 출판해서 10,000권 이상 팔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이 이 정도 팔려도 우리나라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세를 받게 된다는 것은 알까요?

일 년에 책 한 권 출판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도 함께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에 물가도 아주 비쌉니다. 한 끼 식사비도 만만치 않고, 커피 한 잔 가격도 5,000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면서 오랜 시간 고민해서 출판한 책에 대해서는 비싸다고 말합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조금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있지 않아서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곤 합니다. 조금 더 알기 위해 노력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세상이 되면 어떨까요?                   

무소유보다 무욕을 지행하라

-전삼용신부-


임금님이 한 농부에게 “네가 하루 종일 걸어서 돌아온 땅을 내가 네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왕의 약속을 들은 농부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자기의 땅을 넓게 얻기 위해서 열심히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뛰기도 했습니다. 조반 먹을 생각도 잊었습니다. 점심때도 넘기며 열심히 걸었습니다.

      ‘한 발자국 더 걸으면 그만큼 내 땅이 넓어진다.’

      이런 생각으로 몸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해가 서산에 지는 것을 바라보며 입에서 단김이 올라오고 앞이 가물가물 현기증이 나는데도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태양이 서산에 넘어가는 순간 임금님 앞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 체력이 다 소진되어 임금님 앞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우리 안의 자아를 임금으로 모시면 이런 결말을 맞습니다. 자아는 돈에 대한 욕심과 육체에 대한 쾌락과 사람을 심판하는 교만으로 우리 각자를 저렇게 이용하고 죽입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예쁜 여자와 사귀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자아를 섬기는 것임도 몰랐습니다. 그저 짝꿍이 예쁘니 행복했던 감정만 믿고 그런 자아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중학생 때 이런 짓도 하였습니다. 혼자 짝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해봤지만 속으로는 많이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중학교를 졸업하고 겨울방학이 되었습니다. 편지로라도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창피해서 같은 편지를 여러 명에게 보냈습니다. 물론 그 애들은 제가 같은 편지를 했다는 것을 자기들끼리 연락하여 알고는 아무도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 찌질 했던 시절이고 매우 창피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대학에 가니 제가 좋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괜히 좋아했다가 더 예쁜 여자가 나타날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리고 더 높은 곳을 바라봤습니다.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생각하며 마음 졸였습니다. 뭐 이도 저도 안 됐습니다.

      사제가 되니 모든 고통은 욕구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자아가 자아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욕구를 자아내는 자아를 죽이기 위해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성당에 나와 그 자아의 욕구를 채워 주십사고 청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청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돈이 많은지, 적은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난 관심 없는데?”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돈을 다시 찾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욕심은 버리고 영혼구원에만 힘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영혼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가 행복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화분에 물을 주지 못하고 며칠을 밖에서 지내야 했을 때의 마음 아픔 때문에 차라리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그 화분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의 평화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평화가 오지는 않습니다. 만약 평화가 왔다면 그 화분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소유가 아니라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생깁니다. 이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원하는 것이 있든 없든 고통스럽습니다. 무소유를 지향하지 말고 무욕을 지향해야합니다. 욕구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부족함 없이 살아야 나를 노예로 삼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믿고 조금씩 노력하면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보았고, 운전한지 28년이 넘었습니다. 국제 운전면허로 운전하지만, 뉴욕에서는 다시 운전면허 시험을 봐야 합니다. 한국과는 도로 사정이 다르고, 운전 법규도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필기시험을 보고, 도로 주행 시험을 봐야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운전은 분명 손으로 합니다. 핸들을 잡는 건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전은 눈으로 하는 거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눈으로 운전하는 게 맞습니다. 신호를 보고, 차선을 보고, 표시판을 보고, 사람을 보면서 운전합니다. 도로의 사정이 다르고, 교통 법규가 다를지라도 정확하게 보고, 판단하면 한국에서도 뉴욕에서도 운전은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됩니다.

 

차를 운전하는 건 눈이고, 눈의 판단에 따라서 손이 핸들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차를 운전해서 목적지로 가는 건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목적지를 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운전하는 차는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됩니다. 난폭운전은 본인은 물론 주변의 운전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불법운전은 교통사고의 원인이 됩니다. 과속, 중앙선 침범, 신호위반은 조금 빨리 갈 수 있겠지만 자칫하면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로 가기도 합니다. 음주운전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음주한 사람은 운전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운전하는 차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준법운전은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준법운전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안전운전은 행복한 운전의 시작입니다. 피곤하면 충분히 쉬었다 갑니다. 장거리 운전이 있다면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앞차와 뒤차의 운전을 살핍니다. 과적 차량이나 대형 트럭이 있다면 피해갑니다. 추월하려는 차가 있다면 자리를 비켜 줍니다. 안전운전을 하는 사람은 주일 미사뿐만 아니라 평일 미사에도 기쁘게 참례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양보운전은 짐을 든 어르신을 모셔다드리는 운전입니다.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봉성체에 봉사하는 운전입니다.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운전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운전입니다. 양보운전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재물도, 명예도, 권력도 기꺼이 내어놓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재물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나쁜 마음으로 재물을 사용하면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됩니다. 선한 마음으로 재물을 사용하면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하늘에 재물을 쌓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탐욕과 독점으로 상처입은 우리 사회에 가장 좋은 치유제는 소욕지족의 신선한 바람입니다!

 -양승국신부-

 

살아생전 법정 스님께서 평소 각별히 존경하던 자운 스님께 장문의 문안 편지를 올렸더니, 스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답장을 보내셨더랍니다. 그 답장이 유명합니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소병소뇌(少病少惱)!’

 

 해석하면‘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며, 작게 앓고 작게 걱정하라!’입니다.

 

 평소 우리가 언제 행복해 합니까? 물론 엄청나고 대단한 대성공에 행복해 합니다. 로또 당첨 같은 기적 같은 일 앞에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기란 벼락맞는 것 보다 더 힘듭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된 행복은 작은 것에서 샘솟는 것 같습니다. 힘겨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퇴근했을 때, 가족들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한 마디에 우리는 행복해 합니다. 내 작은 성취와 작은 성공에 함께 기뻐해주는 동료의 모습에 우리는 행복해 합니다.

 

 빡세고 피곤한 하루 일과를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열차 시간이 많이 남아있길래, 이리 저리 산책을 하다가, 웬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커피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께서는 제대로 커피를 공부하신 전문가셨습니다. 그분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며 조금 비싼 에티오피아 핸드 드립 커피를 한 잔 시켰습니다.

 

 진한 품격이 느껴지는 한잔의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있다보니, 하루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순간에 확 가시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비싼 커피를 마셨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 자신을 위해 이정도 투자하는 것 별로 나쁘지 않군! 나를 위한 품위있는 커피 한 잔, 하느님께서도 용납해주시겠지!

 

 우리가 평소 누리는 행복이라는 것은 뭔가 엄청나고 대단한 것에서 보다는 작고 소소한 것으부터 온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최근 복잡하게 돌아가는 시국을 바라보며 불교계에서도 던지는 말씀이 소욕지족입니다. 한 노승(老僧)께서는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인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끝도 없는 인간의 탐욕이라고 외치시며, 소욕지족으로 돌아가자고 외치십니다.

 

 저 역시 오늘날 우리 나라가 이토록 사분오열된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탐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이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 불변의 진리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보니, 장기 독재자가 속출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비극적이었습니다. 재물이란 것도 적당히 가지고,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공유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재물에 대한 과도한 탐욕의 결과 역시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탐욕 역시 범국민적 자제와 절제가 요구됩니다. 다른 수많은 이웃 자녀들은 어찌되든 상관없이, 그저 내 자녀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과욕과 탐욕이 극단적 교육의 위기 시대를 초래했습니다. 공교육은 붕괴되고 사교육은 기승을 부리게 된 것입니다.

 

 성장 계발 시대 엄청난 국가적 지원과 혜택을 받으며 성장하고 큰 이윤을 남긴 대기업들, 그 이윤을 고생한 직원들과 하청업체들과 통크게 나누려는 마음, 그리고 사회의 공익을 위한 환원의 마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나친 탐욕의 결과는 독점이요 부패, 그 결과는 공멸이요 죽음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조심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복음 12장 15절)

 

 다양한 분야에 걸친 탐욕과 독점으로 상처입은 우리 사회에 가장 좋은 치유제는 범국민적 소욕지족 운동, 소욕지족의 신선한 바람입니다.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

-반영억신부-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재산을 쌓아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야훼를 경외하며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잠언15,16).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전도5,9). 재산에 욕심이 생기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제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릅니다(집회14,5).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리십시오(잠언23,4).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는 정당한 영역이나 이미 충분한데도 욕심을 내는 것은 탐욕입니다. 모든 탐욕은 우리를 멸망에로 이끌어 갑니다.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집니다”(하바2,5). 그러므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토비12,8).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물질 뿐아니라 학문이나 능력, 신앙에 있어서도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자신이 옳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관리하는 권한만 있을 뿐입니다.

 

 신명기 (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셔서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탐욕을 조심하여라.
-송영진신부-


산상설교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이 말씀은, “너희는 허무하게 사라질 세속의 재물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남아 있게 될 하늘나라의 보물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는 말씀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 말씀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돈을(재물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산상설교 외에도, 예수님께서 재물에 관해서 비슷한 말씀을 하신 일이 많은데,
예수님의 말씀들은 인간 세상의 경제활동이나 화폐제도를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말씀들이 아닙니다.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돈 없이 살아라.”가 아니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단도 필요에 따라 ‘돈’을 사용했습니다.
(완벽하게 ‘돈 없이’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도단에는 사도단의 ‘공금’을 보관하는
‘돈주머니’가 있었고(요한 12,6; 13,29),
그 돈으로 뭔가 필요한 것을 사거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요한 13,29).
아마도 그 공금의 재원은 신자들의 후원금이었을 것입니다(루카 8,3).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돈’이 그들을 노예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돈’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 사도단의 ‘돈주머니’의 담당자는 배반자 유다였습니다(요한 1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돈주머니를 맡기셨는지, 그 자신이 스스로 맡았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또 그가 돈 때문에 배반을 한 것인지,
배반하기로 결심하면서 돈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는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돈주머니를 맡고 있었다는 것은,
‘배반’과 ‘돈’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그 공금을 자기 마음대로 횡령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12,6).>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탐욕’이 죄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병이 들었을 때 많은 돈으로 더 좋은 약을 쓸 수 있고,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하느님께(교회에) 바치면서
그것을 ‘성덕 쌓는 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돈을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갈 수 있다면,
그 나라는 가난한 사람은 갈 수 없는 나라이고,
그런 나라는 결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하느님 나라 입장권은 돈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돈을 모으는 일에 힘쓰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만 힘을 써야 합니다(마태 7,21).

이런 말을 하면 늘 듣게 되는 반박이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이웃 사랑 실천을 많이 하면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갈 수 있지 않은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가운데에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돈이 많으면 사랑 실천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그럴듯한 말인데, 정말 옳은 말일까?
만일에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이 많아서 사랑 실천을 많이 한다면,
그래서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서 부자들보다 불리하게 됩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공평한 일이고, 불공평한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 실천은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크기는 돈의 액수로는 측정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이 많으니까 사랑 실천을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일 뿐이고,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하느님께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불우이웃 돕기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만 보고서
‘사랑 실천’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가난해서 물질적으로는 불우이웃 돕기를 못해도
하느님 기준으로는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세속의 기준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유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않은 채로,
즉 부자로 살기를 고집 부리면서 불우이웃 돕기를 하는 것은
‘사랑 없이’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 ‘불우이웃 돕기’는 사랑 실천이 아닙니다.
그 일이 정말로 ‘사랑 실천’이 되려면, 부유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마음을,
또는 부자로만 살겠다는 고집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부자였던 성인 성녀가 많은데,
그분들 가운데에는 부자인 채로 생을 마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자였지만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는 모두 가난해진 분들입니다.) 


믿음과 행복

-이종훈신부-


우리가 기억하는 성인들과 위인들은 굳센 믿음과 신념으로 살았다. 그들의 삶이 곧 믿음이고 신념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 믿음의 결과를 보았던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알폰소 성인도 당신이 세운 수도회가 이태리를 넘어 이곳을 포함해서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못 보았다. 하지만 믿었을 것이다, 자신이 시작한 일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주어진 날 수만큼 산다. 수십 년 있다 보니 여기서 영원히 살 것처럼 또는 여기서 생이 끝나는 것처럼 착각한다. 이곳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가족과 친구 등 여러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올 때도 혼자였듯이 떠날 때도 혼자다. 이 외로운 인생길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다면 삶은 우울할 것이다. 결국은 나의 생은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외롭고 우울할 뻔 했던 나의 생에 하느님이 당신을 알려주셔서 나의 시간은 희망과 기쁨으로 변한다. 남들이 고발하지 않아도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고 또 고백도 한다. 하느님은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이 지긋지긋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아신다. 이런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끝까지 나를 용서하신다. 게다가 내가 행한 보잘 것 없는 선행에 상을 주신다. 내 죄는 용서받고 내 선행은 상을 받는다.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이런 사실과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이!

 

여기서 영원히 살 것처럼 주어진 일에 충실하지만 오늘 밤이 마지막 날이 되어도 좋을 만큼 가볍게 살고 싶다. 그런 마음이 곧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으로 만들어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만 믿고 고향을 떠났다. 그는 여기서 175년이나 살았지만 바다의 모래알과 밤하늘의 별처럼 불어난 자손들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믿었고,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나는 여전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 죄를 용서하시며 그것들을 보속할 수 없는 나의 선행에 상을 주신다고 믿는다. 이런 나의 믿음을 이루어주시려고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되살아나셨다(로마 4,25).

 

주님, 저의 이 믿음이 빗나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저의 희망이고 오늘을 아침을 맞는 기쁨입니다. 세상은 이런 이상한 셈법을 비웃을지라도 믿지 못해 외롭고 우울하기보다는 믿어 기쁘고 행복할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렇게 좋으신 주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잊지 않게 어머니의 자애로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13-21: 어리석은 자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고 하신다.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런데 탐욕을 경계하는 것사랑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랑을 자기 몫으로 물려받은 우리는 그분을 성가시게 할 것이다. 그러나 청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좋은 신앙을 나누어 가지도록 일러달라고 할 것이다.

 

탐욕은 악마의 함정이며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막대기와 돌을 섬기는 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탐욕은 악한 영들의 올가미이다. 그것을 인간을 옭아매어 멸망으로 끌어간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이 탐욕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인류가 다 싫어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거두고 근심에 빠져 한심한 말을 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7) 그는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9). 그러나 부자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재산은 사람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잠언 13,8)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그런 재산이 없다. 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는 것을 몰랐다.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 세상에서는 모두 없어졌겠지만, 하늘에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둔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모은 재물은 유산으로 상속된다. 선행,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 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 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고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며, 영광스런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 누가 그런 사람일까? 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모든 힘을 다해 없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보화를 쌓는다. 그는 덕행과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신부-

단풍의 시간은
짧습니다.

생명의
시간또한
너무나 짧습니다.

너무나 짧기에
허투루 쓰기에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을
믿어야합니다.

살아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합니다.

생명의 가치는
사랑의 가치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산증식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재산은 영원하지
않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재산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나게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생명이 의지하고
기댈 분은 오직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재산 이야기입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어떤 사람이 유산 분배의 중재를 예수님께 요청하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하느님 모상으로서 품위를 적절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지요. 그런 목적으로 임하는 건강한 노동과, 그 대가로 얻는 재화는 필수 기본 요소이고 축복이지, 재물 자체가 악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비유 안 부자의 말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 거기다가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 '자, 네가 ...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루카 12,16-19)

그 부유한 사람의 생각과 말에는 온통 "나", 즉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탐욕"은 모든 힘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때 쌓이는 죄입니다. 내 일, 내 수고, 내 재산, 내 안위, 내 행복... 자기중심적으로 쏠리고 기우는 사이 신앙과 진리와 양심은 균형을 잃어버리고, 인간은 우주 만물과 섭리와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되지요.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탐욕이 슬픈 이유는 모으고 쌓고 누려온 그의 삶에 하느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분은 곁에 계셨지만 그가 그분을 외면하고 자기 능력과 자기 힘과 자기 재산을 믿었던 것이지요. "나"에게 그토록 집중해 살았건만 정작 "내" 목숨도, "내" 재산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허무함...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누가 하느님 앞의 부유한 사람일까요? 또 무엇이 하느님 앞에서도 재화로 인정받을까요?

오늘 제1독서와 연결지어 본다면 그 답은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아브라함은 ...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로마 4,20).
여기서 "오히려"라는 말씀이 한층 더 깊숙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자손이 없을 때도, 겨우 얻은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주님께 대한 신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요. 그는 희망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희망했고, 약속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믿었습니다.

단순한 믿음도 하느님 앞에 큰 자산으로 남을 텐데,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지하는 믿음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그 믿음에 맞갖은 응답을 주시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 이상으로 차고 넘치게 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로마 4,22).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이 굳게 지킨 그 믿음, 바로 그 확신 때문에 그가 의롭게 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결과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로마 4,24).

우리가 하느님 앞에 쌓을 수 있는 재화는 썩어 없어질 지상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모아 오만하게 흔들며 내놓는 재물의 악취는 오히려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니까요. 설령 지금 눈 앞에 캄캄한 절벽과 거친 폭풍과 사나운 맹수를 맞닥뜨렸다 해도, 약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일지라도 주님의 약속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굳건하고 단순하며 흔들리지 않는 충직한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주님 발 앞, 천국 계좌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천상 화폐가 아닐까 합니다.

의혹과 고통, 절망의 도가니에서 달구어져 더 고귀하고 순결하게 된 믿음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못하고 이웃을 향해 자선이 되고 선행을 낳으며 자비를 발휘합니다. 이 또한 매우 값진 천상 화폐가 되겠지요.

자신만을 위해 축적하고 비축하는 탐욕은 믿음이 결핍될 때 나오는 증상입니다. 먹이고 살리기도 하시지만, 앗아가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 만물의 주님을 믿지 못하니 자력으로 대비하고 해결해 보려고 죽을 힘을 다해 영혼과 육신까지 갉아먹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한 헛발질인지요.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영성체송).
주님의 눈길을 바라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신 분이 사랑을 듬뿍 담고 지그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 필요와 허기를 우리보다 먼저 알아채시고 재빠르게 반응하시는 그분이 가난하고 비참한 중에 당신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네가 많이 힘들구나. 괜찮다. 내겐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없다. 그저 믿기만 하면 좋겠구나 그냥 믿어만 다오."

재물이 보물인 자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77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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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