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7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2019년 10월 17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냐시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역이었던 안티오키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10년 무렵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이냐시오 주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들르는 곳마다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루가 11,47-54)
Woe to you, scholars of the law!
You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ou yourselves did not enter
and you stopped those trying to enter.”
Denunciation of the Pharisees and Scholars of the Law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며,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과 기념물을 건축하면서, 마치 자신들은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예언자가 오시리라 예언한 분이시며, 스스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고, 그래서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두 번째는, 그들이 그릇된 인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자신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마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 하였고, 특히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공부해서 전문가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이런 오류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늘 신앙의 기본 정신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합니다.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신앙인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바라보기보다는 교회를 대표하여 신앙을 보여 주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강변하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믿는 신앙과 몸담고 있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처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혹여 우리의 행실이나 태도가 사람들을 잘못된 인식으로 이끈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이런 꾸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는데 굳이 이렇게 많은 렌즈가 필요해요?”
사진 실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표준렌즈를 끼우고 다니지만, 좁은 거리에서 넓은 장면을 찍어야 할 때도 있고 멀리에 있는 사람을 선명하게 찍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꽃이나 나뭇잎 등 세밀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찍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즉, 상황에 맞춰서 적합한 렌즈를 사용해야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성지순례 중에 아주 웅장한 성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웅장하고 멋진 성당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 카메라를 꺼냈는데, 성당이 너무 크다 보니 전체 사진을 찍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거리를 맞추기 위해서 자신이 한참 뒤로 가면 됩니다. 아니면 광각렌즈를 바꿔서 찍으면 되지요. 그런데 성당이 너무 크다고만 불평한다면 어떨까요? 사진 좀 찍게 성당 크기를 줄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상대방만 바꾸라고 청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밈으로써 자기네 조상들이 한 짓을 단죄한 유대인들의 헛된 미신을 비판하십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세운 것이 어째서 악한 범죄행위가 될까요? 오히려 예언자들을 명예롭게 해 드린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움으로써 그들을 죽인 자기 조상들이 잘못되었음을 단죄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행동을 본받아서 똑같은 모습으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실제로 죽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선조들의 상속자임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무덤을 만들어 세운 것보다 조상의 행실을 본받는 것이 그들의 죄인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2)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죄한 예수님을 죽인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죽은 자들에게 참회할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지 않으니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개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제이슨 워맥(Jason Wamack)은 ‘포춘’이 선정한 변화를 선도하는 500대 리더 중 한 명이자, 미국의 100대 최고 행동 변화 사상가입니다. 그가 이런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의 체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학교에서 부모에게 연락할 때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 때만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수업 후에 학부모와 학생에게 전화를 다섯 통씩 하면서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대화의 내용은 칭찬입니다. 학생의 좋은 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칭찬하면서 앞으로도 이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점을 인정하다 보니 아이들이 그 좋은 점을 반복해서 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누구나 다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를 기초로 리더로 또 사상가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점을 고치라고만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좋은 점은 보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갈등과 대립으로 서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인정과 지지 그리고 칭찬.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를 계시한다
-전삼용신부-
미국의 링컨대통령과 케네디대통령은 놀라운 운명의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고 독일 일간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가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16대 링컨은 노예해방, 35대 케네디는 뉴프런티어 정신으로 존경받았지만 암살로 생을 마쳤다.”며 “두 사람간의 공통점들이 전율감마저 들게 한다.”고 전했습니다.
‘링컨-케네디 커넥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링컨은 1846년, 케네디는 1946년 국회의원에 선출됐으며, 링컨은 1860년, 케네디는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링컨(Lincoln)과 케네디(kennedy)라는 이름은 모두 알파벳 7자이다.
▶링컨의 여비서 이름은 케네디였고, 케네디의 여비서는 링컨이었다.
▶둘 다 금요일에, 머리에 총알을 맞고 암살됐다.
▶암살범들과 후임 대통령들은 모두 남부 출신이며, 후임 대통령의 이름은 존슨이었다.
▶링컨의 뒤를 이은 앤드루 존슨은 1808년, 케네디에 이어 취임한 린든 존슨은 1908년 태어났다.
▶링컨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는 1839년, 케네디 알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는 1939년 태어났으며 이름의 알파벳은 모두 15자이다.
▶부스는 범행후 극장에서 창고로, 오스왈드는 창고에서 극장으로 도망쳤으며 모두 법원판결전 피살됐다.
▶링컨은 암살 1주일 전 메릴랜드주 먼로시에 있었고 케네디는 암살 1주일 전 마릴린 먼로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도 누군가를 따라하며 계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 삶이 누군가의 삶의 반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 사귈 때는 본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하여 편안하게 되면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본모습이 바로 자신들의 부모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투로 말하고 남자는 자신 아버지의 모습대로 응대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내 안의 누군가가 나를 통해 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보통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닮습니다. 그렇다고 꼭 사랑해서 닮지만은 않습니다. 미워해도 닮습니다. 양심은 사랑하기 때문에 닮게 만드는 기관이고 자아는 미워하기 때문에 닮게 만드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양심이 발동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나고 자아가 발동하면 자신이 미워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오게 됩니다.
물론 미워하는 사람과 반대로 살겠다고 결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은 다 안 좋습니다.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도 미워하는 사람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림은 거꾸로 그려져도 대상은 그대로입니다. 어쨌거나 사람은 좋은 모습, 안 좋은 모습을 본받아 그대로 투영시키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그대로 계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였고 박해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그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참배하지만 속은 그 조상들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다 누군가로부터 배워 그대로 동조하여 드러내는 계시이자 증언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의 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중에서 좋은 모습만을 되풀이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을 계시하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계시합니다. 사탄을 계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의 욕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믿으면 하느님의 계시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양심을 일깨우러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대신 살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동조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어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합시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를 동조하고 계시합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운전할 때입니다. 굽은 길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속도가 빠르면 차는 원심력이 있어서 제동거리가 길어집니다. 원심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평상시처럼 운전하면 차가 바깥으로 멀어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난간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물에서 장난할 때입니다. 물을 한 방향으로 계속 돌리면 중앙에 원 모양의 구멍이 생깁니다. 구심력은 주변의 물건을 빨아들입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기압의 차이로 돌풍이 불곤 합니다. 돌풍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주변에 있는 걸 빨아들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나무, 자동차, 소까지도 빨아들입니다.
불가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차원을 넘어서 존재했던 것, 존재하는 것, 존재할 것과도 관계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걸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하며, 우리는 흔히 ‘인연(因緣)’이라고 합니다. 자아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면의 깊이가 적으면 밖에서 오는 인연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운전 중에 옆에 운전자가 손가락질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잠시 불편한 건 상관없지만 온종일 그 불편함이 간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근심, 걱정, 불안, 불평, 불만, 원망은 외부에서 들어와 마음의 평화를 흔들어 놓습니다. 외부의 원심력이 강하면 영적인 갈등이 심해집니다.
모임에서 구심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샘이 깊은 물처럼 기쁨과 평화가 샘솟습니다. 장자가 이야기했듯이 마음을 ‘빈배’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야유와 조롱이 있어도 영적 성장의 발판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칭찬과 존경을 겸손과 온유함으로 녹여내는 사람입니다. ‘난향천리, 덕향만리’라는 말처럼 주변을 향기롭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쉽게 끓고, 쉽게 식는 우리의 정치에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서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사람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 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겁니다.” 지혜롭지만 겸손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결단력이 있지만 온유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트집을 잡는 사람
-반영억신부-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냐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 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시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가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송영진 신부-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이 말씀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일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예언자들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다르지 않은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후손들이 만든다는 말씀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일을 통해서
자기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인데,
이 말씀에는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이나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후손들이나 똑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본받겠다면서 성지순례를 가지만, 그 모습을 보면,
세속 사람들의 속된 관광여행과 다르지 않은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성지로 놀러가는 것과 성지순례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갈 때는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갔다가,
돌아올 때는 성지순례를 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성지에서 바쳤던 기도들도 잊어버리고,
세속적으로 놀고 즐기기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식의 성지순례는 성지순례가 아니라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새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세례명을 정합니다.
세례명은 성인의 이름으로 정하는데,
그 성인을 자기의 주보성인으로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 그 성인을 본받아서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성인이 어떤 분인지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만 정하는 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주보성인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다면,
그 성인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받기는커녕 계속 잊어버리고 산다면,
세례명을 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운전석 앞에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붙여 놓고,
또 묵주도 걸어놓은 자동차를 자주 봅니다.
교통사고가 안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붙여 놓고, 또 묵주를 걸어놓았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모시고 운전을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교통법규도 안 지키고, 난폭 운전, 음주 운전, 신호 위반을 하면서도
차에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가 있으니 사고가 안 나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냥 미신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새로 산 자동차의 축복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식을 했으니 사고가 안 나겠지.” 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미신일 뿐입니다.
(사실 신앙과 미신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축복식을 한 자동차니까 더 조심해서 운전해야지.”가 올바른 태도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이 말씀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구원의 진리’를 뜻하고,
‘지식의 열쇠’는 하느님 나라의 열쇠입니다.
그 열쇠를 치워 버렸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사람들을 막고 있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 잘못된 교리 해석, 잘못된 신학 이론과
승인받지 못한 사적 계시 등은 모두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는 일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사이비 종교 같은 다른 종교나
다른 종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 내부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잘못된 성경 해석과 교리 해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잘못된 신학 이론과 승인받지 못한 사적 계시 등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은 실제로 많습니다.
여기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라는 말씀에는,
몰라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안 들어간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지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삶’도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본당의 사제나 수도자 때문에 냉담자가 되는 경우를 보면,
그 사제나 수도자의 ‘잘못된 지식’보다는 ‘잘못된 언행’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잘못된 삶’ 때문에 실망해서 냉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성직자, 수도자답지 않게 사는 사제, 수도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안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도 막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하느님 나라에 안 들어가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지만,
남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은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0).”
여기서 ‘이 세대’ 라는 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는 일이고,
그것은 그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한 자들 편에 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든 누구든지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이종훈신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뜻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잘 듣기 힘든 말인 것 같다. 비난 고소 고발은 많은데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돼서 미안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말 나쁜 의도를 갖고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는 많지 않을 듯싶다. 대부분 무지와 미숙, 착각과 오류 등의 실수 그리고 게으름의 잘못으로 이웃에게 크고 작은 고통을 준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함은 잘못된 신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에 더해 그에 따라 너무 엄격하고 열심히 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 일거다. 열심히 살지도 않은 이들을 불쌍하다고 무조건 용서하는 하느님은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과는 너무 달랐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사는 그들의 마음에 과연 하느님이 머무실 자리가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하느님보다는 자기만족과 열심히 살지 않는 이들에 대한 비하와 비난만이 있었을 것 같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이 세리의 고백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감사드렸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없었고 그 세리는 하느님의 집을 바라보지도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완전히 비워져서 하느님은 그 마음을 다 차지하실 수 있었다. 그 세리의 기도에 더해 ‘하느님 죄송합니다. 저를 믿어주셨는데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하겠다.
아무리 벌을 받고 변상하고 배상해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에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아무 잘못도 안 하며 살 수도 없다. 그런 의도가 아니어도 상대방을 아프게 한다. 이런 우리의 딱한 처지를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아드님을 희생시켜 영원하고 무한한 용서를 쌓아 놓으셨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감사하면 그만이다. 이것은 세리처럼 낮춘, 아니 자신의 처지를 안 이들에게는 큰 선물이다. 사실 이것 말고는 달리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
예수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보다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주님께 죄송하다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한 노사제는 자신이 용서를 청할 자격도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아 이제는 그저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낮추고 비운 마음을 닮겠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도는 정말 아니었는데 마음의 상처를 입히게 돼서 이웃에게도 미안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죄인들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시니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용서를 청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47-54: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조상들을 단죄했지만, 비슷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조상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은 것이 죄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조상들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그들의 악함을 씻을 수는 없다.
하느님을 폭행하는 것보다 더 악한 죄는 없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라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 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마태 23,35)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안에서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례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록 피는 흘리지 않는다 해도 힘없고 약한 이웃을 헐뜯거나 정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비아냥거리며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나 않은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 51)
-한상우 신부-
들국화도
들국화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무책임에서
책임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피에 대한 우리의
동반책임입니다.
책임은 변명을
멈추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책임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첫시작입니다.
십자가의 진실을
바라보는 데서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생명
하나 하나를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잃어버린 사랑의
책임을 다시
찾게합니다.
사랑의 책임은
귀기울여
우리의 아픔을
듣는데서
이루어집니다.
욕망을 정화하는
사랑의 책임으로
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책임임을
기억합시다.
삶과 삶
길과 길을
이어주는
사랑의 책임인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비장하고 결연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이 계속되고,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율법을 대체할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모든 내용들이 "책임"이라는 무겁고 중차대한 말씀으로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루카 11,50).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밝히신 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해온 죄악을 언급하십니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바가 집권층과 종교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이익과 불협화음을 낼 때 그들은 가차없이 그 목소리를 없앴지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절이며, 곧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바로 하느님의 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1).
책임론. 예나 지금이나 책임을 진다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은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이, 이미 벌어진 일의 결과와 파장까지 수습하고 보상하는 일은 커다란 희생과 대가가 요구되고, 설사 책임진다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만큼 온전한 해결은 어렵기 때문이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선사받은 소중한 율법을 민족주의적이고 편협한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내내 하느님의 목소리를 외면했던 책임을 그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언젠가 자기들 입으로 "책임"을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긴 합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종용할 때 내뱉은 군중의 외침이지요. 이 얼마나 무모하고 경솔한 호언장담입니까...
사실 아무리 권위자이고 지도자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들이 무슨 책임을 질 수 있게습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또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은 하고 계시지만 실상 속으로는 그 책임을 온전히 당신 것으로 받아안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역사 안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죄와, 앞으로 그들이 그 역사에 편승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율법주의적 정당성을 보장받아 벌일 예언자 살해의 완결판(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책임까지 당신이 떠안으려 작정하고 계십니다. 당신 자신에게 모든 죄의 책임을 지우시는 것이지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강생 구속이라는 엄청난 호의가 감사는커녕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지지조차 않아도 예수님은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책임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로마 3,21).
율법의 열혈 신봉자인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 사울의 입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살아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돌에 새겨진 율법 조항의 문자를 대신하리라 자신있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다인 입장에서는 천인공로할 반역적 발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 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로마 3,22).
게다가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경계까지 허물어 버리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국적, 종족, 혈연, 제도, 신분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에게 의롭다 하신다니,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 온 인류에게로 활짝 열어 젖혀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3-24).
"거저"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거저"는 아니지요. 우리는 "거저" 얻었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의 희생은 "거저"가 아니었으니까요. 이스라엘 역사 안에 줄곧 흘려진 하느님의 피와, 이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의 피로 얻은 의로움의 가치는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로마 3,25).
주님께서 그저 믿으라고만 하십니다. 당신이 책임 진 것에 대해 공치사도 없고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내가 너희를 위해 한 것을 믿으라고만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의로움으로 구원될 것이니 그저 믿으라고요... 과연 모든 책임을 떠안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를 대신해, 내 죄를 대신 책임져 주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감사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요. 오늘 기념하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순교자도 다른 모든 순교자, 증거자들처럼 그 감사와 사랑 때문에 함께 책임지는 길, 곧 순교의 길을 마다 않고 받아 안은 분이지요.
책임을 진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사랑으로 그 문을 열고 구원의 길을 거저 터 주신 그분이 저만치 앞서 가십니다. 그 길은 사랑으로 장님이 되고 사랑으로 무지해진 영혼만이 흔연히 따라나설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책임을 떠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그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을 것인지 묵묵히 숙고해 보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천국의 자물쇠는 열기 쉽다
-김찬선신부-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다.”
옛날에 많이 쓰던 말 중의 하나가'성공의 열쇠'라는 말입니다.
열쇠란 자물쇠를 여는 것이고,
자물쇠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문을 잠그는 장치인데
무엇이 성공의 열쇠라면 아무나 못하는 성공을 하게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성공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공의 가부가 갈리는 것입니다.
아무튼 옛날에는 성공의 열쇠라는 말을 많이 썼고,
많이 썼다는 것은 사람들이 성공이라는 것을 좋아하고
그 성공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를 원했다는 뜻인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지식의 열쇠'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갖기를 모두가 원하는 것일까요?
우선 지식의 열쇠란 아무나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거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알 수 없는 것을 신앙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신비가 되는데
그것을 아는 열쇠라면 신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천국의 열쇠'로 쉽게 이해하고픈 유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해도 된다면 천국문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게 자물쇠로
잠겨있고 열쇠를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도록 잠겨 있다는 말이 되지요.
그렇다면 진정 천국문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게 잠겨있는 것인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면 특정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인지
우리는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와 복음을 종합하여 얘기하면
율법 교사들은 이 열쇠가 율법이라고 생각하고
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천국 입장에서 아예 제외되며,
이스라엘 사람일지라도 율법을 모르는 사람은 제외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잘못 생각하는 율법 교사들이 천국 입장 열쇠도 치워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바오로 사도도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자물쇠로 잠겨 있다고 하시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다만 그 열쇠가
율법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열쇠란 자물쇠에 달린 것입니다.
어떤 자물쇠냐에 따라 열쇠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나 예수님께는 자물쇠가 열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못 열게 되어 있는 자물쇠도 아닙니다.
율법을 잘 알아야만 하고 잘 지켜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때는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잘 열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겁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고,
그러나 천국문의 열쇠는 주님께 있으니 열어달라고 하기만 하면 되며,
나만 열어주고 다른 사람은 열어주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른처럼 자기가 열려고 하지 않고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열어달라고 하고,
열어달라고 하면 주님께서 열어주실 거라고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믿고,
또 나만 천국에 들어가려하지 않고 모두 같이 들어가려는 사랑만 있다면
주님께서는 다 문을 열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쉬운 열쇠를 율법 교사들은 치워버렸다고 오늘 나무라시는데
우리도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이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19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