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2019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루가 11,5-13)
I tell you, ask and you will receive;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the one who seeks, find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모두 검불처럼 되는 날이 다가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찮게 졸라 대는 친구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그러나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고, 또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청원 기도를 할 때 무엇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청원 기도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하느님께 의존하고 의지한다는 것이고,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예수님 말씀대로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들보다 훨씬 더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시기에 청하는 것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요구하거나 졸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어떤 부모도 자식이 원한다고 해서, 또 자식이 해 달라고 조른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지는 않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나 그 기도를 귀 기울여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에 맞갖은 태도를 지니고,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 기도를 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 안에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영국의 자동차 수리업체 ‘버피 프로케어’는 불만족 이유보다 만족 이유에 더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성공의 근본 원인에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소비자들은 이런 점에 만족하고 있다. 조직 내부에서 이런 요인들을 연구하고 더 확대할 수 있도록 하자.”라면서 격려했습니다. 이 격려를 통해 8개월이 안 돼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80% 미만의 만족도였는데, 소비자들로부터 95%의 만족도를 얻게 된 것입니다.
긍정요소를 확대하면 임원이나 부서 사이에 정치적인 날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도 비난할 필요가 없다 보니, 우선 직원들의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기는 그대로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어서 그들 역시 만족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정적 모습을 보면 서로 날을 세우기만 할 뿐이지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정적 모습을 보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에 친구에게 빵을 꾸러 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친구는 계속해서 꿔 줄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줄곧 졸라댔기에 필요한 만큼의 빵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만약 빵을 꾸러 간 사람이 ‘이 친구는 절대로 꿔 주지 않을 거야.’라는 부정적 마음이 가득했다면 이렇게 줄곧 졸라댈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꿔 줄 거야.’라는 긍정의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떨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긍정의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긍정의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 방법입니다. 조금 하다가 포기하고 마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강한 긍정의 마음으로 들어주실 때까지 청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원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 이상까지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꽤 연세가 많은 분이셨는데, 연세보다 훨씬 건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 비결이 어떻게 돼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소위 “왕년에….”라는 시리즈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 하는 건강 비결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만 계속 이야기하십니다. 심지어 왕년에 정치도 했다면서 지금 정치에 대한 비판도 신랄하게 하십니다. 솔직히 정치와 건강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분께서 과거의 자기 모습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거의 모습에 연연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은 지금의 자기 모습에 자신 없을 때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과거에만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대한 기억만을 떠올리며 지금의 자신을 위로하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만 연연하며 살기에는 지금을 사는 내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주님의 기도는 자아를 때리는 망치다
-전삼용신부-
곰을 발견한 한 소년은 17.3초 만에 정확하게 곰이 자신들을 따라잡을 것을 계산하였습니다. 그 공포감에 빠져있을 때 다른 소년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소년이 말했습니다.
“너 정말 멍청하구나! 우리는 절대 저 곰보다 빨리 달릴 수 없어!”
두 번째 소년이 말합니다.
“그건 사실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너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돼.”
왜 달리지 않는 것일까요? 달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뛰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장애물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것을 먼저 보아야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소비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매번 곰에게 잡아먹힙니다. 기도하면 곰에게 잡아먹히게 만드는 자아를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 하나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바로 다음에 바로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방법과 효과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선, 주님의 기도의 방법은 하느님을 괴롭히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벗이 한 밤중에 찾아와 계속 빵 세 개를 요구하면 귀찮아서라도 빵을 내어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귀찮게 하느냐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하느님은 더 원하는 이에게 더 많이 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의 열매인 빵 세 덩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빵 세 덩이와는 무슨 상관일까요? 보통 성경에서 숫자 ‘3’은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빵은 ‘에너지’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에너지가 성령이니 빵 세 덩이는 성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얻어지는 ‘복음삼덕’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과 싸워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얻으셨습니다.
이 복음삼덕은 자아를 눌러 이기면 얻는 덕입니다. 청빈은 자아의 소유욕을 이기고 정결은 자아의 육욕을 이기며 순명은 자아의 교만을 눌러 이깁니다. 삼구를 이기면 가질 수 있는 덕이 복음삼덕인데 이 복음삼덕은 하늘에서 오는 에너지인 성령의 힘으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기 전까지는 주님의 기도를 하느님을 괴롭히듯이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아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면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을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는 한 명만 잡아먹는 곰에게 수많은 사람 중에 내가 잡아먹히게 만드는 내 안의 가장 큰 적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 런’은 악독한 양계장 아줌마로부터 닭들이 탈출하는 내용입니다. 탈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닭이 안 된다고 믿는 닭들에게 이런 대사를 합니다.
“당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뭔지 아세요? 양계장의 울타리가 아니라 당신들 머릿속에 쳐져있는 울타리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머릿속의 울타리를 벗겨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불가능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인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 자아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자아는 걱정과 두려움을 자아내지만 주님의 기도는 그런 것들이 솟아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가치를 안다면 짬을 일부러 내서라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석공들은 돌이 깨지지 않아도 계속 망치질을 합니다. 101번째 망치질에 돌이 깨졌다면 그것은 100번의 끈질긴 믿음의 망치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이기려면 이렇게 주님의 기도로 튀오나오려는 자아의 머리에 망치질을 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반가운 선물이 왔습니다. ‘좋은 생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옮기면 어김없이 보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옮겼는데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 감사할 사람, 나누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책을 읽으니 이번 호의 주제는 ‘고진감래(苦盡甘來)’ 였습니다. 바람에 예쁘게 피어나는 꽃은 긴 겨울 땅속에서 양분을 찾았던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의 글도 비가 온 뒤에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훈훈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만 나누고 싶습니다. “시골 학교로 부임한 선생님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주사(酒邪)가 심했고,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습니다. 가정 방문을 하였고, 배고픈 아이를 위해서 밥을 사 주었습니다. 비가 내린 어느 날, 아이의 발자국에는 물이 홍건 했습니다. 신발장을 보니 아이의 신에는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예쁜 신발을 사 주었습니다.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나중에 크면 선생님에게 신발 하나 사주면 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세월은 흘렀고, 선생님은 은퇴하였습니다. 신발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게 주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전에 신발을 사 주었던 그 어린이가 지금은 신발가게 주인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제자는 울다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비로소 우리에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화답송은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양승국신부-
50년간에 걸친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를 끝내고, 꿈에도 그리웠던 고국으로 귀환하던 유배자들의 마음은 참으로 감격스러웠고, 고국산천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가슴은 두근 반 세근 반 희망으로 설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국 땅에 도착해보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고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영원할 것처럼 견고했던 도성들은 자취도 없이 허물어져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심장이요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도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고 있던 삶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아있던 동족들은 이교 문화와 우상숭배에 푹 빠져 영혼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청춘과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 운동에 매진하다가,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듣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던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받은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에 참 슬퍼졌습니다.
친일파들은 어우선하고 혼란스런 정국을 틈타, 어느새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하고 또 세탁해서, 새로 수립된 정부의 주류이자 기득권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고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국가와 민족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독립 유공자들에게 다가온 것은 또 다른 박해요 철저한 냉대였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이찌 그리 무심하신지...
하느님께서는 암울했던 시절, 길잃고 방황하던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일으키기 위해 보낸 사자(使者)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구약시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에서 소개된 말라키 예언자 역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배에서의 귀환 이후, 이스라엘에는 사실 더 이상 왕이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백성들의 시선은 성전 재건 작업의 주인공들이었던 성전 책임자들, 곧 사제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뜻밖에도 그들은 신앙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재정 전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큰 파워를 지니게 되었고, 그에 따른 극단적 세속화와 부정부패가 뒤따랐습니다.
이런 위기 시대에 등장한 말라키 예언자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횡행하고 있던 온갖 악습과 그릇된 예배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특히 말라키 예언자는 사제들의 직무에 대한 게으름과 나태함을 강하게 꾸짖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충실, 이방인들과의 혼인에 대해 질책합니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예물 봉헌에 대해서도 강하게 경고합니다.
말라키 예언자가 신랄하게 경고하고 직책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흡사한지, 섬뜩할 정도로 유사합니다.
특히 총 6개의 신탁 가운데 두번째 신탁은 사제들의 타락을 강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라키 예언자의 눈에 들어온 당시 사제들의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예물은 가장 값지고 흠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빵과 훔친 가축, 병들거나 절뚝거리는 가축을 무성의하게 예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말라키 예언자가 활동하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주도권은 레위 가문이 아니라 사독 가문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즈루빠벨의 호위 아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될 당시 모든 권한과 임무를 장악하게 되었고,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힘과 돈, 정치력까지 한 손에 쥐고 있으니 자연스레 타락과 부정부패의 길은 불을 보듯 뻔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막대한 경제력을 지닌다던지, 세속적 권력과 긴밀히 결탁하게 될때, 타락과 비리, 부정부패는 마치 공식처럼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역시 지나친 경제력을 쥐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높은 위치로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속의 권력과 지나치게 친밀한 상태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상적인 마인드로 재물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재물보다 잿밥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세상의 개발 논리에 깊이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말라키 예언자의 경고는 날카롭기만 합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만군의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키서 3장 19~20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반영억신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송영진신부-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5-8).”
이 말씀은, 하느님을, ‘사람의 기도를 귀찮게 여겨서 안 들어 주시는 분’으로,
또 기도를, ‘끈질기게 계속 졸라 대서 원하는 것을 기어이 받아내는 일’로
오해하기가 쉬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들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하느님은 사람의 기도를 귀찮게 여기시는 분도 아니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제때에 안 주시고 미적거리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바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앞의 말씀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벗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청하는 것을 주지 않고,
줄곧 졸라 대야만 마지못해 억지로 주는 일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고 청하여라.”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주시지 않겠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안 주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고집을 꺾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과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내가 원하는 그것을 가장 좋은 것이고,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고,
또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지 모르면서 ‘바로 지금’ 달라고 청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할 때에는
‘내가’ 바라는 바로 그것만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때’에 맞추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그냥 나의 사정을 말씀드리는 정도로 그치는 기도,
나의 문제를 언제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문제만 말씀드리면 되는데, 답까지 미리 정해 놓고서
그대로 해 달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기도를 바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모습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는 모습과 같습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언제 주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또 아이가 갖기를 바라는 그것이 아이에게 주면 안 되는 위험한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것을 주지 않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에게 해로운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지금 당장 자기가 갖기를 바라는 그것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고집 센 아이는 부모가 안 주면 줄 때까지 울고불고 하면서 악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 철없는 아이들처럼 바치는 기도를 과연 올바른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말씀을 앞에서 언급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과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이다.” 라는
말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누구든지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잘 받는 방법은
능동적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그것은 주시는 것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이 말씀은, “하느님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인데, 우리 쪽에서 생각하면 ‘올바른 지향’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은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나쁜 것’만 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청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것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확실히 ‘나쁜 기도’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청하는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가장 좋은 기도는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입니다.
(‘주님 뜻’에 맡긴다는 것은 ‘결과’를 맡겨 드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까지 몽땅 다 주님께 떠넘기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우리 하느님
-이종훈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과연 하느님다운 예수님의 말씀이고 신나는 약속이다.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인 하느님께 청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악한 것을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려운 문제 해결,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 위험 중의 보호, 곤경에서 해방 등 사는 데 다 필요하고 절실한 것들이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거기에 가장 좋은 것을 사주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왜 우리 하느님은 그렇게 오랜 시간 청하고 매달렸는데도 주시지 않는 걸까?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 우리 하느님은 가난뱅이가 되셨다고.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셨으니 더 이상 줄 게 없다고. 말라키 예언자가 고발한 내용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말라 13,14-15).’” 우리 하느님은 정말 가난뱅이라서 악한 이들을 벌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실 수 없는 걸까?
연로하신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더 이상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살펴드려야 한다. 그런데도 자녀들은 그분이 그렇게라도 살아계심에 고마워하고 마음 든든해한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기 때문일 거다. 어쩌면 우리 하느님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힘이 없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실 지도 모른다. 불룩했던 하느님의 주머니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 있던 것들을 남김없이 다 나와 믿는 이들의 마음에 옮겨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넘겨받으셨고 그분은 다시 우리에게 그런 당신을 통째로 넘겨주신다. 그리고 약속하셨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예수님, 주님은 당신 가진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무엇인가 청하며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주님 곁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오늘도 어머니께 이러저러한 것들을 청합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끝까지 그렇게 기도하면서 제가 주님 곁에 꼭 붙어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5-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그분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 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라고도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가며,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이것들이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겠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한상우신부-
언제나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이
아버지의 기쁨이며
우리의 행복이
아버지의 행복입니다.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사랑을
기도로 체험하게
되는 우리 뜨거운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칩니다.
기도와 일상사이
일상과 기도사이에
사랑의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드디어 알게되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청하는 기도로
마침내 살아갈
힘을 얻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모든 여정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어제에 이어 오늘의 말씀도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우리가 청하고 찾을 것은 어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안에 다 들어 있는데 무엇을 더 찾고 청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일까 곰곰이 머물러 보았습니다. 설마 우리 안 저 깊은 곳의 숨은 욕망 - 돈과 집과 자동차, 명품과 승진과 합격, 인기와 명예와 권력 - 을 청하고 찾으라는 뜻은 아닐 것 같은데 과연 주님은 무엇을 더 주시려는 것인지요.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복음환호송).
문득 복음 환호송의 말씀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 손을 잡고 말씀의 기도로 데려가셨습니다.
미사 준비를 위해 다음날 미사 독서들(입당송, 독서, 화답송, 복음 환호송, 복음, 영성체송)의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습니다
전례 시기와 축제일에 따라, 혹은 이어지는 매일 미사의 흐름과 전후 문맥에 따라 의미를 찾으며 그 안에서 특별히 다가오시는 말씀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쉽고 명확히 드러날 때도 있고, 더 깊이 머물고 숙고하며 반복해 되뇌여야 희미하게나마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다가오신 그 말씀에 머물러 묵상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분심과 잡념이 사방에서 쿡쿡 찔러대기도 하고 상상과 기억이 끼어들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설령 발을 헛디뎌 그런 데에 정신이 팔리더라도 얼른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말씀께서는 어디 가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다시 말씀 앞에 앉아, 오늘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의미가 무엇일까 포기하지 않고 머무를 때,
바로 이 순간 오늘의 복음 말씀이 좋은 안내자가 됩니다.
"줄곧 졸라 대면 ...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우리가 기도 안에서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앞에 나열한 세속적 부와 힘이 아니라 바로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말씀을 청하고 그 의미를 찾고 문자와 문법의 닫힌 문을 끈질기게 두드릴 때 말씀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어 주실 것이니까요. 사실 피조물인 우리가 바랄 것은 단 하나입니다. 주실 것이 확실한데 부분적이고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달라고 할 이유가 없지요. 우리가 청하고 찾고 바랄 것은 바로 "모든 것"이시고 "전부"이신 하느님뿐입니다. 그 하느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별것도 못 되는 일부분에 한눈 팔거나 마음을 빼앗길 이유가 없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성령!!!
그분은 곧 하느님 자신일 뿐만 아니라, 말씀을 만나고 알아듣고 소유하게 해주시는 키워드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말씀이 기록되도록 영감을 주신 성령께서 지금 여기 말씀 앞에 있는 나에게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감을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너희가 무엇이든 아버지인 나에게 청하면, 나는 모든 것의 주인인 나 자신을 너에게 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자기 증여의 선언이고 약속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인 말라키 예언서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 재건에 관해 이야기한 (우리가 얼마 전까지 만난) 하까이 예언서나 즈카르야 예언서보다 삼사십 년가량 뒤에 쓰인 책이지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 무슨 이득이 있느냐?"(말라 3,14)
성전과 도성 재건의 열정이 사그라들고, 기대했던 희망의 때가 선뜻 보이지 않자 백성들은 과거의 악과 다시 타협하며 신심을 잃고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기에 주님께서도 그들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여 들어 주시고"(말라 3,16 참조) 예언자는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사실 그 어느 때보다 꾸준함과 항구함이 필요한 시기였을 겁니다. 당장 코 앞에 구원과 번영을 드러내 달라고 을러매다가 이내 포기하고 등 돌릴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묵묵히 겸손과 신뢰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지요.
실제로 말라키 예언서의 이 말씀은 당시에 당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기를 건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치유를 날개에 싣고 오시는 의로움의 태양, 바로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기도가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그렇습니다. 알라딘 램프나 요술 지팡이처럼 내 욕구를 손쉽게 당장 짠~ 하고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단 믿음과 신뢰를 갖고, 묵묵히 항구하게 꾸준히 머물러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이, 우리의 양심과 성령의 영감이 고운 채가 되어 모든 사사로운 자기중심적 탐욕을 걸러내지요.
이 과정에서 우리 안에는 "하느님께서는 내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확신이 생기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는 건 다 좋은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드디어 모든 기도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 말씀 앞에서 섣불리 실망하지 말고 겸손과 정성과 신뢰와 끈기를 다해 머무릅시다. 기도할 때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청한 것은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믿읍시다"(1요한 5,15 참조). 우리가 주님께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면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12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