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2019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루가 11,1-4)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The Lord's Pray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죽어 버린 아주까리 때문에 화를 내는 요나 예언자에게,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유다인들도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와는 달리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 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사가들에 비하여 유독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많이 전해 주고, 특별히 큰 사건을 앞에 두고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주님의 기도 첫 줄에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당시 사람들의 기도와 무엇이 달랐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는 바로 자녀로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첫마디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단순히 하느님을 부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이 바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신앙 고백입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라고 부르셨고, 그 말은 육으로 맺어진 친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그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로 우리 모두가 당신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임을 깨우쳐 주십니다.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완벽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 기도의 모범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기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의 경험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 이렇게 저렇게 좋은 점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그저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저의 책에 대한 경험이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특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채칼에 손이 베인 적이 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채칼에 손이 베이면 아프겠지?’라고 막연한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그 고통을 겪는 것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직접 경험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아픈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그 뒤 더욱더 조심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고 또 읽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기에 모르는 것입니다.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만 그럴까요? 우리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우가 “신부님, 세례를 받았음에도 전혀 느끼는 것이 없어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합니다. 믿음을 키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곧바로 우리가 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기도는 당시의 유다인들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기도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좁혀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멀리에 계신 분으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주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냥 알아서 잘 되게 해주세요.’라는 막연한 기도를 바치고, 세상일에만 온통 신경을 쓰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직접 체험해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고, 이 힘으로 세상을 더욱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지금 연세가 90이 넘으신 고령이십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수술을 계속해서인지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셨습니다. 매주 미사를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만나는데, 그때마다 여러 가지를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아버지 인생 이야기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효도란 특별한 행동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부모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에 대한 편견을 한쪽에 내려놓고 그들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닐까요?

주님의 기도는 신앙학 개론이다
-전삼용신부-
학사와 석사와 박사와 교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어떤 대학에 파리에 대해 연구하는 파리학과가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처음 배우는 것이 ‘개론’입니다. 개론은 파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르칩니다. 정말 재미없습니다. 파리학과 학생들이 파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인 ‘파리학 개론’을 배운 다음에는 ‘각론’을 배우게 됩니다. 파리의 부분 부분에 대해 더 자세하게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파리 앞다리론’, ‘파리 몸통론’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파리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마치면 학사학위가 주어집니다. 이때가 되면 파리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지식으로 현장에 나가보면 지금까지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 배워야합니다. 석사과정에 들어가면 한 부분을 깊이 배웁니다. ‘파리 뒷다리’에 대해서만 깊이 파는 것입니다. 이 연구를 ‘파리 뒷다리 관절상태가 파리 움직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결과를 맺습니다. 이때가 되면 파리 뒷다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많이 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파리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학사들보다는 겸손해집니다. 이제 무엇을 모르는지 알 것 같으면 석사가 된 것입니다.
박사과정은 더욱 좁고 깊은 영역을 탐구합니다. ‘파리 뒷다리 발톱’정도가 될 것입니다. 좁은 영역에서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자니 머리가 희거나 빠지거나 시력이 안 좋아지는 부작용을 유발합니다. 그래도 고생 끝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탄생합니다. 박사논문입니다. 논문 제목이 예를 들면 ‘1년생 파리 뒷다리 발톱의 성장 패턴이 파리 먹이 취득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와 같습니다. 그리고 열정에 불타 파리 뒷다리 발톱에 낀 때에 관해 책을 씁니다. 그러면서 그 때의 색깔이 노랑인지, 검정인지, 푸른색인지에 따라 같은 주장을 하는 지식인들과 연대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대학에 와서 강의할 때 다시 ‘파리학 개론’을 가리킵니다. 개론은 너무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공부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조금은 어렵게 설명을 해야 합니다. 물론 가끔 파리 뒷다리 발톱의 때에 관해서도 살짝 언급을 해 줍니다. 쉬운 것을 어렵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런 수업을 듣고 교수님의 학식에 놀라 감탄합니다. 어렵고 재미없게 파리에 대한 개론을 배운 학생들은 또 개론을 배우고 파리에 대해 다 아는 사람처럼 학사학위를 받습니다.
[참조: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 여섯 번째 생각 여행, 전문성’, 유영만, 위너스북]
무언가를 어렵게 가르치면 사실 그 사람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론을 쉽게 가르칠 수 있어야 참으로 박사입니다. 사실 개론이 전부입니다. 더 부분적인 것을 파고들다보니 처음에 배웠던 개론을 잊어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잘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잘 안 풀린다고 더 힘을 주면 더 안 됩니다. 그때 프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본에 충실하세요!”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면 언제나 초보자입니다. 프로가 되려면 기본기를 보통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해야 합니다. 그 지루한 과정을 통해 기본기가 탄탄할 때 훌륭한 프로선수가 됩니다.
축구 프로 선수가 가장 많이 연습하는 것을 무엇일까요?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기본인 슈팅과 패스입니다. 다만 초보처럼 슈팅하거나 패스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처럼 슈팅하고 패스합니다. 초보자는 그 기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프로는 같은 것이라도 훨씬 쉽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프로는 어려운 것을 해 내는 사람이 아니라 기본을 프로답게 해 내는 사람입니다.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높이는 뿌리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라도 저런 기도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쉬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프로가 알려주신 신앙의 기본기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프로는 무엇이 중요한지 압니다. 그것만 열심히 연습하면 최고에 오를 수 있음을 압니다. 그것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당신처럼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기를 알려주신 것이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 신앙의 정도에 따라 각자의 해석이 다릅니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은 관상기도의 수준에 맞게 주님의 기도를 이해하고, 초보 신앙인은 또 그렇게 이해합니다. 초보 신앙인은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당신처럼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많은 프로다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공생활동안 가르치신 모든 내용이 다 주님의 기도의 해설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가르침과 비유들이 주님의 기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를 프로처럼 할 수 있을 때 프로 신앙인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기본은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올바른 성장이 가능합니다.

-조재형신부-
외신 기자 협회에 등록되어 있어서 협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변호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변호사들은 이민자들의 고용, 재산 보호, 세금, 영주권 취득, 복지를 위해 법률 자문을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미국 정부는 이민자들에 대해 엄격한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힘들고 어려운 이민자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모습은 미국 사회의 또 다른 면이었습니다. 자선과 기부의 문화는 교회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바다와 섬((La Mer et L'Ile)’의 뉴욕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바다와 섬은 독도를 사랑하고,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알리려는 문화, 예술인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작곡가들은 독도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재능과 능력을 조국을 위해서 나누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바이올린, 첼로, 해금, 대금이 어우러져서 연주하였습니다. 멀리 뉴욕에서 ‘목포의 눈물, 그리운 금강산’의 연주와 노래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당리당략을 위해서 다투는 모습을 보았는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작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정치인들도 엄중한 국제정세를 바라보며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으로 경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민자들을 위해서 법률 자문을 해 주는 변호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재능과 시간을 기꺼이 조국의 가장 작고 외로운 섬 ‘독도’를 위해 나누는 문화, 예술인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아버지의 뜻인지 말씀과 표징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들판을 헤매는 목자처럼 힘들고 지친 이들의 친구가 되어는 주는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용서를 청하는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뿐만 아니라 이웃의 십자가도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재물도, 명예도,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또는 허락되는 시간에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을 보여 드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이 쌓여 가면 어느덧 기도는 내 삶의 중심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생활의 반석
-반영억신부-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후반부는 우리 서로간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이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챙겨주게 될 때 주님의 기도는 완성됩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이 아버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실“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의 기도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여기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방법’으로 해석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도
“기도하는 방법은 이렇다.”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 또는 지침이고,
모범적인 기도의 예문입니다.
< 그 당시에 제자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도는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리면
어떻게 바치든지 간에 그 기도는 좋은 기도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하여도 마음에 없는 ‘빈말’이라면,
그것은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마태 6,7).
마음에 없는 ‘빈말’로 바치는 기도는
믿음 없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말이고,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 또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들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 당신의 일을 어서 하시라고 재촉하는 기도가
아니고, 또 안 주시는 것을 어서 달라고 재촉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도 참여한다는 ‘응답의 기도’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의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기도’와 ‘삶’이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로 살아야 하고, ‘삶’이 곧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도는 말로만 바치고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말로만 하는 응답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응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잘하면서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실상 기도를 안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그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우리도 동참하겠다는 응답이고,
우리를 그 나라의 시민으로 받아 주시기를 청하는 간청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그 노력의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세속의 풍조에 물들어서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무리 열심히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고 해도,
그 기도는 ‘빈말’이고, ‘거짓 기도’입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바치는 기도이고,
사실상 이미 주고 계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 기도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말은 ‘저희’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으면서 이웃의 굶주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고, 바친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힘’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이 기도는,
지치지 않고 그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끈질기게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을 겪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인데,
그 ‘힘’을 잘 받아서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는
용서와 구원을 바라는 기도인데,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우리가 용서한다는 말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자격이 없습니다.
용서의 경우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를 잘 받는 것은 우리 쪽에서 할 일이고,
잘 받는 방법은 바로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를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일입니다.
(정말로 억울하고 분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그리고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해 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들,
즉 박해, 고난, 유혹에서 지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당연히 노력해야 하는데,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해치는
시련과 유혹들을 물리치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기도’입니다(마르 9,29).

요나
-이종훈신부-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그 즉시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다. 요나는 바로 이것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요나 4,2).”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죽고 싶을 정도로(요나 4,3) 못마땅했던 것 같다.
그는 거센 풍랑 속에 속죄의 제물로 던져진 후 큰 물고기의 배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서원한 것을 지키겠노라 결심했다(요나 2,10). 자신은 하느님의 큰 자비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으면서도 다른 사람들 특히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이를 정도로 엉망으로 사는 그들도 자신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용서받음이 그렇게 싫었나보다. 아주까리나무에게는 그토록 크게 동정하면서도(요나 4,10) 수많은 사람들이 벌을 받아 죽는 것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처사를 참을 수 없었다. 아마 하느님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아주까리나무를 동정한 게 아니라 살인적인 더위를 피하게 해주었던 나무가 사라진 것 때문이고 그 나무가 당한 불의함 때문에 죽을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는 없어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딱 요나 같다. 그는 니네베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으로 마땅히 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느님은 그들이 오른쪽 왼쪽도 가릴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고, 게다가 그들 때문에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 벌을 받게 하실 수는 없으셨다(요나 4,11). 자신에게는 하느님이 언제나 큰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기를 바라면서 죄인에게는 정의로운 재판관이시기를 바란다. 뉴스를 보면서 거친 욕까지 내뱉으며 화내는 것을 보면 단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과 짐승과 벌레들까지도 당신의 작품이니 어느 것 하나 소중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작품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도 그게 내가 만들었으면 소중하고 사람들에게 자랑까지 하지 않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거기에서 한 가지만 빼고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이다. 하느님은 아버지요 어머니이고 우리는 자녀이니 당연하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의 그 친밀한 관계로 우리들을 초대하시며 당신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라고 초대하셨다. 그것이 용서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몫으로 남겨 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치욕적인 형벌을 받는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3,34).”라고 기도하셨다. 니네베 사람들이 오른쪽 왼쪽도 가릴 줄 모르는 철없는 어린이로 보시던 하느님의 아드님다운 기도이다.
예수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얼굴이시며 그분께로 가는 유일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나처럼 그 길을 피해 달아나지만 어느새 또 그 길로 돌아와 있곤 합니다. 제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기 때문일 겁니다. 믿는 대로 살게 저의 믿음을 더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마음을 가르쳐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1-4: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신다. 즉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준 기도이며, 그러기에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로서 또한 큰 책임을 부여한 기도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다. 종들을 자유라는 지위로 들어 올리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의 대열에 있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때에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이 기도의 의미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올 것인데,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던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루카 11, 1)
-한상우신부-
기도 하시고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모두는
기도가 필요한
기도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필요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라는
영적 토대 위에
집을 지으십니다.
우리의 삶과
기도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 안으로 우리는
들어갑니다.
기도를 통해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됩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을 알게됩니다.
기도 없는 사랑
기도 없는 용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의 길또한
기도의 길임을
배웁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들 안에는 기도가 가득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동안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봐오기만 했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복음 안의 배열 상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마르타, 마리아 자매를 방문하신 뒤의 일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선택했다는 "좋은 몫"이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갈망이 싹텄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매우 바람직한 변화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기적과 표징에 쏠렸던 눈길이 그 모든 활동의 원동력인 기도로 옮겨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에서 보호"(루카 11,2-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피조물이며 하느님 자녀인 인간으로서 주님께 바쳐야 할 기도의 골자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해 달라는 그분 현존의 청원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이곳이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청원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당신께 의탁하며 살 수 있도록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매일을 꾸려갈 양식을 바라는 청원입니다.
"용서"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를 주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풀어나가길 바라는 청원입니다.
"유혹에서 보호"는 어둠과 악의 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청해야 할 핵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유다인 남성인 제자들이 그동안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예수님에게서 기도와 말씀과 행동의 일치, 통합을 발견했기에,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결정하는 바로 그 기도를 배우고 싶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 그들의 바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주님의 기도" 안에는 그동안 제자들이 해오던 모든 기도가 수렴되고 있고, 또 앞으로 제자들이(우리들이) 바칠 모든 기도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요나의 대화가 펼쳐집니다. 허물없는 사이에서나 오갈 만한 내용이 요나의 입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요나 예언자는 (좋게 말해) 꽤나 용감하고 대담한 성정을 지녔던 듯합니다. 자칫 무례하고 즉흥적, 자기중심적이며 재차 죽음을 운운하는 자포자기적 비관적 성향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부분이 비치기도 합니다만...
이 대화 내용이 불편하십니까? 요나가 괘씸하게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그의 미숙하고 단순해 보이는 태도가 속시원히 공감이 되시는지요? 사실 이 대목은 기도의 현실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피조물이 서로를 듣고 답하는 솔직하고 진솔한 순간입니다. 요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한계, 불평과 불만, 아닌 줄 알면서도 어깃장 놓는 심보까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 거짓 없이 드러냅니다. 어쩌면 그가 그만큼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다는 반증도 되지요.
이에 하느님은 인내롭게 대응하십니다. 요나가 아무리 유치하게 나와도 그의 눈높이에 맞게 표징을 일으키시고 적절한 가르침으로 연결하시면서요. 이처럼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니네베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요나에게도 드러내십니다. 요나 역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어야 할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우아하게 내 좋은 면만 보여드리는 기도를 고수하고 있다면, 오늘 요나의 모습이 참 생소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오늘 하느님과 요나의 대화는 진솔한 기도의 참 좋은 예로 보여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하느님 앞에 미숙하고 이기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철부지일 뿐이니까요. 그런 자기 실체를 가감없이 드러낼수록 이미 그 꼴을 다 아시는 하느님과 얼른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내게 맞는 맞춤형 응답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가리는 게 많을수록 겹겹이 덧씌운 허울을 벗기느라 시간과 에너지만 더 들 뿐입니다.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세상의 어머니들, '내가 낳았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이런 표현 많이들 하시지요? 바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은 우리를 벌하려 준비하고 계신 잔혹한 심판관이 아니라, 당신이 낳은 자녀들의 갈지자 걸음, 한눈 팔기, 딴청, 청개구리 짓, 모르고 짓고 알고도 짓는 죄악까지 한없이 동정하고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그런 자녀(우리들)로 인해 창자가 다 끊어질듯 애끓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진액입니다.
요나의 기도도 주님의 기도도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를 향해 가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언젠가 탄식도 바람도 청원도 거대한 침묵 안에 녹아들어, 말이 필요 없는 기도, 존재의 기도로 이어지겠지요. 그때는 우리와 그분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알고 내가 그분을 알기에 사랑 안에 녹아들어 둘로 가를 수 없는 상태, 내가 기도가 되고 기도가 내가 되는 신비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영혼을 들어올려"(화답송) 그분께 은밀히 속삭입시다. "제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