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그때에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5-10)
The apostles said to the Lord,
"Increase our faith."
The Lord replied,
"If you have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ould say to this mulberry tree,
'Be uprooted and planted in the sea,’
and it would obey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불의와 재난을 보아야 하냐고 하바쿡 예언자가 하소연하자,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다(제2독서).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고 해도 복종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돌무화과나무는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에 강한 바람에도 잘 견딥니다. 반면에 겨자씨는 씨앗 가운데 가장 작은 것에 해당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작은 믿음도 돌무화과나무처럼 견고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심겨지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종은 주인에게 명령받은 모든 힘든 일을 수행하고 나서도,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종은 무슨 일을 하든, 주인에게 내세울 것이 없고, 어떤 권리나 보상도 요구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믿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무자비한 주인이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봉사를 했다 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지신 것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실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서 오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 믿음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승복하는 자세가 나옵니다.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확고하고 위대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겨자씨만큼 작고 깨지기 쉬운 믿음이라도,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능력이 나오고, 삶의 경이로움과 영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더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성실과 겸손으로 빛이 되는 신앙인
-손희송주교-
중세 시대에 독일의 쾰른 대성당이 건립될 때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까마득히 높은 종탑 꼭대기에서 조각가 한 사람이 돌조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에 꽃잎 하나하나를 아주 정성껏 열심히 조각했습니다. 하루는 동료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여보게, 무얼 그리 열심히 조각하고 있나? 저 밑을 내려다보게.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데, 누가 그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라도 하겠나? 대충해두게나.” 그러나 조각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나는 밑에서 누군가가 보아주기를 바라지 않네. 내가 열심히 조각한 이 작품을 보아주실 분은 바로 저 위에 계신다네.”
신앙인에게 기준이 되는 것은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입니다. 하느님께서 늘 사랑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것을 믿고 그분 손길에 의지하면서 그분 뜻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이가 참된 신앙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 보든 안 보든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하느님과 반대되는 세력들, 억압과 폭력, 싸움이 판을 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성실함을 유지합니다.(제1독서)
참된 신앙인은 성실할 뿐만 아니라 겸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무슨 선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십니다.(필리 2,13)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깊은 사람은 자기 본분을 다하고 나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줄 압니다.(복음)
이런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는 교회 봉사자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이들은, 성직자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빛을 전하듯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교만과 불손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겸손한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집회서 저자는 “주님은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20)고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봉사하는 이들 중에서 사제와 주교는 올바른 가르침과 모범으로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품성사로 축성된 사람으로서, 성사로 주어진 하느님의 은사,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에 의지해서 용감하게, 고난마저 감수하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제2독서) 하느님 앞에서는 겸손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에서는 용감하고 굳세야 합니다. 성품 받은 봉사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도록 많은 기도와 격려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어찌하여.....!
-장재봉신부-
저는 하바쿡 예언자를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도 같군요. 제법 긴 시간을 하바쿡 예언자의 당돌함과 ‘되바라진’ 모습에 비위가 상해서 마뜩지 않았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저는 오늘 여러분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고작 3장에 불과한 짧은 글이니 꼭 읽어주시길 청합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짧은 성경에 담긴 믿음의 엑기스를 뽑아 간직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치를 보듯이 성당에서만 쩔쩔매는 시늉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인 양 오해하는 못난 신자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돌아가는 일이 갑갑할 때, 하느님 앞에서 진심으로 고뇌하며 “어찌하여”라며 야무지게 하느님께 항변할 수 있는 세상의 대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하바쿡처럼 당당하고 하바쿡처럼 진솔하며 하바쿡처럼 지혜롭기를 간곡히 청하는 것은 옳고도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바쿡처럼 하느님의 응답을 들으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느끼게 되어 가슴 저린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 교회의 꿈이기에 그러합니다.
솔직히 하바쿡 예언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답변은 그지없이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럼에도 하바쿡에게는 경악할 만한 폭탄선언의 위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토록 부르짖는데도 모른 척하시는 것인지, 이렇게 엉망이 된 세상을 보고만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제 곧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혹한 이방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를 들려주고 계시니까요. 이러한 하느님의 응답은 하바쿡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을 법한데요. 수천 년을 이어서 똑같은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지 헤아려보게 됩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답답하고 한심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위해서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라고 야무지게 따지는 믿음인이 보고 싶다는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의 기도가 하바쿡 예언자처럼 대범하고 똑 부러지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늘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반대로만 굴러가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오직 나의 안녕과 나의 건강을 염려하며 빌고 또 비는 기도로 채워지고 있으니 참으로 송구한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신 비유 말씀이 색다르게 다가오는데요. 마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전이고 우리는 하잘것없는 종에 불과하다는 말씀으로 들을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주인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충실한 종에게 “쓸모없는 종”이라는 고백을 단언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실까 염려가 되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날 예수님의 말씀이 그 시대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결단코 주님께서는 당신과 우리 사이가 주인과 종이라 단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천년 전에 들려주신 그 케케묵은 비유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 주시려는 것인지 다시 살펴야겠지요.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만 줄 수 있고 성장시킬 수 있는 신비의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작고 큰 것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믿음의 양이 아니라 비워내고 비켜드림으로 작아지는 작업이며 그 작아짐 안에 그분의 것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믿음의 근거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얻은 구원의 은혜에 있습니다. 때문에 그분께서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넘어 우리 믿음이 매일 ‘자라나도록’ 살펴 키워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해야 합니다. 단순함이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천국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기에 그렇습니다. 이 단순함이야말로 그분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성실한 종이 될 수 있는 천국의 묘약인 까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바쿡 예언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더더욱 믿음의 귀감이라 싶은데요. 막막한 삶이 힘에 겨워서 주님께 하소연하며 매달릴 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응답은 주님을 향한 환호로 마감된다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으니까요.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도록 철저히 학습 시켜 주니까요. 하바쿡 예언자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당부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니까요. 마침내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간다는 진리에 입각하여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도약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사제는 마음이 아립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여태껏, 전쟁터에 계약의 궤를 모셔오면 전투에서 승리할 줄 알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잘못 이해한’ 신앙을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믿음과 말씀을 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드는 모습이 비일비재하니 말입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께 어떻게 하실지를 일러드리려는 같잖은 행위이니 말입니다. 그분의 뜻을 좌지우지하려는 오만일 뿐이니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신앙생활의 규칙에만 매달려 지낸다면 결국 예수님이 아닌 율법을 더 숭배하는 꼴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에 전혀 엇박자만 치고 있다면 그분과 전혀 상관없는 미신행위입니다. 믿음의 오용이며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결국에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처럼 ‘상대의 기를 꺾어 버리는 아주 나쁜 짓’으로 발전할 소지가 큽니다. 끝내 주님께로부터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다는 엄중한 경고를 들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주님을 잊고 주님 사랑을 잃는다면 교회는 허기져 쓰러질 것이 뻔합니다. 신자들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행해지지 않는 교회는 생명을 잃어 빈사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와 똑같이 예수님을 직접 보지도 못했고 만난 적도 없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철저히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얼마든지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의 온전한 사랑을 완벽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신앙생활을 성당 안에서만 살아내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믿음의 정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분의 뜻을 살아내는 삶의 변화에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한 주간, 성당에서만 사랑의 허울을 쓰고 있다가 세상에서는 훌러덩 벗어던지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삶을 살피기 바랍니다. 스스로에게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묻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만약에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하바쿡 예언자처럼 주님께 탁 터놓고 여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오늘의 화답송으로 해답을 콕 찍어 일러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마음을 무디게 하지마라”는 말씀은 곧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고대하고 계신다는 고백임을 깊이 새겨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큰일을 하시도록 마음을 비워드리는 복된 한 주간이시길 기도합니다.

성실과 겸손으로 빛이 되는 신앙인
-손희송주교-
중세 시대에 독일의 쾰른 대성당이 건립될 때의 이야기 라고 합니다. 까마득히 높은 종탑 꼭대기에서 조각가 한 사람이 돌조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에 꽃잎 하나하나를 아주 정성껏 열심히 조각했습니다. 하루는 동료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여보게, 무얼 그리 열심히 조각하고 있나? 저 밑을 내려다보게,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데, 누가 그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라도 하겠나? 대충해 두게나.” 그러나 조각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나는 밑에 서 누군가가 보아주기를 바라지 않네. 내가 열심히 조각한 이 작품을 보아주실 분은 바로 저 위에 계신다네.” 신앙인에게 기준이 되는 것은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 느님의 눈입니다. 하느님께서 늘 사랑의 눈길로 우리를 바 라보신다는 것을 믿고 그분의 손길에 의지하면서 그분 뜻 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이가 참된 신앙인입니다. 그런 사람 은 누가 보든 안 보든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하느님과 반대되는 세력들, 억압과 폭력, 싸움이 판을 치 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성실함을 유 지합니다(제1독서). 참된 신앙인은 성실할 뿐만 아니라 겸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무슨 선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 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 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 자신
이십니다(필리 2,13).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깊은 사람은 자신 의 본분을 다하고 나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 야 할 일을 하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줄 압니다(복음). 이런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는 교회의 봉사자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불림을 받은 이들은, 성직 자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이 시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달이 태양으로부 터 빛을 받아 빛을 전하듯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교만과 불손이 넘쳐나는 세 상에서 진정으로 겸손한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 로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은 겸손 한 이들을 통하여 광을 받으신다”(집회 3,20)고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봉사하는 이들 중에서 사제와 주교는 올 바른 가르침과 모범으로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품성사로 축성된 사람으로서, 성사로 주어진 하느님의 은사, “힘과 사랑과 절제의 ”에 의지해서 용감하게, 고난마저 감수하 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제2독서). 하느님 앞에서는 겸 손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에서는 용감하고 굳세야 합니 다. 성품 받은 봉사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도록 많은 기도와 격려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강재원신부-
군종신부의 삶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군인들과 함께 미사를 하고, 그들 의 수고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자 간식을 싸 들고 위문을 다니고, 부대생활에 적응을 돕고자 부대마다 찾아다니며 인성교육을 합니다. 사고 친 친구들이 있으면 마음을 바로 잡고 군생활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구치소 방문을 하고, 아픈 친구들을 위로하러 군병원에 위문을 갑니다. 신부들도 현 역 장교인지라 각자의 직책에 맞게 부대 회의에 참여하고, 부대에서 요구하 는 각종 교육, 시험 등을 이수해야 합니다. 훈련기간에는 꼼짝없이 성당, 혹 은 부대에 대기해야 합니다. 이 생활을 반복합니다.
그러다보니 성무활동보다는 부대의 과업에 더욱 치중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환경 때문에 어 쩔 수 없지만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합니다.
올해 초반이었습니다. 군종병으로 저와 함께 지냈던 친구가 기숙학원에 등록을 한다고 전화를 하 였습니다.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던 친구였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에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새로 수능 준비를 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활이 괜찮은 것인가 의문을 갖 고 있던 차에 이전 군종병과의 통화는 어떤 확신을 갖게 해주는 하느님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느님 께서는 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방법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5년 동안의 군종신부로서의 생활을 돌아보니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 애 를 썼지만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저의 것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종인데도 불구 하고 주인의 모습으로 살고자 했으니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이 들었던 것 입니다.
아마 내년 군인주일에 저는 민간인이 되어있을 겁니다.(제대가 300일 남았습니다^^) 군종성당을 떠나 는 날 본당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 니다.”(루카 17,10) 아무것도 수확할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군대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 지도록, 그리고 저를 포함한 군종신부들이 그 일에 투신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
-성주형신부-
군대, 특별히 훈련소에서 많은 병사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각기 이유는 다르겠지만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신앙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 만 안타깝게도 군대에서 세례를 받고 제대 후 사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사람 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너무 가볍게 여겨지 기도 하고, 과연 의미가 있는지 자문하며 씁쓸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마 다 한 신부님께서 저에게 해주신 조언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우리는 씨앗을 뿌릴 뿐,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다. 열매까지 맺으려는 것은 어쩌면 교만일지도 모른다.” 맞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것은 사람의 몫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섭 리이듯,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자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은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뿐일 것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앗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우리가 뿌리는 믿음의 씨앗은 겨자씨 크기만큼 미약할지 모르지만, 본래 씨앗 이라는 것은 폭발적인 생명력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고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뿌리는 그 믿음의 씨앗으로 큰 열매를 맺으시고, 더 나아가 나무 가 뽑혀 옮겨질 수도 있을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이곳 군대에서 하고 있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강한 생명력의 가능성을 지닌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간직하고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믿음의 삶 역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의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그것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 어떤 기적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하시는 주님의 권능은 전능합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길 소망합니다. 그 일은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뿌린 그 씨앗은 주님께서 열매 맺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것까지 걱정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열매 맺는 것은 주님의 몫으로 돌려드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믿음의 씨앗을 기쁘 게 간직하고 용기 있게 뿌려 나갑시다. 그리고 주님께 함께 기도드립시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바로 그 기도를 말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

자라나는 신앙의 씨앗
-이슬기 신부-
부대 안을 걷고 있노라면 지나가는 친구들이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아멘!”, “알렐루야!”
그 인사에 저도 “그래~!! 좋은 하루~~!!” 큰 소리로 화답합니다.
그러다 친구들이 하는 행군에 군복을 입고 참석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 “찬미 예수님!!”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잠깐의 침묵 후에 친구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신부님, 군인이셨어요?” 저도 “어쩌다 보니 두 번 왔네.”라고 대답하고 함께 걷습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러갑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친구들의 고백이 쏟아집니다.
중·고등학교 때 성당에 나가지 않다가 입대하고 성당에 다시 나온다는 친구, 복사단 학생회를 했지만 대학을 가면서 성당을 잊고 살았다는 친구,
세례를 받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친구, 많은 고백이 쏟아집니다.
질문도 같이 쏟아집니다. 세례받는 법을 묻는 친구, 왜 군대 두 번 왔는지 묻는 친구.
많은 고백과 질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친구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가 좋은 것 같습니다. 성당 잘 다니고 싶습니다.” 친구들의 공통적인 말에 저는 그저 웃음으로 화답할 뿐입니다.
이런 친구들과의 삶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아! 이 친구들의 믿음이 어쩌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구나.’
너무나 작은 크기라 그냥 지나치면 있는지도 모를 그 겨자씨에 비유된 믿음.
결국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 믿음이
우리 친구들의 마음 안에서는 싹을 틔우고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 듯합니다.
조심스럽게 자라는 친구들의 믿음을 바라보면 성당에 와서 누구보다 큰 소리로 성가를 부르고
지루한 강론 시간에 눈은 감고 있어도 마음은 열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저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을 고백합니다. 작은 것에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을 만나는 친구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어쩌면 저 뿐만이 아닌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많은 이들이 느낄 수 있는 부끄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우리가 처음 하느님을 만나고 기뻐했던 그 순수함을 잠시 잊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살았던 그 순수함을 우리 친구들은 이제 막 느끼기 시작합니다.
군인 주일을 맞이하여 군인 친구들을 마음에 한 번 떠올려 보았다면,
우리의 순수함을 잊고 살았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작은 싹을 조심스럽게 틔우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떠나 군이라는 곳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신앙을 키우는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달달한 초코파이와 음료수가 아닌
친구들이 하고 있는 신앙에 대한 격려와 관심 그리고 기도입니다.

-서공석신부-
복음서들은 유대인들의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남긴 초기 신앙인들 대부분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유대인 고유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예수님에게 청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마르코복음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1, 23).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고유한 과장법이 있습니다. “좋아 죽겠다”, “바빠 죽겠다”같은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과장(誇張)법입니다. 그것을 외국어로 옮기면 뜻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은 사람도 없고, 산을 바다에 던진 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다는 말이나,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표현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전달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어떤 신통력(神通力)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초능력(超能力)의 소유자가 되고 싶습니다.「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가 그분을 유혹하였다고 말하면서 유혹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초능력,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무사한 초능력, 부귀영화를 사람들에게 주는 초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면서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며,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것은 기적(奇蹟)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놀라움은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 위주로 살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위주로 살게 되는 놀라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로 삽니다. 재물과 지위를 탐하고, 여러 가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하느님의 일, 곧 베풀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일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믿음은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녀는 부모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부모의 뜻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함께 계시는 부모를 무시하고, 자기 위주로 살면, 우리는 그것을 불효 혹은 패륜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도 자기 위주로 살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면, 자녀들은 제대로 자라지도, 성숙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사랑은 인간이 자기 한 사람 위주로 살지 않고 헌신(獻身)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하고 살아서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 그런 헌신은 놀라운 일로 보입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 부모를 위한 자녀의 사랑은 인간 모두가 하는 일이라, 우리 눈에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 사실을 우리가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기초적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오시게” 하자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은 초능력을 얻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 병든 이, 죄인,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당한 이들과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 그리고 모든 불행한 이는 하느님이 버린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정신질환자나 간질환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1).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라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행복할 것을 비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신앙은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만큼 엉뚱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보라는 말씀은 의미 없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신앙은 그런 불가능한 일이 사람들 안에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의 역사는 사랑과 봉사와 헌신의 역사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24) 역사입니다. 초인적 능력을 탐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만 찾던 사람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닫고,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에 실천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자신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힘까지 빌려서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움을 깨닫게 해서 그런 망상(妄想)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새롭게 태어나듯이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이, 봉사한 후에,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물러날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가르치던 것과는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자기 할 바를 다 했으면, 당연히 상응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땅에 떨어진 밀알과 같이 돌아갸셨습니다. 쓸모없는 종과 같이 세상에서 물러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돋보이게 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사랑하고 섬기며, 그것을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배웁니다. 우리가 배워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라, 우리 스스로는 쓸모없는 종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자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여 표류하던 생명이 하느님이라는 넓은 바다 안에 심어지는 놀라운 일입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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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마지막, 선생님들은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큰 결실을 볼 것이라는 다섯 명의 학생이 다른 학생들보다 여러 지표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성적도 껑충 뛰었고, 지능 검사 점수도 학기 초보다 12~36점 올라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소에 매년 우수한 학생들을 미리 선발해 달라는 부탁까지 선생님들은 합니다.
사실 결실을 볼 학생 선발은 무작위로 했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우수한 결실을 볼 학생이라는 말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 것이고, 이러한 긍정적 기대가 아이들을 우수한 학생으로 변화시켰던 것이지요.
누군가로부터 긍정적 기대와 함께 관심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결국, 누군가의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쉽게 판단하면서 부정적 결과만을 예측합니다. 그리고 이 예측은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착각에 빠집니다. 자신의 잘못된 시선이 이렇게 만든 것인데 말입니다.
이러한 긍정적 기대와 관심이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부정적 기대와 무관심은 믿음 없음을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정도로도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대로 된다고 하시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겨자씨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작은데 그만한 믿음이면 충분하다니요? 그러나 겨자씨 자체에서 머물지 않고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커지는 겨자 나무를 떠올려야 합니다. 즉,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은 가능성을 간직하는 믿음,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 기대와 관심을 두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말씀하신 뒤에 종과 주인의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일하고 돌아온 종이 먹을 것을 준비하고 옆에서 시중을 든다고 해서 고마워하지 않는 주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고마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도 당연히 간직해야 하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부정적 시각과 무관심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도 긍정적 시각과 큰 관심을 두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하바쿡 예언자가 불의와 재난을 어떻게 봐야 하냐고 하소연하자, 주님께서는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실한 믿음만이 불가능을 없애고 가능성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우리는 좋은 하루를 맞이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늘 좋은 하루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한 상황이 찾아오면서 최악의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 좋은 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의 4가지만 실천해 보십시오.
1. 오늘 하루 후회하지 않기.
2. 오늘 하루 조급하지 않기.
3. 오늘 하루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기.
4. 오늘 하루 화내지 않기.
좋은 하루, 나를 통해서 어느 정도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은 감사를 먹고 산다
-전삼용신부-
한 여성이 10년 동안 사실상 식물인간이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해도 극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뺑소니 차량과 정면충돌한 사고의 후유증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다보니 우울증까지 왔습니다. 당연히 죽음도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결심한 후에 마지막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어느 휴양지에서 댄스 공연을 보았습니다. 춤을 좋아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구경꾼들이 다 빠져나갔는데도 여전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팔 뿐이었습니다.
‘그래. 팔이라도 움직여보자.’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팔을 흔들었습니다. 그 리듬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고 다리와 허리까지도 들썩였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니 아무 통증 없이 몸 전체를 움직여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다. 10년간의 통증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다니!’
다음 날에도 통증이 생길 때 그렇게 반복했습니다. 통증이 적은 부분부터 움직여 그 움직임이 온 몸으로 퍼지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 날엔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리를 움직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상상 속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반드시 있구나!’
그녀는 TV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은 잊어버리고 움직일 수 있는 부분에만 리듬을 맞췄어요. 나흘째부턴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게 됐죠.”
미국의 카줌(Loolwa Khazzoom)의 기적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쓴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통증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있습니다.
[출처: ‘리듬: 꿈을 방해하는 부정적 이미지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는 평균 2주에 한 번꼴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3퍼센트 정도가 생존합니다. 생존한 두 사람의 말이 ‘뉴요커’지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난간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는 바로 그 순간. 저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내린 일만 빼고서요.”
자살을 용기가 있다면 세상엔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뛰어내렸다면 그것만은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제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뛰어내렸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였습니다.”
나를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악입니다. 그 악에게 이용당하여 감사한 면을 볼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볼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더 긍정적인 면, 더 감사한 면을 발견하려 노력해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감사한 일들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믿으면 반드시 시련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야한다고 믿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미래는 두렵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그 두려움이 믿음을 갉아먹습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믿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 지면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 믿음이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이기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지금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합니다. 이것은 믿음에게 밥을 주는 일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믿음은 굶어죽습니다.
방탄커피를 만들어 1억 잔 이상을 판 데이브 아스프리가 어떻게 그런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커피 전문가가 아닌 컴퓨터 전문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커피에 버터를 섞는다는 생각이 세상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외면하였고 커피 전문가들은 비판하였습니다. 그런 때는 수도 없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는 말합니다.
“수많은 비평에도 불구하고 내 믿음에 따라 행동한 결과, 나는 성공을 거머쥐었다. 자신만의 미션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미션을 품어야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 감사함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신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비평가들의 말을 믿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 비난을 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든 결국 당신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테니 감사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머릿속 이야기를 바꿔라.”
[출처: ‘최강의 인생: 제3장 두려움을 감수하고 틀을 파괴하라’, 데이브 아스프리, 비즈니스북스]
TV의 동물에 관한 프로그램에서 어떤 철새들이 히말라야의 아주 높은 산을 넘으려고 며칠 동안 사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며칠 동안 맞바람과 맞서 싸우다보면 바람이 잔잔해지고 순풍이 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넘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철새들이 산을 넘으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것들의 믿음을 역풍이 빼앗을 수 없는 이유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실제로는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모범을 비유로 보여주십니다.
어떤 하인이 있는데 밭에 나가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을 때 주인은 저녁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기꺼이 저녁을 차리고 주인이 식사를 하는 동안 음식 냄새만 맡으며 시중을 듭니다. 설거지까지 다 하고 나서야 간신히 남은 음식으로 밥을 비벼먹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때 주인이 와서 “오늘 고생했지?”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하인은 이렇게 대답해야합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주인이 자신을 종으로 맞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 식솔들은 밖에서 굶어 죽어야 할 수도 있고 산적 떼에 부인과 딸이 잡혀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셨는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나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신 것도 포함됩니다. 주님을 믿으면 동시에 감사가 함께 증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옥 가는 것보다 주님의 집에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지금 감사하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감사가 큰 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한 사람입니다. 믿음은 감사를 먹고 삽니다.

-조재형신부-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당시에 일본의 가전제품은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도 입학 선물로 일본의 소형 녹음기를 받았습니다. 작고 아담한 녹음기는 저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가전제품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인의 장인정신, 성실함,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만들어낸 성공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철옹성 같았던 일본의 가전제품은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애플, 삼성, 구글, 페이스북 같은 새로운 기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장인정신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서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은 스마트 폰을 기점으로 한 디지털 환경의 변화입니다. 애플, 삼성, 구글, 페이스북은 그런 환경에 적응해서 디지털 혁명의 대열에 함께 했습니다.
100년 전 중국과 한국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국력과 한국의 문화가 당시 세계의 수준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석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청동기 시대는 철기 시대를 견디지 못한 것처럼 철기 시대의 문명은 증기기관으로 발전한 기계문명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였고, 새로운 산업혁명이라는 배에 탑승했습니다. 마차는 자동차의 등장으로 자리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증기기관의 기계문명은 디지털로 무장한 4차 산업혁명에 자리를 내주리라 예상됩니다. 변화되는 시대의 상황을 직시해야 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박해와 순교를 견디어낸 제자들의 헌신적인 선교로 예루살렘을 벗어나 중동,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로 전해졌고, 동방의 조선에도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문화를 받아들였고, 견고한 교계제도와 교리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고, 교회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고,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타성에 젖게 되었고,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교계제도는 질서를 유지하는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현장의 소리를 경청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제도입니다. 시민혁명과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은 교리와 신학을 따분하게 여겼습니다. 여행을 자유롭게 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진화론과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지성이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제 성소의 감소가 급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교회를 매각하기도 했고, 교회가 문화시설로 대체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떨까요?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교회는 박해의 긴 터널을 지났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섰습니다. 권위와 독재를 비판하였고,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했습니다. 70년대 백만이었던 신자는 10년마다 백만 명씩 늘어났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500만 명의 신자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전구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함께 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겸손하지만,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박해를 견디어낸 신자들은 신앙에 충실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교회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성당을 신축하고 대형화된 교회는 신앙을 키우는 데 소홀했습니다. 핵가족화되면서, 성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면서 가정에서의 기도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사제들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권위와 독선은 공동체에 큰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신앙은 삶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전락했습니다. 사제가 마음에 안 들면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이 쏠리면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30% 미만의 신자들만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목소리가 성당에서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가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제들의 성찰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사제가 걸었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권위와 독선을 버리고 겸손과 온유함을 입어야 합니다. 사제의 말과 강론은 영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성체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사제는 그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성찰입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의 기도가 살아나야 합니다.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재물을 땅에 쌓기보다는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묵주를 든 손에는 악의 세력이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순교자들이 보여준 영성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그런 걸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이처럼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나는 주님의 위대함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요?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요?
-양승국신부-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늘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권의식, 우월주의, 특혜, 특별대우, 갑질, 차별대우 같은 구시대적 악습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근현대사를 돌아보니, 그런 악습에 깊숙히 빠져 살았던 악한 무리들의 횡포와 갑질로 인한, 가난한 국민들과 힘없는 서민들의 수난사(受難史)였습니다.
청문회장과 국정감사장에서, 아주 거만한 자세로, 폼이란 폼은 있는대로 다 잡고, 틈만 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참으로 봐주기 힘든 꼰대중의 꼰대인 한 국회의원을 보고, 정말이지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국회의원! 그거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어찌 그리 쌩난리를 다 피웁니까? 보아하니, 지금쯤 집에서 지난 세월 반성하며, 손주손녀나 보면 딱 좋을 분 같은데, 그분도 죽을 고생을 하길래, 참 불쌍해보였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너무나 나약한 존재여서, 지속적인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할 때, 순식간에 안하무인, 꼴불견으로 돌변합니다. 쥐꼬리 만한 권세라도 손에 쥐게 되면, 천하를 다 얻은 듯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다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코웃음치는 것도 모르고,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내가 누군줄 알아?’하며 허세를 부립니다.
그저 야심으로 가득차 영혼은 사라진 채 좀비처럼, 불나방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의 미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들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도 웃기고 가증스러운 데, 하느님께서 보실 때는 얼마나 더 웃기고 가증스럽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 직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침을 가르치십니다. 요점은 제자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10절)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자는 종이라는 것, 제자로서의 사도직 수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보상이나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들, 참으로 봐주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껏 부풀려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근본, 원초적 결핍, 태생적 나약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마치 이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 불과 20년 30년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육체는 아무 볼품없이 모습으로 차갑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저 세상 어딘가에서 초조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꼭 쥐고 있던 재물들은 사방천지로 흩어져버렸을 것입니다. 남겨놓은 글도, 명성도 순식간에 잊혀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도 자부심을 느꼈던 소중한 저서들은 킬로그램당 얼마씩에 팔려 고물상 한켠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인물, 엄청난 존재가 되고자 발버둥치는 노력들이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 없는 허영심, 자만심, 하늘을 찌르는 교만함을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육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위쪽에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나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 나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나는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제자직 수행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되어준 사람
-반영억신부-
‘이웃사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찾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믿음의 힘>
-송영진신부-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5-6)”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는 사도들의 말은,
자신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해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니까
‘믿음의 은총’을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믿음이 있기만 하면”인데,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없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부족한 것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겨자씨 한 알’은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믿음의 문제는 ‘강하냐? 약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불가능한 일은 없다.” 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 말씀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또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이 말씀들은 잘못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1) 믿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바라는 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실망해서 믿음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어떤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라는 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남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하는 죄를 짓는 일이고,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3) 세상 모든 일이 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닌데,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또는 기도가 부족한 것을 감추려는 속셈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고,
그 경우에는 세상 모든 일이 다 기적이라는 말은 그냥 ‘말장난’일 뿐입니다.
‘믿음’과 ‘기적’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어라.”입니다.
예수님 탄생 예고 때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루카 1,37).
기적은 하느님(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믿는 사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고 기도하면 무조건 주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응답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 기도에 응답하는 것은 ‘주님의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기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주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기도하자마자 즉시 일어날 때도 있고,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바라는 대로 일어날 때도 있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하게 믿고 기도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믿고 청한 대로 기적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의 힘’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주님의 자비’를 겸손하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뒤에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나쁜 결과로 끝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나쁜 결과를 만드는 경우입니다.
(주신 주님의 탓이 아니라 받은 사람의 탓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는데도 ‘우연의 일치’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간절하게 믿고 기도했을 때
원하는 대로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보다 기적이 안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잘못된 지향으로 기도를 바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님께서 다른 계획이 있어서 거절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1)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바라는 이기적인 기도로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적처럼 보이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사탄의 장난입니다.)
2) 주님께서 언제 응답하실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믿음이란 ‘기다림’입니다.
3) ‘거절’도 주님의 응답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님께 간절하게 청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좋은 예입니다(2코린 12,7-9).
(우리 눈에는 ‘거절’로 보이기 때문에 ‘거절’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사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거절’이 아니라 ‘다른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가장 좋은 것’이 우리가 바란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일 수 있고,
‘가장 좋은 때’가 우리가 생각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때일 수 있습니다.)

믿음
-이종훈신부-
장인의 손은 기계보다 정확하고, 명인의 작품은 예술이다. 이런 이들은 한결같고 답답할 정도로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한다. 수십 년 혹은 평생을 하루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그 한 가지 일만 해서 명품을 만든다. 그들의 작품에 경탄하고 그들의 고집이 존경스럽다. 원칙을 고수하며 한결같은 그들의 마음과 손놀림은 이미 아름다운 결과를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에는 속임수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2천 년 동안 변한 적이 없다. 그것을 다르게 혹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잠시 반짝하며 소란을 피우다가 모두 사라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사셨고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뜻, 곧 진리였고 또 진리이다. 주님께는 과거형이나 현재형이나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셨고 사랑은 나눔과 섬김이라는 열매를 맺으며 세상은 그 열매를 먹고 산다. 명품은 명인의 손재주가 아니라 원칙에 충실한 그의 마음에서 탄생하고, 영원한 생명은 변치 않은 주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충실함이 믿음이다.
어느 날 한 노 수녀님이 어떤 사람은 수십 년 같은 일을 그렇게 달인과 명인의 경지에 오르는데, 수도생활 수십 년을 했으면 기도의 달인이 되고 예수님을 동네 친구처럼 알아야 하는 게 아니냐며 부끄럽다고 하셨다. 남 얘기가 아니다. 세속의 삶보다 수도생활이 더 긴데도 아직도 기도시간이 반갑지 않고 고해소에서 아직도 그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계속 여기서 살아도 되는 건가?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반복하면 기도의 달인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라디오 방송을 듣듯 듣고 초등학생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선교의 명인이 되려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존재를 담고 있어서 그 믿음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된다. 하느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아니 당연히 그렇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지만 오늘날 그분을 믿는다고 백두산이 제주도로 옮겨오고 대한해협이 갈라지지 않는다. 기도해서 불치병 다음날 아침에 낫고 어려운 문제가 그냥 해결되지 않는다. 나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많은 도전과 시련을 받아도 사랑 나눔 섬김을 포기하지 않고 백 원짜리 빵과 포도주 한 모금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의식을 매일 거행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보답과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 남은 시간 동안 여기서 이렇게 살 수 있음에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유대인들이 외침을 받았을 때 하느님은 하바꾹 예언자를 통해서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고 말씀하셨고,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라고 해석했다. 믿는 이는 영원히 산다. 달인도 명인도 못 되도 괜찮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치 않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그분을 믿고, 믿는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나, 그 길을 충실히 따라가면 믿는 대로 된다.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예수님, 주님의 제자라고 불리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부당함을 주님보다 제가 더 잘 알겁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저를 부르셨음을 믿고 오늘도 주님의 길을 걷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갖고 계신데 제가 다른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잉태하셨으니 저도 그 말씀을 간직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조욱현신부-
오늘의 주제는 '믿음'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에 온전히 의탁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두려움이나 자만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제1독서: 하바꾹 1,2-3; 2,2-4: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하바꾹 예언자는 예레미아와 동시대인이다. 하바꾹은 하느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다시 세워주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듯 항의하고 있다(1,2-3). 이 불편에 대해 주님께서는 신뢰심을 가지라는 계시를 내리신다. 비록 쉬 오지 않으실지 몰라도 당신을 믿는 사람을 도와주시러 반드시 오신다. "네가 받은 말을 누구나 알아보도록 판에 새겨두어라. 네가 본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2,2-4).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계속 신뢰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보증하시고 계시다. 그러나 '올바른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 즉 순간적인 어려움에 무릎 꿇어 하느님께 신뢰할 용기를 잃고 불의와 부정에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렇다면 '신앙'이 어떻게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육체적'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에 충실한 사람들은 갈데아 민족의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며, 영신적 생명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악이나 폭력의 모든 위협과 안이한 것, 편의주의적인 것, 감각적인 것 등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강인함을,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형성시켜준다. 믿음은 우리의 직접적인 체험을 넘어 기다릴 줄 알게 한다. 문제는 말씀을 신뢰하는데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영신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패배할 것이다.
복음: 루카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라고 하시며, 약은 청지기와 부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연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재물을 끊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사도들은 의기소침해진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믿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답변하신다. 그만한 신앙이라도 있었다면 그 믿음은 그 고장에서는 뿌리가 대단히 깊어서 폭풍우에도 절대로 뽑히지 않는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그대로 옮겨 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이란 양적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믿음의 가치는 '질'과 '순수성'에 달려있다. 겨자씨는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으면서 그 씨앗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시켜주는 강력한 생명력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하나의 내적 실체로서 어떠한 형태도 갖고 있지 않으며, 거창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성' 안에 살아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 나가고자 노력함으로써 단순과 겸손을 통해 행하는 모든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믿음은 신앙인의 삶 속에서 아무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중요한 상황에서 뿐 아니라,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마다 '기적'을 이루어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종의 비유에서 믿음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말씀하신다. 당시의 종이라고 하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시킬 수 있는 주인의 소모품 같은 존재였다. 이 종의 모습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무상'이고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에 공로에 대한 기록부도, 봉사의 시간표도 없고, 봉사의 한계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다 무상적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에는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10절). 우리의 봉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봉사가 '보잘것없음'이 드러난다. 정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다 했는가?'(10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무상성'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믿음이며, 제자들이 갖추지 못했던 믿음이다. 이 종의 비유는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하도록 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활동적'이어야 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즉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도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주님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성장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며,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무상으로 내어 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자. 믿음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루카 17, 6)
-한상우신부-
사도들에게
믿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믿는 법이란
예수님과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자라나야 할
우리 삶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삶의
슬픔도 기쁨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됩니다.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성장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자연스레
주님을 드러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섬기는 믿음이란
기다리고
준비하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겸손해지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믿음"으로 모아집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전제가 입당송에서 성대히 울려퍼집니다.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인이시옵니다"(입당송).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모든 만물을 돌보시고 명령하십니다. 만물은 그분께 복종합니다. 명령하시는 그분 안에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복음의 대목은 사도들의 청원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청원이기도 하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먼저 '믿음의 힘'(루카 17,5-6)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이어서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루카 17,7-10)를 말씀하시지요. 얼핏 내용이 다른 두 개의 가르침으로 보였던 것이 오늘은 두 내용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다가왔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시길 청하는데 예수님은 달라는 믿음은 주시지 않고 '믿음의 효능'을 말씀하십니다. 즉,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멀쩡하게 땅에 잘 심겨진 나무를 바다에 옮겨심는 것같이 얼토당토 않은 일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도 믿음으로 명령하면 피조물이 본성을 바꾸어 복종한다는 뜻일 겁니다. 이는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지혜 19,6)된다는 지혜서 저자의 고백을 떠올리게 하지요.
이어서 주인과 종이 등장합니다. 신분제 아래서는 아무리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종이라도 주인을 위한 의무는 끝이 없게 마련입니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루카 17,8).
주인의 이 요구는 지당합니다. 돌무화과나무에게 바다로 옮겨심어지라는 명령처럼 얼토당토 하지도 않습니다.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내심 좀 부당하게 느껴질 수는 있으나 인륜과 순리를 거스를만큼 악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으레 그랬으니까요.
주인은 자기가 종에게 하는 명령에 종이 복종하리라는 걸 알고 또 믿습니다. 사회제도 안에서 이루어진 관습이나 합의, 약속이니 그렇습니다. 종의 복종은 주인의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특별히 파행을 꿈꾸지 않는 한,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자기에게 부여된 신분적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입당송에서 노래했듯이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실 때, 그분은 이미 우리를 믿고 계시는 겁니다. 비록 그것이 고된 노동 후의 잔업 요구일지라도, 또 그동안 살던 땅에서 뽑혀 나무의 생장 조건에 해가 될 것이 뻔한 바다로 옮겨가라는 명령일지라도, 하느님은 우리가 순종하리라는 걸 믿으시기에 그렇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믿으십니다! 명령하는 이의 믿음과 신뢰는 명령받는 이의 기꺼운 순종을 부릅니다. 모두 주인의 권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때"에 대한 예언자의 한탄 섞인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입에 담아 전하건만 정작 이루어지지는 않으니 예언자로서 면이 서지 않을 뿐더러, 조롱과 비웃음을 사게 되니 그렇습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하바 2.3).
주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주님의 때"는 늦어지는 게 아니라 늦어지는 듯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기다림은 고요한 투쟁, 침묵의 투쟁입니다. 그리고 이 투쟁은 반드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상대방이 꼭 온다는 믿음이 있을 때 시간이 늦어져도 기다리는 것처럼, 믿어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과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다'(2티모 1,13 참조)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꾸며낼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하고, 종에 불과한 우리에게 품고 계신 하느님의 믿음이 우리에게까지 옮아와서 형성된 덕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주인은 종을 믿고, 종은 주인의 믿음이 헛되지 않게 따릅니다. 명령과 복종, 상하 종속 관계처럼 보이나 실은 믿음으로 긴밀히 연결된 두 존재 사이의 관계성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은 각자의 역할을 바꾸는 대전환의 역설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친히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밝히시며 종의 자리를 꿰어차셨고, 사도 바오로 역시 그분이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필리 2,7)고 이야기합니다. 주인이 종이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신비입니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루카 17,7).
종이 되신 주인께서 우리가 명령(청)하기도 전에, 당신 몸과 피로 우리가 먹을 것을 친히 준비해 내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먼저 흡족히 배불리신 후에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실"(루카 17,8)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충만해지기 전까지 그분은 목마르고 배고프고 허기진 사랑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종이 되신 주인께서 겸허히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걸 다, 생명까지 다 내어주셨으면서도 생색을 내기는커녕 더 못 주셔서 안달하십니다. 무얼 더 줄까 두리번두리번 우리 주위를 살피시다가 비고 약하고 허물어진 곳이 보이면 놓치지 않고 채워주는 분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종이 되신 마당에 본래 종인 우리가 무얼 더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앞에서 종처럼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발까지 씻어 주시는 분(요한 13,1-20 참조) 앞에서 믿음 외에 어떤 명령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이렇듯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과, 피조물이고 종인 우리 사이를 단단히 엮어 주는 끈입니다.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고,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영성체송)이시니 우리가 그분께 되돌려드릴 것은 믿음입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쓸모없는 종임을 고백하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믿음에 보답하는 한 주간 되시길 두손 모읍니다

절망 속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믿음
-김찬선신부-
오늘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것이 주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노래합니다.
“주님, 모든 것이 주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주님의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주님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이 기도는 에스테르기 4장의 말씀이기도 한데
원수의 음모에 의해 에스테르 왕비와 유다 민족 모두가 죽게 될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르도카이가 바친 기도입니다.
인간의 불의에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기도가 바쳐졌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폭력이 마구 자행되는 독재국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 같은 경우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라고 믿는데
이들의 야만적 폭력 앞에 하느님은 아무런 힘이 없으시고,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하느님이 아무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닌지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우리의 희망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1독서의 하바꾹 예어자처럼 외치게 됩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정말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바꾹 예언서는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늦어지는 듯 하드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위대한 운동가들이나 정치가들도 이런 말을 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거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거나
“그래도 나는 진리가 승리하리라 믿는다.”고 얘기합니다.
이들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둠을 볼 때 이들은 새벽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억압을 볼 대 이들은 해방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불의의 승리를 볼 때 이들은 진리의 승리를 봅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인간을 볼 때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고
보통 사람들이 인간의 어둠을 볼 때 그들은 하느님의 빛을 볼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인간적으로 막다른 처지에 다다랐을 때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진정 밤이 깊고 어두워야 별이 초롱초롱하고
인간의 불이 꺼져야 하늘의 별빛이 빛나듯
인간적 절망의 순간에 하느님의 희망은 보이기 시작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비로소 진정 싹트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돌무화과 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져라 하더라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0월 2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