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4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10. 3. 19:00

2019 10월 4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루가 10,13~16)

 

 Whoever listens to you listens to me.
Whoever rejects you rejects me. 
And whoever rejects me rejects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빌론에 유배된 이들은,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다고 고백하며 참회 기도를 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고을들에게, 당신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무겁고도 매섭습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불행을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려면 이 세 도시가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였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바빌론 임금의 생각을 적은 것에서 가져온 말씀인데,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이 하늘까지 올라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질 것을 꿈꾸다가 저승으로 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장소였고, 당신 구원 사업의 중심 장소로서 들어 높여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교만하고 완고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불행을 선고받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도록 이끄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승복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회개의 여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평소에 존경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본당 사목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사랑도 많이 받으시지요. 그런데 어느 본당으로 이동을 하셨는데 부정적인 평가의 말들이 들리는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린다, 신부님께서 개인적인 욕심을 부린다, 기도하기보다는 행사 위주의 일을 한다 등의 말들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는 지금의 본당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이 본당으로 이동하신 뒤에 사람이 바뀐 것일까요? 어느 부분에서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자들과 신부님의 대치로 인해서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서 주님만 보고서 성당 나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나쁜 생각을 버리고 대신 좋은 생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 빠져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만들어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병원에서 식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형제님은 치료도 받지 않으면서 암으로 인한 죽음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서 쓰러졌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아쉽게도 그만 주님 곁으로 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병리학 조사 결과 암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조금 부풀어 오른 림프종 몇 개만 발견된 것으로 죽음까지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부정적인 마음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보여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향해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면 절대로 들을 수가 없겠지요. 듣지 못하는 이유만 계속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 안에서 함께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대화의 기술보다 더 값진 것은 경청의 기술이다(말콤 포브스).



괜찮다. 사랑한다.

어떤 형제님께서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식들을 향해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자녀들을 폭언과 폭언으로 길들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남을 고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을 고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서로가 함께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말이 아닐까요?                   

교회를 보는 눈이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죄인이었을 때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졌지만, 회개하고 나서는 참 많은 이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우선 아버지가 그를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그가 갑자기 이상해져서 가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취했던 사람이 너무나 이상해져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많은 친구들이 나중에 그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그는 교황님께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당시 부유하기 그지없었던 교회분위기에서 거지로 살아가는 수도회를 세우겠다는 프란치스코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교황의 꿈을 통하여 프란치스코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구걸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많은 외면과 무시와 박해를 받아야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그의 제자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썼던 회칙은 너무나 엄격하여 그 제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에게 외면당해야 했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너무나 그리스도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도 받았습니다. 손과 발, 가슴의 다섯 상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다닌다는 표징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완전히 그리스도처럼 되어버리면 많은 이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재산을 다 뿌려버리고 극도의 극기생활을 하며 부자 교회를 비웃는 듯한 그의 삶은 지금 신앙인들에게도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태어나셔도 그렇게 외면당하실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신앙인이었어도 잘못된 신앙을 가졌음이 프란치스코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파견된 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파견하신 분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파견된 자는 파견하신 분을 품 안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지 않으면 지옥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파르나움, 벳사이다, 코라진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도시들이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는 무엇일까요? 그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눈이 곧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 눈을 가져야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는 가톨릭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래로 계속 복음을 전하고 그 받은 은총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베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교회를 파견 받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제들을 통하여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하셨을 리가 없다며 교회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같은 은총들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을 감소시킨 다른 종파들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어느 종파를 선택하느냐가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판결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당신 살과 피를 주시고 죄의 용서까지도 주실 수 있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는다면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곧 교회를 보는 눈입니다. 아니, 교회를 보는 눈이 그리스도를 보는 눈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올 때 여행 가방을 가지고 왔습니다. , , 필기구, 제의, 신발을 가져왔습니다. 잘 챙겨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꼭 가져와야 할 건 놓고 왔고,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걸 가져왔습니다. 몇 년 지낼 동안의 물건이고, 정 아쉬우면 부탁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문득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옆 본당의 신부님이 강론 때 닭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전에 닭을 키울 때입니다. 닭 중에는 유난히 약하고, 병든 닭이 있습니다. 다른 닭은 활기차게 먹이를 찾고 움직이는데 병든 닭은 머리를 숙이고 졸고 있습니다. 그러면 힘이 강한 닭이 졸고 있는 닭의 머리를 쪼아댑니다. 그러면 약한 닭은 죽습니다. 병이 더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닭은 그렇게 죽습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닭의 선택입니다.” 닭만 그럴까요? 사람들의 공동체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왕따가 있습니다. 왕따 당하는 학생은 악 하거나, 못된 게 아닙니다. 학생들 사이에 약하고, 지적으로 모자란 친구가 왕따를 당합니다.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생존게임이 자연스럽습니다. 승자독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돈도 실력이라는 말도 있었고, 땅콩이 비행기를 멈추기도 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장관의 능력과 자질을 묻는 청문회에서 딸의 성적, 학력이 쟁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기보다는 타인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익숙합니다. 인류는 최근까지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건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권력과 재물과 능력에 따른 새로운 계층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또 다른 삶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병들고 약한 닭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약한 닭을 위해서 병원을 만들고, 공동체가 힘을 다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밤을 새워서라도 찾는 착한 목자가 되라고 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큰아들이 되지 말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가 되라고 합니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자고 합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면 무엇을 가지고 싶으신지요? 나를 외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게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업적입니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서 유익할지 모르지만, 언제가 우리가 모두 가야 할 곳에는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얼 가져가야 할까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리가 가져가야 할 건 외적인 게 아닌 내적인 거라 합니다.

 

어둠에 빛을 주는 마음, 의혹이 있을 때 믿음을 주는 마음, 절망이 있을 때 희망을 주는 마음,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마음,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는 마음,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산책을 나갔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강아지를 만났습니다. 보아하니 족보와는 거리가 먼 강아지, 잡종 중에 잡종 강아지였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짖지도 않았습니다. 손만 내밀면 그저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손을 핥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주인 몰래 들고 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녀석이 그렇게 예뻤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녀석이 송아지나 코끼리 만해도 예뻐서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까요? 녀석이 그리도 예뻤던 이유는 작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분명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부담스러워하실 것입니다.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작은 사람, 겸손한 인간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의 한없는 겸손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칭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본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 ‘작고 가난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아래 있는 사람’, ‘죄인 중의 죄인’,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등으로 자신을 칭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을 판박이처럼 빼닮았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하려고 집도, 수도원도, 아무런 재산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덕을 유지하려고 사제직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도회 총장이 되었지만 갓 입회한 지원자에게도 순명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수도원 들어와서 참으로 멋진 선배 사제를 봤습니다. 당신께 들어오는 좋은 선물들은 모두 저처럼 ‘없어 보이는’ 후배들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십니다. 당신은 늘 노숙인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 선배가 인사발령이 나서 다른 소임지로 떠나실 때였습니다.

 

 다들 수도원 마당에 모여서 인사를 드리는데, 깜짝 놀란 것이 이삿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짐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달랑 손가방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걸 손수 양손에 들고 대중교통으로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홀연히 떠나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아가셨던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귀감이 되어야 할 고위 성직자들은 제 몫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갖은 이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했습니다.

 

 위풍당당한 대성전들과 수준 높은 예술작품 등으로 외관상 교회는 활짝 꽃피어났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암울한 시절,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모습, 가장 가난한 모습, 가장 겸손한 모습,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대중들 앞에 등장합니다. 지닌 것이라고는 지독한 고행과 극기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 하나뿐인 그가 부패일로를 걷고 있던 제도교회와의 정면대결을 펼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한 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서슴없이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외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까지만 우리가 잠시 빌린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회개의 삶

-반영억신부-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 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카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것이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4,5).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회개의 삶을 살지 않는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회개할 때 자루를 뒤집어쓰고, 재위에 앉거나 머리에 재를 뿌린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낸 행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이나 비난까지도 감내하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진심이 담겼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진정한 회개의 삶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행은 죄의 결과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회를 무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송영진신부-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3-16).”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로 제목이 붙어 있고,
또 예수님께서 고을들을 꾸짖으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성경에 어떤 국가나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국가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 그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의 사람들이 무조건 멸망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한 국가나 도시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전체가 심판 대상이지만,
구원을 받거나 멸망을 당하는 것은 각 개인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과 심판의 날에 일어날 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가족이라도 구원과 멸망으로 갈라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은 개인의 문제” 라는 말은 심판결과가 그렇다는 뜻이지,
남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구원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 실천이고, 사랑 실천은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관심 갖지 않고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고,
혼자서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태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도 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죄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도시나 한 국가가 이상한 풍조에 휩싸여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또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죄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일도,
세상을 복음화 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사랑 실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말씀이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안 믿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물론 예수님 말씀에 있는 ‘회개’ 라는 말은
‘당신에 대한 믿음’도 포함하는 말이긴 합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회개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티로와 시돈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고,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을 언급하신 것은,
그 두 도시 사람들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하느님 뜻’에 합당한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참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믿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할 일은 ‘회개’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고,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받을 심판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받을 심판이 더 엄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처음부터 세례를 안 받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세례를 받았고,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
신앙인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그동안 받은 주님의 은총을 부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은총 속에서 살았던 시간들은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은총이 취소되는 일도 없습니다.)

‘회개’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이미 받은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회개’ 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지은 죄에 대한 회개도 포함되는데, 그 경우에도,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 하는 수동적인 회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응답하는 능동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옥 가는 것만 피하면 그만이라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를 안 짓기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즉 믿음과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죄는 안 짓겠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열성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이웃 사랑 실천을 하고, 항상 기도하면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살아 있는 삶’입니다. 


순수의 힘

-이종훈신부-


숲 속은 밤은 정말 캄캄하다. 어두워서이기도 하고 고요해서도 그렇다. 한 마디로 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무엇인가 있으면 그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크다. 반딧불이와 별똥별은 선명하고 전등불빛에 달려드는 나방 날갯짓에도 깜짝 놀란다. 세상에서 사셨던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그러지 않았을까? 지극히 순수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을 것 같다.

 

선입견도 유전적으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도 없는 하느님이 처음에 사람에게 불어넣어주셨던 그분의 인격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근거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이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볼 수 있고,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었을 것 같다. 명의는 증상만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 병의 근원을 찾아내기 때문에 병을 제대로 치료한다. 예수님도 그런 마음과 인격을 지니셨으니 사람과 세상을 꿰뚫어보셨을 것이다. 그분의 치유와 구마 등의 신적인 능력도 그 티 없이 맑은 마음과 순수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반딧불이의 작은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보이고 나방의 날갯짓이 비행기소리처럼 들리는 숲 속의 밤처럼 예수님의 마음도 그렇게 순수했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으로 받으신 고통도 컸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지혜로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신적인 능력으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행하셨다.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당신의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고 죄를 뉘우쳐 하느님께로 그리고 하느님이 사람을 지어 만드실 때 불어 넣어주신 그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당신의 예상과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많이, 아주 많이 실망하셨던 것 같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고 그분의 순수한 마음이 지닌 지혜는 당연한 미래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데도 자꾸 똑같은 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렇게 불같이 화내셨지만 그보다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훨씬 커서 그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불사르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아버지 사랑, 인간 사랑이었습니다. 죄인인 저는 그 사랑으로 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실망과 괴로움으로 자신을 위로하거나 감추지 말고 주님의 큰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고 주님의 계명을 더욱 충실히 지켜나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0,13-16: 띠로와 시돈에게 기적을 보였더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큰 기적과 놀라운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마을들을 엄하게 꾸짖으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3)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백성이다.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받아들이지도, 응답도, 보답도, 회개도 하지 않았음을 한탄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의 오늘의 말씀은 이 마을을 저주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기를 바라시며 걱정하시는 말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다.

 

너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겠느냐?’라고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은혜, , 가족들, 재산, 재능, 건강 등,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조건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교회에 그리고 이웃에게 얼마나 더 많은 선행과 봉사를 나보다 더 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6)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큰 권한과 최고의 영예를 주셨다. 비록 인간들이지만 하느님 같은 영광을 입혀 주셨다.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분을 물리치는 것이며,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물리치는 죄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전해주는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니, 어떻게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요,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물리치는 것이며 그분과 아버지 하느님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 내용은 다소 어둡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빌론 유배에 대한 바룩 예언서 저자의 참회 기도가 들려 오고,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탄식이 들려옵니다.

"불행하여라"(루카 10,13).
오늘의 대목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 기사에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런저런 지침들을 당부하시면서 혹여 받아들여지지 않을 상황을 염두에 두어 대응책까지 일러주신 바 있지요(루카 10,,10-12). 이 말씀에 긴장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도 어느 고을들에서 배척당하셨다는 걸 솔직히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한 고을의 이름들이 불리웁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안타깝게도 이 고을들은 예수님과 더 가깝고 친숙한 곳들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한탄과 탄식에 가까운 이 불행 선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무기력, 나아가 하느님의 무기력을 만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복음 내용 앞부분의 2인칭 "너희"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가리켰다면 뒷부분의 "너희"는 제자들을 향합니다. 용기를 주시려는 겁니다. 너희가 받는 환대는 내가 받는 것과 마찬가지고, 혹 너희가 배척을 받아도,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배척하는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움츠러들지도 말라고 격려하시지요.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이름과 존재를 새기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바룩 1,15).
하느님의 의로움과 그 앞에 선 우리의 부끄러움. 이는 벗어버릴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일 겁니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옴팍 쏟아부은 선택된 백성이라도 스스로 거부하고 배척하고 외면하면 도리가 없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거해서라도 당신 말씀을 듣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이 존중 역시 그분의 의로움이니까요.

바룩 예언서 저자는 유다의 패망과 바빌론 유배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라고 겸허히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고, 말씀을 듣지 않은 죄입니다. 심지어 이집트 탈출 때 이집트에 내리신 재앙과 저주가 이번에는 고스란히 이스라엘에 내린 것이라고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성찰합니다.

핑게 없는 무덤이 없다는 옛말처럼 모든 흥망성쇠에는 원인이 존재하지요.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닥쳐온 행, 불행의 실마리를 아프지만 정확히 성찰해낼 수 있다면 아무리 비참한 흑역사라도 디딤돌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각자의 삶을 "하느님의 의로움과 인간의 부끄러움"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돌이켜 봅시다. 예수님과 가까웠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처럼 각자 삶에 알알이 박힌 사랑의 기적들을 망각한 채 무심하고 미온적인 마음으로 회개를 마냥 미루고만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결국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제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당신께서 주신 것이고 당신이 이루신 일입니다. 반면 제 삶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실패는 제 탓입니다. 그러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 초기 하느님께서 자신의 길을 밝혀 주시기를 청하며 밤새 "하느님 의로우신 당신은 누구시며, 죄많은 저는 또 누구입니까?"를 되내며 기도하였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회개의 삶이었다고 유언에서 고백하지요. 또 자신이 시작한 수도회의 첫번째 명칭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답니다. 큰 회심은 큰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큰 회심과 큰 사랑으로 교회를 쇄신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하느님의 의로움과 우리의 부끄러움을 겸손되이 고백하는 큰 회심의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께 자비를 청해주십사 성인께 전구합시다.

"성 프란치스코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우상인가, 이상인가? 
-김찬선신부-


내게 프란치스코는 우상이었다.
이상이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우상이었다.

이것이 사부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은 저의 소감입니다.
인간적으로 얘기하면 운명적인 만남이지만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그것이 성소였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수도원에 들어와 책도 아니고 선배들로부터
처음 얘기로 들은 프란치스코는 그야말로 저를 뿅 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저였지만
하느님은 너무 멀고 예수님은 너무 무거운데 비해 프란치스코는
인간미를 풀풀 풍기면서도 초월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뒤로 밀리고 프란치스코가 저의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저의 이상이 아니고 우상인 이유입니다.
우상이나 이상이나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존재라는 면에서는 같은데
추구하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집착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매이게 하며,
주님을 가리키고 따르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하느님과 주님을 대신하고 가리는 것이 차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저를 집착케 하고 매이게 하고 주님을 가리는 존재가
프란치스코였기에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데 있어서 당연히 사달이 났지요.
하느님을 잃고 길을 잃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가야할 곳이고 예수님은 그 길인데
갈 곳도 일고 갈 길도 잃은 겁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되는 것이 돈 버는 것처럼
저의 성취, 욕심, 집착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제가 가야할 종착역이 아닙니다.
종착역은 하느님이고 프란치스코는 그리로 가는 길의 한 역일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차가 종착역을 향해 가면서 프란치스코라는 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우는데
저도 이 역에서 예수 기차에 올라탈 사람 중의 하나지요.

기차에 올라타고 기차가 떠나면 역도 떠나게 마련입니다.
불교 우화가 얘기하듯 강을 건너고 나면 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냥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였으니 너무도 고맙지만
아무리 고마워도 그 배를 계속 메고 다녀서는 안 되겠지요.

사실 프란치스코도 프란치스코라는 역을 우리에게 남겨줬지만
그도 기차를 타고 떠나버려 이제 그 역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집착하고 매였던 저와 달리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떠나고 난 뒤 프란치스코와 같이 쳐다보던 하늘을 보니
하늘로 오르는 계단 꼭대기에 프란치스코가 이미 올라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라라도 프란치스코가 먼저 올라간 그 하늘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 프란치스코의 젖에서 젖을 먹었더니
그 젖이 달콤할 뿐 아니라 황금빛이 났습니다.

클라라가 본 이 환시에서 계단은 천국의 계단이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단이며 완덕의 계단입니다.
겸손이라는 맨 및 계단에서 시작하여 사랑이라는 맨 위 계단까지 오르면
사랑이신 하느님께 도달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계단입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갔기 때문입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참으로 사랑한다면
뭘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해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을 같이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6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