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1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9. 30. 18:43

2019년 10월 1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간 그녀는 결핵을 앓다가 1897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데레사 수녀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고행하였다.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그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선종한 뒤에 나온 데레사 수녀의 병상 저서들은 세계 각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하게 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은 그녀를 시성하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녀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소화(小花)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루가 9,51-56)

 

On the way they entered a Samaritan village
to prepare for his reception there,
but they would not welcome him
because the destination of his journey was Jerusalem.

 


A Samaritan Village Rejects Jes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많은 민족들과 강한 나라들이 만군의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러 오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자 사마리아인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두 번째 단계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이 시작되는 단락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으로 전하는 마르코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그것은 루카 복음사가가 가지고 있던 선교에 대한 관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시면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전함으로써,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이방인 선교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패망시킨 다음, 사마리아로 사람들을 유배시키고, 이방 민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사마리아는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혼합 민족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른 이방인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생각했어도, 절대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고, 이방인으로 멸시하였습니다.사마리아에 들어서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이유로 고을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습니다. 이에 화가 난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고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러 오셨고, 세상을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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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비를 보면 나무나 좋았습니다. 노랑나비, 흰나비, 호랑나비...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우아해 보였고, 나비를 만졌을 때의 부드러움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이 나비를 많이 잡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학교 앞에서 파는 번데기의 시기를 나비가 거친다는 것입니다. 맛은 좋지만 번데기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런 번데기에서 허물을 벗어 멋진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나비는 알에서 시작해서 먼저 애벌레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이 얼마나 힘들까요? 이 시간에 지쳐갈 즈음 기적이 일어나는 납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비가 되기 전에 알, 애벌레, 번데기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머무는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내 상태는 어느 정도일까요? 멋진 나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멋진 내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상태에서 머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따라서 항상 힘을 내는 삶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성장하는 나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들어가려는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셨고 또 그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미움과 복수의 마음을 간직합니다. 사랑의 삶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인데, 아직도 미워하고 판단하면서 단죄하려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아직 완벽한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지요.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렇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에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 오직 주님께로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경탄할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내가 하기 나름이다'라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라(앙드레 지드)..



생각을 조심하라.

영국의 전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그것은 곧 너의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그것은 곧 너의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은 곧 너의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그것은 곧 너의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하라. 그것은 곧 너의 운명이 된다.

생각이 곧 운명을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건설적이지 못한 부정적인 생각,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소비하며 나의 운명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자비로우려면 가죽신발을 신어라

-전삼용신부-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은 산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데 악명 높은 산적 셋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은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용기를 다하여 큰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남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너희들은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는 것이냐!”

      도적들은 마음이 찔렸는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스승이 돌아오시자 그 소년은 자랑스러운 듯이 있었던 일을 고했는데 프란체스코가 섭섭한 투로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실수했다. 지금 곧 도적들에게 가서 이 빵과 포도주를 주고 오너라.”

소년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들을 바로 쫓아가 빵과 포도주를 든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소년을 따라 수도원으로 되돌아왔으며, 회개하고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누구와 싸우면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들보다 낫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다면 당연히 그들이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박수도 손이 서로 마주치기 때문에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내가 상대와 같은 수준이니 싸움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싸움은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품은 성인은 싸움을 하지 않고 사랑을 합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는 도둑들을 나무랐지만 프란체스코는 도둑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방금 전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큰 사람은 그 큰 공간으로 모든 사람을 품을 줄 압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제자들이나 결국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똑같이 작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포용력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용은 고슴도치를 가슴에 품는 것처럼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 아픔을 참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로 포용력이 결정됩니다.

      신발이 없던 어떤 시절 어떤 사람은 자신의 발을 찌르는 돌들을 다 캐내겠다고 길을 파헤치며 다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동물의 가죽으로 자신의 발을 감싸서 걸어갔습니다.

      누가 더 큰 사람일까요? 일일이 반응하는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큰 사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 가죽옷을 발에 두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죽옷은 무엇을 말할까요? 주님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러자 부끄러움이 사라졌습니다. 부끄러움이 사라지자 이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웃을 심판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인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완충작용을 해 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이 작은 아픔을 참아낼 수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가죽신발을 입읍시다. 가죽신발은 기쁜 감정입니다. 내가 기쁘면 다 용서가 됩니다. 가죽신발이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행복한 감정입니다.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그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 절대 안 좋은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기분이 나쁜 사람은 그 기분 나쁜 이유를 이웃에게서 찾아냅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10월의 첫날입니다. 예전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책을 통해서 가을의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포노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시대 구분을 ‘BC/ AD’에서 ‘BJ/ AJ’로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 폰을 세상에 내놓았고, 이제 스마트 폰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모든 사람이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을 쓰는 세대는 기존의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저도 스마트 폰을 사용하지만, 그 기능의 1%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몰라서도 그렇고, 익숙하지 않아서도 그렇습니다. 요즘의 젊은 분들은 스마트 폰에 의한, 스마트 폰을 위한, 스마트 폰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보의 검색, 쇼핑, 여행, 은행 업무, 음식 배달, 단체 대화가 스마트 폰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모르는 스마트 폰의 영역이 훨씬 많을 겁니다.

 

제가 태어난 세대는 베이비 붐세대라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룩한 세대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을 그것도 분단된 상황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인 발전과 성장을 일으킨 세대라고 합니다. 서독의 광부로, 중동의 건설 노동자로, 베트남 전쟁 참여로 외화를 벌던 세대입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한 주산으로 계산하던 세대입니다.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시작한 첫 세대입니다. 자동차를 신발처럼 편하게 몰고 다니던 세대입니다. 군사 독재의 시대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룩한 세대입니다. 아파트 문화를 처음 접한 세대입니다. 어느덧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한 세대입니다. 이제 대규모 은퇴를 앞둔 세대입니다.

 

30년의 짧은 시간이지만 300년 이상의 문화적, 시대적, 사상적 격차를 느끼는 세대입니다. 달이 차면 지기 마련입니다. 어둠이 걷히면 새벽이 오기 마련입니다. 서로의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아직 많은 시간 함께 해야 하니 스마트 폰 세대의 삶과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스마트 폰 세대는 앞선 세대의 눈물과 땀을 존중해야 합니다. 세대 간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는 분명 다를 겁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정신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입니다. 강물이 앞서거나 뒤에 따라서 오거나 바다로 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은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유배를 떠났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과 함께했다고 싫어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무시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이방인과 함께했지만 정든 고향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마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온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의 을 과감하게 바꾸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였습니다. 구원은 장소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믿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라는 주관적인 관점을 버리고 너와 우리라는 객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세대, 지역, 학연, 민족, 사상, 이념의 벽을 허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을 내릴 걸 이야기합니다. 성서에서 불을 내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불꽃을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성령의 불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위로, 화해, 평화, 사랑을 주는 영입니다. 가난한 이, 장애인, 이방인까지도 함께하는 일치의 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용서와 자비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10월 첫날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하시는 모든 일에 축복이 깃드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천국에 올라가면 지상에 장미 소나기가 쏟아지게 하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가톨릭 교회 역사 안에 세 분의 여성 교회 박사가 계시는데,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873~1897)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소화(小花) 데레사란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15세에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17세에 서원을 했으며, 불과 7년여의 짧은 수도생활, 그것도 결핵으로 늘 골골하다가 24세에 세상을 떠나신 데레사, 특별한 배움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던 데레사에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회 박사란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데레사가 비록 24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하루를 천년처럼 살았음을, 하루 하루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데레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주님을 만났고, 그분과 대화했고, 그 힘으로 이웃에게 다가섰으며 사랑했던 것입니다. 데레사의 생애를 통해 신앙의 깊이는 결코 나이나 연륜에 학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데레사는, 자신의 이름처럼 깊은 산중에 홀로 핀 한 송이 ‘작은 꽃’처럼 살았습니다. 특히 원장 수녀님의 권유로 쓰게 된 자서전에서 데레사는 스스로를 하느님 정원에 핀 한 송이 작은 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데레사는 가르멜 수녀회 안에서 위대한 대선배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를 ‘작은 데레사’라고 불렀습니다. 데레사는 더 이상 내려설 수 없는 극도의 겸손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토로 정한 것입니다.

 

 데레사는 이런 작음에 대한 큰 사랑을 자신이 남긴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장미나 백합에 견줄 수 있는 큰 성인을 창조하신 한편, 오랑캐꽃이나 들국화처럼 주님께서 발밑을 내려다보실때 그분의 눈을 즐겁게 해드리는 작은 성인들도 창조하셨으니,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크고 넓은 길, 탄탄대로를 걷고자 기를 쓰는데 비해 데레사는 어떻게 하면 작고 낮은 길을 걸을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데레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위대하고 큰 성인이 될 수 없음을 인식했고, 자신에게 꼭 맞는 길은 작고 좁은 길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데레사는 덕행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대단하거나 큰 덕행이 아니라 작은 덕행을 실천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데레사는 수도 공동체 내 동료 자매들의 시기질투나 냉대를 열심히 참아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동료 자매를 더 깊이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락 시간이면 일부러 가장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자매 곁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가르멜 수녀회 안에서의 짧은 수도생활 중에 부여받은 직무 역시 지극히 작고 평범한 소임이었습니다. 주방 보조, 복도 청소 담당, 제의방 보조, 안내실 보조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그 작은 일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지극정성으로 진지하게, 환하고 기쁜 얼굴로 수행했습니다.

 

 이런 지극히 겸손한 데레사, 작음의 천사 데레사를 주님께서 보시고, 한껏 들어 높이셨습니다. 그녀를 몇 안되는 여성 교회 박사로 선포하시고, 선교의 수호자로 명명하시며, 우리 모든 후배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귀감으로 내세우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데레사의 생각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감탄사를 연발하게 됩니다.

 

 “제게 있어 기도는 하나의 열정이며, 하늘을 한번 우러러보는 것, 기쁨을 맛보거나 시련을 당할 때에도 감사와 사랑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데레사는 지극히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그녀가 남긴 여운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한사코 그녀는 작은 길을 추구했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위대했습니다. 그녀는 떠나면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제가 천국에 올라가면 지상에 장미 소나기가 쏟아지게 하겠습니다. 저는 하늘 나라에서도 지상에 선행을 베푸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품을 키워라

-반영억신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가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야단을 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가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3,17). 예수님께서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가1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 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라가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 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을 하다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품을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송영진신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네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예루살렘 성전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 기간 중에는
적대감이 더 깊어졌습니다.
여기서 ‘심부름꾼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심부름꾼들의 임무는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그 심부름꾼들을 맞아들이지 않은 정도로 그치지 않고,
심하게 모욕하고 박해했을 것입니다.
(유대 민족에 대한 민족적 증오심과 유대교에 대한 종교적 적대감이 합해져서
그 모욕과 박해가 대단히 심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의 모욕과 박해를 하느님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적대감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적대감이었기 때문에,
두 사도가 그 적대감을 하느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또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라고 이미 가르치셨습니다.
두 사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사도의 심정은 아마도 “내가 모욕과 박해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이 모욕과 박해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라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두 사도의 말은, 겉으로만 보면 “저희가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인데,
뜻으로는 아마도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할까요?”일 것입니다.
두 사도가 바란 것은 자기들이 당한 일에 대해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두 사도는 어쩌면 “저희의 분풀이를 위해서 저들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입니다.” 라고 변명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하느님을 위해서’ 사마리아인들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두 사도가 아직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이 죄를 짓기만 하면 곧바로 천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그들의 생각과 말이 옳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당신의 계명을
다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 일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베드로 사도가 칼을 뽑아서
그것을 막으려고 한 일이 연상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마태 26,52-53).” 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셨습니다.
(힘이 없어서 참는 것과 힘이 있지만 참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 힘이 없어서 참는 것은 억울하고 분한 일이 될 뿐입니다.
사랑 실천은 ‘힘이 있지만’ 참는 경우에 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천벌을 내리기로 작정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따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들을 꾸짖으신 다음에
그냥 다른 마을로 가신 것은 아닐 것이고,
사마리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도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을
‘지금 당장’ 보고 싶어 하는 심정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왜 아무 일도 안 하시나?
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시기는 하는가?” 라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떻든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바로잡힐 때가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냥 참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선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과 사랑의 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악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비폭력

-이종훈신부-


방 안에서 키우던 식물 하나가 시름시름 앓더니 잎이 모두 시들어 버렸다. 뽑아버릴까 하다가 시간이 없어 그냥 두었는데 얼마 전부터 새 줄기와 잎이 다시 나온다. 아마 물을 너무 많이 줬었나보다. 놀랍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

 

힘과 폭력이 만들어낸 평화는 억압이다. 목적이 선하다면 수단도 선해야한다. 구원의 도구는 비폭력적이어야 한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선포하듯이 예수님은 세상 권력의 폭력을 끝까지 비폭력으로 대하셨다. TV 드라마 대사처럼 전쟁은 쉽고 평화는 골치 아프다.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은 당신의 인생을 요약하며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하나의 긴 여행으로 묘사한다. 사탄인지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예수님의 그 여행길을 끝까지 방해했다. 예수님도 그것들과 맞서느라 고단하셨고 마지막 시간에는 갈등하며 괴로워하셨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들도 이해할 수 없는 스승과 함께 지내느라 세상에는 없는 하느님의 길을 따라가느라 버거웠을 것 같다.

 

구원의 길은 비폭력이다. 주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 그분은 충실하게 당신의 방식대로 고집스럽게 구원의 길을 가셨다(이사 42,3).’ 폭력을 쓰려는 제자들은 꾸지람을 받았다(루카 9,55). 우리는 정당방위가 아니라면 어떤 형태의 폭력도 쓰지 않아야 한다. 물리적인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폭력, 다수의 폭력도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 한다. 폭력은 두려움의 표현이란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의로운 이들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나? 두려워할 것이 있다면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뿐이다.

 

구세주 예수님, 주님이 보여주신 길은 지루하고 고달파서 힘을 써서 쉽게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고 또 실제로 그것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고 구원의 길도 하나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패배와 실패로 보여도 그것이 주님이 가셨던 길임을 굳게 믿고 계속 끝까지 갈 수 있게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안에 있는 모성(母性)이 더 자라나 제안의 폭력성을 비롯해 마주하는 폭력들을 품어 안을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복음: 루카 9,51-56: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나서신다. 하늘로 올라가시어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실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셨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럴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수난을 당하시게 된다.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제자들이 상처받지 않고, 심한 냉대를 받아도 불평하지 않고 참아 내기를 바라셨다.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그들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들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먼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한상우신부-

하나의 작은 꽃이
자연스레 꽃길을
만들어갑니다.

아름다움은
길을 만듭니다.

아름다운
길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습니다.

길은 예수님처럼
마음을 굳히는
이들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이
우리의 길을
다시 따뜻하게
품어줍니다.

길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삶이
곧 길이 됩니다.

큰 길만
가려는 우리들에게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작은 길도 길임을
믿음으로 보여줍니다.

믿음의
길에서 만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삶보다
아름다운 길은
없습니다.

작은 한 사람의
수도자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우리또한
사랑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소박한 일상
소박한 기도로
소박한 주님께로
돌아서는 참된
기쁨이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 비장한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오늘 제1독서인 즈카르야 예언서는 이민족과 세계 만방이 하느님 현존을 기대하며 몰려올 영화로운 도성 예루살렘을 이야기하지만, 현재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예언자의 죽음의 도성"(루카 13,33 참조)입니다.

"마음을 굳히셨다."
설령 예루살렘을 향하는 지금 이 길이 당장 수난과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예수님께서 번민과 고뇌를 딛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세우신 순간은 참으로 결연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 9,51).
이 냉대와 거부는 유다와 사마리아 사이에 형성된 해묵은 적대감과, 무시에 대한 반감에 기인합니다만, 다른 이유도 존재할 겁니다.

사실 한 존재가 큰 빛으로 들어갈 때 어둠의 힘도 여지없이 끼어듭니다. 그 결단의 파급 효과가 크고 은혜로울수록 끌어내리려는 힘도 적극적이 되지요.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려는 큰 뜻을 품고 한 걸음 나아가시는 순간, 언젠가 다가오겠지만 그게 당장인 줄은 몰랐던 거부와 배척이 유다와 사마리아의 역사적 관계성을 빌미로 실체를 드러낸 겁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결심을 굳히신 순간 받으신 첫 번째 유혹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요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앞당겨졌을 뿐 당신이 맞이하셔야 할 예언자의 길임을 잊지 않고 계시니까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천둥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엘리야라도 된 듯 여기는 걸까요? 만용도 이런 만용이 없습니다. 홀대받는 스승에 대해 그만큼 분하고 속상한 심정은 알겠으나 충성심이 과했지요. 악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의 충성심과 애정을 통해 명예심을 부추기고, 상처입은 영광이 분노와 파괴로 이어지도록 방법을 슬쩍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루카 9,55).
예수님은 지금 철없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행위를 통해 그들 안에서 피어오르는 악의 기운에게 철퇴를 가하시는 겁니다. 한없이 자애 넘치고 사랑 가득한 분이시지만, 제자들 안에 스며든 악의 기운을 감지하실 때면 가장 신뢰하는 제자에게도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를 외치시는 분이니까요.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라는 허울로 내뱉은 폭력적이고 무분별한 역성이 예수님을 끌어내리려는 두 번째 유혹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6).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냉랭한 거부에도, 지나친 충성에도 휘둘리지 않으시고 꿋꿋이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는 힘은 자기애와 자기 영광에 함몰되지 않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또 당신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찾는 선택이었기에 이렇듯 so 쿨~하게 떠나신 것이지요.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나도 가겠다."(즈카 8,21)
예루살렘을 향하는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에 가서 외칠 것입니다.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우신 영광의 주님께 함께 가자고 독려하는 이 목소리는 이미 수 세기 전 성읍마다 마을마다 울러퍼져야 했지요.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와서도 현실의 벽은 두껍기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사도 8,14).
훗날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후, 필리포스의 전교로 시작된 사마리아의 복음화는 교회 역사 안에 성큼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즈카르야의 예언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전기를 맞이한 것이지요.

"때가 차자"(루카 9,51).
때를 아는 이는 경솔히 분노하거나 앞질러 실망하지 않습니다. 적처럼 다가오는 이를 증오하지 않고 혀처럼 감겨드는 이를 편애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움직이는 힘을 꿰뚫어 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대하시는 "때"는 당신 십자가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적개심과 차별을 없애버리실 진정한 "때"입니다. 그 "때"가 지금 여기서도 차오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스며드는 차별과 적대감과 무시와 소외의 악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요... 제 분노를 충성심인 양 투사해 놓고는 "불을 내려 버릴까요?" 하며 있지도 않은 능력까지 동원해 어둠에 동조하고 있다면, 돌아서서 꾸짖으시는 예수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습니다. 무어라 하시고 어디를 향하실지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이 혼돈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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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