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9. 29. 18:32

2019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가 9,46-50)

 

 “Whoever receives this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비 자체이신 주님께서 선악과가 아까워 그들을 내쫓으셨을 리 만무합니다.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인간이 하느님 행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사람을 심판한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주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심판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아담은 하와 탓을 하였고 하와는 뱀 탓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였던 죄는 결국 마음이 좁아지게 만들어 서로를 심판하게 만들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은 포용력과 직결됩니다. 가장 작은 이를 받아들인다면 하느님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깊은 계곡이 물을 받아들이듯 깊은 겸손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힘입니다.교만하면 죄를 짓고 그 죄책감을 무마하려고 다른 사람을 심판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죄가 없으니 이웃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을 심판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판단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도 죄도 따라서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안아 줄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회사에서 생산하던 제품이 사람들의 커다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구매요청이 끊이지 않았지요. 사장님까지 작업복을 입고서 제품 생산을 위해 밤낮없이 공장을 돌렸지만, 도저히 요청물량을 맞추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장님은 함께 제품을 생산해줄 협력업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너무 바빠서 작업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첫 번째 협력업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정문을 통과도 못 했습니다.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의 사장님을 정문을 지키던 직원이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것이지요. 두 번째로 찾아간 협력업체에서는 정문은 통과했지만, 사무실 직원이 사장님의 옷차림을 보고는 담당자가 없다면서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로 찾아간 협력업체는 달랐습니다. 경비원은 물론 담당 직원까지도 친절하게 웃는 모습으로 사장님을 맞이했던 것이지요. 어디와 업무협약을 체결했을까요? 당연히 세 번째로 찾아간 협력업체와 계약을 맺었고, 두 회사는 이후 더 큰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겉모습만을 보고서 쉽게 판단을 합니다. 하지만 이 겉모습만으로는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요. 따라서 그 이면까지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는 겸손한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수많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에 있으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포용하는 마음이 넓은 마음이고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합니다. 이렇게 논쟁을 한다는 것은 우두머리가 되려는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욕망을 주님께서 어떻게 잘라 버리셨습니까? 바로 어린이를 통해서였습니다. 어린이의 순수함과 겸손함의 본보기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속이려는 마음이 없고 순수합니다. 생각이 단순합니다. 어린이는 높은 지위를 탐하지 않고, 남보다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그 뒤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막으려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를 막지 말라는 것 역시 배타적인 마음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포용력을 가지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자기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2012년 세계 행복 보고서 중에서).



짧은 기억력의 힘.

기억력이 좋은 것이 좋을까요? 기억력이 나쁜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기억력이 좋다면 생활하는데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기억력 좋은 모습을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 골프 세계 4대 대회를 모두 석권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3번이나 달성하여 골프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잭니클라우스는 자신의 성공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한 샷은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나쁜 샷을 오래 기억하면 경기를 망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미식축구에서 선수시절에는 패스의 달인으로 불렸고, 나중에는 명감독으로 자리를 매겼던 오토 그레이엄 역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지요.

“아주 짧은 기억력입니다. 실수를 잊고 빨리 다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신체 조건이나 재능보다 중요합니다.”

좋은 기억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나쁜 것은 기억하지 않고 지금에 충실하게 집중할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옥까지 포용할 수 있는 사람

-전삼용신부-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습니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습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사장은 또 배신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으니 대인(大人)인 것입니다. 사장이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전에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를 댄 것은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를 책망할 마음이 없었지만 아담 스스로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보고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하와를 심판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으면 이웃도 심판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포용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면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겸손한 사람은 포용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서로 큰 사람이냐를 따지며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지 말씀하시기 위해 어린이를 세우십니다. 어린이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런 포용력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간음한 여자를 다른 사람들은 다 판단하여도 예수님은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여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을 받으셔야하셨습니다. 또한 가리옷 유다도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이 가까이하기 좋아하는 사람만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마귀 같은 인간도 당신 곁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오기를 바라는 이는 누구나, 심지어 마귀 같은 유다까지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셨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더 꼬장꼬장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온유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퇴하신 신부님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더 비판하시고, 더 나무라십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이전에 그런 분이었을지라도 매우 온화하게 변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내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 많아야합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당신을 거부해서 멀어지려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도 자신해서 나와 멀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마귀까지도 받아들일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마귀는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귀까지 받아들이면 지옥까지도 자기 마음을 넓힌 사람이 됩니다. 지옥까지 마음을 넓힌 사람만큼 큰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이 하느님의 영향 하에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다만 지옥까지 마음을 넓히셨기 때문에 하느님보다 큰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옥에 있는 마귀들이 회개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부모는 마귀 같은 자녀도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큰 것입니다. 혹시 나는 사람을 분별하지 않습니까? 지옥까지 품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큰 사람입니다. 지옥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옥과 같은 유다도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는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습니까?


-조재형신부-


산책하면서 동네 슈퍼에 가곤 합니다. 주로 한국 슈퍼엘 가지만 이따금 중국 슈퍼도 가고, 미국 슈퍼도 갑니다. 식품을 파는 슈퍼이지만 대상에 따라서 물건의 종류와 구성이 다릅니다. 한국 슈퍼는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식품이 많습니다. 중국 슈퍼는 생선과 면류가 다양합니다. 미국 슈퍼는 햄, 치즈, 빵이 다양합니다. 기본적인 것은 한국, 중국, 미국 슈퍼가 비슷합니다. 야채, 과일, 음료수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이슬람 슈퍼는 아직 가보지 않았는데 아마 다른 슈퍼와는 차이가 날 것 같습니다. 이슬람은 음식에 관한 규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할랄은 이슬람법상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읽는 복음서도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주제가 조금씩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전체적인 구성이 비슷하기에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같은 관점에서 보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대상이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세상의 종이 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은 권력, 명예, 성공을 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루카 복음도 대상은 이방인지만,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며, 목동들이 경배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돌아온 아들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과 말씀을 역사적으로 기록해서 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 복음은 그러한 사건과 말씀을 해석해서 그 영적 의미를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며 오직 그분을 믿음으로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서의 탄생 부분을 생략하고 말씀이신 하느님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부터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나 니고데모의 이야기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등은 요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예로니모 성인은 평생 성서를 번역하고 연구하면서 지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서는 예로니모 성인께서 라틴어(Vulgata)로 번역한 성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번역하면서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에게 성서 번역의 영감을 주었던 오리게네스는 성서해석의 3가지 방법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구적인 해석입니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의 글로 해석하는 단계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이런 해석을 가장 초보적인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서의 언어는 문화, 시대, 역사, 민족을 포함하기에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서를 읽는 시대, 문화, 역사, 민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비유적인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이런 비유적인 해석은 윤리적인, 도덕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이해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세 번째는 영적인 해석입니다.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성찰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단순히 윤리적인, 도덕적인 가르침을 넘어서는 영적인 양식입니다. 이런 성서해석은 교회의 신비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여러분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집중 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신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수도자들과의 만남에서 이런 덕담을 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수도자 여러분, 이토록 급변하는 시대, 극단적으로 세속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수도 생활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수도 생활하면서 만나게 될 여러가지 유혹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집요하게 다가오는 다양한 유혹들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비결을 한 가지 알려드릴까 합니다.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강력한 유혹을 잘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집중 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이지 크게 공감했습니다. 저 역시 부족한 한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가장 유혹이 덜하던 때가 언제인가 생각했을 때, 그 순간은 바로 가장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가득 찼을 때였습니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청소년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닐때는 바빠서 그런지 유혹이 파고 들어올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에 몰두할 때는 거기서 오는 주님으로부터의 은총이 큰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342~420)의 삶만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역시 혈기 왕성했기에, 청소년기·청년기 시절 껌 좀 씹었던가 봅니다. 숱한 오류와 방황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로니모의 젊은 시절은 콘스탄티노 대제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성행해오던 이교 사상이나 우상숭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지만, 과거의 악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예로니모 역시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예로니모를 호되게 치셨습니다. 그는 치명적인 중병에 걸리게 되고, 오랜 세월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습니다.

그제서야, 예로니모는 자신의 그릇된 지난 삶을 크게 가슴치면서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장애물이 많았던 도시 로마를 즉시 떠납니다. 카르치스 광야, 안티오키아를 거쳐 이스라엘로 넘어가 수도생활에 전념합니다.

우리 모두 체험하는 바지만, 한번 길들여진 세상의 맛, 향락적 삶의 맛을 단칼에 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로니모 역시 그랬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새 삶을 추구했지만, 문득문득 과거의 달콤했던 세속의 맛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 유혹이 얼마나 컸던지, 몇번이고 다 때려치고 돌아가고 싶었답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큰 유혹 앞에 예로니모는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 다가오는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성경책을 펼쳐들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성경을 보다 잘 공부하기 위해 한국어 못지 않게 배우기 어렵기로 유명한 히브리어·칼데아어를 독학으로 습득했습니다. 그리고 385년부터 404년까지 20여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신구약 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완벽하게 번역했습니다. 그 유명한 불가타 역 성경을 완역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업이 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친애하는 동료 성직자·수도자들, 형제 자매님들, 수시로 다가오는 다양한 유혹들 앞에서 고생이 많으시겠죠? 우리 모두의 영적 지도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유혹이 크면 클수록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해, 우리 사회와 교회 공동체를 위해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 헌신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몰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너무 어렵다면, 성경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큰 목소리로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기울여 필사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앞에서는 참고서를 펼쳐 들고 열심히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노트를 하나 마련해 매일의 은총 일기를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기적처럼 유혹이 물러갈 것이며, 생각지도 못했던 주님으로부터의 은총과 축복이 거짓말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반영억신부-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 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십니다.“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가9,48).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하든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뜨는 신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신자 한 분이 매번 자리를 뜨니 그 이유를 좀 알아봐 주세요.’하고 회장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아니나 다를까 강론을 시작 하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기다리던 회장님이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어떤 사정이라도? 그랬더니 신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예. 저는 화장실에 갑니다. 무슨 특별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잠자기 전에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이 있거든요. 뭐 잘못됐습니까?” 

 

@@@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해도 안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되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한다[글/허준혁].


<낮춤과 섬김>

-송영진신부-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6-48)”

여기서 ‘그들 마음속의 생각’이라는 말은,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제자들 마음속의 욕망”을 뜻합니다.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권력욕과 명예욕이 강한 사람들이었을까?
그것은 아니고, 그런 욕망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어린이의 순수하고 단순하고 겸손한 특성을
강조하시는 상황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를 강조하시는 상황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예수님 섬기듯이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렇게 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고,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바로 그렇게 나에게 오신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가장 큰 사람이 되고 싶다면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라.”가 아니라,
즉 높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는 남들보다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대답을 하셨을까?
아마도 분명히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가운데 남들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일 것입니다.
현실이 어떻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사람은 원래 없습니다.
(원래 높은 사람은 없다는 말은, 원래 낮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습니다.
원래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는데, 높게 보이는 직책은 있습니다.
(실제로 ‘높은 직책’이 아니라, ‘높게 보이는’ 직책입니다.)
누군가는 그 직책을 맡아야 하지만,
그 직책을 맡는다고 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낮게 보이는 직책을 맡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세속에서도 모든 직책은 봉사직입니다.
따라서 높게 보이는 직책을 맡는다고 해서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고,
봉사하고 섬길 책무만 많아집니다.
그렇지만 실제 현실을 보면, 그 직책을 맡은 사람이 봉사하고 섬기기는커녕
백성 위에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루카 22,25).
(선거철만 되면 백성의 종이 되어서 백성을 잘 섬기겠다고 약속했다가
당선된 후에는 섬기기는커녕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우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그 일과 그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일만 본받지 말고 그 마음부터 본받아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 세족례를 거행한다고 해서
섬김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날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겉으로만 말고, 진심으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려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 당신의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루카 22,27).
만일에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속마음을 감추고서
‘겉으로만’ 낮추고, ‘겉으로만’ 섬긴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앞자리로 올라앉으라는 말을 듣기를 기대하면서
일부러 끝자리에 앉는 것은 거짓 겸손입니다.
사실 ‘거짓 겸손’은 교만과 위선보다 더 위험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낮춤’은 원래 위치보다 더 낮은 위치로 내려가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결국 자기 자리를 찾아서 앉는 것이 ‘낮춤’입니다.
원래 높은 사람도 없고, 원래 낮은 사람도 없기 때문에,
‘섬김’은 높은 사람이 자기를 낮추어서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형제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높은 내가’, 나보다 더 낮은 저 사람보다 낮은 위치로 나를 낮추어서
섬김을 실천하면 사람들이 나를 겸손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겠지.” 라는 생각이
혹시라도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늘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높다는 생각과 저 사람이 나보다 낮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교만입니다.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섬김은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요한 13,34-35)과 사실상 같습니다.
사랑이란 같은 위치에서 사랑할 때에만 참 사랑이 됩니다(요한 15,12-15).
그래서 ‘낮춤’과 ‘섬김’은 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보다 더 높다.” 라는 의식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다.” 라고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주인이 종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종을 해방시켜서 자기와 동등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종으로 묶어둔다면,
그러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입니다.)  


낮아지는 행복

-이종훈신부-


대박 성공신화 부 유명 힘, 세상은 이런 것들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매체들은 이런 사람들을 앞 다투어 소개한다. 그런 걸 보면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길가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서로 다투었으면서도 그것이 스승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알아 숨기고 싶었다(마르 9,33-34). 바라면서도 아닌 척 했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참으로 큰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1등은 한 명이고 인생대박 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는다. 복권으로 기금으로 조성되는 원리이고, 또한 사기의 방식이고 도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인 것 같다. 사람들이 바라니까 없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가장 낮아지셨다. 그러신 분이 행복을 전하셨다(마태 5,3-12). 행복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다.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공동체는 모두 보이지 않는 몇몇 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작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숨긴 일도 보신다(마태 6,4.6.18). 그들은 하느님께만 보이고 싶었고 어쩌면 하느님도 모르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더 행복해졌을 테니까.

 

예수님, 낮아짐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원죄에 물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주님이 먼저 그렇게 살아 모범을 보여주셨는데도 그 길을 자꾸 의심합니다. ‘그게, 이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그 혼인잔치에서 하셨던 것처럼 제가 주님을 믿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46-50: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들은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탄이 그들에게 뿌려놓은 욕망의 씨앗을 뿌려놓았고, 그 씨앗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셨다. 그것이 가라지가 되어 멸망하게 되는 것을 바로 잡아 고쳐주신다.

 

제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작은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아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48)라고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를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49) 제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도로 불림을 받지도 않았고, 교사로도 임명받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구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세가 70명의 원로들을 주님 앞에 오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진영에서 영이 내려 예언을 하였다. 이 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것은 성령께서 모세를 시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50)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봉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주님 옆에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에 맞는 은총을 구하자.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한상우신부-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가장 작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가장 작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단절된 관계를
섬김으로
이어주십니다.

끊임없이
작아지시는 길을
예수님께서는
걸어가십니다.

작아지심으로
아름다워지는
삶의 길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보잘 것 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지시는
사랑으로
우리모두를
끌어안습니다.

큰 사람의
속박이 아닌
작은 사람의
소통과 자유입니다.

점점 작아지시는
예수님의 성체에서
막을 수 없는 참된
사랑을 만납니다.

작은 사람의 길은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길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복음 대목은 두 번째 수난 예고에 이어서 벌어진 장면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루카 9,46).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펼쳐지고 있네요. 그들에겐 서열과 힘의 논리가 여전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세속 가치에서 예수님 중심의 가치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아서일 겁니다.

"누구든이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루카 9,48).
어린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애틋하고 자애로운지요. 사실 어쩌면 지금 예수님 앞에서 논쟁하고 있는 제자들도 예수님 눈에는 이 어린이처럼 작고 여리고 약한, 그래서 소중한 존재일 겁니다. 그들이 큰 사람인 척 착각하고 있을 뿐 어린이에 불과한 존재들이지요.

예수님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을 받아들이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거라는 통 큰 발언을 거침없이 하십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인 어린이와 성자이신 예수님 자신, 또 당신을 보내신 성부 하느님까지 동일시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말씀을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대목에서도 만납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지요(마태 25,31-46 참조).

우리가 어제 부자와 라자로 일화에서 두 부류의 상호적 도움과 나눔을 제시받았다면, 오늘은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아예 가장 작은 사람이 되라는 초대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작아져라, 내려놓아라, 내려와라, 버려라, 비워라, 가난하게 되어라...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하고 힘도 영향력도 클수록 큰 사람이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서는 작을수록, 가난할수록, 텅 빌수록 큰 사람입니다. 허술하고 약하고 빈 자리만큼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어지는 제자들의 두 번째 이슈는 그들이 여전히 세상 때를 못 벗었음을 드러냅니다. 자칫 편가르기가 될 수 있는 소속과 구분의 문제입니다.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 중 하나가 아니기에 막으려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막지 마라"(루카 9,50).
예수님 답변은 간결하고 위엄에 넘칩니다. 제자들은 그가 어디 소속이냐, 누구 편이냐에 무게를 두지만, 예수님은 그로 인해 마귀의 압제에서 해방된 영혼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누구라도 고통받는 이에게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이라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제1독서에서는 재건되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즈카르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은 주님 현존 안에서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이고, 주님은 이국 땅에서 시들어가는 당신 백성을 구해내어 데려오실 것입니다.

유배 후 재건될 예루살렘에 다시 모여들 백성은 이미 혹독한 이국살이로 작아진 이들일 터이고, 남아 있던 이들이야말로 침략자가 데려갈 가치조차 없었던 작은 이들이었지요. 하느님께서 그런 이들로 다시 예루살렘의 영화를 끌어내실 겁니다. 그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온에 커다란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즈카 8,1).
예루살렘 재건과 성전의 건축은 인간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것도 그분께서 크고 "격렬한" 관심과 열성과 애착을 다해 이루시고야 말 일이지요. 백성을 향한 이 크고 격렬한 하느님의 열정이 그분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도록 끌어내렸습니다. 처음에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종래에는 수치와 치욕 속에 처절히 죽음을 맞은 사형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가장 작은 이가 되길 자처하신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크고 강하고 높은 우상을 향해 달리는 세상과 역행해, 작고 낮고 약하고 고요하게 작은 이로 오신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작은 이에게는 새 예루살렘의 평화가 잔잔히 차오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가정, 공동체, 직장, 관계들 속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또 작아지는 것이 예수님,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길이라면, 힘이 들더라도 욕심을 낼만한 일이지요. 그럴 자격도 없는 우리의 몸값을 당신 목숨으로 치르러, 섬기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9월 한달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