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28일 연중 제 25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19. 9. 27. 19:32

2019년 9월 28일 연중 제 25주간 토요일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루가 9,43ㄴ-45)

 

 “Pay attention to what I am telling you.
The Son of Man is to be handed over to men.”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ay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시고 그 한가운데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리자는 아기 때 부모에게 버려져 며칠 동안 폐가에 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발견되어 살아났습니다. 그녀를 입양한 이나는 극도의 트라우마와 공포에 시달리는 리자를 인내와 끈기로 가르쳤습니다. 리자는 새어머니의 끈질긴 노력으로 러시아의 유명 모델이 되었습니다. 열 살 무렵 친어머니가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을 때 만나기를 거부하며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생명체도 피 흘림 없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피를 흘려야 진정한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을 위하여 마치 거름처럼 자신의 생명을 바칩니다. 이것이 부모의 자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칭찬하고 놀라워합니다. 아무도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영광의 시간에 죽는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 의아해하면서도 감히 무슨 뜻인지 여쭈어 보지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힘이 당신 십자가의 죽음 덕분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세상을 살리는 생명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려는 이는 생명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거부하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의 영광은 자녀에게 생명을 주어 자녀를 살게 할 때 드러내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의 영광도 그렇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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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이 함께 놀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뺨을 때렸습니다. 이렇게 뺨을 맞았을 때의 반응은 세 가지 경우가 있겠지요. 첫 번째는 때린 아이의 뺨을 똑같이 때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부여잡고 울면서 떠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뺨을 맞은 이유를 냉정히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밝은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세 번째 반응입니다. 뺨을 맞은 이유를 분석하다 보면 당연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반응을 따릅니다. 내가 당한 만큼 되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다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때린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만 가득합니다.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이 마음만 괴로워집니다.

이렇게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지만, 세 번째가 아닌 절대로 선택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고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의 상황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이를 미리 준비시키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도록 미리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그 말씀에 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 침묵하고 말지요.

지금까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보아왔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영원하리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영광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앞선 이야기의 세 번째 선택이 아니라, 두 번째를 선택합니다. 그래서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주님의 뜻을 거부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따져보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밝은 미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탈무드).


탈무드 중에서...

누가 지혜로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누가 강한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이다.

누가 부자인가? 자신의 몫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누가 존경받을 만한가? 자신의 동료들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보니 사람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또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지혜롭고, 강하며, 부자이며,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도달함의 사이에 있는 십자가

-전삼용신부-


 보조국사 지눌과 그 누이의 이야기입니다. 지눌의 누이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부처님처럼 훌륭한 동생이 있으니,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야. 동생이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지눌의 누이는 지눌이 열심히 불공을 닦아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을 무시하였습니다.

      누이는 아랫마을에 살면서 지눌에게 반찬과 음식을 자주 갖다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누이가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눌은 누이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자기에게 먹어 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 먹기만 하는 동생을 보고 누이는 은근히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동생, 아무리 배고 고파도 그렇지. 내게 먹어 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서 먹는 법이 어디 있어?”

      “왜요? 동생이 배부르게 먹으면 누님도 저절로 배부르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자네가 먹는데 왜 내 배가 불러?”

      지눌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누님께서는 항상 동생인 제가 부처님 같으니, 그 불법의 힘이 누님에게도 저절로 미친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지눌의 누이도 불도를 열심히 닦기 시작했습니다.

      지눌이 활동할 당시 불교는 선종과 교종의 갈등이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

      선종은 깨달음을 중시하고 교종은 배우는 것을 중시합니다. 가톨릭종교로 말하자면 선종은 교회 내에 성령의 감도로 내려오는 진리인 ‘성전(聖傳)’을 말하고, 교종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록인 ‘성경(聖經)’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불경을 통해 배우려는 종파가 교종입니다. 반면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고 미소를 지었을 때 그 의미를 깨닫고 미소로 화답한 가섭의 예처럼, 설명할 수 없는 부처의 마음을 깨달으려는 것이 선종인 것입니다.

    

      선종은 교종이 글자에 얽매인다고 비판했고, 교종은 선종이 무식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실제로 선종에서는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일부 승려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반면 교종 승려들은 정치에 관여하며 무신들을 차별대우하여 발생한 ‘무신의 난’이 발생하는 데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눌은 이 혼란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정혜쌍수’의 논리를 펼쳤습니다. ‘정’은 선종의 수행법을 말하고, ‘혜’는 지혜를 뜻하여 교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선종)과 말씀(교종)의 가르침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수행 방법으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는데, ‘돈오’는 선종의 깨달음이고, 그 깨달았다면 ‘점수’, 즉 조금씩 그 깨달은 곳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종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종의 도움으로 그 깨달은 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마치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번개가 번쩍 치는 것을 보고 나아갈 길을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길을 보았다고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았어도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보조국사 지눌의 깨달은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그 누이가 보조국사 지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려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두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칫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로 고백했다고 할 것을 다 했다고 믿으면 선종만 주장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깨달았다면 말씀을 통해 배우고 익혀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복음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앙고백이 끝이 아니고 십자가가 남았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참으로 자신이 도달한 신앙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십자가가 다가왔을 때 도망치게 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선종과 같습니다. 교리를 배웠다고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그 배운 교리를 나의 것으로 체득하여 내가 변해가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길을 보았으면 더듬어 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안 되기 때문에 성체성사의 감동은 줄어들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잊고 심지어 사랑하라는 유일한 계명을 어기고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하기까지 되는 것입니다.

      안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알면 그것이 나의 것이 되도록 체득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배부르다고 우리 배까지 부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먹고 마시고 행동해야 그리스도가 됩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에 온 지 1달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밝은 웃음으로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곧 적응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전보다 치안이 훨씬 좋아졌다고 하십니다. 뉴욕은 곳곳에 공원이 있으니 공원을 보는 재미도 있다고 합니다. 신문사도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예전보다는 일하기가 수월해졌다고 합니다. 뉴욕의 뮤지컬, 박물관을 구경하는 멋진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뉴욕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갑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뉴욕의 교통체증은 장난이 아니라고 합니다. 범칙금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고 합니다. 법정에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운전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뉴욕은 인건비가 비싸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불러서 했던 일도 여기서는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손재주가 없어서 그것도 걱정입니다. 사슴 진드기, 벼룩이 있어서 잘못 물리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합니다. 피부가 약한 편이라서 공원 갈 때도 신경이 쓰입니다. 차 안에 동전을 넣지 말라고 합니다. 동전 때문에 차 유리창이 깨질 수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차에 동전통은 없습니다. 걱정해 주는 말이 고맙습니다. 그런 말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은 아직 오직 않았다. (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지금 처한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최악이 아직 오지 않았다. (The wor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만난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나쁜 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지구에 온 어린 왕자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 주면 좋을까요? 아름다운 노을을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지구를 환하게 밝힌 태양이 잠시 쉬러 가는 거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을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그 이슬은 넓고 깊은 바다에서 왔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이슬이지만 큰 바다를 품고 있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그 주위에서 춤추는 나비와 벌에 관해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지구는 참 평화로운 곳이라 말하면 좋겠습니다. 생각하면 지구별은 이 넓고 광대한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별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어린 왕자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구별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때문에 오랜 시간 지구를 찾아온 설렘과 기대가 날아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 독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유배 생활의 어려움도 곧 끝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 머물리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걸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 멍에는 가볍고, 내 짐은 편합니다. 오늘 걱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내가 세상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 있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진리의 협조자, 성령을 보내 드립니다.”

 

사람에게 넘겨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모함과 질시를 받아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직 최선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의 운명이자 우리의 운명인 수난과 십자가 죽음!

 -양승국신부-

 

공생활의 절정기 시절, 인류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 핵심 제자단을 동반하고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모하셨고, 신비스런 영광 속에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복음 9장 35절) 그 말씀으로 인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더욱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내려오시니, 산밑은 큰 군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나름 절박한 필요성을 지니고 찾아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서자 마자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악령을 한 아이에게서 쫒아내셨습니다.

 

 그간 그 어떤 예언자나 명의(名醫)로부터도 볼수 없었던 탁월한 예수님의 치유 능력과 촌철살인의 말씀, 인간적인 매력 앞에 제자들은 물론이고 모여든 모든 사람들은 경탄과 박수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 스승님의 모습을 본 제자들의 어깨는 자기도 모르게 으쓱으쓱했겠지요. 제자들은 지인들에게 자랑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봤어? 저분이 바로 내가 모시고 있는 스승님이야! 내가 이런 사람이야!”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 가득 차오르는 기대감을 떨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이제 스승님의 나라가 서게 되면 ㅎㅎㅎ”

 

 그러한 헛된 기대와 야심을 정확히 꽤뚫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엉뚱한 환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제자들의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는 초강력 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복음 9장 44절)

 

 당신 수난에 대한 두번째 예언인 고통스런 이 말씁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지만, 어쩔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안배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야서 53장 6절)

 

 제자들의 반응은? 안타깝게도 스승님의 말씀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메시아상이 전혀 엉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의 절절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지극히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란 존재를 통한 개인적인 야심의 성취를 위한 계획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피조물의 손에 넘겨져,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스런 관문을 통과하셔야 하는 운명을 지니셨습니다.

 

 따라서 이웃을 위한 희생과 헌신, 모욕과 십자가 죽음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수용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말씀을 귀담아 들어라

 -반영억신부-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 감탄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가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 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가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예로니모성인은“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했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미룰 수 없는 사람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 주님께서 사람들의 잔인한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예고를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들,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서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고,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사람의 아들은 사

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

-한상우신부-

넘겨져도
사람의 생명은
생명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생명까지
우리들 손에
맡기십니다.

내어주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넘겨지심으로
하나가 되십니다.

삶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모진 우리가
새로워집니다.

넘겨지심으로
모든 경계와 구분을
허무십니다.

넘겨지심으로 우리와
공동체가 되십니다.

서로를 위한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넘겨지지 않으면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넘겨지고
내어주어야
서로를 살리는
생명이 됨을
십자가에서
다시 배웁시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루카 9,43).
오늘의 복음 대목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악령 들렸던 아이의 치유 사화에 이어 나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놀라워한다는 말이 이해되지요. 복음사가는 "다", "모든"이라는 수식어로 군중이 느끼는 경탄과 경외심을 극대화해 전달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갑자기 찬물이 확 끼얹어진 듯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제자들을 향해 이르십니다. "너희는"에 사용된 조사 "는"은 군중과 제자들을 구분합니다. 설령 군중은 경탄하고 기대에 부풀지라도, "너희에게만는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시며 첫 번째 예고 때(루카 9,22 참조)와 달리 수난에 대해서만 간략히 전하십니다. 기적도 일으키고 사람도 되살리는 분이 "사람들 손에 넘겨진다"니... 이 표현은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중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이사 53,7) 백성의 악행을 자원하여 대속하는 메시아 상이 깔려 더 비장하게 들립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루카 9,45).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잔뜩 고조된 성공 체험, 흥행 분위기에 들떠 있으니 수난 예고가 귀에 들릴 턱이 없지요. 이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빈틈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의 독서(입당송, 제1,2독서, 화답송, 복음 환호송, 복음, 영성체송)에는 우리 각자를 만나려 다가오시는 말씀께서 현존하십니다. 각자에게 맞게 다가오시는 말씀은 우리의 역사, 실존, 상황, 특성을 건드리시며 말을 건네시지요.

이런 비유는 좀 경박스러울지 모르나,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은 진정 살아계시기에, 우리 각자에게 맟춤형으로 요리된 "당신을 위한 오늘의 특선 메뉴"와 같습니다. 성령의 현존을 청한 후 그 말씀들을 읽고 머물고 묵상하면서, 천사와 목숨을 걸고 씨름한 야뽁 나루터의 야곱처럼 엎치락뒤치락 매달려, 들고 파고, 물어뜯고, 잘근잘근 씹고, 삼키고, 되새기고 하다 보면 말씀에 감추어진 뜻은 서서히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물론 이 과정이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매우 적절한 때에 은총으로 건드려 주시기에 깨달음 또한 그분께 맡기고 묵묵히 머무를 뿐이지요. 이는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준다"(지혜 6,13)는 지혜서 저자의 경험적 명제로도 확인되는 여정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이제보니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였지만, 더 깊이 진지하고 대담하게 여쭙지 못한 그들의 태도도 일조를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미 자기 안에 답을 가지고 있을 때는 더 못 알아듣습니다. 아니, 자기 욕구와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면 알아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못 알아듣는 체하는 동안 불편하게 다가오신 말씀께서 이번에는 그냥 지나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당신을 위한 오늘의 특선 요리"를 준비해 다가오시는데, 짐짓 모른 체하며 마치 뷔페에 온듯 구미에 맞는 음식(말씀)을 고르려 합니다. 소화가 잘 될 것 같은 음식, 즉 양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큰 무리 없이 무탈하고 다복하게 사는 데 격려와 위안이 되는 말씀을 찾아 헤매기도 하지요.

말씀에 관해 묻기 두려워하는 태도에는 여러 원인이 작용할 겁니다. 우선 게으르고 귀찮아서, 말씀보다 중요한 다른 일들이 널려 있어서, 말씀이 꽁꽁 감추어둔 자아를 건드릴까봐, 말씀이 미지근한 나를 삼켜버릴까봐, 행여 십자가를 주면서 세속적 욕망을 놓으라고 할까봐...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시기에 하까이 예언자에 이어 활동했던 즈카르야 예언자의 환시와 신탁 부분으로 그에게 내린 여덟 개의 환시 중 세 번째 환시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즈카 2,6).
즈카르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펼쳐 주시는 환시의 뜻을 묻습니다. 환시에 담긴 모호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한 인간이 천상 존재에게 용기내어 묻는 것입니다. 그에게 보여진 여덟 개의 환시 중, 드러난 정황이 매우 명확한 네 번째 환시(즈카 3,1-10)와 천사가 그에게 질문한 여섯 번째 환시(즈카 5,1-4)를 제외하고 즈카르야는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그에게 질문을 막을 만큼 심각한 선입견이나 두려움이 없고 또 심저에 자기를 위해 고정된 답이 없기에 가능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를 잡으리라. ...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즈카 2,8).
새 성전 건립과 도성 성벽의 재건에는 이방인의 시기와 방해라는 외부적 요인도 있었지만, 내부적 분열 상황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극복해야 할 어려움 중 하나였지요. 이에 주님께서 이 도성 재건이 당신의 뜻임을 반복적으로 예언자를 통해 들려 주십니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5).
이제 새 예루살렘은 자기 민족만의 좁고 편협한 울타리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구분과 분리, 차별을 상징하는 성벽 없이, 들어오려는 모든 이를 환대하고 껴안기 위해 끝없이 확장되는 널찍한 품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대신 주님께서 불 벽이 되어 주신다니 "사랑의 불"이 예루살렘을 에워쌀 것입니다.

재건될 새 성전, 그리고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성벽에 구획 지어지지 않아, 넓이에 한계를 모르는 영원한 도성이 될 것입니다. 성 안과 성 밖은 차가운 돌벽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불 벽으로 가늠하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주님께서 온 도성에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 되실 것입니다.

자기들 권위에 도전이 될까 두려워 주님 말씀을 외면한 바리사이들이나, 첫 번째 수난 예고 때의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 제자들처럼, 혹시 즈카르야 예언자도 제 민족만을 위한 예루살렘 도성의 영화를 꿈꾸어 질문들을 그냥 삼켰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다행히 그는 묻고 또 물으며 하느님 뜻의 핵심을 향해 깊이 깊이 들어갑니다. 자기 계획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뜻만을 추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간결한 수난 예고에 말문이 막혀 더 여쭙지도 못하고 결국 감추어진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에 담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적 의미까지 가닿지 못한 채 두려움만 가득 안고 말씀의 여정을 중단한 모양새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말씀과 함께 걷는 여정 안에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어도 경청하고 순히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사심없이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하여"(즈카 2,15).
묻고 답하고 듣고 새기고 머무르는 사이 우리는 말씀과 결합해 하나가 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일치! 온 힘을 다해 말씀에 몰입하고 전념하는 사이 내가 말씀이 되고 말씀이 내가 되는 신비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 두려움을 멀리 치워버리고 말씀에 한번 빠져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30일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