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9. 25. 18:25

2019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가 9, 7-9)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Herod's opinion of Jes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까이 예언자는 주님의 집을 지으라는 만군의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벌레는 잎을 보지만 나비는 꽃을 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에 따라 가려지고 왜곡됩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산도 돈이고 물도 돈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예수님도 그런 분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많은 사람들과 헤로데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말합니다. 헤로데도 이런 의견에 동참하며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려는 목적이었습니다.우리는 여기서 같은 본당에 소속된 신앙인들도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험생 자녀를 둔 학부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시기보다는 자녀의 성적이 잘 나오도록 도와주시는 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녀의 성공이나 건강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시선은 내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왜곡되고 그렇게 내가 바라보는 하느님도 왜곡됩니다.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욕구를 버려야 합니다. 부모가 진정 부모로 보이면 부모에 대한 감사만이 남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고 주님에 대한 감사만 솟구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뵐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엘렌 랭거(Ellen Langer)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난처한 상황을 제시했습니다.

1) 수업 들어가기 직전 45명 학생 전체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상황.

2) 아주 매력적이지만 대단히 차가워 보이는 이성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상황.

3) 아주 싫어하는 두 사람이 속해 있는 위원회에 제3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상황.

이 세 가지 난처한 상황에 대해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첫째 그룹에는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할지 방법을 생각해 볼 것(과정 지향적)’을 주문했고, 두 번째 그룹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공 가능성을 0~100점까지 매겨볼 것’(성공 지향적)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두 그룹의 주문을 서로 바꿔서 풀도록 했습니다.

어느 쪽이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더 크게 생각했을까요? 첫째 그룹이었습니다. 과정을 먼저 생각하면서 성공 가능성을 높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의 가능성만을 따졌던 둘째 그룹은 대부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즉, 성공 지향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공 가능성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일단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집중해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힘도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자신의 헛된 맹세로 인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되지요(마태 14,1-12 참조).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맹세를 지키는 것에만 생각했기에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왕이라는 위치였기 때문에 분명히 또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느냐 마느냐만 따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속담처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런 세상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정의 행복보다는 결과의 행복을 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로데와 마찬가지로 후회와 함께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주님과 우리 모두 함께 누리는 그 행복을 좇아서 생활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에피쿠로스)..



나보란 듯 사는 삶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우리입니다. 내 말을 그리고 내 행동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면서 망설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곧 나 자신의 자존감과 연관이 되어서 자존감 상실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든다면 한 번 이 점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내가 눈치를 보는 그 사람이 나의 이런 모습을 요구했을까? 자존감을 내세우지 말라고 이야기했는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남보란 듯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나보란 듯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호기심과 신앙의 차이

-전삼용신부-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수도원의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수도원 기물은 낡고 끼니를 잇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젖소를 먹이는 목동이었던 고셰 수사는 약초를 이용하여 술을 들게 됩니다. 그가 만든 ‘불로 장생주’가 날개 돋친 듯 팔리자, 수도원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고셰는 그 공로로 사제 서품을 받게 되나 계속하여 술을 만들며 시음하므로 알코올 중독자가 됩니다. 고셰는 미사 중에 술주정을 하여 귀신들렸다는 말을 듣고 감금되어 술만 제조하게 됩니다. 고셰는 젖소만 키우게 해달라고 애원하나 거절당합니다.

      저녁 미사가 끝날 때마다 수사들은 고셰의 영혼을 위하여 함께 기도를 드리자고 합니다. 그 시간에 술 만드는 낡은 건물에서 술에 취한 고셰의 슬픈 노래와 고함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수사들은 염려하며 말합니다.

      “이를 어쩌나! 신자들이 알면 큰일인데….”

      이것은 알퐁스 도테의 단편 ‘고셰 신부의 불로 장생주’의 줄거리입니다.

      누구도 이 소설에 나오는 수도회 신부, 수사들이 사랑 가득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를 드려주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고셰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비슷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피리를 불어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함께 울어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의 사람도 많은데 그래도 예수님께 관심이 있으니 얼마나 기특합니까? 그러나 그저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더 나쁩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며 예수님을 궁금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께 믿음이 있어서 만나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요한처럼 또 목을 벨 준비가 되어있는 인간이었습니다.

      호기심과 신앙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호기심은 자기만족을 위해 예수님을 만나려는 것이고, 신앙은 예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처음 아버지에게 다가가게 만든 것은 ‘나에게 유산을 주실까, 안 주실까?’하는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하고 아버지께 돌아갈 때는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어떤 일을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오로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께 무엇을 해 드리고 싶은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신앙인이 아니고 모기였습니다.

      영화 ‘기생충’엔 학력과 경력을 위조해서 한 가족이 모두 부잣집에서 일자리를 얻는 내용이 나옵니다. 학력은 그저 공부 방법만 잘 알면 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나 동료와 협업하여 성과를 이루어내는 능력은 또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이젠 학력이나 스펙만을 보지 않습니다. 스펙만 보다가는 회사를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단물만 빨아먹는 기생충과 같은 사원을 뽑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입사하는 사람에게 회사를 위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부터 묻습니다.

      만약 이 회사에 왜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바로 낙제입니다. 그 사람의 꿈을 위해 회사가 희생되도록 내버려 둘 사장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으십니다. 하느님도 이용당하시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성당에 나올 때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을까?’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신앙이 아니라 그냥 헤로데와 같이 하느님을 이용하러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다’ 주셨습니다. 더 이상 주실 것이 없으십니다. 이젠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이용하는 거짓 신앙인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보답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부터 참 신앙인이 됩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님께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하는지 묻기 위해 하느님께 다가갑니다.


-조재형신부-


며칠 전에 읽은 글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물가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실수로 남자가 사준 목걸이를 물가에 흘렸습니다. 목걸이를 찾는 여자에게 남자가 한마디 했습니다. 여자는 미안한 마음에 목걸이를 찾는데 남자가 한마디 하는 게 싫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용하던 대화가 점점 소리가 커졌습니다. 분명 여자가 가까이 있는데도 남자는 여자가 멀리 있는 것처럼 크게 소리를 냈습니다. 여자도 남자가 가까이 있음에도 덩달아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을까요? 비록 몸은 가까이 있지만, 가슴이 멀어지기 때문에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저도 가까이 있음에도 목소리가 커진 적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멀어진다고 느껴서 목소리가 커졌던 거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슴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말도 필요 없어진다고 합니다. 두 가슴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헤로데의 가슴과 예수님의 가슴을 만납니다. 헤로데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가슴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취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슴을 가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욕망, 재물,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원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념, 민족, 세대, 지역이라는 갈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있지만, 우리의 폭력과 전쟁 때문에 생겨난 난민이 더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부와 권력은 지녔지만 미덕이 없었던 헤로데입니다. 그는 화려한 궁궐에 살았지만, 인생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남을 위한 빵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많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편견을 깨끗하게 부숴버렸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골고타의 언덕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행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기심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단 10분을 살았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그 삶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겠지만, 인생은 그 삶의 가치로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망이 있는 사람과 가슴을 가까이하십니다. 예수님은 힘과 욕망과 재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걸 찾는 사람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지금 헐벗은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느낍니다. 지금 아픈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슴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습니다. 헤로데의 가슴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것 같습니다


이제 내가 이 도성에 건강과 치유를 가져다주겠다. 내가 그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넘치는 평화와 안정을 보여 주겠다!

 -양승국신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고스마와 다미아노 두 성인(聖人)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성인(聖人) 의사! 하니, 즉시 늘 그립고 존경하는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1945~2008)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안타깝게도 요셉 원장님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은 무료로 치료해 주셨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탓에, 2005년 위암이 발병하게 됩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원장님은 병세가 깊어가면서, 극심한 통증으로 힘드셨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평생 해오시던 무료 진료를 계속해나가셨던 것입니다.

 

 2008년 4월 15일(화)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후, 4월 18일(금) 선종하셨는데, 쓰러지시기 불과 나흘 전인 4월 11일(금)에도 미사에 참석하시고, 진료를 하신 것입니다.

 

 요셉 원장님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결혼까지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저희 수도자들이 크게 부끄러울 정도로 영적 생활, 기도생활, 청빈생활, 나눔생활에 투철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요셉 원장님께서는 노숙인 부랑인 환자들의 육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 자활, 특히 영적인 치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 하셨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의 업적을 남기신 원장님이셨지만, 말년에 늘 이런 고백을 서슴치 않으셨습니다. “환자들에게 좀 더 잘해주었더라면...”

 

 요셉 원장님은 피를 흘린 순교자는 아니지만, 땀의 순교자, 일의 순교자임을 확신합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 교회 역사 안에는 피를 흘린 순교 성인들은 흘러넘칩니다. 이제는 요셉 원장님처럼 사랑의 순교자, 즉 삶을 통한 증거자가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젊은 사제 시절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한 소도시 본당에서 현지인들 사목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다정다감하시고, 포도주를 무척이나 좋아하셔서 코끝이 늘 빨갛던 주임 신부님께서는 저를 한 성지(聖地) 성당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성당은 바로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에게 봉헌된 성당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을 향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두분이 의사였던 관계로,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이 성지를 찾아와서 미사도 하고 고백성사도 청했습니다.

 

 고스마와 다미아노 두 성인은 요셉 원장님처럼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었습니다. 돌팔이, 날나리, 가짜 의사들이 판을 치던 당시, 제대로 의술을 배운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명의(名醫)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더욱 감동시킨 것은 고스마와 다미아노의 수도자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두 분은 언제나 청빈, 순종, 겸손의 덕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치료받으러 오는 환자들을 치유자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측은지심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환자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치료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육체적·영적인 기적이 뒤따랐습니다.

 

 두분으로부터 치유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두분의 모습과 살아 생전 요셉 원장님의 모습이 100퍼센트 일치하는 듯 해서,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303년 디오클레시아노 로마 황제에 의해 갑작스레 불어닥친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즉각적인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분은 순교하신 이후에도 이 땅에 남아있는 환자들을 위한 치유활동을 계속하셨습니다.

 

 고스마와 다미아노의 순교 이후에 수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자상하고 따뜻했던 영혼과 육신의 치유자였던 두분의 빛나는 모습을 잊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런 병고로 힘들때면 언제나 두분의 전구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을 남달리 흠모하고 존경했던 펠릭스 4세 교황님은 로마 시내에 두 성인을 위해 대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그 성당을 관리하면서 사제들의 성무활동을 도왔던 유스티니아노라는 부제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치료시기를 놓쳐, 한쪽 다리가 괴저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곧 그가 죽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유스티아노 부제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던 어느 날 밤,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이 내려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어려운 수술이었지만,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은 괴저병에 걸린 유스티니아노의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었고, 다른 하나의 다리를 이식했답니다. 그런데 그 다리는 전날 죽은 아프리카 출신의 한 노인의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부제의 한쪽 다리는 희고, 다른 한쪽 다리는 검게 되었다는, ‘전설따라 삼천리^^’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의료인들(영적 치유자 역할을 수행하는 성직자·수도자, 상담가를 포함한)이 육체의 의사뿐만 아니라, 영혼의 의사 역할까지 충실하셨던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 그리고 요셉 원장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의료행위를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습니다.


용서를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반영억신부-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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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송영진신부-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여기서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을 뜻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14,2; 마르 6,16),
루카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말은, 자기가 요한을 죽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확인하는 말, 즉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뜻의 말입니다.
세 복음서를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헤로데는,
죽은 요한의 귀신(유령)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나타내는 말도 아니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할까봐 두려워하는
미신적인 불안감 정도로 해석됩니다.

이 말을,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으로 해석하면 강론하기가 편리하긴 합니다.
“죄 짓고는 못 산다.”, 또는 “아무도 양심을 속이지는 못한다.”,
또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영혼의 자유를 잃게 된다.” 라고
강론을 전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초점을 맞추는데,
복음서 전체 내용을 볼 때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자기가 한 짓들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끼면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군중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사실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을 안 느끼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하는 짓이 죄라는 의식 자체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도소 사목을 하던 시절에, 양심이 아예 마비되어 있는 사람들과
죄의식 자체가 없는 사람들과 “나는 옳다.” 라고만 생각하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을 자주 만났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도소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은 교도소 밖에 더 많이 있고,
지도층 인사들, 종교인들, 정치인들, 언론인들...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루카 23,6-8).”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것과,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한 것은
종교나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유명한 마술사의 마술을 보고 싶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징을 보기를 기대했다는 것은 어떤 신기한 일을 보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헤로데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루카 23,9).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헤로데는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11-12).”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헤로데의 모습에서
그 어떤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헤로데 같은 사람들을 겨냥해서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20).”
헤로데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헤로데를 회개시켜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회개하기는커녕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자기의 죄를 덮으려고 했습니다.
(살인으로 간통죄를 덮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 사람이라도, 그 양심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바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입니다.
그때가 되면, 죄를 지으면서도 죄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서
마음 편하게 살았던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죄 속에서 살았는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죄라는 것은 알았지만,
죄책감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은,
그때가 되면 생생하게 되살아난 양심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실 하느님의 법정은,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와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의 대결이 아닙니다.
피고인 자신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하느님 앞에서 숨으려고 하는, 그래서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이 내리기도 전에
스스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심판입니다.
그래서 심판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마음을 졸이는 일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고, 심판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지금의 삶’에서 이미 시작된 심판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그 모습이 그대로 심판 결과로 이어집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꽤나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주님 앞에 참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자.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신부-

정작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목을 베어 죽인
호기심어린
요한 세례자입니다.

소문으로는
그 사람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만남으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소문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만남을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 만남이 우리를
살게하는 힘입니다.

이와같이
참된 만남이
필요한 요즈음의
시간입니다.

소문에 우왕좌왕
하지 않는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소문 속에는
또 다른 소문만이
나올 뿐입니다.

감싸주고
사랑해야 할
기도의 만남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서로의 삶에서
우리의 만남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드리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시지 않아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요한이 되살아났다. ... 엘리야가 나타났다. ...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루카 9,7-8).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들은 헤로데 영주가 당황할 만큼 예수님의 족적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인적, 집단적 역사 체험에서 떠오르는 위인들을 예수님에 비기며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고자 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그런데 누구도 감히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친히 세상에 오셨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 성자의 그림자만 좇을 뿐 ,아무도 정답을 모르는 셈이지요. 그분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인, 영웅, 예언자들이 말미암고 통하고 향하는 분이십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헤로데가 예수님의 친척인 요한의 목을 벤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언젠가 그는 예수님을 만나긴 할 것입니다만, (루카 23,6-12 참조)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1독서는 하까이 예언서의 시작 부분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 공동체가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지만 여러 어려움으로 진행이 지지부진하지요. 게다가 페르시아 제국 내의 정치적 혼란으로 예루살렘도 긴장 상태가 됩니다. 하까이 예언자는 이 불안정한 상황을 오히려 공동체를 일깨우는 기회로 삼아, 신앙의 열성을 되찾고 주님께 합당한 집을 지어드리면 복을 받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이스라엘을 독려합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하까 1,5.7).
두 차례나 등장하는 이 말씀은 지금도 유효한, 불안과 절망으로 흔들리는 인간 실존을 관통하는 권고입니다.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하까 1,6).
굳이 옛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어도 이 상황이 이해 가실 겁니다. 이미 우리 모두가 이런 저런 삶의 궤적 안에서 다양하게 겪은 허무하고 허탈한 빈손 체험들이지요.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높이 오르고 널리 알려져도 본질을 붙잡고 있지 못하면 알맹이 빠진 껍데기처럼 공허만 남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드러난 헤로데의 욕구,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바람이 진리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아닌 다음에야 예수님이 아닌 하느님이 만나주셔도 만족은 없을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열과 성을 다해 남의 다리나 긁는 형국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합격과 성공, 입신출세와 부귀영화를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을 희생한 구원자시니까요.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하까 1,7).
이는 당시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의 영적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 보면 매우 깊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산"은 잘 알다시피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고,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나무를 떠올리게 하지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물리적인 예루살렘 성전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저마다 지어야 하는 각자의 영혼의 성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과, 제 십자가를 지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매일의 희생으로 지어집니다. 진리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십자가를 생략하고 건너뛰어 버리면 저속한 호기심이나 값싼 욕구에 그칠 뿐이지요. 우리가 주님께 지어 바칠 저마다의 성전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감사와 겸손의 가마에서 구워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벽돌이 눈물과 희생이라는 접합제로 견고히 쌓아 올려진 영혼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하까 1,8).
우리의 성전 앞에서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온갖 보석이 박힌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당신이 거하실 소박하고 진실한 영혼을 기꺼워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나 보려고 하기도 전에 이미 들어와 자리잡고 계십니다. 우리 영혼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