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Margaret K 2019. 9. 20. 19:12

2019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124위 복자 성화.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등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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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나라 한 지역의 오랜 부자 가문에는 돈을 똥으로 여기라는 가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똥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준 음식의 찌꺼기입니다. 몸 안에 찌꺼기를 계속 지니고 있으면 몸이 상하지만 그것을 밭에 뿌리면 우리가 먹고 살아갈 양식의 거름이 됩니다. 그 가문은 이러한 돈의 속성을 잘 알았기에 오랜 기간 큰 부자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돈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돈을 죄의 도구로 만들기도 하고, 구원의 도구로도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돈 자체가 죄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합니다.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여인들 가운데는 악령과 병에서 풀려난 여인들, 곧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가 있고, 타락의 온상이었던 헤로데 궁에서 일하는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지닌 재물은 그리 깨끗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하며 그 여인들의 행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돈은 우리 몸의 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몸에 피가 부족하면 죽음에 이릅니다. 그리고 피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어도 사람은 죽습니다. 피가 돌아가야 하듯이 돈도 돌아야 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교회라는 몸 안에 피를 흐르게 만드는 것은 신자들의 몫입니다. 돈이 죄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이 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갑곶순교성지에서는 2년에 한 번 교구 차원의 순교자 현양 대회를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개최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현양 대회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작년에 현양 대회를 했기에 오늘은 아무런 행사 없이 미사만으로 기념합니다. 그래도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서 순교자성월 기념음악회를 오늘 저녁 7시부터 엽니다. 많은 분이 함께하셔서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구골(Googol)이라고 아십니까? 아마 생소한 단어일 것입니다. 이 단어는 10의 100제곱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잘 모르겠지요. 1 뒤에 0이 백 개 달린 숫자입니다. 감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구골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숫자를 의미합니다.

인터넷 세상은 이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개념처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한 인터넷 검색 엔진 업체에서 구골을 자신의 회사 이름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등록 중에 실수로 잘못 표기를 하게 되었고, 구골(Googol)이 아닌 구글(Google)이 된 것입니다.

지금 현재 구골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구글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요. 가짜 이름이 진짜 이름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구글의 상표 가치는 2019년 현재 자그마치 3천90억 달러이지만, ‘구골’이라는 단어의 가치는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면서 가짜, 짝퉁의 삶이라고 스스로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짜, 짝퉁이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서 또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가치가 올라갑니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순교자들의 삶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순교자들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목숨을 내어놓을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들을 가짜, 짝퉁의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두고 하느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사람을 절대로 가만히 두시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다고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기준에 맞추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맞출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만이 주님의 선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는 우리의 깊은 기쁨과 세상의 깊은 갈망이 만나는 곳이다(프레드릭 비크너). 



바닥짐

바닥짐(Ballas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항해할 수 있도록 배의 바닥에 싣는 돌이나 모래, 물 등을 말합니다. 그래서 거친 파도와 비바람을 만나서 이리저리 배가 흔들릴 때, 이 바닥짐이 배의 중심을 잡아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바닥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좌초되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바닥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바닥짐의 재료들을 보십시오. 엄청난 무게로 배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닥짐이 항해를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도구가 됩니다.

우리 삶 안에서의 고통과 시련이 바로 바닥짐이 아니었을까요? 이 바닥짐을 포기하고 버리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미주 지역의 한인 공동체는 한국인만을 위한 성당을 마련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몇몇 본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지 본당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세 가족이 지내는 게 쉽지 않지만 서로 친교를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도와주었던 훈훈한 가족 드라마였습니다. 한인 공동체도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는 현지 본당에서 서로 도와가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다르지만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미주 한인 공동체의 주보 성인은 대부분 한국의 순교 성인들입니다. 먼 이국땅에서 신앙생활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순교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순교 성인들의 전구와 도움으로 미주 지역의 한인 공동체가 뜨거운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국회도 한 지붕 두 가족이 지내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입니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정당이니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삶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인 걸 알아야 합니다. 삶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인 걸 알아야 합니다. 삶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인 걸 알아야 합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은 돌고 돌아 나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가슴에 지나친 비수를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은 상대방의 잘못을 비판하는 정당보다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을 선택할 겁니다. 초등학생들도 잘하는 걸 국회의원이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순교는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저는 오늘 박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적인 이유입니다.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사회였습니다. 천민과 노비가 있는 사회였습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자유와 민주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이 있었고,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서구 사회에서 전해진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모두 한 형제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에게 해 준 게 바로 나에게 해 준 거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천주교의 교리는 철저한 신분제인 조선의 사회와 어울리기 힘들었습니다. 이것이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문화적인 이유입니다. 조선은 오랜 전통으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몇 년씩 상을 치러야 했습니다. 조선의 관혼상제는 형식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풍수지리를 이용해서 묏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사주와 팔자를 이용해서 길일을 택하였습니다. 남녀가 유별하였고, 유교의 가르침이 마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사를 허용하지 않는 천주교의 방침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미신으로 여기는 태도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문화적인 충돌이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당시 집권세력은 사회적인 불만과 어려움을 돌리기 위해서 외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이용하였습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 목적으로 천주교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 가야 했고, 순교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그들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을 겁니다.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조선의 학문과 사상의 폭은 더 넓고 깊어졌을 겁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박해의 이유입니다.

 

네 번째는 신앙과 신념이 이유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박해를 받아 순교했던 건 바로 네 번째인 신앙과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리는 성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울어라, 선비네 휜 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때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줄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새로운 개벽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천민도, 노비도, 백정도 없는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신분과 능력과 재능과 출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믿음과 사랑으로 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에 죽어서도 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이 박해의 칼날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순교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칼로도, 환난으로도, 박해로도, 굶주림으로도, 헐벗음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 순교 신앙입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순교 신앙입니다.

 

이런 순교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세상은 화려하고, 세상은 풍요롭고, 세상은 가지고 싶은 게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환난, , 박해가 없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멀어지곤 합니다. ‘다음에 하지 뭐라고 하는 영적인 게으름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남들도 그러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를 죄에 물들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비하와 열등감이 우리를 일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일어서지 않으면 걸을 수 없고, 걷지 않는 사람은 엠마오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우리 모두는 영예롭고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후예입니다. 우리의 혈관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마치 한 송이 숨은 야생화처럼, 외진 곳에서 기도와 노동, 희생과 보속으로 하루를 살아 가시는 수녀님들의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신 원장 수녀님께서는 대뜸 ‘떡 본김에 제사 지내자!고 하십니다. 사연인즉은 고백 지도 신부님께서 지난 번 바쁘셔서, 성사를 한번 건너 뛰셨는데, 이왕 오신 김에 우리 수녀님들 깨끗하게 세탁 좀 해주고 가랍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한 달에 한번도 아니고 두번 씩이나 고백성사를 보신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 추측을 했습니다. ‘언제나 기도 안에 영적으로 사시는 수녀님들, 그것도 격주로 안빠지고 고백성사를 보시는 수녀님들이니, 초스피드로 끝나겠지!’

 

 그러나 웬걸!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속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크게 위안이 되는 점 한 가지는, 그 맑고 선한 수녀님들께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그’로 인해 쌩고생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먼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 매일 같은 식탁에 앉아 삼시세끼 밥먹는 사람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 때 마다 결론 삼아, 단골 소재로 삼아 드리는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예롭고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후예입니다. 우리는 자주 까먹지만 우리의 혈관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사랑의 유효 기간, 결혼의 유통 기한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전문가 집단의 연구에 따르면 그 유효기간은 통상 30개월이랍니다. 3년이 채 못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30개월이 경과하자마자, 한 가지 ‘각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합니다. 마치 로또 같은 그분, 로또 안 맞듯이 죽어도 나와 안맞는 그분, 나와 달라도 너무나 달라,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그분, 바로 그분을 향한 ‘순교자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와 철저하게 다른 그분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상황 앞에서는, 순교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영웅적인 노력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의 유효 기간을 무한대로 연장시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한국 순교자들의 영예로운 순교는 어느 날, 평소 조금도 준비 안했는데,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온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별 자격도 없었는데, 병인박해가 다가오고, 기해박해가 다가와서, 다시 말해서 시대가 도와줘서 순교의 영광을 맞이하신 것이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순교자들은 평소 늘 순교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매일 나와 다른 그를 기쁜 마음으로 인내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매일 다가오는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고통스런 현실을 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견뎌냈습니다.

 

 그런 일상적인 순교 훈련, 순교 연습이 매일 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순교의 기회가 다가왔을때,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찬미와 영가를 부르며 순교의 현장으로 기쁘게 나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 앞에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떤 방식, 어떤 자세로 순교 영성을 실천할 것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순교자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교회는 백 여년 동안 신유, 기해, 병오, 병인등 4대 박해를 통해 만 명 이상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순교자의 피가 오늘의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병인박해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시간 순교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순교라는 말은 신앙과 믿음을 증거하기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습니다.”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지혜서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순교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행동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지혜3,1-9).라고 적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세상은 어리석게 보았지만 주 하느님 눈에 들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곧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 “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 신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이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화젓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최해성 요한은 배교하면 한 고을을 통째로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로마8,35-39).

 

그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장에서는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 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하고 노래합니다. 지금 받는 수고와 땀은 후에 받을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련과 역경,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수가 늘어갔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제 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에 성직자나 수도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성경도, 기도서나 묵주, 신심서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은 무엇이든 풍족합니다. 그런데 주님 체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은총은 많은데 담을 그릇이 없는 탓입니다. 복음에서 보듯“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지만 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만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나의 취향과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크신 예수님에게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로 바오로 사도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5-8)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자기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 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익숙해져 왔는데 그런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아픔이 없이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했으며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하고 고백합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인데,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 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그리고 명예와 재물과 취미생활, 위신체면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3,9).

 

현대의 순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리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명한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밉거들랑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은 안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이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순교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 마더 데레사 -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도 만들어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라.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26).”

‘순교자들’은 예수님 말씀 그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육신의 목숨’과 ‘온 세상’을 버려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순교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한 분들이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그분들에게 큰 영예와 영광을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교자들에게 적용해서 말한 것인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떠한가? 나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존경하는 것은,
과거의 우리 교회의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의 신앙생활을, 또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지금’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들이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순교자 현양’은 열심히 하면서도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현양은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가정생활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포기하고 하루 종일 기도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가정생활을 할 때에도,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신앙인으로서’ 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시간이 남을 때에나 하는 생활처럼 한다면,
즉 여가 시간의 취미 생활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면,
순교자들을 존경한다는 말은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서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특별한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냉담자가 많은 것이 현실인데,
기도하지 않는 것이 냉담하게 되는 첫 번째 원인입니다.
‘누구 때문에’, 또는 ‘어떤 일 때문에’ 라고 냉담하게 되는 이유를 말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이유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냉담하게 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기도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기도는 아쉬울 때에만 하는 일도 아니고, 성당에서만 하는 일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은 기도를 해야만 주님의 생명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허약하게 되고,
작은 상처만 입어도, 또는 작은 유혹만 받아도 금방 넘어지게 됩니다.

‘사랑 실천’은 특별한 때에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항상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의 삶과 사랑 실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눈에 뜨이지 않는 작은 사랑도,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큰 사랑도,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고 고귀한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처지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도 평소에 꾸준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이라면, TV 보는 시간보다, 또 휴대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합니다.
세속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주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고,
세속의 영향력에 물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하신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말씀도 아니고, 힘든 말씀도 아닙니다.
하려고 하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안 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을,
“자꾸만 세속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누르고”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순교자들이라고 해서 사는 동안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의 공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분들은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그런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그 ‘물리침’이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십자가 너머에 부활과 생명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죽음만 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봅니다.

신앙인의 ‘인생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고,
세속에서의 출세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잠깐 반짝였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들입니다(호세 13,3).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헛웃음의 대상

-이종훈신부-


정치인들의 삭발릴레이를 두고 그들과 지지자들은 결기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쇼라고 평가한다.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하나뿐인 목숨이나 신체의 일부를 잘라낼 정도로 자신의 주장과 믿음이 옳다고 선포하는 이런 행동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선택하는 최후 그리고 최고의 선포 수단이다. 그들의 권력과 경제력을 감안하면 그런 행동들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한 유명 작가가 요즘은 자신의 의견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사고가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것이 정의와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라며 여론조사가 최고의 권력이 되어버린 무지몽매한 천박한 세상이 됐다고 비판했다. 가짜뉴스가 진실이 되어버리고 소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오늘의 세태를 정확히 꼬집은 것 같다. 사람은 정말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진리라고 주장한다. 토론은 없고 주장만 난무하는 것 같다. 그러니 시끄러울 수밖에.

 

김대건 신부님이 제작한 조선전도(1845)는 대동여지도(1861)보다 16년이나 앞섰다. 신부님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외국 선교사들을 영입하고 선교하기 위해 제작했지만 그 당시 정부는 외세에 나라를 넘기기 위해 제작했다고 단죄했다. 그런데 거기에 독도(우산)가 표시되어 있어 요즘 일본의 엉뚱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다시 주목을 받는다. 세상이란, , 헛웃음만 나온다.

 

차 없는 굽은 길을 운전할 때는 차선을 따르지 않고 목적지를 두고 직선으로 달린다. 그러면 중앙선의 왼쪽 오른쪽을 넘나들게 된다. 나는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지만 세상은 왼쪽 혹은 오른쪽에 있다고, 교통법규 위반이라고 혹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복음적으로 사는 것이 때로는 그들의 주장과 맞아 환영받기도 하고 반대를 받아 박해를 받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진리에 대한 믿음대로 산다.

 

그런데 과연 나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인가?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는 죄로 기울지는 경향을 몸에 지닌 죄인이니까. 내가 바라고 좋아하는 대로 되면 기쁘겠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온 마음으로 바라도록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높은 분이라서가 아니라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를 빼앗아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름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어리석은 세상을 두고 하는 헛웃음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도 그 헛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다.

 

예수님, 주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더 깊고 굳은 믿음을 주시면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저보다 못나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보았던 것을 저도 볼 수 있게 이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천사의 말에 하고 대답할 때 지니셨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를 가르쳐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의 정신이란 내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없이할 수 있는, 나를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영세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 당하고 죽으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를 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들을 시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20일 수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