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9. 18. 18:22

2019 9 19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가 7,36-50)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행실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며, 당신의 발을 닦아 준 죄인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세 명의 일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일도 안 하며 미래에 사장이 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도 회사의 모든 일에 대하여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맡은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첫째 사람은 여전히 사장이 되겠다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고, 둘째 사람은 원인 모를 사고를 당하여 퇴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던 셋째 사람은 그 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같은 직장을 다니더라도 어떤 사람은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런 일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냐고 불평을 합니다. 결국 누가 더 성공할까요? 자신의 위치에서 더 감사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것입니다.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미사에 참여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자신처럼 비천한 죄인을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하지만, 어떤 사람은 마치 덜 받은 것처럼 이것저것 청하려고만 합니다. 심지어 봉사나 봉헌을 하면서 ‘자신의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착각합니다.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무엇인가 대접해 드린다고 착각하던 사람입니다. 반면 여인은 받은 것에 보답해 드릴 것이 없어 눈물만 흘립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무엇인가 해 드리고 있으니 보답이 올 것을 기대하였고, 여인은 너무 받아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만을 생각하였습니다.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주님 것입니다. 나의 것을 드릴 수 없습니다. 모두 받은 것이니 그저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무엇인가 주님께 해 드린다고 느꼈던 바리사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였지만 여인은 용서받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감사의 눈물’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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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신부님 옆에 타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들을 제 차에 태우고 어디를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제 차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지요. 그런데 한 분이 조수석에 앉으려다 말고 옆에 타면 안 되냐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제가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왜 안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조수석 자리에는 그 누구도 앉을 수 없도록 짐이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글라스, 우산, 책과 노트, 그 밖에 여러 전선까지 이 자리에 있으니 사람이 도저히 앉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혼자 살고 있기에 누가 제 옆에 탈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조수석 자리가 편안하게 하나의 짐칸처럼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얼른 이 짐들을 트렁크에 쏟아부은 뒤에야 이 자매님께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내 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혹시 내 마음에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욕심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그 사랑이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래서 내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한구석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향유 옥합을 들고 한 여인이 서 있습니다. 잠시 뒤 그녀는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최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여인에 대한 칭찬을 아무리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는 전혀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을 보기보다는,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주목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여자를 판단하는 것을 뛰어넘어 이제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까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자기 마음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도 자신들의 마음을 내어드리지 못하고 판단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반대하기보다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내 마음 안에 소중히 모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자기 죄에 책임을 지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유혹을 마주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해야 할 위대한 일입니다(성 안토니우스).



어떤 비교를 할 것인가?

자신이 한 달에 10만 원을 더 받는 경우와 주변 사람들이 한 달에 20만 원을 덜 받게 되는 경우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10만 원을 더 받을 때는 주변 사람이 20만 원을 더 받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20만 원을 덜 받게 될 때는 나는 더 받지도 덜 받지도 않습니다.

비록 주변 사람들이 한 달에 20만 원을 더 받더라도 내가 10만 원 더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변 사람들이 20만 원 덜 받게 되는 경우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전자는 내가 받는 액수가 남과 비교해서 –10만 원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내가 받는 액수가 남과 비교해서 +20만 원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100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 더 행복해할까요?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는 있지만, 행복 지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타인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이 비교에서 벗어날 때가 바로 행복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비교하지 않고서 산다면 그만큼 발전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쳐진다면, 우리는 비교 대상을 바꿔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완벽한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덜 완벽해도 열심히 사는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죄를 끊는 고해성사 보는 법

-전삼용신부-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도둑맞았습니다. 신발을 훔쳐간 도둑 때문에 그 학급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신발 도둑을 잡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친 아이는 금방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습니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

      도둑질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선생님의 판단이 옳을까요, 옳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그냥 여기서 끝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아이가 다시 도둑질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창피를 당하고 벌을 받았다면 ‘다음번엔 들키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받아야 그 죄에서 벗어납니다. 용서받지 못했다고 믿는 것에서 다른 죄들이 이어집니다. 죄는 죄를 낳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 주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믿었다면 서로에게 핑계를 대는 죄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가 멈추려면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완전히 용서받으면 감사의 눈물로 보속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라야 더 큰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고해성사를 들을 때, 어떤 신자들은 “이건 이전에 했던 고백인데요, 계속 찜찜해서 ... ”라고 말하며 전에 했던 고백을 반복해서 합니다.

      이런 경우 이전에 고해성사를 할 때 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용서받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도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런 찜찜한 상태라면 계속 죄가 남아있어서 또 죄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고해성사 보고나서의 찜찜한 상태는 또 다른 죄를 지을 준비과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들은 각자가 씻어내지 못한 죄책감의 열매들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고해소에 들어가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한 죄인인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줍니다. 예수님은 이 행위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비유말씀을 가만히 보면 죄의 용서는 예수님께서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바리사이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도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예수님께 입 맞추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물 대신 향유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이미 그 여자는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그 여인은 이미 죄를 용서받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표시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의 확증을 듣지 않았더라도 그 여인은 죄를 용서받았음을 믿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받아야합니다. 고해소에는 그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증을 받으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고해소에 감사의 마음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보속을 해야 죄의 용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해서 더 큰 보속이라도 하고 싶어져야합니다. 예수님께 무릎 꿇고 이미 용서받은 죄에 감사하여 눈물로 발을 씻어드리는 마음으로 고해를 보고 보속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자비를 믿어야합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같은 자세로 고해소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또 그런 마음으로 고해를 보아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누가 감사한 마음으로 또 죄를 찾아 나설 수 있겠습니까? 바리사이와 같이 무언가를 해야 주님께 용서받는다는 마음이 아니라, 죄인인 여자와 같이 이미 용서받았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동네 산책을 하면서 추모비를 보았습니다. 궁금해서 추모비를 읽어보니 마을에서 전쟁에 참전하였고 사망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추모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추모비를 세운 겁니다. 추모비의 끝에 요한복음 1513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사망한 사람을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허물과 잘못을 보시기보다는 우리들의 선행과 희생을 보십니다.

 

뉴욕 맨해튼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셸 저지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11 당시에 본당 신부님이셨던 미셸 저지 신부님은 소방대의 지도신부였습니다. 사고 현장에 함께 했던 신부님은 구조의 현장에서 소방대원과 함께 사망하였습니다. 당시에 많은 희생자가 있었지만 가장 먼저 찾은 사망자는 미셸 저지 신부님이었습니다. 9.11 희생자 중에서 가장 먼저 추모 미사를 봉헌했던 분이 미셸 저지 신부님이라고 합니다. 추모 미사에는 대통령까지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신자들이 신부님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미셸 저지 신부님을 자비와 사랑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있고 이타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되돌려 받으려는 사랑입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 있고 사회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랑도 숭고합니다. 그 사랑이 가정을 이루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됩니다. 사회적인 사랑은 정의와 공정이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평화로 열매 맺습니다.

 

바리사이파라는 직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자이며 성직자라는 신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고, 존재하는 모든 걸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

 -반영억신부-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다’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자비가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라도 용서받을 권한이 있고 용서를 받으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습니다.”

 

동네에서 행실이 몹시 나쁜 여인이라고 소문난 여인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 용서를 청하는 방법이 남 달랐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작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은 여인의 참회행위를 보지 않고 과거의 잘못에만 비중을 두었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모습에는 관심도 없고 여인의 과거 잘못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잡는 그녀의 손짓 하나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여인의 접촉을 부정을 타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 여인은 마땅히 심판과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난 받아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나쁜 행실을 알고 있고, 주변사람들이 그 여인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모든 참회행위를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시며 여인의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매여 미래를 막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빌미로 한 사람을 매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용서와 사랑으로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줍니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난 일에 연연하고 집착하면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큰 사랑은 과거의 잘못에 용서를 가져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모두를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법을 지켜야 하지만 사랑의 법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야 합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저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주님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물로 누벼놓는 하루를 주님의 자비가 감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시는 일에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기억을 잃어버리시고,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십니다....하느님께는 어떤 죄도 마지막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법보다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오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7,40-43).”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1) 채권자와 채무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더 많이 용서받는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그렇게 오해한다면, 그것은 “더 많이 용서받으려면
더 큰 죄를 지어야 한다.” 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더 깊이 회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
또는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깊이 회개한다.” 라는 뜻입니다.

2)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 쪽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안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안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운해 하거나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넓은 뜻으로 ‘은혜’로 표현하면, “나는 항상 하느님의 은혜를 가득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은혜를 받은 적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적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바라는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달라고 고집부리는,
마치 떼를 쓰는 것과 같은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만 내세우는 사람,
다른 사람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혼자서만 복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가 받고 있는 은혜가 은혜인 줄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사실상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는 ‘채권자, 채무자’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것은 알아듣기 쉽도록 사용한 표현일 뿐이고,
하느님은 채권자가 아니고, 우리는 채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는 글자 그대로 ‘은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특히 어떤 물질적인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온 세상이 다 하느님의 것인데, 인간이 어떤 물질적인 것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께 무슨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헌금을 많이 바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많이 받는다고 말하는
종교나 종파가 있다면, 그것은 백퍼센트 사이비 종교입니다.)

4) ‘봉헌’은 받은 은혜에 대한 대가를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또 사랑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봉헌의 기본정신은 ‘감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고마워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즉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도, 사랑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하느님 쪽에서 생각하면,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받는 우리 쪽에서 생각하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당신께서는 언제든지 막강한 힘을 발휘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 당신 팔의 힘을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온 세상도 당신 앞에서는 천칭의 조그마한 추 같고
이른 아침 땅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지혜 11,21-23).”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자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비’란, 받는 쪽에 어떤 권리가 있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쪽의 선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겸손하게 감사드릴 뿐입니다.

또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요구’하는 것처럼 기도하면 안 됩니다.
‘요구’가 아니라 ‘간청’을 해야 합니다.
청원기도를 바칠 때에도 감사기도를 먼저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태어나서,
그 무한한 사랑 속에서, 또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설명이 없는데, 아마도 아벨의 제사는 ‘감사 제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인의 제사는 감사하는 마음 없이 하느님과 흥정을 하려는 제사였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는 형식적인 제사였을 것입니다.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과부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즉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쳤을 것입니다(루카 21,4).
(만일에 그 과부가 뭔가 속셈이 있어서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노우재신부-


용서와 의로움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여 말씀을 듣습니다. 겸손과 호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죄인인 여자가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불청객입니다. 그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립니다. 바리사이는 죄인을 상종하지 않는 것을 덕이라고 여겼습니다. 속으로 예수님을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하고 비난합니다.

죄인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스승님” 하고 존경하는 듯 부릅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교양 있는 사람은 세련된 방식으로 죄를 짓습니다. 반면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고개를 들지도 못합니다. 죄를 지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그러면서도 예수님 곁에 잠시라도 있고 싶어 합니다. 주님 사랑 없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주님 사랑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너무나 잘 압니다. 사랑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말로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시며, 자비로운 사랑을 먼저 베푸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비로 죄인을 의롭게 하십니다. 바리사이 시몬을 못마땅해하시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용서와 사랑을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비로 정의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이종훈신부-


더러워지지 않는 하느님

바리사이는 분리된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준수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는 죄인들의 무리에서 분리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다고 자부했던 것 같다. 반면에 다른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살 수 없어서 구원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바리사이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요한 7,49)’이라는 비난과 무시를 당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 안 돼서 속상하고 괴롭다. 교회법과 교리 그리고 신학적인 이론들은 잘 몰라도 어떻게 해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지 잘 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안다. 하지만 아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거의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당연히 그것을 감추고 속으로도 애써 모르는 체 하는 것이지 않을까?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도 만만치 않은 데 거기에 감추고 가린 그 무거운 마음의 짐까지 게다가 티 않게 짊어지고 살려니 사는 게 참 힘들고 버겁다.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엄격한 율법준수와 철저한 금욕생활로 죄인들에서 분리되어 그들에게 물들지 않은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고 자부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렇게 엄격하고 철저하게 살면 완전히 깨끗해지나? 아닐 것 같다. 죄는 자동적으로 저질러진다. 안 하려고 해도 하게 되고, 하고 싶지 않아도 어느새 또 그렇게 돼버린다. 내가 더러워서 그런가? 그리고 그렇게 더러운 나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존귀하신 예수님을 더럽히면 안 되니 가까이 가면 안 되나?

 

아니다. 그 반대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아니 그분을 만지고 그분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분은 내가 당신을 찾기보다 먼저 나를 부르신다. 동구 밖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매일 기다리신다(루카 15,20). 나는 나를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다쳐서 아프고 먹지 못해 배고프다고 보신다. 나의 죄스러움이 그분을 더럽히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깨끗함이 나를 씻어 낫게 한다. 나는 또 다치지만 그분은 나 때문에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하느님이시다.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큰 확신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깨끗이 씻을 수 없다. 하느님 앞에 더러운 죄인은 없다. 배고프고 다쳐 아파하는 당신의 자녀만 있을 뿐이다. 세상 모두가 끝까지 그를 단죄하고 저주해도 그가 하느님을 찾고 청한다면 그는 하느님 앞에서 깨끗해지고 하늘나라까지 훔쳐 들어간다(루카 23.42-43). 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말이다.

 

예수님,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여인은 어디선가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주님을 찾아왔지만 존귀하신 당신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없어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당신의 발을 닦고 거기에 그 비싼 향유를 부어 발라드렸습니다(루카 7,37-38). 다른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지만 주님은 그를 안쓰러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확인시주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 바리사이들은 믿을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깨끗해지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불만이었겠지요. 그들이 옳았습니다. 그런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늘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이 땅으로, 내 마음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저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그 힘센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오니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믿게 해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7,36-50: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그 바리사이의 집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회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37),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 즉 회당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인은 아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땀에 젖은 채 식사 중인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린다.

 

여기서 바리사이 시몬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39)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에게 두 채무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는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43) 채권자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밖에서도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셔서는 더 큰 기적을 행하셨다. 밖에서는 병든 육신을 고쳐주셨지만, 안에서는 병든 영혼을 고쳐주셨다. 밖에서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고, 안에서는 죄 많은 여자를 죽음에서 살려 내셨다. 그러나 눈먼 바리사이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입맞춤이란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춘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께서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셨듯이, 교회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교회만이 신부처럼 신랑에게 입을 맞춘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분의 신부,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는 깊숙이 감추었던 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여인을 옭아매고 있는 많은 조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 이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다운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여자를 자유롭게 해주신 동시에 함께 앉아있던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셨다.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49) 말한다.

 

이제 용서는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7) 라고 하신다. 베드로 사도도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 4,8)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꾸미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한상우신부-

수천번
수만번
용서하시는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용서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용서와 사랑
믿음과 구원은
언제나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배려의
여정입니다.

용서라는
믿음없이는 결코
구원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믿음과 용서를
치유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용서의 십자가가
있기에 그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을
자라게합니다.

사랑하기에
용서할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이 끝이 없듯
용서도 끝이 없습니다.

무한한 사랑과
무수한 용서의
시간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용서의 시간에
용서의 자리에
십자가의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아프고 힘들기에
가치있는 용서의
이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눈물은
용서와 사랑의
눈물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답게 용서로
돌아가는 용서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용서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은 참 아름다운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자기 고을 어느 집에 초대되어 오신 예수님을 용기 내어 찾아온, 죄인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드린 사랑 이야기입니다. 언제 만나도 가슴 뭉클한 우리 죄인들, 너와 나의 이야기이지요.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얼마나 정성스럽고 애틋하면서 또 장엄한 광경인지요. 그녀는 자기를 단죄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이유로 자기를 내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바리사이의 집까지 들어왔습니다. 설령 집 주인이 뭐라 하더라도 그분만은 자기의 손길과 봉헌을 뿌리치거나 경멸하지 않으실 것을 믿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누가 더 그 채권자를 사랑하겠느냐? ...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루카 7,42-43)

속으로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 시몬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채권자와 두 채무자의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 더 많은 액수의 빚을 탕감받은 이가 채권자에게 더 고마워하리라는 건 당연한 이치지요.

사실 우리는 많건 적건 빚을 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무엇으로도 되갚기 어려운 사랑의 채무를 지고 있지요. 그런데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제대로 되갚을 의무조차 별로 느끼지 못하는, 작은 것 하나 드리면서 마치 제 살을 베어내 바치는 듯 엄청 생색 내고 주저하는 철없는 채무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시몬과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좋은 선생님처럼 비유를 들어 차근차근 사랑과 용서에 대해 친절히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누구도 '난 저 사람보다 빚이 적으니 조금만 내놓아도 돼'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절대 기준이 없기 때문이지요. 누가 무엇을 더 탕감을 받았는지 주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가 진 빚을 꼬장꼬장 셈하지 않으시니 이 사랑의 빚은 우리 스스로 체감하는 만큼 갚아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알면 알수록 하느님께 받은 자비와 은총이 크다는 걸 감지하는 이는 더 많이 사랑할 겁니다. 사랑하면서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한 관계로 엮여질 것이고요. 반면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께 빚진 게 없다고 여기는 이는 냉랭하고 건조하게 주님과 원거리를 유지하겠지요. 그분과 관계 맺을 여지는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고요. 우리가 드리는 사랑은 용서 받은 증거이고 결과이며 효과가 될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

예수님께서 그녀의 애틋한 사랑에 용서로 화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그리고 이 "용서"에 '감히!'하면서 떱떠름해 하는 이들 앞에서 한술 더 떠서 "구원"을 선포하시지요. 이 구원은 당시 제도가 권장하고 의무화한 율법 준수의 결과가 아니라, 부족한 채 주님께 전적인 신뢰와 희망을 드린 여인의 믿음이 맺은 열매입니다.

오늘 이 아름답고 장엄한 사랑의 광경 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를 관상합니다. 그녀는 본성상 거룩하면서도 그 품 안에 죄인들을 안고 있는 교회의 표상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를 모르는 분이시나 겸손하게도 모든 죄인들, 죄인이면서 정화되고 거룩하게 되어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갈 모든 교회 구성원을 대신해 이 순간 그녀의 돌봄과 섬김, 사랑을 받고 계십니다.

교회는 울며(죄인인 우리 교회 구성원의 죄와 약함을 연민하며) 눈물(세례수)로 우리를 씻고(정화하고) 머리카락(돌봄)으로 우리를 어루만지며 위로합니다. 입을 맞추며(말씀을 담아 주고) 향유(성령, 치유)를 발라 힘을 북돋아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겸손하고 사랑 가득한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죄많은 우리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새롭게 회복하여 나날이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게 변모되어 갈 것이고, 그럼으로써 제2의 그리스도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끼는 협력자 티모테오를 격려하고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1티모 4,12)

복음의 관상과 연결해 본다면, 티모테오는 갓 생성되어 꼴을 갖추어가고 있는 신생 교회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지닌 은사 ...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1티모 4,14)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잘나고 뛰어난 존재가 되라 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사에 주목하라고 이릅니다. 자칫 제 능력과 힘에 기대어 은총도 제 자질로 착각하기 시작하면 이제 막 태동해 싹이 트는 상태에선 침몰하기 십상이니까요.

받은 은사, 하느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는 이(교회 공동체)는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가 강조한 "성경 봉독, 권고, 가르침"(1티모 4,13)에서 모든 겸손과 사랑의 행위가 분출하여, 정화하고 성화하는 교회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복음 속 여인을 바라보는 주님의 눈을 봅시다! 얼마나 사랑 넘치고 자애가 가득한지요! 티모테오를 격려하는 사도 바오로의 마음을 봅시다! 얼마나 큰 신뢰와 기대로 가득한지요! 교회와 그리스도, 죄인인 우리 자신과 교회, 빚쟁이인 우리와 그리스도 안에 오가는 사랑의 역동적 흐름 안에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라고 오늘의 말씀들이 초대합니다. 그러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딛고 주님 발치로 나아갑시다. 우리 사랑을 받으시려 거기 주님이 계십니다.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