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9. 9. 17. 18:36

2019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1-35)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집인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고 기초라며,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보고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는 세태를 나무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렘린’(1984년)이란 영화에서 귀여운 동물 모과이가 나옵니다. 모과이는 이 세상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귀엽고 순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모과이를 키우려면 자정 이후에는 절대 음식을 먹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귀여운 모과이에게서 괴물들이 나옵니다. 인간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절제를 통하여 보존됩니다. 지나친 술, 담배, 인터넷 사용, 텔레비전 시청 등은 우리 몸에 해롭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우울해지고 그 우울함을 달래려고 더 쾌락적인 것들을 찾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습니다. 육체를 너무 만족시키면 영혼이 메말라지고, 영혼을 너무 만족시키면 육체가 괴로워집니다. 이는 마치 두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에 물을 주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영적인 곳이 아니라 육적인 곳입니다. 이런 세대를 예수님께서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라고 비유하십니다. 육체에 집중하면 영적으로는 무감각해집니다. 스마트폰 게임에 집중하는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말씀에 민감해지려면 육체의 욕구에는 무감각해져야 합니다. 이 세상 즐거움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즐거움에 몰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따분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이 따분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꿀처럼 다디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춤추고 노래할 수 있게 됩니다. 영에 민감하고자 조금씩 육에 무감각해집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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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약점은 상처받기 쉬운 부분이기에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더듬이 하나가 레이더처럼 나와서 나의 약점을 숨기고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약점이 사라지는 때도 있겠지만, 정확하게는 단지 약점을 숨길 뿐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책을 잘 읽는다고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어떤 분은 황송하게도 성우 같다는 이야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저는 말을 많이 더듬었습니다. 특히 긴장하면 말더듬증이 더욱 심해져서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조용히 숨어 사는 몫을 선택했습니다. 과묵해 보였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 행세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신부가 되면 분명 사람들 앞에 서야 하고 또 그들 앞에서 많은 말을 해야 하는데 피해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모습이지요. 그래서 어려운 발음은 아예 하지 않거나 발음하기 쉬운 다른 말로 교체해서 말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평소에 신경 써서 책을 소리를 내 읽으면서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지금도 말더듬증은 약간 남아 있지만, 사람들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말더듬증이 오히려 선물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게 이러한 단점이 없었다면 스스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부로 생활하면서 강론을 하고 강의를 하면서 살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말더듬증을 고치려는 저의 노력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불평불만에서 멈춰 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새롭게 생각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봐야 하는 나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극기의 삶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먹고 마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다.’라면서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멈춰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 부분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이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 역시도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저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그냥 멈춰서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큰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잘못이다(공자).



행복의 이유를 찾는 행복한 사람.

어느 철학자가 말합니다.

“아름다운 2월은 날짜가 짧아서 고통도 짧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삶이 곧 아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삶이 곧 기쁨이라고 생각했다면 짧은 날 수에 서운해하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2월은 날짜가 짧아서 기쁨도 짧다.”

짧아서 아쉽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면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이유를 찾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보십시오.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되지 않으려면

-전삼용신부-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이나 복권에 당첨되는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단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바로 ‘그릿(Grit)’입니다. 그릿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얼마까지 다그칠 수 있는지의 정도입니다. 머리고 좋건 나쁘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줄 아는 만큼 성공합니다.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공통점을 조사한 내용이 있지만, 이번에는 한 스튜디어스가 비행기 일등석, 퍼스트클래스의 승객들만의 행동과 습관을 발견하여 낸 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퍼스트클래스는 비행기 좌석의 3%이고 부유층 구성비도 3%입니다.
 

      첫째, 일등석 사람들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항상 메모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펜을 항상 지니고 다닙니다. 기록하고 쓰는 행위는 자신의 머리를 믿지 않는 겸손함에서 나옵니다.

      둘째, 일등석 사람들은 전기와 역사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유독 퍼스트클래스에서는 신문을 가져달라는 요청이 드뭅니다. 그들은 지독한 활자의 중독자들이나 베스트셀러가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투박하고 묵직한 책을 읽습니다. 비행기 내에서도 재미를 찾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일등석 사람들은 자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퍼스트클래스의 승객은 일단 자세가 바릅니다. 일등석이 자세가 가장 흐트러지기 좋은 조건인데도 그들은 좋은 자세로 당당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입니다. 좋은 자세를 갖기 위해서는 평소에 육체의 편안함을 거스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넷째, 일등석 사람들은 대화를 이어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경청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쓰는 말들은 주로, “그래서 어떻게 됐지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등의 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를 끄집어내기 위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일등석 사람들은 승무원에게 고자세를 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겸손한 말투로 승무원을 대합니다. 항상 “바쁜 중에 미안하지만”이란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여섯째, 일등석 사람들은 아내를 극진히 모신다고 합니다. 아내뿐만이 아니라 동승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폭넓은 인사를 합니다. 사람에게 열려있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야합니다.

      우리는 부자들이 부모를 잘 만나서, 운이 좋아서, 시대를 잘 타고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없어서 자신은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댑니다. 어떤 책을 읽어봐도 부자는 항상 자기 자신, 특별히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과 싸워 이긴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돈을 모아 편하고 게으른 생활만 꿈꾸면서, 먹고 마시는 생활만 꿈꾸면서,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지 못하는 핑계를 대고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이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세상에서 부자가 된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자신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돈을 좋아하고 권력과 쾌락적인 삶을 좋아하던 바리사이들은 이런 가르침에 끄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가르침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주었던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예수님께서 같은 가르침을 말씀하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며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지혜란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세 욕구와 싸워 이겨야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산 믿음의 선조들이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이 신앙을 가지면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됩니다. 자아는 실현시킬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이 주장을 한 이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삼구와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요한의 세례의 목적입니다. 삼구와 싸우지 않는 신앙인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30)

      우리도 말씀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구, 육욕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욕구를 가난의 마음, 절제의 마음, 겸손의 마음으로 바꾸려는 싸움을 시작해야합니다. 그래야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삼구와 싸우지 않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지혜의 자녀들이 됩시다.


-조재형신부-


사람을 안다는 것은 나의 기준과 나의 판단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상대방의 마음과 함께해야 합니다. 저 역시 저의 판단과 기준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많습니다.

 

책에서 읽은 글입니다. 오해와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좋은 내용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강물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묵상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차를 파는 노인과 친해졌고, 매년 가면 노인과 대화하며 차를 마셨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노인과 인사를 하려는데 노인은 갠지스강에서 주전자의 물을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오염된 강물로 차를 끓인다는 생각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노인과 대화 하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해에도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은 반갑게 인사하면서 차를 한 잔 주는데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이번에도 갠지스강으로 주전자를 가지고 가서 물을 채워 왔습니다.

 

기분이 상한 나머지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오염된 강물로 물을 끓입니까? 노인은 아닙니다. 저는 한 번도 오염된 강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의심되면 저와 함께 계단으로 내려가 보세요.’ 확인해 보니 계단 아래에는 펌프가 있었습니다. 땅속 깊이 파이프가 연결돼 있었고 맛있는 지하수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의 차는 맛있었던 겁니다. 남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는 계단 끝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노인의 정성과 노인의 친절함을 외면했던 자신의 오해를 깊이 뉘우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과 계단의 끝까지 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이제 막 시작했는데 벌써 결말을 예측합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풍기셨던 따뜻한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습니까?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한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부터 ‘먹보요 술꾼’이라고 불렸다는 것이, 술을 많이는 아니고, 아주 ‘쪼끔’ 좋아하는 제게,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동시에 이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께서 너무나 인간미가 넘치고 자연스러운 분이셨다는 것이, 또한 제 마음을 크게 흐뭇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전형적인 고위 관료들처럼 목이 뻣뻣하거나 고자세가 아니셨다는 것, 조금도 가식적이거나 형식적이지 않으셨다는 것, 그저 물흐르는 것처럼 편안하고 자유롭게 사셨다는 것, 너무나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태생적·후천적으로 삐딱하고 경직된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인간미 넘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메시아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빌려 탄생하지 않으시고, 구름을 타고 등장하셔야만 했습니다. 구질구질한 저잣거리가 아니라, 잘 청결하고 정돈된 구중궁궐에서 탄생하셔야만 했습니다. 세리나 창녀, 죄인들과 어울려서는 절대로 안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잔치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몇일씩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나오는 음식마다 싹쓸이하셨습니다. 밤 늦도록 죄인들과 어울려 포도주 잔을 기울이시며,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시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 심하게 거슬렸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이렇게 투덜거렸던 것입니다.

 

 “보라, 저자는 먹요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복음 7장 34절)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던 시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꼴불견 그룹이 둘 있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쌍으로 붙어다니면서, 안그래도 식민통치 아래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동족들을 몹시도 괴롭혔습니다.

 

 그들에게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점들은 위선적인 신앙과 언행 불일치, 그리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향한 노골적인 배척과 박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끝끝내 거부한 나머지, 자신들 뿐만 아니라, 동족 유다인들에게까지도 구원으로 향하는 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가장 열심하고 충실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이, 그토록 급격히 바닥으로 추락한 원인이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과 신앙에 대한 진지하고도 일상적인 성찰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죄와 오류 모순 투성이였던 자신들의 내면과 영혼으로 향했으면 정말 좋으련만, 그런 노력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 약점 잡기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들의 매처럼 날카로운 시선은 100퍼센트 예수님을 올가미에 옭아매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위선 덩어리요 비굴함 투성이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치졸하고 부끄러운 모습과, 지금 난리들을 치고 있는, 구린내가 진동하는 웃기지도 않는 모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거짓이나 위선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셨던 진실 그 자체셨던 예수님 눈에 그들의 갖은 비리와 위선, 비굴함과 천박함은 절대로 비켜갈 수 없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크게 혐오하십니다. 일부러 보란듯이 게걸스럽게 주린 배를 채우시고, 포도주 잔을 높이 쳐드시며,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신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일관되게 유지하셨던 예수님의 얼굴 표정은 어떠하셨을까요? 유추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에서는 따스하고 다정한 인간미가 철철 흘러 넘쳤을 것입니다.슬퍼하는 사람 앞에 그냥 마주 앉아 손을 잡고 같이 울어주셨을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는 사람과는 한데 어울려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을 것입니다. 고민 투성이인 청년과는 밤늦도록 곱창집에 앉으셔서, 소주잔을 같이 기울이며 그의 고민을 다 들어주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목덜미가 뻣뻣한 제왕이나 독재자, 몰지각한 정치인들 같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요. 마치 모기떼들처럼, 요즘 들어 더욱 기승을 부리는 모 정당 정치인들처럼 표리부동하지 않으시고, 그저 한없이 부드럽고 진실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풍겼던 그런 따뜻한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습니까? 경직되지 않고, 뻣뻣하지 않고 물흐르듯이 자연스럽습니까?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이지 않고, 진리와 겸손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까?


어깃장을 놓지 마라

 -반영억신부-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 걱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장 나쁜 노예근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것은 어깃장을 놓는 행위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에 장단을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비딱 선을 탄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은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봉헌해야할 분입니다.” 나의 법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내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정채봉 @@

진자와 가짜

진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가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장애물 경주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

출발보다 도착이 중요한 것

사랑의 경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송영진신부-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1-35).”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요한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마귀가 들렸다.’는 말은 ‘미쳤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글자 그대로 핑계일 뿐이고,
회개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라고,
즉 ‘예수는 죄인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그것도 글자 그대로 핑계일 뿐이고, 그들은 구원받는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라는 말은,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시정잡배 같은 자다.”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엄격한 극기고행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활동 방식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예언자의 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기쁨’에 초점을 맞추어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회개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은 사람들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세례자 요한이 극기고행의 생활을 포기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생활을 했어야 했는가?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포기하고,
즉 죄인 취급 받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바리사이들만 만나면서, 바리사이들처럼 생활하셨어야 했는가?
사실 어떤 식으로 활동 방식을 바꾸었더라도,
사람들 자신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 당시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댔는지가 중요하지도 않고,
그 핑계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그 선포를 받아들여서 회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구원’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그리스도교는 재미가 없다. 너무 보수적이다. 어렵다. 딱딱하다.”
이처럼 자기 자신이 구원과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고,
교회 탓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서양 종교’ 라서 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서양 종교’가 아니라 ‘동양 종교’입니다.
유럽에서 볼 때에는 이스라엘은 동양입니다.)

< 성직자들, 수도자들, 또는 일부 신자들의 잘못된 모습들을 지적하면서
교회를 비판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것은 우리 모두가 먼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그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라고 말할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얼굴입니다.>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정체성을 잃을 정도로 세속과 타협을 하거나
세속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교회가 재미없다는 말을 안 들으려고 세속적인 재미를 추구하면,
그것이 교회일까?
그냥 세속의 오락장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가끔 생기는 일입니다.
청소년들을 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미사 전례를 이상하게 바꾸고,
그래서 미사 전례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그런 식으로 하면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겠지만,
그 효과는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것을 선교활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교회는(신앙인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
미움과 박해도 안 받고, 사람들이 좋아하겠지만,
교회는(신앙인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세속화’는 ‘복음화’의 반대쪽에 있고, 교회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속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함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4).”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7,36-50: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그 바리사이의 집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회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37),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 즉 회당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인은 아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땀에 젖은 채 식사 중인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린다.

 

여기서 바리사이 시몬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39)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에게 두 채무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는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43) 채권자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밖에서도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셔서는 더 큰 기적을 행하셨다. 밖에서는 병든 육신을 고쳐주셨지만, 안에서는 병든 영혼을 고쳐주셨다. 밖에서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고, 안에서는 죄 많은 여자를 죽음에서 살려 내셨다. 그러나 눈먼 바리사이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입맞춤이란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춘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께서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셨듯이, 교회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교회만이 신부처럼 신랑에게 입을 맞춘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분의 신부,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는 깊숙이 감추었던 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여인을 옭아매고 있는 많은 조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 이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다운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여자를 자유롭게 해주신 동시에 함께 앉아있던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셨다.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49) 말한다.

 

이제 용서는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7) 라고 하신다. 베드로 사도도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 4,8)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꾸미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 34)

-한상우신부-

자유롭고
아름다운
술꾼이며 먹보이신
예수님의 삶을
다시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세상을
바라셨습니다.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친구가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함께하면서
영글어갑니다.

어울리면서
익어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공감도 이해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함께 해야 할
사람을
보게됩니다.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웃고 함께하는
잔치를 원하셨습니다.

더 사랑하고파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먹보 아닌 먹보로
술꿀 아닌 술꾼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복음은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함께하는 나눔입니다.

나눔의 먹보이며
나눔의 술꾼을
따릅시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당시 세대를 장터 아이들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들은 서로 호응하지 않는 무리들을 기리키는 듯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흥겨운 피리 소리가 울리면 소리의 진원지인 잔칫집을 찾아 함께 축하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축제의 흥을 돋우느라 춤도 추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게 당연하지요. 또 곡 소리가 나면 상을 당한 곳을 찾아 정중히 애도하며 함께 울어 주는 것이 도리일 겁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루카 7,33)
광야라는 극한의 땅에서 극기와 고행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주님의 길을 준비시킨 세례자 요한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런 취급을 당했지요. 욕구와 안위를 초월한 철저한 삶이 소박한 백성에게는 귀감과 모범이 되었지만, 자기들이 근접 못 하는 경지가 불편한 기득권자들에게는 견제의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단식과 절제가 마귀 힘으로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 버린 셈이지요.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34)
세례자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보다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민중 한가운데 들어가십니다. 먹고 마시는 인간 본연의 욕구에 함께하시며 종교 중심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을 품으시지요. 죄인이라 손가락질 당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은 함께 먹고 마시며 음식을 나누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본디 생명 나눔은 그렇게 시작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소탈하고 허물없는 연민과 자비의 모습은 율법에 대한 도전과 무절제로 간주됩니다. 사람들, 특히 종교 기득권자들이 내용물인 진리보다 외피에 꽃혀 본질을 놓친 탓입니다. 껍질의 색이나 두께, 재질을 비난하느라 의미와 정신까지 가닿지 못한 채 형식만 저울질하다 저울마저 엎어버린 형국이지요. 결국 당시 세대 사람들은 그 어느 것에도 호응할 마음이 없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공감능력이 없으면 왜곡하여 판단하고 부정적 시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5)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 드러내는 부분이 다를 뿐이지요. 지혜의 모든 자녀들, 성령의 열매인 지혜를 입은 이들, 성령 안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부어주신 특은에 따라 저마다 지혜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투영합니다. 그런 이들의 모임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참조)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단 몇 줄로 요약하면서(1티모 3,16 참조) 그리스도의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된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놓친 것이기도 하고, 세기를 지나 지금 우리에게 도전장인 동시에 보증서도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은총의 방식은 인류의 수만큼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는 오직 한 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기에 이를 입증하시는 성령께 힘입어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모든 길은 옳고 귀하고 소중하며 가치롭습니다.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1티모 3,15) 답해야 하는 순간에 봉착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길, 예수님의 길, 사도 바오로의 길이 오직 한 하느님을 가리키듯, 모든 길은 흔들림 없고 변함 없으신 하느님을 향합니다.

길의 다름은 "악"이 아니라 "선"의 증식이고, 증식되고 분화하는 다양성만큼 하느님의 진리는 경계를 허물고 벽을 넘어 모두를 포용하는 힘이 됩니다. 이 다양성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1티모 3,16)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피리 소리에도, 곡소리에도, 또 침묵에조차도 귀기울이고 감응하고 소리를 보탤 줄 아는 관대하고 유연한 마음을 청합니다.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이 세대는 오늘도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통해 드러나셔야 하고 영광 받으실 분이십니다. 보잘것없는 죄인인 나를 통해서도 그렇게 될 것이니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20일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