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9. 9. 10. 18:39

2019 9월 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가 6,20-26)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영국이 낳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인 에릭 클랩튼의 ‘티얼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을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클랩튼이 히트곡을 내지 못하며 슬럼프에 빠져 술과 마약으로 자신을 위로할 때 태어난 아들이 코너입니다. 클랩튼은 아들을 위하여 새 삶을 살아 보려 애썼지만 매번 실패하였고 결국 아들은 별거하게 된 아내와 살게 됩니다.크게 반성한 클랩튼은 술과 마약을 끊고 아들과 만나 동물원에 가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I LOVE YOU”라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아빠를 기다리다 베란다에서 추락해 죽습니다. 자신을 기다리던 아들 코너를 위하여 만든 노래가 “내가 하늘에서 너를 만나면 너는 내 이름을 알 수 있겠니?”라고 시작하는 ‘티얼스 인 헤븐’입니다.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무엇인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회비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농부는 남의 밭을 갈다가 발견한 보물을 얻으려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이렇듯 하늘의 행복을 얻으려면 땅의 모든 행복을 팔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재물을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돈도 좋고 예수님도 좋다는 식의 생각이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만듭니다. 에릭 클랩튼이 아들을 얻으려고 술과 마약을 끊어야 했듯이,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면 이 지상의 행복을 끊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박해받는 이들은 행복하고, 부유하고 배부르고 지금 웃고 칭찬받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면 이 세상의 행복을 기회비용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최고의 긍정심리학자들이 장기적인 행복에 미치는 외부 세계의 영향은 10%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장기적인 행복의 80%는 우리의 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스트레스 없이 평온하게 살아간다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습니다.

1967년 과학자 토마스 홉스와 리처드 라헤는 삶에 커다란 타격을 주는 스트레스를 점수로 매겨 구분하는 작업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배우자 사별을 통한 스트레스 점수는 100점, 이혼은 73점, 실직은 45점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몇 점일까요? 기쁘고 좋은 일이니 스트레스가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자그마치 50점이나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배우자 사별, 실직, 결혼, 이혼 등은 우리 주변에서 참 많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겪은 모든 분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커다란 질병을 얻었을까요?

사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에 잘 견디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지속시켜주는 엔진의 역할을 이 스트레스가 담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스트레스의 최고 강도 문제가 아니라 지속시간이 중요합니다. 회복될 전망이 있는 스트레스는 오히려 우리 몸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강한 사람도 어느 순간에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가난, 굶주림, 슬픔, 미움을 당함…. 이를 통해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스트레스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혼자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기에 하느님의 손길에 의탁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묻혀서 풍요와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의 풍요와 만족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합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만을 내세우면서 욕심과 이기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다고 호소만 하지 마시고, 그 스트레스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꿈꾸는 자는 영원히 살지만, 꿈 없는 사람은 하루를 살 뿐이다(존 보일 오라일리).



김복례 할머니 이야기.

몇 년 전 대구에 사는 한 할머니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44세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어 홀로 국수 장사를 하며 딸 다섯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그 뒤 69세부터 할머니께서는 중학교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119구급차에 실려 갈 정도로 열정을 넘쳤습니다.

이렇게 학구열을 불태워 2년 만에 중등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친김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역시 2년 만에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도 2년 만에 졸업해서 학사모를 썼다는 기사였습니다. 이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만학도가 워낙 많으므로 여기까지는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함은 그 뒤에 어떤 기자가 물었던 할머니의 꿈이었습니다. 꿈을 묻는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듬해 합격을 목표로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공부를 마치고서는 사회봉사에 여생을 보내는 것이 제 꿈입니다.”

할머니께서 처음부터 ‘미국 유학’이 꿈이었을까요? 아니지요. 처음에는 중학교 입학이... 다음은 고등학교 입학이... 다음은 대학교 입학과 졸업이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미국 유학과 함께 사회봉사에 대한 꿈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나가면서 꿈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의 공통점은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루었어도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요? 꿈은 커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 단계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행복하려면

-전삼용신부-


데이브 아스프리는 26세에 실리콘 벨리 대기업 전략계획 이사로 선임되어 연봉 70억 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모든 것을 잃고 30세 무렵에는 몸무게가 140킬로그램까지 늘어나 죽음 직전의 만성피로로 고생하던 인물이었습니다. 40세 무렵 성공한 사업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다시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인물 450명을 직접 인터뷰하고 ‘최강의 인생’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왜 실패했고 어떻게 재개할 수 있었는지, 많은 성공한 인물들의 공통점을 통해 제시합니다.

      그가 실패했던 원인을 그는 이렇게 솔직히 밝히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명석하고 성공한 비만인이었던 나는 몇 년 동안이나 세 가지 본능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로지 돈을 좇고 안전함을 얻고자 권력을 원했으며 섹스할 기회를 찾아다녔다. 본능에 휘둘려 불어난 몸무게에 고통 받았고, 늘 화가 난 채로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면 살았다.”

      우리 신앙인은 그가 ‘삼구(三仇)’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연구한 결과대로 더 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바로 세포 내에서 발전소 역할을 하는 기관인 ‘미토콘드리아’를 통해서입니다. 미토콘드리아는 진화론적으로 따지지만 가장 초기의 박테리아와 같은 생명체입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에서 생존을 위한 세 가지 욕구를 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미토콘드리아는 신경계를 장악해 지능과 관계없이 생명체라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 행위에 무의식적으로 집중하도록 만든다. 일명 ‘세 가지 F’라고 불리는 이 행위는 바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Fear: 무언가 생존에 위협을 가할 때 도망치거나 숨거나 맞서 싸우도록 만드는 것), 먹는 것(Feed: 굶어 죽지 않고 앞서 언급된 F, 즉 두려움을 느끼는 행위를 잘 수행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섭취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F는 종족 번식에 필요한 행위(Fuck)를 의미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좇는 권력, 돈, 섹스 이 세 가지가 바로 미토콘드리아의 명령에 따라 집착하게 되는 가치다. 권력은 결국 일정 수준이상의 안정을 보장해주므로 권력이 있으면 두려운 대상에게서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 또 돈이 있다는 것은 항상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매력적인 외모는 종족 번식을 위해 자신의 짝을 찾을 확률이 높아짐을 뜻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이라 여긴 이런 것들이 고작 박테리아가 시킨 일이라니 씁쓸하지만, 이처럼 우리 몸이 ‘세 가자 F’에 대한 본능을 가장 우선시하고 중요시하도록 설계된 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무엇이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줄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이 본능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본능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이 세 가지 본능을 지키기 위해 1초에 수백만 번의 신호를 인간에게 전달한다고 합니다. 1,000조에 달하는 개수의 미토콘드리아가 전부 위의 세 가지 행동을 좇을 때, 의식을 갖춘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모든 시대마다 그 부르는 이름이 달랐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호칭은 ‘에고(Ego)’, 즉 ‘자아’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은 물론이요 다른 450명의 걸출한 인물들의 성공비결이 이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 향상을 최우선시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이들의 답변이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정의하는 일반적인 성공 공식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이들 중 그 누구도 돈, 권력, 매력적인 외모를 성공의 열쇠로 언급하지 않았다.”

      저자는 성공은 이 자아의 욕구와 싸워 그 욕구를 이길 수 있을 때 오는 행복의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성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이겨 행복해져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평화와 평온을 얻기 위해 명상과 호흡법을 수행하는 이들 대부분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고 답했다. 큰 변화를 불러오는 이들은 자신의 평화와 행복을 최우선시하고 있었다. 결국 얼마나 더 영리해지고 빨라질 수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행복하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참조: ‘최강의 인생; 들어가며’, 데이브 아스프리, 비지니스북]

      김대건 신부님도, 예수의 데레사 성녀도, 모든 성인 성녀들도 하나같이 ‘삼구(세속[돈]-육신[성욕]-마귀[권력])’와의 싸움을 강조했습니다. 이전에 세례를 받기 위해 꼭 외워야 했던 천주교 요리문답 에서도 “179 문 :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견진성사의 목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230 문 :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라며 세례 받으면 바로 삼구와의 싸움을 위해 성령을 받는 견진의 길을 걸어야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비자 교리 때 이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데이브 아스프리처럼 세속에 있는 사람들이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발견해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생 성공의 비결은 자아의 욕구를 이기는데 있습니다. 자아의 욕구가 세속-육신-마귀, 삼구입니다. 삼구를 이기는 방법은 성사생활을 포함하는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기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님만이 삼구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루카복음에서 설명하신 예수님의 세 가지 행복과 불행선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루카 6,20-26 참조).

      우선 가난해집니다. 그러나 그 가난이 세속을 이기는 능력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곧 행복의 길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또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꺾으려면 배고플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또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박에 없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욕을 이기시기 위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권력욕을 이기기 위해 나의 교만을 꺾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또 그 반대로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교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사실 기뻐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높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슬퍼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낮아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라고 하십니다.

      루카복음의 행복선언은 정확히 삼구를 이겨야 행복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웃으려면 지금 슬프게 만드는 자아의 욕구를 버려야합니다. 그런 것 안 채워져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을 키워야합니다. 그러면 더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매 순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그 기술을 익힌 사람들만 참 행복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신문은 발행 부수에 따른 구독료가 있고, 광고료가 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구독료만으로는 운영이 쉽지 않을 겁니다. 신문을 믿고 광고를 내는 광고주가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분은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분은 전화로 인사하고 있습니다. 광고는 의당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업을 알리는 겁니다. 공익광고가 있어서 직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직원이 대답하였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을 사랑하는 독자가 있습니다. 매년 자신의 사업체를 광고하지 않고, 광고료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광고를 내고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광고를 내주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세상의 일에도, 하느님의 일에도 성실하신 분입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에 도움을 주는 분이 또 있습니다. 아무런 보수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기사와 사진을 보내 주시는 명예 기자입니다. 행사의 내용과 알맞은 사진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넓은 미국에서 기사를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남미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은 선교지의 일을 재미있게 보내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을 소개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소중한 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소중한 것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 소중한 것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는 책의 내용이 좋았습니다. 80을 바라보는 어르신은 10년 넘게 내면의 삶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미주 지역의 사정에 맞는 강론을 보내 주시는 신부님도 계십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은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분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분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빛과 어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하면 편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피부색과 지역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철학과 사상은 그렇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마니교도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편을 가르고, 구분하면 이해하기 쉽고, 적과 우군을 구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단순히 이분법으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를 가르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에게는 하느님의 위로와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부유한 이에게는 소유를 넘어 존재의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소유를 넘어 존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부유함도, 가난함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받은 이도 할례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타인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예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행복하길

 -반영억신부-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 하여라.’그래서 젊은이는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머리 돈 여자!’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골로3,9-10). 참된 행복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을 차지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에게서 얻으려 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참 행복 선언, 불행 선언

-송영진신부-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에 있는 ‘참 행복 선언’은,
단순한 ‘행복론’이 아니라(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고,
충실한 신앙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복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 행복 선언’은 세속에서 말하는 ‘행복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을 뜻합니다(루카 16,13).
‘부유한 사람들’은 재물에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에게서 받는 위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 말씀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이 가장 유명합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4-25).”
이 말씀의 뜻은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재물을 움켜쥐고서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기만 한다면...)

(재물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또 어떤 식으로든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마음이 재물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불편하게 느끼지는 않더라도 예수님 말씀들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또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재물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면 살아갈 수도 없고,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재물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탁상공론’인 것만 같다.”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실천할 수도 없는 일들을 실천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일까?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신앙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 6,21ㄱ).”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루카 6,25ㄱ).”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루카 9,12-17), 만일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누구라도, “나는 지금 배가 불러서 빵을 먹지 않겠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빵을 거절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기적의 빵’을 못 먹었을 것입니다.
(안 주셔서 못 먹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 먹어서 못 먹은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인데, 안 먹겠다고 하면 억지로 성체를 먹이지는 않습니다.
능동적으로 받아먹으려고 하는 사람만이 성체를 받아먹게 됩니다.
(혹시라도 마음속으로 먹기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성체를 받아먹었다면?
그것은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입니다.)

‘굶주림’과 ‘배부름’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예수님 말씀은 단순히 ‘먹는 일’에 관한 말씀만은 아니고,
은총을 받는 일 전반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은총은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만일에 세속적인 어떤 것 때문에 배가 부른 상태여서 은총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또는 은총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은총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자기가 거부해서 못 받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ㄴ).”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루카 6,25ㄴ).”

‘지금 웃는 사람들’은 세속의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는 사람들’은 ‘회개하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슬퍼하면서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의 쾌락에 빠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2-23).”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이 말씀에서 사도행전에 있는 헤로데의 일이 바로 연상됩니다.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1-23).”
세속의 찬사에 취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라는 점 때문에도 멸망을 향해서 가는 자들이지만,
세속의 헛된 명예만 추구한다는 점 때문에도 멸망을 향해서 가는 자들입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박해와 고난을 겪어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지금 겪는 미움, 추방, 모욕, 중상 등이 기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일들을 기쁨으로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사도 5,41).  


하늘시민의 꿈

-이종훈신부-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제자들은 스승을 따르느라 집과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려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을 부르신 예수님이 먼저 그러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하게 되셨다.

 

예수님의 명령과 당부가 없어도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 예수님도 행복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속적으로는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집도 가정도 없고 힘도 부도 명예도 지니지 않으셨다.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가난하셨다. 무덤에 누워있는 사람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셨다.

 

그분의 행복은 저 위 하늘에 있었다. 그 전에 저 하늘에서 사셨던 것처럼 여기 세상에서 그렇게 사셨다. 여기에서 찬란한 것들이 저기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죽음으로 그 광채를 모두 다 잃어버린다. 여기 것은 저기로 하나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려고 자신과 함께 땅 속에 묻었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결국 모두 남의 것이 돼버렸다.

 

무덤에는 썩은 육체만 있다. 거기서 행복은 조금도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여기서 이미 죽었고 저기서 다시 새롭게 태어났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그러니 위에 있는 것만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아직 그 시간이 오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이미 여기서는 죽었다. 그 대신 저기서 나의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콜로 3,1-3).

 

무덤에서 행복을 생각할 수 없고, 쓰레기처럼 내다버린 탐욕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쓰레기더미를 뒤적거리곤 한다. 그것들이 나를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자꾸 그런 바보짓을 한다. 땅의 것은 잊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자. 거기에 참되고 영원한 행복이 있다.

 

예수님, 하늘에 계신 분이 땅에 잠시 내려오셨으니 여기에 주님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늘에 다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하늘시민으로 살기를 바라지만 내다버린 것들의 미련이 남아있습니다. 위의 것만 생각하려하지만 보이지 않으니 자꾸 의심이 생깁니다. 믿음이 부족하니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늘시민의 삶을 더 갈망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신다. 루카는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 이것은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죄에서 가난한 사람,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 세상 우두머리에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요한 14,30 참조).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처럼(2코린 8,9 참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을 요약한다면, “우리가 몸과 마음, 모든 힘을 다하여 또 가진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살이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에 불행하고 바보스럽게 보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보상받지 못한 것은 영원으로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현세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과 세상의 행복을 놓고 그 마음에 어떠한 순서로 정리되어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다면 모든 것은 잘 되어있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하느님께나 인간에게나 제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 그리고 우는 것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울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울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유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세상의 일로 차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일에 즉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삶 때문에 결정적으로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에 나오는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하며,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보듯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선행을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행복한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 21)

-한상우신부-

행복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날에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에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위로하여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의
참된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울음과
통곡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바꾸어놓으십니다.

우리의 울음을
웃음과 기쁨이
되게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의
모든 역사를
이끌고가십니다.

행복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행복은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어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후 군중들 틈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치유도 해 주십니다. 그러시고는 제자들을 향해 참행복을 선언하시네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물질 숭배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위안이 되기도 하고 또 도전이 되기도 하는 말씀이지요. 혹 잉여 자산이 넘치는 이라면 에둘러 마음의 가난, 영의 가난으로 뭉뚱그려 이해하고 싶을 수도 있고, 혹 실제로 가난하기는 한데 그게 왜 복인지 모르겠을 만큼 가난이 진절머리 나는 사람이라면 반감도 들기도 하는 말씀일 겁니다.

이 행복 선언에 대해 묵상하고 연구한 영성가, 신학자들의 주해와 풀이는 차고 넘칩니다만, 이 말씀의 의미를 진실로 진실로 깨닫는 이는 사실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가난과, 소유와는 별개의 가치인 행복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만이 알아듣고 동의할 수 있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은총을 진짜로 체험한 이는 대개 감사와 사랑 가득한 침묵으로 들어가 소리 없는 언어로 말을 하기에, 어쩌면 이 행복은 아무에게나 알아듣도록 허용되지 않은 신비의 영역이기도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가난한 이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는 말씀처럼, 세속의 유형 무형적 재물로 빼곡한 상태에서 마음은 온통 그곳에 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재물이 들어차지 않은 빈 자리 만큼이 곧 하느님의 자리가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어느 쪽이 먼저인지가 중요합니다. 욕심을 부려도 부려도 재물을 모으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빈 자리가 생겨 버린 이들의 박탈감 가득한 가난과, 먼저 하느님을 위해 빈 자리를 마련해 떼어놓고 남은 곳을 생존을 위한 소박한 재물로 채우는 이들의 가난은 외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일지라도 내적으로는 차이가 상당하지요.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참행복의 가난은 아무래도 후자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옛 인간과 새 인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속적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혔던 옛 인간이 이미 죽고, "하느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콜로 3,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인간은 지상에 살되 지상의 질서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그에게는 물질과 권력이라는 중력이 미치지 않거나, 혹 방향성에 별 영향이 되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자극일 뿐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께서 차지하실 빈 자리를 먼저 마련해 두고 남은 자리에 재물을 두지만 결코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손에 달려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참행복 선언의 포문을 "가난"으로 여신 까닭은 이어지는 굶주림, 울음, 미움과 박해, 모욕과 중상 등이 모두 가난의 범주로 묶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충만함으로 넘어가는 비움의 관문이고, 새 생명을 얻는 죽음의 문지방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다면 가난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입니다.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 세상이 비록 가난을 악이라고 멸시할지라도, 가난은 세상이 잃어버린 하느님의 자리를 되찾는 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하느님을 소유한 이들의 가난 덕분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아직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가난은 나누고 양보하고 희사하면서 타인의 빈 곳을 채워주려는 선한 이들의 손끝을 타고 옮아가 행복의 자취를 전염시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를 향해 내달리는 이 세상에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공존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매료되어 가난을 선택하는 이들 역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집니다. 이 행복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설명할 수 있다면 아직 정점은 아닌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이 세상에서 부를 탐하고 누리는 사람은 왜 불행할까요? 이 지상 나라에서는 나름대로의 행복을 누리면서 위로를 받겠지만, 안타깝게도 참행복인 하느님 나라는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가난하십니까?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다만 먼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은 몫을 떼어놓는 훈련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좀 넉넉하십니까?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내가 좀 넉넉하다 느끼시면 얼른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나누십시오. 그리하여 항상 조금 아쉽다 할 정도로 만든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를 얻는 비법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족과 행복의 관계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6274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13일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