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2019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Whoever does not carry his own cross
and come after me
cannot be my discipl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면 누가 그분의 뜻을 깨닫겠냐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 달라고 옥중에서 부탁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전에 아들을 너무나 아낀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시집온 며느리가 아들을 빼앗아 간 것 같아서 며느리를 미워하였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괴롭힘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아들은 어머니를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럴 수 있느냐며 자신을 떠난 아들을 원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과 ‘소유’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위 어머니가 한 것은 ‘소유’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물건은 소유하는 것이고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려 하니 좋은 결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오히려 보내 주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셨습니다. 아드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된다고 떼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하느님께 봉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표현 방법입니다. 사랑하면 흘려보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은 ‘봉헌하라’는 뜻입니다. 봉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잃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투자의 귀재가 자신에게 적은 돈을 맡기면 크게 불려 주겠다고 말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적은 돈을 아끼지 않고 과감히 그에게 내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더 큰 돈을 위해서 적은 돈이라도 내어놓아야 하듯이, 더 큰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려면 다른 모든 것을 내어놓고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드님까지 내어놓으셨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 내 인생의 모든 것
-한민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참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은, 예수님께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향한 길이며, 제자들에게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부모와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단순히 ‘양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재화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맹목적으로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말씀에는 ‘전적인 투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그것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삶을 그분께 투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에서 과연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걸 만큼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는 사람이며, 모든 것의 기준을 그분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의 예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필레 9)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셨습니다. 사도의 삶은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했지만, 사실 그 만남은 그가 박해하던 교회 공동체와의 만남을 통해 미리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필리 3,7-9 참조) 그분께는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도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의 화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단순히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과 사랑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환상은 금물입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온갖 유혹들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으며, 우리 마음의 눈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두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임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고 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여정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아는 여정에서 어디쯤 와 있습니까? 그분은 내 인생에서 어떤 분이십니까?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따르느냐에 따라 갈릴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장재봉신부-
루카 사도는 오늘 그곳에는 예수님을 좇는 거대한 무리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덕이었을 텐데요. 그곳에 온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구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문으로 들었던 놀라운 기적을 기대하며 숨죽여 주님을 주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은 콩밭에 계신 듯 보입니다. 뭔가 신기하고 멋진 일을 기대하고 몰려든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계시니까요.
그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의 마음이 거북했을 겁니다. 하물며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이나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도 죄다 당신 제자의 자격이 없다는 말씀에 도대체 뭔 얘긴지…… 어안이 벙벙한 채 걸음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받아들이기 힘든 폭탄선언에 많은 이들이 실망했을 테니까요. 어리둥절하고 망연자실한 마음은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아연실색하여 주님을 말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시는지, 따지고 싶었을 것도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르심이 결코 가족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냉혈한이 되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의 심지는 당신 제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의 우선순위를 밝힌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어리둥절해 하거나 뜨악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당신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저 막연하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고 생각만 할 뿐 주님을 따를 생각은 전혀 없는 ‘남’처럼 지내는 것은 아닌지 캐묻고 싶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의 삶이 법의 테두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교회의 전례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거나 교리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주님을 잘, 제대로 따라가는 줄 착각하니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정녕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의 최고봉인 양 여기는 오해가 만연하니 말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네 번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에 비해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스무 번이나 하셨다고 밝힙니다. 이야말로 주님을 아는 것을 넘어서 제대로 된 구원자임에 감격할 때에만 비로소 당신을 제대로 따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을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전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보잘것없음에만 주목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비웃었고 하느님의 자비심을 폄하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내리신 이스라엘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냉정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 15,8)
하느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바리사이들은 머리로는 하느님을 열심히 연구했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했기에 주님과 어긋난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찔림 받기 원합니다. 그분을 향한 사랑은 그분 곁에서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향한 믿음은 그분의 걸음을 좇아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공식은 무조건적인 따름으로만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따름이 없는 믿음은 공허한 외침이며 허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식물들은 새잎을 계속해서 내기 위해서 오로지 빛을 향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식물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데 어째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빛이신 주님을 향해 돌아서 따르는 것이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눈 부신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말입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아주 분명한 믿음의 선을 봅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지적해 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곧 따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감격하여 오직 그분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귀한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기에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만 자신이 가진 것이 많아서, 그 가진 것에 연연한다면 결코 주님을 향할 수도 좇을 수도 없습니다.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를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주님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선 사람들은 세상의 계산에 약삭빠른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손해이며 피해로 계산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수긍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당장의 손해에 마음이 기울었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이익이라고 결단내렸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는 삶이라 해서 주님의 나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 안에 품은 바알,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마음을 깨부수지 못한다면 슬퍼하며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믿음은 세상의 것을 뒤로하고 잘라내는 외로움의 결단인 이유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말씀을 특정한 사람에게만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군중”에게 똑같이 이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만천하에 공개하십니다.
이제 그분의 제자인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외칠 차례입니다. 주님의 보편적인 공정하심을 널리 알리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만천하에 전해야 합니다.
이 사명 앞에서 우리는 숱한 갈림길을 만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혼란해 하지 맙시다. 망설이지 맙시다. 주님의 복음을 듣고 천국을 향한 길에 들어섰으니 돌아서지도 맙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그분을 향한 사랑이 매일 매일 불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청합니다.

예수님 제자 됨의 심각성
박일 신부-
제자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루 카 13,24 참조). 또 하늘나라의 잔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 은 초대하는 목소리에 즉시 응답하고 따라야 합니다. 때문 에 새로 구입한 밭을 살펴보는 것도 포기하고, 새로 산 겨릿 소를 부려보는 것도 중단하며, 아내를 맞이하는 것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루카 14,18-20 참조).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 제자 되는 첫걸음은 일단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의 뒤를 따르고, 그분의 말을 듣는 것입 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분을 뒤따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 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든 것 위에 모셔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을 그분 뒤에 놓아야 합 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요구를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 고 모순적이며 도전적인 단어를 사용하시어 요약하십니다. 바로 ‘미워하다’, ‘증오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참으 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 존재의 탄 생지요, 성장의 못자리이며, 인생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들 인 가족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라’ 고 하십니다. 당신이야말로 사랑해야 할 단 한 분이시며, 우리들의 단 하나뿐인 동반자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라
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미워하라’는 뜻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뒤에 놓으라는 뜻 이요, 둘째 자리에 놓으라는 뜻입니다. 그 어떠한 경우라도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예외적으로,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똑 같을 수 없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분 외에 다른 모든 것들 은 그림자에 불과한 그런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 안에만 구 원이 있습니다(사도 4,12 참조).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 면,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명예도 잃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남긴 그 어떠한 것 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지워지는 운명도 받아들여 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은 본질적으 로 사람들이 대단히 거북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 는 가운데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수행할 준비가 되 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쉬운 길이 아니니,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는 사 람, 다른 임금과 전쟁하게 된 임금의 예를 들면서, 일시적 인 열광과 제 나름의 미래를 그리며 섣불리 따라나서지 말 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자기 전부를 걸어 완전히 헌신하는 자세로, 죽을 각오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 결국에는 참 평 화와 광을 얻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계산을 잘하자
-박덕수신부-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이며 성모 탄생 축일입니다. 절기로는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이 며 추석이 가까웠습니다. 올해는 절기가 빠른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원죄 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이십니다. 원죄 없는 분이 태어난다는 것은 인 류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좋으신 어머니의 생신은 우리들의 축일이 기에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 다. ‘돈이 많이 드는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 냐?’ 또 ‘어떤 임금이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 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곰곰이 계산해 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농부의 고백입니다. ‘제가 사는 곳 일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주변 농부들은 모두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땅은 석유 매장지 바로 바깥에서 끝나기 때문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고 저는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벼락부자가 된 농부들은 도시로 떠났지만 저는 40년이 넘게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도시로 간 그 사람들은 한 가정도 예외 없이 이혼을 했고 자녀들은 타락했습니 다. 그러나 저의 가정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면서 굳은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또 저희 자녀들은 하 느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저희만 불행한 줄 알았는데 저희가 가장 복받은 가 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계산을 잘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큰 것을 놓친다는 소탐대실(小貪大 失)에 빠질 때도 많습니다. 가장 큰 지혜는, 지금 내 앞에 이루어지는 나쁜 현실, 어려운 일들도 주님께서 섭리하신다고 굳게 믿고 잘 받아들이면 오히려 훗날 주님의 보살핌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 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힘이 드는 건 인생의 오르막길을 가느라 그런 것이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힘이 들지 않으면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느라 그런 것이다.”
성모님 탄생 축일과 한가위를 기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계산은 했는데...!
박순호신부-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지만 저는 나름 계산이 빠르고 꼼꼼한 사람입 니다. 예전에는 확실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닌 것 같은 생 각도 듭니다. 갈수록 아무 계획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늘기 도 합니다. 술에 취하면 더 잘 그럽니다. “난 오늘만 산다.”는 영화의 대사처럼 그거대로 폼 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만 이렇게 생 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자의 인생에 중요한 사건들이 하나씩 더해 갈수록 더 잘하기 위해 계획하고 계산하는 것이 그만두고 싶은 무거움 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사람은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100% 없다고는 못해도 자기 삶을 무계획으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 삶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인생을 버려두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본능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편적인 계획은 빼더라도 인생 전체가 걸린 부분을 처음으로 계획한 것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입니다. 나름 그렇다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나도 신부님이 되어야겠다 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저런 신부님이 되어야겠다고 계산을 하긴 했는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 지 않은 것이 재미있고 신나는 것들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한눈을 팔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거 기에다 내 계산이 틀린지 맞는지 검토하지도 못하고 중요한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 다. 다시 말하면 어디까지 계산해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계산을 끝내버린 것입니다. 공사 경 비가 예상보다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니 기운이 빠집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성당에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경비는 생각을 했는데 신학교에 갈 공부 경비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놀았는데 계획이 많이 틀어졌습니다. 너무 어려서 잘 모르고 계산한 것이니 취소하기로 하고 다시 계산을 하여 계획을 세웁니다. 지금 신부가 되어 주보 강론을 쓰고 있으니 그다음에는 잘 된 것 같지만 내용만 다르지 마찬가 지입니다. 다 살펴 계산한 줄 알았는데 놓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변수가 되어 공사 경비를 마구 올려 버립니다. 저는 이 탑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물 질적 세상의 온갖 유혹들 그 경우의 수를 모르고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강도가 어느 정도로 강하게 올지는 계산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수정하고 계산하고 그러면 또 몰랐던 변수가 생기고 이제는 너무 버거워서 모든 계획을 접고 싶은 마음이 눈앞에서 아른거립니다. 신 자분들도 경제적일지 정신적일지 모르지만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인력은 안되니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길 청합니다. 주님, 아직은 공사를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유가 있으시면 대출 부탁드립니다. 계산 은 했는데 많이 모자랍니다. 비웃음을 당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소유권은 주님께 드리겠습니 다. 완성할 수 있도록 마무리를 부탁드립니다. 저라는 탑을 당신이 마저 세우시고 당신이 소유 하시기를 바라오니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예수님이 제자 되는 길
-황봉철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저는 두 가지로 묵상합니다.
그 첫 번째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즉 결코 버리지 말고 예수님처럼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탑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처럼 곰곰이, 또 전쟁을 치르고자 하는 임금처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혈연(부모 형제자매의 인연)이란 정말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지고 가기 힘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어,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염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요한 19,25-27)
그러니까 우리도 그 혈연을 끝까지 잘 지고 가야 하겠지요?
그것이 나의 십자가라고 생각한다면? 물론 그 혈연보다도 더 우선하는 것이 신연(信緣), 즉 믿음의 연인데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자신의 목숨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목숨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라면 예수님처럼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내가 버려야 할 소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 예로 우리는 오늘 제2독서인 필레몬서(9-17)를 묵상하게 됩니다.
1장으로만 되어있는 이 서간의 내용은 오네시모라는 종이 현재 옥중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수발을 들고 있는데,
그의 주인인 필레몬에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정중히, 그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의 편지로 보입니다.
내 생각을 접고 먼저 상대방의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입니다.
즉 나의 욕심을 버리고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역지사지의 마음!
제1독서인 지혜서(9,13-18)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서 지혜로 구원을 받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잘 따르기 위해서는 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여 그것을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이고,
내가 버려야 할 소유가 무엇인지를 잘 구별하여(욕심과 역지사지) 그것을 또한 버릴 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려는 사람은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우리가 당연히 사랑하는 대상들입니다.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에 미워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뜻이고, 미워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라는 혈연(血緣)과 자기 자신(自身)에게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준 삶의 방식이었고, 초기신앙인들도 그런 정신으로 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초기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가족이나 당신 자신에게 집착하셨으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초기신앙인들이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였으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하며,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을 위해 큰 희생도 각오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망대(望臺)를 짓는 사람이 성공하려면, 계획성 있게 행동한다는 말과, 전쟁터에 나가는 임금은 치밀한 준비를 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일시적 기분이나 충동으로 처신(處身)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하는 헌신(獻身)의 자세(姿勢)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인간이 지닌 인연(因緣)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인연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밀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지만, 초기그리스도신앙인들이 이미 하던 실천을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하던 실천을 기록하여 남긴 문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가족을 당연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만 집착하면, 그는 큰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부모에게만 집착하는 아동(兒童)은 학교에 가도 적응하지 못합니다. 청년(靑年)이 되어서도 직업인으로 적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합니다.「창세기」는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창세 2, 24)고 말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자녀, 그리고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모두 불행합니다. 태아(胎兒)가 성숙하고도 모태(母胎)를 떠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모태를 떠나 자기가 살 세상을 만나고, 거기서 새로운 인연(因緣)들을 만들면서 그 생명은 자라고 성숙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가 10, 29-37)를 우리는 압니다. 길에서 강도(强盜)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본, 사제(司祭)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현재 사제로서 또 레위로서 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진 인연들을 잠시 잊고,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 곧 강도 맞은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이미 가진 인연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인연에 몰두합니다. 과거의 인연에만 집착하면, 인간으로서 성숙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기 앞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에게 용서를 선포한 것은 하느님이 히시는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베짜다 못가의 병든 이를 고쳐놓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과거의 인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인연에 충실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나 한 사람의 성공과 행복을 쟁취하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기(利己)적 행복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가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하는 일입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의 생존을 베푸신 분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노력할 때,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 바다와 같이 출렁입니다.
가족과의 인연은 좋은 것이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 베풀어진 인연들이고 또한 버팀목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출렁이면, 휩쓸려 버릴 수도 있는 버팀목들입니다. 부모님도 떠나가시고, 선배들도 떠나고, 친구들도 떠나갑니다. 어느 날 나도 떠나면서 내 생존을 위해 버티어 주던 모든 것이 나와 헤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바다와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일이 당신 안에 파도가 되어 출렁이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며, 바다이신 하느님이 당신 안에 파도를 일으키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서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를 버티어 주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例話)는 우리가 소중히 생각해야 할 인연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생명과의 인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행동하고,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가 버리고 떠날 것에 집착하며 삽니다. 가족과의 인연에 갇히고, 재물에 발목을 잡혀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우물만 알지,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만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미 가진 인연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작은 파도가 되어 출렁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리는 작은 파도들이 우리 주변에 출렁이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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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품없어 보이는 형태가 된 이유는 이 나무가 자라는 로키산맥의 지형 때문입니다. 로키산맥의 해발 3,000~3,500m 지점은 바람이 매섭고 눈보라가 심하며 강수량도 아주 적습니다. 생명체가 제대로 살 수 업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다 보니 키가 작은 볼품없이 휘어진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이겨낸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귀한 나무가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시련 등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귀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고 직접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다면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악과 타협을 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져서도 안 됩니다.
탑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합니다.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테니까요. 우리는 주님을 선택하면서 영광스럽고 흠 없는 삶을 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탑의 기초만 놓은 채 포기하는 사람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적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외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더 많은 적은 재물욕, 쾌락에 대한 욕망, 이기심, 남을 쉽게 판단하는 닫힌 마음 등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적군을 나 혼자의 힘으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꼼꼼히 따져보면 승리를 위해 당연히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매우 당황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했던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경우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더욱더’ 등의 비교급 대신 사용했던 말이 ‘미워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서 살아갈 때, 자신의 십자가를 무겁게 느끼지 않고 기쁘게 짊어질 수 있습니다.


종종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 사제서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어떻게 상담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들어주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최대한 많이 들어주려고 했지만, 이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십시오. 누군가에게 어려운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 사람이 “나의 경우는 이러했었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식으로 말했을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했을 때 정말로 큰 도움이 됩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특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는 것입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상대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상대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만 기억하면 분명히 상대방의 진정한 편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웃의 편이 되어주는 모습을 주님께서 먼저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웃의 편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편이 되어주십시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전삼용신부-
1940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더불어 유태인 학대를 피해 수많은 유태인들이 리투아니아로 몰려듭니다. 구소련은 리투아니아내의 각국 대사, 영사관의 폐쇄 명령을 내리지만 마지막 일본 영사관만은 문을 닫지 않고, 피란민들은 마지막 희망을 일본영사관에 걸게 됩니다.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 스기하라 지우네는 일본외무성에 문서를 보내 유태인에 대한 비자발급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그의 3번이나 반복되는 요청을 묵살합니다. 일본 외무성은 대외적으로는 유태인 난민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이라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 독일과 협력관계였던 탓에 비자 발급 자격 조건을 다른 난민들에 비해 까다롭게 함으로써 사실상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입니다.
영사관을 둘러싼 수많은 유태인들을 보며 스기하라는 결국 결심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일이 불러올 파장과 다가올 파면, 불명예, 경제적 궁핍, 가족의 고통이 눈에 선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 판단합니다.
그는 자격조건을 크게 완화하여 무자격에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비자를 발급합니다. 물론 일본외무성의 허락 없이 발행하는 것으로 당연히 문서위조이나 그런 것쯤 상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위조라 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940년 7월말부터 9월 초까지 매일 비자를 발급하였으며 막바지에는 거의 하루 300장 정도를 발급합니다. 거의 한 달에 발행하는 분량을 하루에 발급했다 합니다. 2000번대 이후로는 연번호도 적지 않습니다. 영사관이 폐쇄될 때 까지 연번호가 지정되지 않은 비자까지 포함하여 수천 장 이상 발행되었으리라 보고, 비자 한 장으로 한 가족 전체의 입국이 허가됐던 것으로 보면 대략 6천명 이상의 유태인이 비자를 얻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는 영사관이 폐쇄된 날 리투아니아를 떠나기 위한 열차 안에서까지 비자를 발급합니다. 이후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이 발발해 리투아니아는 독일군의 수중으로 들어가며 이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은 20만 명이상입니다.
리투아니아에서 탈출한 스기하라는 1941년 체코영사관서 근무하였으며 소련의 체코 점령 때 체포되어 수감생활 후 일본으로 송환됩니다. 이후 자국에서 1947년 외무성으로부터 면직됩니다. 전쟁 후 이스라엘 측에서 일본외무성에게 요청한 그의 행방에 대하여 “‘스기하라’라는 외교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실로 미루어 괘씸죄가 적용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이후 그는 1986년 7월 31일 영면에 들기까지 일본에서 전구를 팔면서 소박하게 여생을 보냈습니다. 스기하라의 이야기가 알려졌을 때, 기자 한 사람이 그의 아들을 찾아가서 외교관으로서 출세의 길을 버린 아버지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가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셨을 때 아버지는 옳은 일을 택했으니까요.”
스기하라는 동방정교회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조: ‘생명의 비자: 양심의 법을 존중한 스기하라 지우네’, 아시아뉴스]
하느님 나라는 소유욕을 버린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마치 층층계단식 논과 같아서 내가 받은 것을 흘려보내주지 않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되어있습니다. 세포가 각자가 가진 것을 옆의 세포에게 전달해주지 않으면 함께 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어줄 줄 모르면 암세포가 됩니다. 본인은 소유하며 살고 싶겠지만 결국 본인도 죽고 이웃도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남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줄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함으로써 나에게 닥쳐올 가난과 고독, 멸시 등의 어려움이 두렵기 때문에 내어주지 못하게 됩니다. 내어주는 만큼 생기는 결핍에 대한 불안함이 모아들이게만 하는 것입니다. 내어주어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결핍을 인내할 능력부터 키워야합니다.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친구가 없어도 행복하고 친구가 있어도 행복하며 부유해도 행복하고 부족해도 행복할 줄 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할 때 힘들이지 않고 내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힘들면 아무 것도 내어주기 싫습니다. 저도 처음 유학 가서 말을 배울 때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소유욕이 엄청 증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마음을 물건으로라도 채우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인도와 아프리카 친구와 함께 같은 방을 썼는데, 그들 특유의 냄새는 참아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정말 네 것 내 것의 분별이 없었습니다. 저의 것을 마구 가져다가 쓰고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뭐 그런 것들이 없다고 특별히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별이 없는 그 친구들의 행동에 속이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물건을 찾아서 다시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들보다 더 잘 산다는 것으로라도 만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미워하라는 말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야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으려면 다른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합니다.
전북 전주의 한 교회에서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란 푯말을 붙인 상자를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 안에 그 같은 물품들을 넣게 했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내용물이 수집됐습니다. 고급 양주에서부터 외설테이프, 추잡한 액세서리, 불량서적 등이 쌓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이것들을 매월 정기적으로 불에 태워버리고 각자 새 생활을 다짐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경건하고 건전한 가정생활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운동 덕분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각자의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통”을 만들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통”도 만들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행복에 빠져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도 내어주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들에 내 것을 넣으면 죄가 사라지고 광야라는 곳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40일을 버티셨습니다. 이 능력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가난과 고독과 지루함, 겉보기는 고통스럽겠지만 친해지면 평화로워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적게 가질수록 가진 것에 더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기도하기 위해 성체 앞에서 밀려오는 지루함과 싸워봅시다. 혹은 집에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성경을 1시간만이라도 필사해봅시다. 그러면 사람들과 왁자지껄 노는 것보다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시간이든, 재물이든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딱 15가지의 물건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천 가지의 물건을 쌓아놓고 삽니다.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부족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아무 오락거리가 없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참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은 교통이 혼잡하고, 주차비가 비싸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좋다고 합니다. 저도 기차와 지하철을 이용해서 시내에 나갔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시간이 남아서 아는 형제님의 소개로 ‘Stardust’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30분가량 기다려서 맛있는 버거를 먹었습니다. 식당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특이한 점 때문에 형제님은 저를 그 식당으로 안내했던 것 같습니다. 종업원들은 모두 뮤지컬 배우를 지망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음식을 주문받고 자리를 안내하지만 멋진 노래를 춤과 함께 불러주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지만 언젠가 뮤지컬 무대에서 노래할 젊은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찼습니다. 주인은 젊은이들을 미래의 멋진 뮤지컬 배우로 소개하였습니다. 손님들도 젊은이들의 노래에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작년에도 이곳에서 일하던 젊은이 중에 20명이 뮤지컬 무대에 섰다고 합니다. 주인은 종업원들의 꿈과 열정을 보았습니다. 손님은 종업원들의 열창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종업원들은 식당이라는 자리에 서 있지만 이상은 멋진 뮤지컬 무대를 향해 날고 있었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Stardust’를 방문하면 좋겠습니다. 음식도 먹고, 젊은이들의 꿈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평강공주는 바보라고 불리던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의 가슴에 있던 열정을 보았습니다. 온달의 타고난 성실함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을 선택한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온달의 가능성을 알아본 평강공주와 평강공주를 믿고 따랐던 온달은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종의 신분이지만 오네시모스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아들로 여겼습니다. 오네시모스는 자신을 종으로 대하지 않고 아들로 여겨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성서는 전하지 않지만 오네시모스는 초대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큰 역할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온 지 보름이 넘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식당의 종업원들처럼 열정과 꿈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왕에 뉴욕에 왔으니 기쁘게 지내려고 합니다. 한국처럼 빠르고 신속한 사회는 아니지만, 이곳의 문화와 제도를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유능한 영업사원은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판매하고, 아프리카에서도 가스난로를 판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능력은 없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일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뉴저지 성 미카엘 성당의 9시 미사이고, 다른 하나는 12시에 있는 롱 아일랜드 한인 성당 40주년 기념미사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기회를 주셨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건 힘과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넘어졌고, 배반했고, 좌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이해하셨고, 용기를 주셨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으로 교회가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입니다. 여러분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버려 길가에 버려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앙이 희망으로 자라나 사랑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며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두번 째 독서인 필레몬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노년기에 접어든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세밀하게 유추할 수 있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젊은 시절, ‘열개의 팔’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펄펄 끓는 혈기와 넘치는 에너지로 온 세상을 뛰어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오로 사도는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마치 경주마 시절을 끝낸 폐마(廢馬)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온몸 여기 저기가 쑤시고 아픕니다. 수시로 닥쳐오는 통증으로 인해, 자면서 몇번이나 깨어 끙끙 앓습니다. 아침이면 안간 힘을 다 써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날씨라도 궂으면 삭신이 부서지는 듯 합니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겨우 운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혹독한 상황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늙고 병든 것도 모자라 투옥된 신세였습니다. 연세 드셨지, 갖은 병고로 괴롭지, 옥에 갇혀있지, 정말이지 바오로 사도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울적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에는 초대 교회 신자들과 동료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 희망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텐데, 마지막 남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쓰신 편지의 수신자는 콜로새 교회의 지도자로 추정되는 필레몬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른 편지와 달리 필레몬에게 쓰신 서한에서는 무척이나 간곡함이 돋보입니다. 필레몬에게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었는데, 꼭 좀 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필레몬의 소유의 종 오네시모스가 어느날 갑자기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극진히 바오로 사도의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음 같아서는 충직한 오네시모스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당시 법이 정하는데로 노예 신분인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바오로 사도의 심정이 참으로 착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분노한 필레몬이 오네시모스를 힘들게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겠습니다. 서한의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은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필레몬서 19절)
아마도 오네시모스는 주인 집에서 도망나오는 과정에서 도피 자금으로 주인 필레몬의 돈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오네시모스가 도망나옴으로 인해 생긴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가 갚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늙은이’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몸’이란 표현까지 구구절절 써가며 필레몬에게 간청하십니다.
노예 오네시모스를 바라보는 노인 바오로 사도의 시선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오네시모스를 사람도 아닌 가축 같은 존재, 자신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소유물, 매매의 대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더 이상 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형제로 바라봤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새로운 인간이요 신앙의 동지, 총애하는 아들로 바라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에 대해 ‘내 심장과 같은 그’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노예 제도를 자연스럽게 바라봤던 당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자세는 놀라움을 넘어 스캔들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날 노예 제도 등과 같은 신분으로 인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다양한 측면에서의 심각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은연 중에 우리 공동체 안에 그런 차별이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론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셨던 측면이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이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국민적 관심사였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틈틈히 시청하며 정말이지 슬펐습니다. 청문회장 한켠을 차지하고 줄줄이 앉아 계셨던 분들, 그들이 보여준 언행 하나 하나는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오만하고 무례한 모습, 파렴치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수많은 우리 어린 청소년들도 보고 있을텐데, 하는 마음에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밉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라는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더군요.
후보자를 앞에 두고 깐죽거리며 우롱하고, 상대를 올가미에 옭아매기 위해 갖은 유치한 언행들을 총동원하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산더미 같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지, 걱정이 되더군요.
그들이 몰염치하게도‘국민이 보고 있습니다!’ 운운할 때는 정말이지 뒷골이 다 땡기더군요. 국민의 대표라고 자처하려면, 품위있고 격조높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이 걸맞게,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겸손하고 진지하게 질문하고 발언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종일관 시정잡배도 그렇게 하지 않을 정도로, 껄렁껄렁·후안무치,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그들이 한 일은 온 국민을 모욕하고, 범 국민적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인 것 뿐이라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정말이지 지도자를 잘 뽑아야겠습니다. 국민들 생각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 지도자, 틈만 나면 버럭 버럭 소리 지르는 지도자, 언행에 품위나 성숙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도자, 비열하고 천박한 지도자를 뽑는 순간, 그 뒤로의 감내해야 할 고통과 부끄러움은 순전히 우리 국민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고집과 소신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특별히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의 쾌유를 기원하고 그 보호자분들에게 인내와 평화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위로와 평화,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접하면서 긴장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누구든지 나에게 오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자기소유를 송두리째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면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성당에 나가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영 딴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보장 받는다고 했는데 귀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말을 씁니다. 속세의 가정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불문에 드는 일을 말합니다. 뜻을 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덕을 닦는 일을 들어 말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모님 품을 떠나갈 때도 ‘출가’라는 말을 합니다. ‘출가’는 소위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집에서 나가는 ‘가출’하고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하였으면 거기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따르기 때문에 이제 그에 대한 그만한 책임이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한 가정의 주체가 되었다면 이제 부모에게 기대거나 무엇을 바라지 말고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뒷받침 해 준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마마보이가 되어 성숙한 인격체로 설 수가 없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이제 놓아 주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보면서 남모르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기대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신경을 안 써 주면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온갖 일에 ‘간섭과 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출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좋은 것임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다른 사람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선택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요한1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하느님을 선택하면 바로 그 선택을 통해서 다시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첫째자리에 놓아야 할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상을 놓고 결정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은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이십니다.
뜻을 품었으면 그에 맞갖은 투신을 해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면 공사를 잘 마칠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임금이 싸움을 해도 먼저 지금 군대의 수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계산하면서 왜 그 좋은 머리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에는 쓰지 않느냐? 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한 투신과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면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따라서 천상을 위해서 유익하다면 나의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죄악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못된 습성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을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그것도 그냥 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쓸데없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소신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면, 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면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인 여러분, 하느님 앞에 적당한 타협이나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의 심성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로는 거미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는 처마 밑과 으슥한 곳에 끈끈한 거미줄을 쳐 놓고서 그 덫에 걸리는 타 곤충들을 잡아먹으며 심지어 동료까지 해치는 무지막지한 해악(害惡)한 놈이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돼! 라는 심보의 소유자입니다.
두 번째로는 : 개미같은 사람입니다. 근면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기도 하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만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필요도 없고 손 벌일 일도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는: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 벌은 이 꽃과 저 꽃을 날아다니면서 꿀을 따면서도 꽃가루 수정을 하여 씨가 잘 맺도록 도와줍니다. 꿀을 모아놓으면 사람이 먹어요. 이웃과 서로 돕고 사는 공생관계를 맺고 산다. 이타주의 적인 사람입니다. 고달프고 힘들지만 보람이 있어요.
예수님을 닮은 삶은 어느 삶인가요? 꿀벌 같은 삶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향을 잘 두어야 하고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철저히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이타주의적인 삶을 충직히 살아야 한다. 하느님광의 관계는 자기 가족과 맺는 관계보다 더 강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소중한 것보다도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이런 사랑이 없이는 기초가 없이 탑을 짓는 것과 같고 군대 없이 전투에 나가는 것과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습관을 버려야 한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기초다.

버림과 따름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은,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도 아니고, 가족을 버리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가족은 미워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미워하다.’ 라는 말은, 우리말 그대로 ‘미워하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이탈, 단절, 초월’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세속적인(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미련, 집착 등을 버려야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고,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티모테오 2서를 보면,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2티모 4,10)” 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 가운데 ‘데마스’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동안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선교 여행을 다니다가 바오로 사도 곁을 떠났습니다.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라는 말은,
단순히 선교사로서 살기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신앙인으로서 살기를 포기하고
세속 생활로 되돌아갔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 곁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서도 떠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신앙생활은 어렵고 힘들고 재미없게만 느껴지는데,
안 믿는 사람들의 세속 생활은 쉽고 편하고 재미있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속에서 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유혹을 물리쳐야만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그런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문을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루카 13,24).>
헤로데의 경우, 그는 이미 죄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가족 때문에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딸이 요구한 대로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사랑하는 딸이 원하는 일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악한 일’을 원할 때 그것을 들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선’을 지향할 때에만 참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가족이 ‘죄와 악’을 향해서 갈 때 함께 가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고,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족은 사랑해야 하지만, 가족의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씀도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또는 지상에서의 인생은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 5,1).”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지상에서의 인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언제든지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누구에게나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거부하고 회피하거나, 기꺼이 받아들여서 짊어지거나,
그것은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일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면,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은 얻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짊어지고 간 사람만이
예수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생애 전체가 십자가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성모님의 응답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성모님의 그 응답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
“끝까지 전력을 다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은 대충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지극한 정성과 열성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생활입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생명을 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면 죽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멸망입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끝까지 가지 못하면 처음부터 안 간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1-33).”
하느님에게 맞서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또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다른 곳은 바라보지 말고,
오로지 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힘들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버림과 추종
-이종훈신부-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주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그분을 모범으로 삼아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그분의 제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소유를 남기지 않고 다 버려야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올바르게 배워 익히기 위해서 제일 먼저 자신의 소유를 버려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제대로 배울 수 없고 제대로 배우지 못하니 깨달음도 없다. 자유와 평화도 없다. 그러면 무엇을 버리나? 자신의 믿음을 버린다. 하느님을 믿는다지만 말뿐이다. 마음 그리고 육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과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믿고 실행한다. 그러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도 같은 죄에서 말이다. 버림은 고사하고 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겉으로 변하는 시늉이나 그렇게 보이기 바라는 것 같다. 아니면 수없이 시도했어도 잘 되지 않으니 언제부터인가 체념하고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내면 깊은 곳에서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변화는 노력이 아니라 버림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무의식에 담겨 있어서 나의 육체에 배어 있는 습관은 어쩌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옳다고 믿는 것과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믿는 모든 것을 버린다.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얻고자 하는 것이 나의 꿈을 이룸이 아니라 나의 완성이고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탑을 완성하고 전쟁하지 않고도 평화를 지키면 좋다(루카 14,28-32). 불완전한 인간성을 완성하고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몸소 실천하여 증언하신 사랑이 진리이고 하느님처럼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고 가르치셨다. 버림, 십자가를 짊, 추종 중에 중심은 십자가를 짊인 것 같다. 물려받은 것과 누군가 내 안에 새겨놓은 그 법칙들을 어떻게 단 번에 모두 내다 버릴 수 있겠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을 방해하는 그것들을 잘 데리고 살아야 한다. 내 안에 새겨진 그 법칙들 혹은 그 목소리는 아마도 이 세상 삶이 끝나는 날에야 사라질 것 같다. 그 때까지 듣기 싫어도 듣고, 싫어도 같이 살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주님 뒤를 따른다.
예수님, 버림이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 목숨을 건 결정일지 모릅니다. 비유적인 죽음이 아니라 실제로 죽기도 하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어차피 때가 되면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게 저의 이 육체입니다. 축복받은 삶은 장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제 삶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아멘.

제자가 되는 조건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참된 지혜”이다. 이 지혜는 지성과도 슬기와도 다른 것이다. 이 지혜는 인간의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고 인간의 혼자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지성과 통찰력의 선물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혜’의 완전한 표현을 그러기에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이시다. 왜냐하면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복음: 루카 14,25-33: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기 포기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헛된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항구한’ 생활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즉 당신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다음 자리’에 두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언제나 가치서열에 있어서도 우리 마음을 봉헌함에 있어서 항상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신이 주님께 얼마를 할애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정말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려할 때에는 항상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 생활을 뒤덮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용기를 잃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계산을 정확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두 비유를 말씀하신다(28-33절). 그러면서 이 비유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태도에 연결하고 계시다.
즉 우리로 하여금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루가 18,24; 12,13-34; 16,1-13 참조).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감정 예를 들면,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막아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두 비유가 주님을 따르는 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잘 계산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고(골로 1,18),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골로 1,15)이라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우상화’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즉 하느님이 제일 첫 자리에 모셔져야 하는데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우상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다.
수도자는 속세를 떠난다. 그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도 그 가치관에 있어 우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고 사는 우리는 항상 주님을 따르는데 잘 계산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에 집착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우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올바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한상우신부-
거센 바람이
나뭇잎을 마구
떨어뜨립니다.
세상 모든 소유는
떨어지는 잎들처럼
분명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하나
버려본 적없는
우리들을 반성합니다.
내어드려야 할
삶이며
떠나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여정이란
이와같이
머물다 떠나고
사라지고 되돌아갈
삶입니다.
삶의 무게가
있기에 주님을
찾게됩니다.
삶의 무게가
무겁기에
내려놓는 법을
배웁니다.
내려놓는 것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우리의 목숨까지도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기꺼이 다 내려놓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내려놓고
버리는 삶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거센 바람에
나뭇잎이 마구
쏟아져 내립니다.
-오상선신부-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은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하나 제시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 잉~ 너무 지나친 주문이 아닌가요? 어떻게 일부야 버릴 수 있겠지만 다 버리라구요!
예수님이 주문하시는 것을 한걸음 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소유라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한번 볼까요?
이것을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앞서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우리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부모,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등이 정말 내 것입니까? 아니, 내 목숨마저도 실제로 내 것이라 할 수 있나요? 다 하느님의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며 소유물로 여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그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에서 미워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소유하는 것이 나에게 밀착시키는 행위라면 미워하는 것은 나에게서 멀리 위치시키는 행위가 되니까요.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러니 미워하라는 말은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내 것으로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어느 관계를 막론하고 그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또 부르심을 받을 때 그들을 흔연히 떠날 수 있는 내적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그에 덧붙여 예수님은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 자질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네요. 내가 소유하는 것이 나를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자질, 스펙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점이나 허물, 장애 등 내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만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고백인 셈이지요. 사실 그것만이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훌륭한 누군가를 흉내내면서 괜찮은 사람인 척 치장하지 말고, 자기의 약함과 어두움, 수치와 모욕, 고통과 죽음이라는 자기 고유의 실존을 인정하고 받아안은 채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 십자가야말로 자기는 물론 타인을 위해서도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것이라고는 죄악과 허물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은 그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자기 것으로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종이 참으로 가난한 자요 그래서 복된 종"이라고 권고하였지요.
오늘 제2독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화를 전해줍니다. 바오로가 감옥에서 얻은 아들, 자기 심장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오네시모스를 원래 그 주인이었던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저는 "아, 바오로야말로 정말 예수님의 참제자였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정 내 소유라 할 수 있는 것을 내려 놓을 때 아들, 형제, 동지를 모두 얻게 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만약 바오로가 "심장"으로 여기니 그를 자기 것으로 계속 두고 필레몬에게 돌려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오네시모스는 평생 도망친 노예로서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것이고 바오로와 필레몬도 참동지가 못되고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필레몬과 오네시모스의 관계도 원래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형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원수 관계로 추락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바오로처럼 내 소유(라 여기는 것을)를 버리는 사람은 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스스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면서도 기꺼이 자기를 내려놓고 순명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내 소유를 내려놓고 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수밖에요. 보통 사람들은 반대로 내 소유를 지고 내 무거운 십자가는 내려놓고 그분을 따르고 싶어하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이렇게 세속적인 영웅을 따르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런데 뭔가 당시 주류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조건으로 가문, 종족, 직업, 학문, 재산, 신분, 성격 등을 따지시지 않고 다만 온전히 투신할 수 있는지를 보신다는 점입니다. 다른 어느 종교 지배계급과 달리 외적 조건보다 마음을, 열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점에서 어부도 세리도 마귀 들렸던 이도 따라나설 수 있으니 이 또한 새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지혜 9,17-18)
바오로가 그랬듯이, 이런 깨달음으로 예수님 제자가 되신 벗님은 참으로 복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다
-김찬선신부-
주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군중이 뒤따라갑니다.
당신을 따라 오는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예 따를 생각을 포기하라고 겁을 주는 것이고 포기를 종용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당신을 따르되 그에 따른 고통을 각오하라고 격려하시는 걸까요?
물론 따르기를 포기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오하고 분발하라고 하시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지혜로운 판단을 하라고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에서 지혜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나
복음에서 “먼저 앉아서 계산하고 헤아리라”는 말씀이
바로 이 지혜로운 판단을 촉구하시는 말씀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것도 무모하게 따르지 않고 지혜롭게 따라야 한다는 거지요.
무엇을 하거나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나친 비관으로 문제점만 크게 보기에
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친 낙관이나 치밀함의 부족으로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입니다.
이 양 극단과 관련하여 저는 저질러 놓고 보는 형입니다.
물론 그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기 위해 고민을 하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빨리 식별이 나면 빨리 포기하지만
그 식별이 쉽지 않을 때 고민을 오래 하지 않고 저질러 버리는데
하느님의 뜻이면 될 거고 아니면 안 될 거라는 믿음으로 그러는 거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지혜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얘기하고,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를 얘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성령의 지혜가 아니면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고린토 전서 2장 11절은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도 성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자기 뜻/자기 의지대로 따를 수가 없고,
자기 힘만으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고,
공자가 얘기하듯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가 되면 곧
내 욕구가 가는대로 마음이 따라가도 법을 어기지 않는 경지가 되면
나의 뜻이 욕심에 휘둘리지도 않고 두려움에 휘둘리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어 하느님의 뜻대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고 자기 의욕만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계산치 않고
집을 짓고, 적은 수의 군대로 큰 군대와 싸우러나서는 것과 같이
무모한 것이고 그렇게 나섰다가는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의 끝에
형제들을 위해 기도한 바를 다시 깊이 묵상해봅니다.
“전능하시고....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9월 4일 연중 제23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